고침안면 高枕安眠 [높을 고/베개 침/편안할 안/잘 면]
☞베개를 높이 하여 편히 잘 잔다는 뜻. 근심 없이 편히 잘 잠. 안심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함.
[출전]『戰國策』〈魏策 哀王〉, 『史記』〈張儀列傳〉
[내용] 전국 시대,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종횡가(縱橫家)로서 유명한데 소진은 합종(合縱), 장의는 연형(連衡)을 주장했다. 합종이란 진(秦)나라 이외의 여섯 나라, 곧 한(韓) 위(魏) 제(齊) 초(楚)가 동맹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는 것이며, 연횡이란 여섯 나라가 각각 진나라와 손잡는 것이지만 실은 진나라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소진보다 악랄했던 장의는 진나라의 무력을 배경으로 이웃 나라를 압박했다. 진나라 혜문왕(惠文王) 10년(B.C. 328)에는 장의 자신이 진나라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침략했다. 그 후 위나라의 재상이 된 장의는 진나라를 위해 위나라 애왕(哀王)에게 합종을 탈퇴하고 연횡에 가담할 것을 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진나라는 본보기로 한나라를 공격하고 8만에 이르는 군사를 죽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애왕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의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애왕에게 말했다. "전하, 만약 진나라를 섬기게 되면 초나라나 한나라가 쳐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초나라와 한나라로부터의 화만 없다면 전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하여 편히 잘 주무실 수 있사옵고[高枕安眠]' 나라도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이옵니다." 애왕은 결국 진나라와 화목하고 합종을 탈퇘했다. 장의는 이 일을 시작으로 나머지 다섯 나라를 차례로 방문, 설득하여 마침내 주(周)나라 난왕( 王) 4년(B.C. 311)에 연횡을 성립시켰다
相思病(상사병)--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 강왕은 포악하고 음란하여 미인을 탐하는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절세미인인 시종 한빙의 아내 하씨를 발견하고는 강제로 후궁을 삼앗다. 그후 아내를 빼앗긴 한빙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하자, 하씨는“시신을 한빙과 합장해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격노한 강왕은 무덤을 서로 보이게는 하되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으나 밤 사이에 두 그루의 노나무가 각각 두 무덤 끝에서 나더니 열흘이 못되 아름들이가 되엇다. 위로는 가지가 서로 얽히고 아래로는 뿌리가 맞닿았다. 그야말로 뜨거운 만남의 표현이었다. 나무 위에는 한 쌍의 새가 앉아 서로 목을 안고 슬피 울어 사람을 애처롭게 만들었다.
이 새를 한빙 부부의 넋이라 여겨, 그 나무를 상사수라고 했는데, 相思病이란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되었고,새는 원앙새라고 하였다.
[참고1] 연령(年齡)을 나타내는 漢字語
지학(志學) : 공자는『논어』에서, 15세가 되어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 데서 나온 말. 15세를 일컬음.
약관(弱冠) : 남자 나이 20세를 일컬음.
이립(而立) : 공자가『논어』에서, 30세가 되어 인생관이 섰다고 한 데서 나온 말. 30세를 일컬 음.
불혹(不惑) : 공자가『논어』에서, 40세가 되어 사물의 이치에 의문나는 점이 없었다고 한 데서 나온 말. 40세를 일컬음.
지명(知命) : 공자가『논어』에서, 50세가 되어 천명(天命)을 알았다고 한 데서 온 말. 50세를 일컬음.
이순(耳順) : 공자가『논어』에서, 60세가 되어 남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한 데 서 나온 말. 60세를 일컬음.
화갑(華甲) :「화(華)」자는 십(十)이 여섯 개에다 일(一)이 하나 있으므로 61세를 나타내며, 회 갑(回甲) 또는 환갑(還甲)이라고도 한다. 61세를 일컬음.
진갑(進甲) : 환갑보다 한 해 더 나아간 해란 뜻이다. 62세를 일컬음.
고희(古稀) : 70세를 일컬음.
종심(從心) : 공자가『논어』에서, 70세가 되어 뜻대로 행하여도 도(道)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한 데서 나온 말. 70세를 일컬음.(從心所欲不踰矩)
희수(喜壽) :「喜(희) 자를 초서로 쓰면 일곱 칠(七) 위에 하나, 아래에 두 개로 모두 세 개가 쓰이므로 喜壽는‘七 + 七’세 즉, 77세를 일컬음.
산수(傘壽) :「산(傘) 자는 초서로 쓰면 여덟 팔(八) 아래에 열 십(十)이 들어가 있으므로‘八 + 十’세 즉, 80세를 일컬음.
미수(米壽) :「미(米)」자를 분해하면‘八十八’이 되기 때문에 米壽는 88세를 일컬음.
졸수(卒壽) :졸(卒)」을 초서로 쓰면 九와 十이 합쳐진 것과 같이 보여 卒壽는‘九十’세, 즉 90세.
백수(白壽) :「백(百)」에서 일(一)을 빼면「백(白)」즉 百에서 하나를 빼면 99세가 된다.
■ 곡돌사신 曲突徙薪 [굽을 곡 / 높을 고/화할 화 /적을 과] ☞굴뚝을 구부리고 굴뚝 가까이에 있는 땔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기다. 화근을 미리 치움으로써 재앙을 미연에 방지함.일의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
[출전]『說苑』
[내용]길 가던 어떤 나그네가 한 집을 찾아 들어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다. 나그네는 우연히 방밖을 내다보다가 그 집의 굴뚝이 너무 곧게 세워져 있어 이따금 불길이 새어 나오고 있는 걸 보게 되었다. 게다가 굴뚝 옆에는 땔 나무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걸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나그네는 주인에게 이렇게 충고해 주었다. "큰일 나겠소이다. 얼른 굴뚝을 구부리고 땔나무도 멀리 옮겨 놓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불이 날지도 모르오" 그러나 주인은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그 집에 불이 났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주인을 구해내고 큰 피해 없이 불을 끌 수 있었다.
주인은 잔치를 베풀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이웃 사람들의 노고에 대한 보답이었다. 손님들의 좌석도 불을 끌 때 힘쓴 정도에 따라 상석(上席)부터 차례로 배치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처음에 굴뚝을 고치고 땔나무를 치우라고 말해준 나그네의 공로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잔치판이 한창 무르익어 갈 때쯤 어떤 사람이 시 한 수를 썼는데 두 구절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굴뚝을 구부리고 땔나무를 옮기라고 권고한 사람의 은혜는 모르고
불에 덴 사람만 귀빈 대접을 받는구나[曲突徙薪無恩澤 焦頭爛額是上賓]
■ 곡학아세 曲學阿世 [굽을 곡 / 배울 학 / 아첨할 아 / 세상 세] ☞학문을 왜곡하여 세상에 아첨한다. 자신의 소신이나 철학을 굽혀 권세나 시세에 아첨함.
