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화(點化)의 점(點)은 본디 문자의 말소(抹消), 자구(字句)의 정정, 점검을 의미하는 글자로 점화란 한시(漢詩)의 수사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로서 남의 시문을 옮겨와서 슬쩍 바꾸어 쓰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그냥 베끼는 것이 아니라 감쪽같이 뜯어 맞춰 흔적 없이 재구성하는 것이나, 그렇다고 해서 원래 전거(典據)가 되었던 작품을 숨기고 그것이 자신의 독자적인 작품인 양 꾸미지는 않는다.
방(倣)-본뜨다. 준거하다. 의지하다
모(摸)-더듬어 찾다. 잡다. 쥐다, 가지다. 베끼다, 본뜨다.
무(撫)-어루만지다. 손에 쥐다.
이런 낱말들이 품은 뜻처럼 평소 존숭하는 대작가의 작품을 향한 이 단어들이 의미하듯 최대한의 그 분에 대한 예우를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위대한 작가의 걸작, 그 독특한 양식과 특징을 흉내 내어, 여기에 자기만의 해석과 멋을 덧대어 결과적으로 전혀 새로운 맛을 내도록 하는 시도로서, 이것은 동양문화의 독특하고 오랜 전통이다. 하니 이미 후배의 뼛속 깊이 육화된 원작의 심도 높은 맛을 의식하며 그 깊은 맛을 유지하고 추억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 자신의 심정으로 새롭게 채색함으로써 일종의 변주(變奏)를 이끌어내는 아취(雅趣) 있는 예술 양식이다.
-<책머리에> 「점화 시집을 펴내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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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봄꿈
春夢 춘몽
春夢雖處誕 춘몽수처탄
人生又若斯 인생우약사
絲身徒穀腹 사신도곡복
功業問其誰 공업문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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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기운에
살풋 든 잠
문득 깨니
꿈결이
그야말로 꿈결
삶 또한 그러하니
해 밝아
나섰던
활기찬 발길
어느결에
석양이라
황홀하던
젊은 날의
꽃 잔치
몽중인 듯
희부연하니
간신히
거둔
생의 열매
쓰다듬는
잠자리 역시
꿈속인 양
소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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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은(詩隱) 이치홍(李致洪: 1873~1951)은 숙릉참봉(淑陵參奉)을 역임하고 남양촌에 서당을 열어 후학 양성에 힘썼고 문집 『시은집(詩隱集)』을 남겼다. 시은집을 살펴보니 선비로서 특립독행(特立獨行)하여 의(義)에 맞게 할 뿐이고 남이 옳다 그르다 한 것을 돌아보지 않은 호걸지사(豪傑之士)로서 도(道)를 믿음이 돈독하고 자신을 앎이 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고서의 번역은 고전번역원 같은 전문기관이나 전문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전문위원이 하는 것이 예사인데도 시은집에 담겨 있는 531수의 한시는 시은의 아들인 향포(香圃) 이명구(李明銶) 선생이 직접 번역하였다. “선친의 한시 작품을 번역해 낸 이명구의 문학정신은 한시 번역 문학사에서도 새롭게 평가되리라 여겨진다.”라고 『시은집』 해제를 쓴 문희순 박사가 말했듯이 한학에 조예가 깊은 분으로 사료된다. 거기에 더 놀라운 것은 시은의 손녀이자 향포의 딸인 금파 이정선(金波 李貞善) 선생이 500여 수 중 100수를 가려 현대 감각으로 점화시를 썼다는 사실이다.
-<축간사> 농학박사 수필가 정판성(丁判聲)의 「유고(遺稿)를 새롭게 점화(點化)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