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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시집. <쌍둥이 할아버지의 노래>(b)
평화통일의 시학
맹문재
1.
김준태 시인의 『쌍둥이 할아버지의 노래』는 한국 사회의 모든 모순이 민족 분단에서 발생한다고 진단하고 그 극복 방안으로 평화통일을 제시하고 있다.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한국의 민주주의는 실현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인권 유린과 불평등한 부의 분배를 개선할 수 없다고 파악한다. 또한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은 물론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독립이 어렵다고 본다. 삼엄한 신군부의 언론 통제를 뚫고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발표해 5·18민주화운동을 전 세계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을 마련하는 데 함께한 시인의 진단 및 인식이기에 주목된다. 국민들의 통일의식이 점점 약화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이 2017년에 시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통일이 ‘매우 필요하다’고 응답한 경우가 16.5%, ‘약간 필요하다’고 응답한 경우가 37.9%로 통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전체의 절반을 넘지만 매우 필요하다는 의견은 적은 편이다. 2007년부터 조사를 시작한 이래 이와 같은 경향은 계속 심화되고 있는데, 민족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과 의지가 감소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50대와 60대는 62.0%와 67.0%가 통일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는데 비해 20대와 30대는 41.4%와 39.6%가 필요하다고 응답해 세대 간의 통일의식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젊은 세대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므로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적인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통일을 이루는 것과 남북한의 민주화에 어떤 상호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조사에서는 ‘통일이 되어야 남한에 완전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다’는 응답이 26.5%, ‘민주주의가 완전히 이루어져야 통일이 가능하다’는 응답이 27.1%, ‘통일과 민주주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응답이 46.3%로 나타났다. 통일과 민주주의 문제를 개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통일의 가치를 우선적으로 내세우면서 민주주의 가치를 희생시킨 적이 있었다. 가령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이후 박정희 정권은 남북통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유신헌법을 공포하고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민족 통일을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국민의 인권을 유린한 것이다. 따라서 남북한의 통일은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민족 통일과 민주주의를 별개의 과제라거나 선후의 과제라고 여기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민족 통일을 이룬 뒤 민주주의를 이루어야 한다거나 민주주의를 이룬 뒤 민족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논리는 정당화될 수 없다. 민주주의를 추구하지 않는 민족 통일이나 민족 통일을 지향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국민들로부터 동의받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민족 통일은 소수 기득권자를 제외한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실현하는 일이 곧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말입니다.”라는 의견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실제로 한국 국민들은 민족 통일을 현실적인 차원보다는 당위적인 차원에서 인식하고 있다. 가령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로 ‘같은 민족이니까’로 응답한 경우가 40.3%로 가장 높고, ‘전쟁 위협을 없애기 위해’라는 응답이 32.5%, ‘한국이 보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라는 응답이 12.5%, ‘이산가족의 고통을 해결해주기 위해’라는 응답이 10.5%, ‘북한주민도 잘살 수 있도록’이라는 응답이 4%였다. 국민들은 통일 문제를 같은 민족이라거나 이산가족의 고통을 해결해주려는 당위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남북한 사이의 전쟁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서라거나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는 물론이고 북미 간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수록 현실적인 차원에서 통일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것이다. 이렇듯 민족 통일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데, 김준태 시인은 그 상황들을 반영하면서 극복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2.
붉은 쇳덩어리 노을이 떨어진 바다
저 시퍼렇디 시퍼런 바다 속에 누워
파도를 토하는 304명의 와불(臥佛)들!
그들이 뿌리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다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세상 바꾸려고,
―「레퀴엠, 세월호- 1. 서녘 바다, 304명의 와불」 전문
한국 사회에서 “세월호” 참사는 특정한 사고를 지칭하는 것을 넘어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윤리가 좌초된 사건을 대변하는 상징어로 각인되고 있다. 국민들은 죽음을 방치하고도 기만했던 정부에 대해 분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기적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자신을 반성하고 사회적 정의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죽음을 개인의 책임이나 운명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자각하고, “304명의 와불(臥佛)들”이 “뿌리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에 죄책감과 아울러 용기를 가지고 함께하는 것이 그 모습이다. 그것만이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인간적인 도리라고 여기고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세상 바꾸려고” 나서는 것이다.