[출전]『史記』
[내용]漢나라 경제(景帝)때 齊나라 사람 원고생(轅固生)은 90세의 늙은 신하였으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을 하는 강직한 성격으로 인하여 헐뜯는 자들이 많았다.
또한 그와 함께 등용된 소장학자 공손홍(公孫弘)도 원고생이라는 늙은 신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원고생은 공손홍에게 태연한 자세로 이르기를,“요즘 學의 도는 어지러워지고 속설이 유행하고 있네. 이대로 두면 유서 깊은 학의 전통은 마침내 사설(邪說)로 말미암아 그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네. 그대는 다행히 젊고 好學의 선비라고 들었네. 부디 올바른 학을 열심히 배워 세상을 넓히도록 노력하게. 절대로 자기가 옳다고 믿는 학설을 굽히어 세상의 속물들에게 아첨하지 않기를 바라네.”공손홍은 원고의 훌륭한 임품과 학식에 감복하여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하고 제자가 되었다. 당시 이름 있는 시인들은 거의 원고의 제자였다고 한다
■ 골육상쟁 骨肉相爭 [뼈 골/고기 육/서로 상/다툴 쟁] ☞뼈와 살이 서로 다툼. 같은 민족끼리 서로 다툼.
[동] 同族相殘(동족상잔) /자두연기 煮豆燃기
[참고]조조는 훌륭한 무장이자 보기 드문 문학 애호가였다. 동한말 실세가 되어 전권을 휘두르자 그의 문하에는 시인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曹丕(조비)는 후에 漢(한)을 무너뜨리고 魏(위)를 세워 삼국시대를 열게 된다.그도 아버지처럼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중국 최초로 문학비평을 시도했는가 하면 최초로 7언시를 지었다.
둘째 아들 曹植(조식)도 문학과 무예에서는 형 못지 않았다. 조조는 그런 조식이 더 맘에 들었던지 그를 편애했다. 조비의 눈에는 동생이 눈엣가시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후에 조조가 죽고 조비가 위나라를 세우니 이가 文帝(문제)다.하루는 조식을 해칠 생각으로 말했다.
"내가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 한 수를 지어라. 그렇지 않으면 엄벌을 내리겠다. 조식은 골육상쟁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의 문학적 재능은 이 때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즉석에서 시를 지었다.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煮豆燃豆
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豆在釜中泣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本是同根生
어찌하여 이다지도 급히 삶아 대는가 相煎何太急
이 시를 들은 문제는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한다. 이때 조식의 나이 열 살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형제간에 서로 다투는 것을 두고는 흔히 이 고사를 인용하였다. 그리고 아주 뛰어난 문학적 재능이 있는 사람은 칠보지재(七步之才)라 불렀으며, 뛰어난 문학 작품을 칠보시라 하였다.
[예문]태조 이성계가 아들 방원의 골육상쟁으로 인하여 함흥이궁으로 행하던 중 심화가 치밀고 노기가 동등하여 조갈이 심히 날 때 차고 맑은 샘물 한 그릇을 진상하였다하여 '진상한 샘 물', '임금님이 잡수신 우물'이라하여 그 물을 '어수물'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어수동이라 전하여 왔다. 이곳 사람들의 주선으로 어수정에다 팔각으로 정자를 짓고 어수정이라하여 기념하고 있다.
■ 공수래공수거 空手來空手去 [빌 공/손 수/올 래/빌 공/손 수/갈 거]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돌아간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죽을 때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
空手來空手去是人生(공수래공수거시인생)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實(부운자체본무실)
生死去來亦如然(생사거래역여연)
獨一物常獨露(독일물상독로)
湛然不隨於生死(잠연불수어생사)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여
날 때는 어느 곳에서 왔으며, 갈 때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인 듯하고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
뜬 구름 자체는 본래 자체가 실이 없나니
죽고사는 것도 역시 이와 같도다
그러나 여기 한 물건이 항상 홀로 드러나
잠연이 생사를 따르지 않네
■ 과유불급 過猶不及 [지날 과/같을 유/아니 불/미칠급]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 중용(中庸)을 가리키는 말.(=過不及)
[출전] 『논어』, 先進篇
[내용]자공(子貢)이 孔子에게“子張과 子夏 중 누가 현명합니까?”하고 물은 적이 있다. 어느날 자장이 공자에게,“士로서 어떻게 하면 達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공자는 도리어 자장에게 반문하기를,“그대가 말하는 達이란 무엇인가?”“제후를 섬겨도 반드시 그 이름이 높아지고, 경대부(卿大夫)의 신하가 되어도 또한 그 이름이 나는 것을 말합니다.”“그것은 聞이지 達이 아니다.
본성아 곧아 의를 좋아하고 말과 얼굴 빛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알며 신중히 생각하여 남에게 겸손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제후를 섬기거나 경대부의 신하가 되어도 그릇되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達이라 할 수 있다.”하고 공자는 자장의 허영심을 은근히 나무랐다. 한편 자하에게는 이렇게 타이른 적이 있다.
“군자유(君子儒)가 되고, 소인유(小人儒)가 되지 말라.”(구자유란 자신의 수양을 본의로 하는 구도자, 소인유란 지식을 얻는 일에만 급급한 학자) 이 두 사람을 비교해 달라는 자공의 말에,“자공은 지나쳤고, 자장은 미치지 못하였다.”“그러면 자장이 나은 것입니까?”“지나침은 못 미침과 같으니라(過猶不及).”
[원문]子貢問師與商也 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 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
■ 과전이하 瓜田李下 [오이 과/밭 전/오얏 리/아래 하]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으로, 의심받을 짓은 처음부터 하지 말라는 말.
[원] 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
[출전]『文選』樂府篇
[내용] 전국 시대인 주(周)나라 열왕(烈王) 6년(B.C. 370), 제(齊)나라 위왕(威王) 때의 일이다. 위왕이 즉위한지 9년이나 되었지만 간신 주파호(周破湖)가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왔던 탓에 나라 꼴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래서 이를 보다못한 후궁 우희(虞姬)가 위왕에게 아뢰었다.
