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창 정렴의 개벽사상
해머슴 박선용(소설가·프로그래머)
“수단의 방법이란 간략하고 쉬운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손댈 방법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장생을 얻으려다 요절한 자가 많았다. 이에
초학자를 위해 몇 자 적는다.”
아마도 수행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한번쯤 이와 같은 문장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조선조 후기 대표적 수행서적 중의 하나인
《용호비결》의
서문이다. 《용호비결》은 800여자의 비교적 짧은 글로 평이하게 쓰여져 있지만 내용이 간략하고
생략이 많아 일반적으로 독학의 교재로 삼기에는 어려운 글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살펴볼 인물은 바로
이 용호비결의 저자인 북창北窓 정렴鄭磏 선생이다.
북창 정렴 선생은 조선 중종 때의 인물로 매월당 김시습·토정 이지함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기인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조선시대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수행자 중 저서를 남긴 대표적 인물 중의 한 분이다.
《해동전도록》이란 글을 보면 조선시대 지식인 중 수행과 관련된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전수한 이로 정렴, 이지함, 곽재우, 권극중 등 네 사람을 꼽고 있다. 정렴은 《단가요결丹家要訣》, 이지함은 《복기문답服氣問答》, 곽재우는 《복기조식진결服氣調息眞訣》, 권극중은 《참동계주해參同契註解》를 지었다고 《해동전도록》은 전하고 있다.
그 중 현대의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게 첫손에 꼽히는 글인 《용호비결》과 《정감록》의
저자 정렴. 1506년에 태어나 1549년 44세의 젊은 나이로 좌탈 입적하기까지 기행으로 점철된 그의 행적과 함께 당시 조선 중기 성리학의 모순에 강력히
대항했던 사상인 미륵사상의 흐름을 살펴보도록 하자.
정렴 선생의 자는 사결士潔, 호는 북창北窓이다. 중종 원년 1506년 3월
갑신甲申에 태어났다. 서인의 대표적인 정인홍鄭仁弘(1535~1623)과
같은 가문의 출신이었다. 명문가의 출신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정치적 풍파를 많이 겪었고, 정렴 선생이 젊었을 때에는 이미 그의 집안은 정권에서 멀어진 시기였다.
정렴 선생뿐 아니라 그의 동생 정작 역시 선가적 인물로 유명하였는데, 이 두 사람 이외에도 수행가로 이름난 선비들이 이 집안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이를 두고 현실적 불우함으로 인해 현세 도피적인 도가적 성향을 띤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정확한 지적이 아니다.
비록 현실적 평지풍파가 영향을 미쳤을지 몰라도 온양 정씨 문중은 일찍부터 정통
성리학과 다른 수행가풍이 있었다. 그것은 몇 가지 사실로부터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문중에
내려오던 문집 여덟 권을 합본한 《온성세고》이다. 이 문집의 저자는 정렴, 정작, 정상, 정지승, 정회, 정두경, 정초, 정돈식 등으로, 정치적·현실적 불우함이 그들을 도교로 굴절된 삶을
살게 했다는 일반적인 평과는 달리 그들의 글은 현실 도피의 삶이 아닌 현실 참여라는 차원에서 당시의 정치와 현실에 대해 비판하고 걱정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하나의 근거는 정렴 선생이 어릴 때 산사에서 불가의 육통법을 시험해보았다는
일화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정렴 선생은 이 체험 이후 스스로 천문, 지리, 의약, 율려, 외국어 등을 두루 익혀 통달했다고 전해지는데, 14세에 중국여행을
하며 수많은 외국인들과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점을 살펴보면 그가 단순한 천재라기보다는 정통 성리학과 더불어 또 다른 학문을 함께 병행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명문 가문인 그의 집안의 사상적 배경이 없었다면 분명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19세 때, 국자시國子試에 뽑히고는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선생이 천문, 의학, 율려에 통달했다 하여 장악원掌樂院 주부, 관상감觀象監, 혜민서惠民署의 교수로 임명하였다. 선생은 잠시 그곳의 교수로 있다가 포천 현감을 지냈으나 얼마 안 있어 그만 두고 양주楊州 괘라리掛羅里에 은거하였다.
그렇게 은거생활을 한지 10년이 지난
1549년 기유己酉 음력 7월 16일 자신이 스스로 자신에 대한 만가輓歌를 지은 후 앉은 채로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친하게 지냈던 화담 서경덕이 세상을 떠난 지 3년만의
일이었다. 선생은 스승도 제자도 없었으며, 친자식 또한 없었다.
그의 아우 정작은 그의 형으로부터 선가의 공부를 배워 후에 동의보감의 편찬에도
참가하였으며, 후에 부친이 을사사화에 연루되자 방랑생활을 하게 된다.
정작은 의병장 이순李順, 고경명高敬命과도 친했고 격암 남사고南師古를 선배로 모셨다고 전해진다.