2014년 4월 15일 오후 9시에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을 포함한 총 476명, 차량 180대, 화물 3,608톤 등을 싣고 인천 여객터미널을 출항한 세월호는 4월 16일 오전 8시 48분 맹골수도에서 급격하게 변침한 뒤 중심을 잃고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청와대, 해경, 안전행정부 등의 국가기관이 구조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아 10시 31분에 세월호는 바다 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304명이 희생된 대참사 이후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까지 바다 속에서 돌아오지 못한 생명들이 있다. 슬픔에 빠진 유가족과 국민들을 위해 끝까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규명할 것이라는 대통령의 약속이 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만큼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국가의 무기력과 무책임과 기만에 충격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국민들 스스로 세월호 참사를 망각하지 않고 희생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나서는 것이다.
던져라 꽃
던져라 술 던져라 밥
서녘바다 저 바다에
퍼렇다 떼죽음 당한 시간
퍼어렇다 떼죽음 당한 파도
떼죽음 당한 불두화 향기
떼죽음 당한 싯다르타
떼죽음 당한 사람의 아들
떼죽음 당한 하늘과 땅
한 마리 새가 죽으면
밤하늘 별들도 눈을 감고
한 송이 백합꽃이 꺾이면
세상의 모든 꽃들도 시들고
떼죽음 당한
사랑과 사랑의 실체
304명의 심장, 영혼들아
밥을 뿌리면 밥에 붙어서
술을 뿌리면 술에 붙어서
꽃을 뿌리면 꽃에 붙어서
바닷길 닦으면 오라
황천길 닦으면 촛불 밝혀
오라 강강술래로 오거라
둥근 달 앞세우고
우리 새끼들 일으켜 세우세
이승에서 죽으면 저승에서 살리고
저승에서 죽으면 이승에서 살리고
보내세
젊은 청춘들 좋은 세상으로!
배 가득히 법고(法鼓) 운판(雲版) 목어(木魚) 실어서
둥둥 북 울려 보내세 두둥실 멀리!
오메 그리하여 우흐흐―
누가 칼을 들어 불을 들어
온다! 온다! 온다! 오고 있네!
이 땅의 우리가 저들을 버렸으므로
또다시 저들을 바다에 밀어 넣을지 몰라
―「레퀴엠, 세월호- 4. 다시라기」 부분
위의 작품의 화자는 “던져라 꽃/던져라 술 던져라 밥/서녘바다 저 바다에”라고 산 자로서 죽은 자를 위한 진혼곡을 부르고 있다. 화자는 “떼죽음 당한” “304명”을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의 태자 이름인 “싯다르타”라거나 “사람의 아들”이라거나 “하늘과 땅”이라고 부른다. 희생자들을 지구에서 목숨을 다한 유한한 존재로 보지 않고 석가모니와 동격이고 하늘과 대지와 함께하는 우주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한 마리 새가 죽으면/밤하늘 별들도 눈을 감고/한 송이 백합꽃이 꺾이면/세상의 모든 꽃들도 시들”고 만다는 세계인식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화자는 “사람의 아들”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다시 살아오는 존재로 만들고자 한다. 전라남도 진도와 해남 지방에서 죽은 자와 산 자를 달래는 장례 의식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다시라기” 혹은 ‘다시래기’의 의미처럼 ‘다시 낳는다’고 믿고 “바닷길 닦으면 오라”, “황천길 닦으면 촛불 밝혀/오라”고 노래 부른다. “강강술래로 오거라/둥근 달 앞세우고”라고 흥겹게 부르기도 한다. 그 결과 “우리 새끼들 돌아오네/저 바다에 꽃을 뿌리고/이 바다에 밥을 뿌리니/둥둥둥 촛불 올리니//우리 아이들이 돌아오네/304명 모두 다 장군이 되어/돌아오네” 하며 기뻐한다.
“떼죽음 당한 사람의 아들”을 살아오게 하는 주체는 다름 아니라 민중들이다. 희생자들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구조되지 못했다. 만약 그들이 사회적인 권세가 높고 부유한 집안의 자식이었다면 허무하게 희생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사 뒤의 수습 과정도 좀 더 신속하고 투명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민중들이 “우리 새끼들 일으켜 세우”고자 나섰다. “이승에서 죽으면 저승에서 살리고/저승에서 죽으면 이승에서 살리”자고, “젊은 청춘들 좋은 세상으로” 보내자고 일어선 것이다. 더 이상 국가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 땅의 우리가 저들을 버렸으므로/또다시 저들을 바다에 밀어 넣을지” 모른다고 반성하고 경계하면서 “산 자가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고/죽은 자도 산 자를 일으켜 세우는/아 대한민국 촛불들”(「레퀴엠, 세월호- 7. 혼무(魂舞)」)이 된 것이다.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운 배가 속수무책으로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텔레비전의 생방송으로 보면서 국민들은 망연자실했다. 안타까움과 슬픔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구조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국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세월호 사건은 과거의 한 사고로 묻히지 않고 현재의 사회 모순이며 왜곡된 여사를 인식하는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3.