"전하, 주파호는 속이 검은 사람이오니 그를 내치시고 북곽(北郭)선생과 같은 어진 선비를 등용하시오소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주파호는 우희와 북곽 선생은 전부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우희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위왕은 마침내 우희를 옥에 가두고 관원에게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했으나 이미 주파호에게 매수된 관원은 억지로 죄를 꾸며내려고 했다. 그러나 위왕은 그 조사 방법이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위왕이 우희를 불러 직접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 신첩(臣妾)은 이제까지 한마음으로 전하를 모신 지 10년이 되었사오나 오늘날 불행히도 간신들의 모함에 빠졌나이다. 신첩의 결백은 청천 백일(靑天白日)과 같사옵니다. 만약 신첩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瓜田不納履]'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李下不整冠]'고 했듯이 남에게 의심받을 일을 피하지 못했다는 점과 신첩이 옥애 갇혀 있는데도 누구 하나 변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신첩의 부덕한 점이옵니다.
이제 신첩에게 죽음을 내리신다 해도 더 이상 변명치 않겠사오나 주파호와 같은 간신만은 내쳐 주시오소서."
위왕은 우희의 충심어린 호소를 듣고 이제까지의 악몽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위왕은 당장 주파호 일당을 삶아 죽이고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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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지는 이 말이 자신의 시야가 좁음을 빗대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몹시 화가 나서 즉시 이렇게 반박했다.
"멀리로는 순봉정(荀奉情)에게 부끄러워하고 가까이로는 유진장(劉眞長)에게 부끄러워 하십시오. 아버지의 친구인 유진장은 노름을 통해 환온의 배반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만일 대롱의 조그만 구멍을 통해 표범을 보게 된다면, 표범의 전체 모습을 보기는 힘들 것이다. 단지 표범의 어느 한 부분만을 보고 이것이 바로 표범이구나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쉽다. 이렇듯 어떤 상황이나 사물을 판별함에 일부분만으로 한다면 적지 않은 실수를 하게 된다. 총체적으로 관찰하고 정리하는 일이 필요하다
■ 관포지교 管鮑之交 [대롱 관/절인 생선 포/어조사 지/사귈 교] ☞친구 사이의 매우 다정하고 허물 없는 교제.
[출전]『史記』 管晏列傳
[내용] 제(齊)나라의 관중(管仲)이 포숙(鮑叔)과 함께 장사할때 이익을 많이 가져도 포숙이 나를 욕심이 많다고 여기지 않았고, 일을 도모하다가 곤궁해져도 어리석다 여기지 않았으며, 세 번 벼슬을 하였다가 세 번 쫓겨나도 못났다고 하지 않았고, 세 번 싸움에 세 번 도망갔으나 포숙은 관중을 겁장이라 여기지 않았다. 관중이 말하기를,「나를 낳아 주신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 준 사람은 포숙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也).」라고 했다.
[원문]管仲이 曰 吾始困時에 嘗與鮑叔賈할새 分財利에 多自與어늘 鮑叔이 不以我爲貪은 知我貧也요 吾가 嘗爲鮑叔하여 謀事라가 而更窮困이어늘 鮑叔이 不以我爲愚는 知時有利不利也요 吾가 嘗三仕하여 三見逐於君이어늘 鮑叔이 不以我爲不肖는 知我不遭時요 吾가 嘗三戰三走어늘 鮑叔이 不以我爲怯은 知我有老母也요 公子糾가 敗할새 召忽은 死之하고 吾가 幽囚受辱이어늘 鮑叔이 不以我爲無恥는 知我不羞小節하고 而恥功名이 不顯於天下也라 生我者는 父母요 知我者는 鮑子也라.
[주]嘗(상)일찍이/ 賈(고)장사하다 / 與(여) 주다 / 謀(모) 꾀하다 / 更(갱) 다시- / 見(견)당하다 / 逐(축) 쫓다,몰아내다 / 肖(초) 닮다 *不肖--아버지를 닮지 못해 못나다 / 遭(조) 만나/ 怯(겁) 겁내다 / 幽(유) 그윽하다 / 囚(수) 가두다 / 恥(치) 부끄러워하다 / 羞(수) 부끄러워하다 / 顯(현)드러나다 **更生갱생 更迭 경질 三更 삼경 變更변경 更正경정 **利己이기 有利유리 便利편리 銳利예리 利益이익
[참고]춘추 시대 초엽, 제(濟)나라에 관중(?∼B.C. 645)과 포숙아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죽마 고우(竹馬故友)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관중이 공자(公子) 규(糾)의 측근(보좌관)으로, 포숙아가 규의 이복 동생인 소백(小白)의 측근으로 있을 때 공자의 아버지 양공(襄公)이 사촌 동생 공손무지(公孫無知)에게 시해되자(B.C. 686)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공자와 함께 이웃 노(魯)나라와 거( )나라로 망명했다.
이듬해 공손무지가 살해되자 두 공자는 군위(君位)를 다투어 귀국을 서둘렀고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정적이 되었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했으나 그가 먼저 귀국하여 환공(桓公:B.C. 685∼643)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押送)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제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臣)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오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이윽고 재상이 된 관중은 과연 대정치가다운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倉 實則 知禮節(창름실즉 지예절)]'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衣食足則 知榮辱(의식족즉 지영욕)]'
고 한 관중의 유명한 정치철학이 말해 주듯, 그는 국민 경제의 안정에 입각한 덕본주의(德本主義)의 선정을 베풀어 마침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첫 패자로 군림케 하였다.
이같은 정치적인 성공은 환공의 관용과 관중의 재능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이긴 하지만 그 출발점은 역시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변함없는 우정에 있었다.
[유]竹馬故友(죽마고우)/,斷金之交(단금지교) /.金蘭之交(금란지교)./芝蘭之交(지란지교)/.知己之友(지기지우)./知音(지음)./刎頸之交(문경지교)./水魚之交(수어지교)./膠漆之交(교칠지교)-아교와 옻처럼 떨어질 수 없는 가까운 사이
[참고]
빈교행(貧交行)---< 杜 甫 > 飜手作雲覆手雨 (번수작운 복수우) 紛紛輕薄何須數 (분분경박수수)
君不見官鮑貧時交(군불견관포빈시교) 此道今人棄如土(차도금인기여토)
손 뒤집으면 구름 일게 하고 손엎으면 비 오게 하니
수없이 어지러운 경박함을 어찌 따질 필요 있겠는가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관중과 포숙의 가난할 때의 사귐을
이 도리를 지금 사람들은 흙 버리듯 하고있네
[풀이]빈교행(貧交行)의 행(行)은 '노래'와 같다. 따라서 이 제목은 가난한 떄의 교제에 대한 노래라는 뜻이다. 작가가 장안(長安)에서 빈한한 생활을 하면서 사관(仕官)을 구하던 시절의 작품으로 보인다. 작가의 열망(熱望)에도 불구, 조정(朝廷) 사람들은 그에게 냉담해서 쉽사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냉담한 세상에 노여움과 절망을 느낀 그가 이 시로써 어느 특정한 개인에 대한 분노를 나타낸 것이란 설도 있다.