정렴 선생의 일생은 기인奇人적인 삶이라고 함축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볼 것은 그의 사상적 변천이다. 비록 당대에
수행자로서 유명한 그였지만 그의 사상적 근본은 유학에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적·정치적 상황과 개인적인 처지가 맞물리며 그는 새로운 사상적
돌파구를 모색하게 되는데 《용호비결》과 《정감록》을 통해 우리는 그의 말년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정렴
선생이 말년에 밝힌 생각은 정통 유가적 사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이후에 민간에 크게 번졌던 미륵신앙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정렴 선생은 기이한 행적과 더불어 수행가로서 널리 세상에 알려지며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렇다고 정렴 선생의 사상이 초기부터 전면적으로 성리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선가의 공부에 일찍부터
눈을 떴다고는 하나 그는 정통 성리학을 중시했다. 《소학》小學의 《근사록》을 초학자의 지름길이라 말했으며, 효제孝悌에 힘쓸 것을 자주 언급하였다. 이러한 성향은 그가 중년에
접어들어서도 변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의 사상이 유학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라기보다 유·불·선 삼교의 근본적 교리를 통달 한데서 나온 것이라 보여진다.
또한 기존의 성리학 체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황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조선
사회가 사회적 모순을 극명하게 표출하기 이전이었던 당시 그러나 새로운 사상의 움직임은 이미 꿈틀대고 있었다. 정렴
선생의 은거 이후 저작을 통해 우리는 그러한 사상적 시작점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당대에 그와 비슷한
길을 걸었던 지식인을 통해 새롭게 대두되는 대안 사상이 어떠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 한 예가 바로 정렴
선생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토정 이지함 선생은 주리론을 배우다가 역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조선 고유의 도가사상을 접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극도의
사회 모순으로 성리학적 사회질서에 대항하는 여러 사상적 흐름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정렴 선생이 살았던
바로 그 시기가 이러한 사상이 꿈틀대기 시작하는 태동기에 해당하는 때였다. 임진전쟁 이후의 실학과 더불어
일부 사찰과 민간에 널리 유행하던 미륵사상도 그러한 흐름의 한 예이다.
두 사상의 차이라면 실학
사상이 기존의 유가적 틀을 기본으로 새로운 사상을 흡수 통합하여 사회 모순을 극복하자는 쪽이었다면 미륵 사상 기타 민간 신앙은 조선의 고유사상을
기반으로 성리학적 질서의 조선을 개혁하자는 쪽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풍수도참설과
일부 불교 및 민간 신앙, 고유 사상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 미륵 신앙이었는데, 이 미륵신앙이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사상이며, 변형 불교적인 것으로
일부 신도들만이 믿었던 사상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당시 정렴 선생이라든가
토정 이지함과 같은 지식인들 – 임꺽정, 장길산, 홍길동 등의 실천적 활동과 격암 남사고의 신교神敎적 흐름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넓은 의미의 미륵신앙으로 서로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보다 전형적인 미륵신앙은
불교와 민간신앙의 합작으로 나타났다. 또한 후대 구한말의 동학이나 증산교에서도 변형된 미륵신앙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렇듯 조산 중후반기를 통틀어 고유사상으로 가장 강력히 성리학에 도전한 사상은 바로
‘넓은 의미의 미륵신앙’이었다.
정렴 선생의 경우, 어지러운 세상사에 회의와 염증을 느끼고 은거한 이후 저술한 책인 《용호비결》과 《정감록》에서 그 새로운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감록》의 경우 직접적으로 미륵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속에는 미륵에게 가탁하고 잇는 일들이 정도령이란 존재를 통해서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정감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풍수도참적 사상, 민간신앙, 역학 등의 내용이 담겨있는데 그것은 정렴 선생이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 하나의 구조적 장치였다. 정렴 선생은 풍수도참의 입장에서 미륵신앙을 전개했고, 그 결과물을
정감록이라는 민간신앙의 형태로 표출했으며, 그 방법론으로는 역학을 택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중요한 저작으로 꼽히는 《용호비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곳에는 실천 수행가로서 수행의 요지를 정리하면서 인체철학, 의학, 역학의 내용들을 담았는데, 당시의 주기론과 주리론으로 추상화된 유교적
사상과는 달리 인체라는 대상을 통해 자신을 주체적으로 변혁시키는 방법론을 담고 있다.
이는 선생이 생각하는 다가올
미륵이라는 것이 추상화되고 섬기는 대상이 아닌 주체 변혁적인 것이며, 그러한 주체 변혁을 통해 새로워질
자신이 곧 현재의 자신이 섬겨야만 하는 ‘미륵’이라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정감록》을
통해 사상적·기복적 미륵의 상象이 용호비결의 방법론을 통해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형태로 바뀌게 된 것이다. 여기에 선생의 저작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시대적 선구자로서, 또한
실천 수행가로서 당대의 어지러운 세상을 보며 이상을 그린 정렴 선생, 수행의 저서를 통해 스스로 자신을
변혁시킨다는 또 하나의 중요한 날개를 빠뜨리지 않고 같이 전하려 하신 선생의 마음을 생각하며 그 분의 글을 접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 모울도뷔
제06호(2001년 0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