제노사이드
집단대학살
그들이
쳐들어
왔을 때
아, 제주
1948년...
대장장이는
쇠를 달구어
칼과 창을 만들고
옹기장이는
가마에 불 넣어
밥그릇을 만들었다
한라산의 붉은 흙으로!
여자들은
자신의 옷을 찢어
내일 태어날 아가들의 옷을 만들었다!
―「제주, 1948년」 전문
주지하다시피 “제주/1948년”에는 “제노사이드/집단대학살”이 자행되었다. 민족 해방으로 부풀어 올랐던 민중들은 대흉년과 미곡 정책의 실패, 실직, 생활품 부족, 전염병인 콜레라 만연 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미군정에 실망하고 있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의 경찰들이 민족의 죄인으로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미군의 경찰로 변신한 뒤 모리 행위를 일삼자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하는 건국준비위원회 및 남로당 계열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던 중 1947년 제주 북초등학교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어린아이가 기마 경관의 말발굽에 치이는 사고가 일어났다. 경찰은 민중들의 사과 요구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경찰서에 쫓아온 이들에게 발포했다. 미군정도 6명의 사람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다쳤는데도 불구하고 사과하기는커녕 정당방위로 규정하고 3·1절 행사의 관련자들을 연행했다. 뿐만 아니라 민중들이 총파업과 항전 등으로 맞서자 동조자는 물론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 잔혹하게 진압했다. 한국전쟁 동안에는 보도연맹 가입자나 요시찰자 등을 학살했고,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4·3항쟁 관련자들을 즉결 처분했다. “그들이/쳐들어/왔을 때” 1만 명 이상의 민중들이 희생당한 것이다.
그렇지만 “제주”의 민중들은 전멸하지 않았다. “대장장이는/쇠를 달구어/칼과 창을 만들”었고, “옹기장이는/가마에 불 넣어/밥그릇을 만들었”으며, “여자들은/자신의 옷을 찢어/내일 태어날 아가들의 옷을 만들었다”. 모순된 국가의 폭력에 희생되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상황에서도 볼 수 있다.
1. 꽃에게
봄날, 꽃이
피지 않는다면
꽃의 향기가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슬프고
삭막하고 어두울까.
2. 밥과 꽃
밥은 사람 몸속으로 들어가
피와 살을 만들어주고
꽃은 그의 고운 향기로
사람의 영혼을 부풀어 오르게 한다
둥그럽게, 아프지 않게, 아 영원히!
―「봄, 금남로에서」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봄날 “금남로”를 지나면서 “꽃”을 노래하고 있다. “봄날, 꽃이/피지 않는다면/꽃의 향기가 없다면/세상은 얼마나 슬프고/삭막하고 어두울까”라며 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가 꽃을 노래하는 이유는 사람의 영혼을 밝혀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밥은 사람 몸속으로 들어가/피와 살을 만들어주”는 것이라면 “꽃은 그의 고운 향기로/사람의 영혼을 부풀어 오르게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금남로”의 민중들이 “꽃”이 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둥그럽게, 아프지 않게, 아 영원히!”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화자의 이와 같은 바람에는 이전의 “금남로”는 “꽃”이 피어날 수 없는 곳이라는 의식이 들어 있다.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어렵구나 무섭구나/무서워 어쩌지도 못하는구나”(「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토로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화자가 “금남로”에 “꽃”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역사의식의 표명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1979년 10·26사건으로 말미암아 유신체제는 막을 내렸지만 광주의 “금남로”는 피로 물들었다. 유신헌법의 개정으로 민주주의 회복을 기대했던 국민들의 염원과는 다르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정보기관과 언론 등을 장악한 뒤 정권욕을 드러내었다.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을 비롯해 정국 운영에 장애가 되는 세력을 제거해나갔다.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정치활동 금지, 휴교령, 언론보도 검열 강화 등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옥죄었는데, 5월 18일 그 전술 차원에서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해제,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는 광주 지역 대학생들을 공수부대를 투입해 진압했다. 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무고한 시민들까지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작품의 화자는 피로 물들었던 “금남로”에 아직 “꽃”이 피어나지 않았다고 본다. 그리하여 모순된 역사를 극복하기 위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4.