■ 괄목상대 刮目相對 [눈비빌 괄/눈 목/서로 상/기다릴 대]▶플래쉬 보기(출처-즐거운학교)☞눈을 비비고 보며 상대를 대한다. 한동안 못 본사이에 상대방이 놀랄 정도로 발전한다.
[출전]『삼국지(三國志) 』오지(吳志) 여몽전주(呂蒙傳注)
[내용] 오(吳)나라 왕 손권(孫權)에게는 부하 여몽(呂蒙)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몸이 날쇄고 무술이 뛰어나 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매우 무식하였다. 어느날 손권이 그에게 공부할 것을 권했다. 얼마 후 손권의 신하 중에서 학식이 가장 뛰어나며 여몽과 오랜 친구인 노숙(魯肅)이 찾아왔다. 서로 이야기하던 중 여몽의 박식함에 깜짝 놀라“오늘에 이르러 학식이 영특하고 박식하니 온나라 시골 구석에 사는 어리석은 여몽이 아니구려.”라고 말하니 여몽이“선비는 헤어진지 3일이 지나면 곧 눈을 비비고 대하여야 할 정도로 달라져 있어야 한다네.”라고 대답하였다.
[원문] 至於今者 學識莫博 非復吳下 阿夢曰 士別三日 卽當刮目相對
■ 광풍제월 光風霽月[빛 광/바람 풍/갤 제/달 월] ☞시원한 바람과 맑은 달, 비 갠뒤의 바람과 달,아무거리낌이 없는 맑고 밝은 인품
[출전] 宋書 周敦滯傳
[내용] 유교(儒敎)는 북송(北宋) 중기에 주돈이(周敦滯 : 1017-1073)가 나와서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를 저술했고, 그 뒤에 정호(程顥)와 정이(程滯) 형제가 사서(四書 : 大學 中庸 論語 孟子)를 정하여 성도(聖道)를 밝히었으며, 주자(朱子)가 이것을 집대성(集大成)하여 형이상학(形而上學) 으로서의 경학(經學)을 수립하여 소위 송학(宋學)을 대성(大成) 시켰다고 알려지고 있다.
주돈이는 옛사람의 풍도가 있으며, 정사를 베풂에는 도리를 다 밝힌 사람이라고 한다. '연꽃은 군자다운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는 <애련설(愛蓮說)> 한 편은 글 안에 도학(道學)의 향기도 풍기지만 그의 인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소식(蘇軾)과 함께 북송(北宋) 시대의 시를 대표하는 황정견(黃庭堅 :1045-1105) 은 주돈이에 대하여 깊은 경의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의 인간성에 대하여, "춘릉(春陵)의 주무숙(周茂叔)은 인품이 몹시 높고, 가슴속이 담박 솔직하여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 고 평하고 있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 "깨끗하게 가슴 속이 맑고 고결한 것, 또는 그런 사람"에 비유하여 사용되고 있다. 또 "세상이 잘 다스려진 일"을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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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괘관 掛冠[걸 괘/갓 관] ☞관직에 있는 자가 제복에 딸린 관(冠)을 벗어 걸어 놓음. 관직을 사임함.
[출전] 후한서(後漢書) '봉맹전(蓬萌傳)'
[내용] 중국 후한(後漢)의 봉맹(逢萌)이 왕망(王莽)에게 자기 아들을 살해당하자 관을 동도(東都:낙양)의 성문에 걸어 놓고 요동(遼東)으로 떠나갔다는 이야기,
후한 사람 봉맹(蓬萌)은 비록 도둑을 잡는 정장(亭長)이었지만 '춘추(春秋)'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전한(前漢)의 12대 왕 애제(哀帝)가 죽고 왕망(王莽)이 평제(平帝)를 세웠지만 왕망은 평제의 어머니인 위희(衛姬)와 그 집안 식구가 도읍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또 그 일을 간한 장남 왕우(王宇) 내외를 죽였다.
이것을 본 봉맹은 친구에게 "삼강(三綱)은 이미 끊어졌다. 지금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들에게도 재앙이 미칠 것이다." 라고 말하고 그 자리에서 갓을 벗어 동도문(東都門)에 걸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요동(遼東)에서 숨어 지냈다.
봉맹은 왕망이 멸망하리라는 것을 알고 머리에 기와로 만든 분을 올려 놓고 시장거리에서 큰 소리로 울면서 "아! 신(新)나라여, 신(新)나라여(왕망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 라고 말하면서 거리를 지났다.
왕망이 멸망하고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즉위하자 태수(太守)가 억지로 조정에 들어오려 했으나 칙령(勅令)을 내려 응하지 않았음.
■ 교언영색 巧言令色 [교묘할 교/말씀 언/좋을 령/빛 색] ☞교묘한 말과 억지로 꾸민 얼굴 빛. 겉치레만 할 뿐 성실하지 못한 태도.
[출전] 《논어(論語)》의 학이편(學而篇),양화편(陽貨篇)
[내용]“교묘한 말과 아첨하는 얼굴을 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적다(巧言令色鮮矣仁)”는 뜻이다. 즉, 말을 그럴 듯하게 꾸며대거나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 생글생글 웃으며 남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 치고 마음씨가 착하고 진실된 사람은 적다는 뜻이다.
■ 교외별전 敎外別傳 [가르칠 교/바깥 외/다를 별/전할 전]☞경전(經典) 바깥의 특별한 전승(傳承). 마음과 마음으로 뜻을 전함.
[동]以心傳心(이심전심) 心心相印(심심상인) 不立文字(불립문자)
[내용] 經典 바깥의 특별한 傳承, 언어나 문자에는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뚫어보고 불경을 얻는다.(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 直指 :‘곧바로 가리킨다.’지적이라기 보다는 직관적이며 여러 군말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 토로하는 마음의 전형.
선종(禪宗)에서 말이나 문자를 쓰지 않고, 따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하는 일. 달마(達磨)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조사선(祖師禪)에서는, 불교의 진수는 어떤 경전의 문구에도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체험에 의해서만 전해진다고 말한다. 이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과 함께 선의 입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다. 석가가 언어로써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교내(敎內)의 법이라면, 교외(敎外)의 법은 석가의 마음을 직접 다른 사람의 마음에 전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표월지(標月指: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진리를 달에 비유한다면 교(敎)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으며, 이에 반해 선(禪)은 달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다른 종파(宗派)가 모두 교내의 법을 가르침에 반하여, 선종에서만은 교외의 법을 주장하는 것이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말로 표현하듯이, 지가 불필요함을 지로써 전하는 껏이라 하겟다. 결국 지(知) 이상의 것도 지를 통함으로써만 알 수 있다.
둘째는 言說文字에 의하지 않고 師資가 직접 以心傳心하는 방법으로서, 이 방법은 殊勝한 근기에게 전하는 방법이다. 前者는 곧, 종교이요 후자가 곧, 선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以心傳心 敎外別傳說의 근거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拈華微笑 敎外別傳說이다. 선종의 宗旨는 경론 等이나 기타 언설에 의하여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언설이외에 師資가 相接하여 以心傳心의 방법으로써 불타의 正法眼藏을 상전한다는 것인 바 이 기원은 벌써 교주 석존으로부터 시작되어 석존이 摩訶迦葉에게 拈華微笑의 방법으로써 정법안장을 전하신 것을, 그 후 27祖가 모두 以心傳心의 방식으로, 代代 전법을 하였다 하여, 그 純一無雜性을 敎家에 대하여 자랑한다. 그러면 이 以心傳心說을 전하는 문헌은 과연 무엇인가.
중국 宋代 道原의 作인(서기 1004년 作) '景德傳燈錄'에는 아직, 이 설의 기록이 없다.k 此書는 구체적인 선종사로서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 중국 선종의 初祖라 하는 達磨大師가 東來한 것은 서기 478년으로 추정되는 바, 이보다도 526년이나 後世에 저작된 이 '傳燈錄'에도 선종 別立의 근거인 拈華微笑, 以心傳心說의 記載가 없다. 이 '傳燈錄'에 의하여 저작된 宋 契嵩의 '正宗記'(1060년 이전 作)에는,
혹 말하기를 여래께서 靈山會中에서 捻華示之하시니 迦葉이 微笑하였는지라, 곧 이에 付法하셨다. 또 가로대 여래는 법을 多子塔 앞에서 대가섭에게 付하셨다 라고 하니 世는 모두 이로써 전수의 實이라 하나, 그러나 이는 아직 그 출처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稱取하나 또한 果敢히 써 審詳하지 않노나.(同書 卷1末)
라고 하여 오히려 그 설을 전적으로는 取信하지 않았다. 이에 의하여 본다면 宋代에 들어와서 비로소 이러한 전설이 점차 떠돌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그로부터 40년 후에 著作된 '建中靖國續燈錄' 卷1에 의하면(1101년 作), "四十九年 三乘顯著, 拈花普示 微笑傳"이라 있고 또 그 후(1183년)에 저작된 '聯燈會要' 卷1에 의하면 비로소
세존이 在靈山會上하사 拈花示衆하시니 衆皆默然이나 唯迦葉이 破顔微笑하니 세존이 云하사되 吾有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하니 不立文字하고 敎外別傳하노라 하시고 付囑摩訶迦葉하시다.
라고 하여, 점차 공공연하게 나타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拈花微笑 敎外別傳說의 근원적인 근거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宋代 智胎의 著 '人天眼目'(1188년 作) 제5 宗門雜錄에,
王荊公 (王安石)이 佛慧泉禪師에게 問云, 禪家에 所謂 拈華는 出在何典이닛가. 泉云 藏經에도, 亦不載로다. 云曰 余頃在翰林苑하여 '大梵天王問佛決疑經' 三卷을 보고 因閱之하니 經文所載가 甚詳하더이다. 梵王이 至靈山하여 金色波羅花를 佛께 드리고 몸을 버려 床坐를 삼아 佛께 請하여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시게 하니 세존은 登坐하사 拈花示衆하시니 人天百萬이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홀로 金色頭陀가 있어 破顔微笑하니 세존이 云하되 "吾有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하니 分付摩訶迦葉하노라"라고 이 經은 帝王이 事佛하여 請問하는 것을 多談하였는지라 所以로 秘藏되어 世에 듣는 자가 없었다.
라고 되어 있다. 곧 王安石 時代에는 이 '大梵天王問佛決疑經'이라는 經이 翰林苑에 있었다 하나 그러나, 이 경이 대장경 중에 편입되어 있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아무 經錄上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이 경은 위경임이 명백하고 또 따라서 拈花微笑 敎外別傳說도 후세인들에 의해 造된 일종의 망설임에 불과한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전설이 造되게 된 동기는 宋에 이르러 선종의 宗勢가 隆盛하여지니 다른 敎宗佛敎에 그 독특성을 誇張할 필요에 의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뿐 아니라, 선종의 28祖의 系譜說도 역시 후세에 造된 것으로 (이에 詳論의 餘裕가 없어 省略하나) 선종으로서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이러한 전설들을 造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은 達磨에 의해 禪法이 初傳된 이래 300여년간에 선이 一宗으로서 堅固한 지반을 닦아서 日就月盛하여 가는 途上에 있으므로 自宗의 系譜를 확실히 해 두어야 할 필요가 28祖說과 또 自宗의 純粹佛敎性을 표시해야 할 必要上 敎外別傳說을 구상해 내었던 것이 아닐까한다.
특히 중국 唐代에까지 융성하였던 모든 교종들은 다 각각 그 所依의 경론이 분명하여 불교로서 행세하는데 유력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선종만이 그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 이류를 밝히기 위하는 同時에 타종의 所依經論보다도 오히려 더 유력한 근거설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扶宗的 운동은 中唐 이후 宋代의 일이었고 禪法을 初傳한 達磨大師로부터 神秀?iddot;慧能에 이르는 禪宗成立時代에 있어서는 그러한 전설이란 전연 없었던 것임에 주의해야 한다.
不立文字의 意義 중국의 圭峯 宗密의 (780-841) '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에 "然達磨西來唯傳心法 故自云我法 以心傳心 不立文字"라 하여 있고, 또 '景德傳燈錄' 楊億의 序에도 "首從於達磨 不立文字 直指心源 그러나 이러한 扶?이라 하여 문자를 不立하였다는 점에 강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들릴는지 모르나, 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以心傳心'한다는데, 그 진정한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 대개의 禪客들은 不立文字에 禪宗의 주안점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지 않는가 한다. 그 증거가 대개의 禪客들이 三藏을 무시해 온 것이며 문자를 경시하는 標本으로 六祖 慧能大師의 無識을들고 있다. 그러나 六祖가 경을 중시한 증거는 있을지언정 무시한 증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이 선종의 宗旨인 바 이 三句 중 "直指人心 見性成佛"이 목적이요 不立文字는 그 목적 달성을 위한 한 수단방법이라고 보아야 한다. 宋代 睦庵 善鄕의 編, '祖庭事苑' 제5 單傳에
傳法祖師는 初以三藏敎로 兼行이러니 後에 達磨祖師는 單傳心印하여 破執顯宗하였나니 所謂 敎外別傳하여 不立文字하고 直指人心하여 見性成佛케 하였나니라. 然이나 不立文字의 失意者多하여 往往謂하되 屛去文字하고 以默坐로 爲禪하니 斯實吾門啞羊耳요 且萬法紛然하니 何止不立文字리오. 殊不知道猶如通하고 豈拘執一隅아. 故로 卽 文字하면 而文字不可得이니라 文字旣爾하니 餘法도 亦然하리니 見性成佛의 所以也니라.
라고 하여 있는 바와 같이 不立文字의 眞意는 破執顯宗하는데 있는 것이다.(이상의 모든 문헌에 모두 達磨大師부터가 不立文字를 주장한 것같이 말하고 있지만 이하에도 논증하는 바와 같이 달마는 결코 그런 문구를 사용한 일도 없을 뿐 아니라 또 문자를 경시하는 태도를 취한 일도 없었다.)
곧 불교의 근본 목적은 어떠한 宗임을 막론하고 見性成佛에 있지 아니한 宗이 없다. 경론상에도 이러한 취지가 명론되어 있는 것이지마는 중생들은 경론의 이와 같은 근본 취지는 망각하고 도리어 경론의 言說文字에만 집착하므로 이것을 破하기 위하여 不立文字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를 屛去하고 默坐하는 것만이 선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啞羊에 불과하다. 만약 문자에 局執하는 자를 위하여 不立文字를 주장한 것이라 하면 어찌 默坐 禪의 局執은 파하지 않을 수가 있으리오. 要는 見性成佛에 있는 것이지 문자를 세우고 좌선을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일본 曹洞宗 螢山紹瑾의 語 '十種勅問奏對集'에
問三曰, 禪家所謂不立文字 敎外別傳矣라 하나 雖然이나 一大藏經이 皆是文字요 禪家語錄도 亦是文字이어늘 若無文字하면 佛祖의 言敎가 依何하여 流布末世耶아.
師曰 文字는 是魚兎筌蹄也니 若得魚兎하면 則筌蹄는 渾是無所用也니다. 修多羅敎는 標月之指也라 若觀月하면 則指亦無所用也나 然이나 人皆認筌蹄하여 不得魚兎하고 認指頭하여 不觀月하니 故로 曰, 不立文字也니다.
라고 奏答하고 있다. 經律論이 言語文字인 것은 사실이다. 문자가 魚兎를 잡는 筌蹄와 같은 것이요, 명월을 가리키는 手指와 같은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魚兎를 잡고 명월을 보기까지에는 그 筌蹄와 手指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魚兎를 이미 잡아 마처고 명월을 이미 보아 마친 후에는 筌蹄와 手指가 무용지물로 되어 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종교적 실천이 선이나 佛에게는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이 魚兎를 已獲하고 명월을 已觀한 사람에게는 筌蹄와 手指는 필요가 없는 것이지마는 아직 魚兎를 잡지 못하고 명월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緊要不可缺의 도구인 것이다. 단 筌蹄와 手指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魚兎와 明月을 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不立文字의 경구가 또한 절대 필요한 것이다. 곧 이러한 의미에서 不立文字를 본다면 선과 敎問에 아무런 問隔도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 나라 禪客 중에는 무식이나 다름이 없는 상식으로써 이상에 논증한 禪宗의 역사적인 사실을 무시하고 不立文字라 하여 불교의 교학을 만약 등한시한다면 교주 釋尊 49년간 苦口 寧의 설법에 대한 죄인이 될 뿐 아니라, 자기의 智見 啓發에도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 것이다.<禪宗의 所依經에 대하여(金東華)>
"네가 가까운 곳으로 가겠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 곳은 언제든지 해올 수 있다. 하지만 백 리 떨어진 곳은 누가 가져가도 되니, 그 곳의 땔감부터 가져와야 우리 집 근처의 땔감이 남아 있지 않겠니?"
아들은 아버지의 깊은 생각을 이해하고 먼 곳으로 땔나무를 하러 떠났다.
■ 교주고슬 膠柱鼓瑟 [아교 교/기둥 주/두드릴 고/비파 슬] ☞거문고의 기러기 발을 아교로 붙여 놓고 거문고를 탄다. 고지식하여 융통성이 전혀 없음. 또는 규칙에 얽매여 변통할 줄 모르는 사람.
[참고]膠着교착/琴瑟금슬/守株待兎수주대토/,刻舟求劒각주구검/尾生知信미생지신
[출전]『史記』.
[내용]조나라에 조사(趙奢)라는 훌륭한 장군이 있었다. 그에게 괄(括)이라는 아들이 있어 병서를 가르쳤는데 매우 영리하여 뛰어나게 병법을 잘 알았다. 그러나 조사(趙奢)는,"전쟁이란 생사가 달린 결전이므로 이론만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병법을 이론적으로만 논하는 것은 장수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앞으로 괄(括)이 장수가 된다면 조 나라가 큰 변을 당할 위험이 있다."하며 부인에게 나라에서 조괄을 대장으로 삼지 않도록 말려 달라는 유언까지 했다.
뒷날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하면서 첩자를 보내 流言蜚語를 퍼뜨렸다.
"조나라 염파 장군은 늙어서 싸움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진나라는 조괄이 대장이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
이 流言蜚語에 빠진 조나라 왕은 염파 대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상여(藺相如)가 극력 반대하면서,
"임금께서는 그 이름만 믿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려는 것은 마치 기둥[膠柱]을 아교로 붙여 두고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괄은 한갓 그의 아버지가 준 병법을 읽었 을 뿐, 때에 맞추어 변통할 줄을 모릅니다."[膠柱鼓瑟]
그러나 임금은 그토록 신임하던 인상여의 말도 듣지 않고 조괄을 대장에 임명하였다. 조괄은 대장이 되는 그날로 병서에 있는 대로 하여 전부터 내려오는 군영들을 뜯어고치고 참모들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자기 주장대로만 작전을 전개했다.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조괄은 이론만으로 작전을 감행한 끝에 40만이라는 대군(大軍)을 몽땅 죽이는 중국 역사 상 최대 최악의 참패를 가져왔다.
거문고의 기둥을 풀로 붙여 고정해 두고 거문고를 타니 조율을 할 수 없게 되어 소리 [音]가 제대로 날 리가 없었다
■ 교학상장 敎學相長 [가르칠 교/배울 학/서로 상/자랄 장]☞가르치고 배우면서 학업을 증진시키고 성장함
[출전] 『예기(禮記)』
[내용] 옥은 쪼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하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모른다. 이런 까닭으로 옛날에 왕된 자는 나라를 세우고 백성들에게 임금 노릇을 함에 교와 학을 우선으로 삼았다. 비록 좋은 안주가 있더라도 먹지 않으면 그 맛을 알지 못하고, 비록 지극한 도가 있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그 좋음을 모른다.
이런 까닭으로 배운 연후에 부족함을 알고 가르친 연후에야 막힘을 알게 된다. 부족함을 안 연후에 스스로 반성할 수 있고, 막힌을 안 연후에 스스로 힘쓸 수 있으니, 그러므로 말하기를,“남을 가르치는 일과 스승에게서 배우는 일이 서로 도와서 자기의 학업을 증진시킨다.”고 한다.
[원문]玉不琢이면 不成器요 人不學이면 不知道라. 是故로 古之王者는 建國君民에 敎學先學하니라. 雖有佳肴라도 不食하면 不知其味야요, 雖有至道나 不學하면 不知其善也니라. 是故로 知不足한 然後에 知不足하고 敎然後에 知困하니라. 知不足한 然後에 能自反야요, 知困然後에 能自强야니 故로 曰 敎學相長야니라.**肴(안주 효)
■ 구맹주산 狗猛酒酸 [개구/사나울 맹/술 주/ 실 산] ☞개가 사나우면 술이 시어짐. 한 나라에 간신배가 있으면 어진 신하가 모이지 않음
[출전]『韓非者』 外儲說右
[내용]군주가 위협을 당하며 어질고 정치를 잘 하는 선비가 기용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한비자(韓非子)는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송(宋)나라 사람 중에 술을 파는 자가 있었다. 그는 술을 만드는 재주가 뛰어나고 손님들에게도 공손히 대접했으며 항상 양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팔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집보다 술이 잘 팔리지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는 마을 어른 양천에게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양천이 물었다. "자네 집 개가 사나운가?" "그렇습니다만, 개가 사납다고 술이 안 팔린다니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사람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어떤 사람이 어린 자식을 시켜 호리병에 술을 받아 오라고 했는데 술집 개가 덤벼들어 그 아이를 물었소. 그래서 술이 안 팔리고 맛은 점점 시큼해지는 거요."
■ 구밀복검 口蜜腹劍 [입 구/ 꿀 밀/배 복/칼 검] ☞입으로는 달콤함을 말하나 배 속에는 칼을 감추고 있다. 겉으로는 친절하나 마음 속은 음흉한 것.
[유] 笑中有劍(소중유검)/ 笑裏藏刀(소리장도)/ 笑面虎(소면호) /面從腹背(면종복배)/ 敬而遠之(경이원지) /羊頭狗肉(양두구육) /表裏不同(표리부동)
[속담] 등치고 간 내먹는다. /웃음 속에 칼이 있다.(웃고 사람 친다.)
[내용]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이임보(李林甫)는 임금의 총애를 받는 후궁(後宮)에게 환심을 사 재상에 올랐다. 그 후「권세와 지위가 장차 자기를 압박할 만한 사람은 반드시 여러 계책으로 제거하고 문학하는 선비들은 더욱 꺼려 혹은 함께 선한 체하다가 달콤한 말로 속이고 몰래 그를 함정에 빠뜨리니 세상 사람들이 '이임보는 입에는 꿀이 있고 배 속에는 칼이 있다'라고 하였다.
臣(혼주간신)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亂世가 따랐음을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唐 玄宗(당 현종·712∼755 在位)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사실 中國의 歷代(역대) 帝王(제왕) 중 그 만큼 人口에 많이 膾炙(회자)되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의 일생은 온통 劇的(극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할머니였던 則天武后(측천무후)가 망쳐놓은 大唐帝國(대당제국)을 英明(영명)한 통치로 다시 일으켜 장장 30년에 이르는 유명한 ‘開元之治’(개원지치)를 이루었다. 당나라 최대의 太平聖代(태평성대)였다.
여기에는 물론 玄宗 자신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탁월한 정치력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賢相의 登用 또한 빠뜨릴 수가 없다. 즉 그는 즉위 초부터 강력한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는데 이 때 그를 도왔던 이로 名宰相 姚崇(요숭)과 宋璟(송경)이 있다. 결국 천하는 未曾有(미증유)의 太平을 맞게 되어 기록에 의하면 도둑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재위 후반기의 天寶(천보·742∼755)시대는 판이했다. 玄宗의 聰明(총명)도 날로 흐려져 갔으며 忠臣(충신)은 사라지고 주위가 온통 奸臣(간신)으로 채워지면서 급기야 대당제국은 亡國(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당시 대표적 奸臣에 宰相 李林甫(이림보)가 있었다. 宦官(환관) 高力士(고력사)의 추천으로 宰相이 된 그는 간사하고 陰險(음험)했으며 猜忌心(시기심)이 많아 자신보다 훌륭한 자는 눈뜨고 보지를 못했다. 결국 그에 의해 제거된 충신만도 張九齡(장구령), 嚴挺之(엄정지), 李適之(이적지), 李邕(이옹) 등 수십 명에 달했다.
그가 政敵(정적)을 제거하는 방법은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절대로 나서지 않고 남을 시켜 처리했으며 자신은 도리어 칭찬하고 다녔다. 그러면서 은밀히 온갖 죄상을 날조하고 뒤집어씌워 꼼짝 못하게 만든 다음 제거했다. 그래서 史家(사가)들은 그를 두고 이렇게 적었다.
“口有蜜, 腹有劍”(구유밀, 복유검)-입술에는 달콤한 꿀을 발랐지만 뱃속에는 무서운 칼을 품고 있다. 여기서 나온 말이 ‘口蜜腹劍’으로 겉은 웃는 낯이지만 속으로는 사람을 해칠 무서운 생각을 품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문화가 흐르는 한자]
■ 구사일생 九死一生 [아홉 구/죽을 사/한 일/날 생]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겪고 간신히 목숨을 건짐.
[동]만사일생[萬事一生]
[출전]『초사(楚辭)』《사기(史記)》〈굴원열전(屈原列傳)〉
[내용]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겪고 겨우 살아난다는 말로, 비슷한 말에 십생구사(十生九死)가 있다.
굴원(屈原)은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이다. 초왕(楚王)의 일족으로 박학다식하고 변론(辯論)에 뛰어났기 때문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회왕(懷王)의 신임을 얻어 삼려대부(三閭大夫:왕가를 다스리는 대부)에 올랐으나, 양왕(襄王) 때 모략을 받아 두 번씩이나 강남(江南)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한 뒤 우국시(憂國詩) 회사부(懷沙賦)를 남기고 멱라수(羅水)에 빠져 죽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굴원열전(屈原列傳)〉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굴평(屈平:平은 굴원의 이름)은, 임금이 신하의 말을 듣고 분간하지 못하고, 참언(讒言)과 아첨하는 말이 왕의 밝은 지혜를 가리고, 간사하고 비뚤어진 말이 임금의 공명정대함을 상처내어 마음과 행실이 방정한 선비들이 용납되지 않는 것을 미워했다. 그리하여 근심스러운 생각을 속에 담아 〈이소(離騷)〉 한 편을 지었다.”이소(離騷)의 제6단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길게 한숨을 쉬고 눈물을 닦으며, 인생의 어려움 많음을 슬퍼한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선(善)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비록 아홉 번 죽을지라도 오히려 후회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雖九死 猶未其悔(유미기회)].’” 이 〈구사(九死)〉에 대하여, 《문선(文選)》을 편찬한 유량주(劉良注)는 이렇게 말했다. “아홉은 수의 끝이다. 충성과 신의와 곧음과 깨끗함[忠信貞潔(충신정결)]이 내 마음의 선하고자 하는 바와 같으니, 이 해(害)를 만남으로써 아홉 번 죽어서 한 번을 살아남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직 후회하고 원한을 품기에는 족하지 못하다.”
구사일생(九死一生)은 유량주가 말한 이 ‘아홉 번 죽어서 한 번 살지를 못한다.’에서 나온 말로 죽을 고비에서 간신히 살아난다는 뜻이 된다. <두산백과>
[원문]又申之以攬 亦余心之所善兮 雖九死其有末悔
[
■ 구상유취 口尙乳臭 [입 구/아직 상/젖 유/냄새 취]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난다. 아직 어리다. 하는 짓이 어리석고 유치 하다.
[속담] 이마빡에 피도 안 말랐다./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출전] <史記>高祖紀
[내용] 한왕이 한신을 시켜 위왕 표를 치게 하면서 물었다. "유나라의 대장이 누구인고?"
누군가가 대답했다. "백직(柏直)입니다." 그러자 한왕이 말했다.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는구나. 어찌 우리 한신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
[원문]漢王以韓信魏王豹 問魏大將誰 左右對曰柏直 漢王曰 是口尙乳臭 安能當吾韓信
■ 구우일모 九牛一毛 [아홉 구/소 우/한 일/터럭 모]☞아홉 마리의 소 중에 하나의 털. 많은 것 가운데 극히 미미한 하나.
[동] 九牛毛(구우모) /滄海一粟(창해일속) /大海一滴(대해일적)-->물방울 적
[속담]아홉 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 뽑기다.
[출전] 『한서(漢書)』司馬遷, 報任安書
[내용]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왕은 秦始皇(진시황)이지만 漢武帝(한무제)는 秦나라 보다도 몇 배나 더 큰 판도를 이룩했다. 동서남의 3방향으로 국력을 뻗쳐 영토를 확장했다. 동쪽으로는 우리나라까지 쳐들어와 漢四郡(한사군)을 설치했음은 周知(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武帝에게도 북쪽의 오랑캐 匈奴(흉노)만은 커다란 두통거리였다. 영토를 넓히기는 커녕 侵攻(침공)과 掠奪(약탈)을 당해야 했으니 大漢帝國(대한제국) 武帝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장군 李陵(이릉)을 시켜 匈奴를 치게 했지만 오히려 패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武帝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다들 李陵을 逆賊(역적)으로 몰아 부쳤다. 그러나 『사기(史記)』의 저자司馬遷(사마천)만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상하게 여긴 武帝가 그의 의견을 물어왔다. 司馬遷은 솔직하게 말했다.
“5000의 군사로 8만의 흉노 騎兵(기병)을 당한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입니다. 그가 항복한 것은 불가피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는 李陵의 친구였다. 하지만 객관적 상황을 고려하여 한 말이 武帝의 노여움을 건드렸음은 물론이다. 결국 그는 下獄(하옥)되어 腐刑(부형·宮刑이라고도 함. 남자의 성기를 자르는 형벌)을 받고 말았다. 司馬遷은 극도의 치욕을 느낀 나머지 자살을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 司馬談(사마담)의 유언이 귓전을 때렸다. 역대로 史官(사관)을 맡았던 家門의 명예를 위해 중국 최초로 通史(통사·모든 왕조의 역사를 담은 것)를 남기라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이어야했다.
또 이렇게 죽는다면 개죽음일 뿐이다. 사람에게는 泰山(태산)같이 위엄을 갖춘 죽음이 있는가 하면, 새의 깃털보다도 가벼운 죽음이 있지 않은가. 그것은 죽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 만약 자살로 끝맺는다면「가령 내가 법에 복종하여 죽임을 당할지라도 마치 아홉 마리의 소 중에 하나의 털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假令 僕伏法하여 受誅라도 若九牛亡一毛라.)동정은 커녕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을 것인 즉 그 명예는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라고 하였다.
그의 심정은 그가 친구 任少卿(임소경)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유명한 ‘報任少卿書’(보임소경서)다. 九牛一毛는 여기서 나온 말로 ‘매우 하찮은 것’을 뜻한다.
마침내 그는 자살을 단념하고 恥辱(치욕)을 감수한 채 通史의 저술에 매달렸다. 不朽(불후)의 명저 ‘史記’(사기)는 이렇게 하여 태어났다. .
■ 국사무쌍 國士無雙 [나라 국/선비 사/없을 무/짝수 쌍]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둘도 없다. 매우 뛰어난 인재.
[동]一歲之雄(일세지웅) : 한 시대의 영웅이라는 말로 그시대에는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 로 뛰어난 인물. /棟梁之材(동량지재)--기둥이 될 만한 인물
[출전]『史記』
[내용] 한왕 유방(劉邦)이 군사를 이끌고 남정(南鄭)으로 갈 때 길이 험하고 멀어서 도주에 이탈하는 자가 많아 군사들이 동요하자 한신(韓信)도 도망하였다. 그 때 승상(丞相) 소하(蕭何)가 그것을 알고 급히 한신을 쫓아갔다. 유방은 충복인 소하마저도 도망한 줄 알고 크게 낙담하고 있었는데 이틀 뒤에 한신을 데리고 돌아오니 유방이 꾸짖으며 다그쳤다.“왜 도망쳤는냐?”소하가“도망한 것이 아니라 한신을 잡으러 갔었습니다.”“다른 장수들이 이탈했을 때는 그렇지 않더니 유독 한신만을 쫓아간 이유는 무엇이냐?”
소하가 말하기를“「모든 장군은 얻기가 쉬울 따름이지만 한신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이 나라의 인물 중에 둘도 없습니다.(諸將은 易得耳나 至如信者는 國 士無雙이니다.)」 폐하께서 한중(漢中)의 왕만 되시려 한다면 그가 필요 없겠지만 천하를 소유하고자 한다면 한신 없이는 더불어 그 일을 도모할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 蕭(맑은대쑥 소) 何(어찌 하) 諸(모두 제) 易(쉬울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