하얀 옷
백합의 향기여
우리 사람 몸이여
해와 달이
거꾸로 돈다 한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남북이 서로
눈감고 불총을 쏘면
하늘에 젖을 물려준
어머니의 말씀 버리면
아마겟돈
쾅쾅, 우주가
폭발하는 소리?
한반도는
풀 한 포기커녕
꽃 한 송이 피지 않고
새 한 마리 날아오지 않을 것이다
두드릴 목탁은커녕
십자가를 만들어 세울
한 그루 나무도 자랄 수 없을 것이다!
―「아마겟돈, 경고!」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해와 달이/거꾸로 돈다 한들/그럴 리야 없”을 것이라고 믿으면서도 만약 “남북이 서로/눈감고 불총을 쏘면” “아마겟돈”의 세상이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하늘에 젖을 물려준/어머니의 말씀 버리면”, 즉 형제들이 서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살아가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 16장 16절에는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겟돈”의 의미는 ‘마겟돈 산’으로 실제의 장소이기도 하겠지만 하나님과 세속의 세력이 대결하는 상징적인 장소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악의 세력을 패배시킬 종말론적인 전쟁을 치르는 장소인 것이다. 그리하여 「요한계시록」 16장 19∼20절에는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곱 천사가 하나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니 악하고 독한 부스럼이 나고, 바다에 쏟으니 모든 생물들이 죽고, 강과 물의 근원에 쏟으니 모두 피로 변하고, 해에 쏟으니 불로 사람들을 태우고,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어둠과 고통을 겪고, 큰 강 유프라테스에 쏟으니 강이 마르고 전쟁을 위해 왕들이 모이고, 공기에 쏟으니 큰 우박이 내려 결국 바벨론이 멸망하리라고 예언한 것이다.
위의 작품의 화자는 전쟁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그 “아마겟돈”을 인유하면서 남북한이 무력 전쟁을 하면 종말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바벨론이 멸망했듯이 “한반도는/풀 한 포기커녕/꽃 한 송이 피지 않고/새 한 마리 날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두드릴 목탁은커녕/십자가를 만들어 세울/한 그루 나무도 자랄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어떠한 전쟁도 인정할 수 없다. 설령 민족의 통일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가진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전쟁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도록 가하는 폭력 중에서 가장 크고 잔인한 것이다. 폭력은 항상 명분을 갖고 있지만 모두 허위일 뿐이다. 그러므로 “의상(義湘)더러 삼국통일 안 되도 좋으니 제발 전쟁하지 말자고 원효는 피를 토하며 보리수나무 목탁을 쳤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들 칼로 서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궁극으로는 통일해야 한다”(「원효(元曉)」)라고 말한 원효의 화쟁(和諍)사상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서로 다투지 않고 화해하며 지내야 궁극적으로 상생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화쟁사상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사상이기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놈을 업어주니 또 한 놈이
자기도 업어주라고 운다
그래, 에라 모르겠다!
두 놈을 같이 업어주니
두 놈이 같이 기분 좋아라 웃는다
남과 북도 그랬으면 좋겠다.
―「쌍둥이 할아버지의 노래 」 전문
“한 놈을 업어주니 또 한 놈이/자기도 업어주라고” 울어대는 상황에서 “그래, 에라 모르겠다!/두 놈을 같이 업어주”는 화자의 자세야말로 화쟁사상을 실천하는 모습이다. 업어주는 순서를 정하거나 어떤 기준을 세우는 데 매달리다보면 필요한 시기를 놓치고 만다. 오히려 질투를 동반하는 싸움에 휘말리고 만다. 따라서 화자가 양쪽의 요구를 모두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올바른 판단이고 실행이다. 그 결과 “두 놈이 같이 기분 좋아라 웃는” 것이다.
화자는 이와 같은 상황을 두고 “남과 북도 그랬으면 좋겠다”라고 의미를 확대한다. 개인적인 차원의 의미를 민족적인 차원으로 확대해서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립적인 존재를 상생적인 존재로 만드는 하나의 전형을 창조하고 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보편적인 상황을, 현상의 의미에서 본질의 의미를 인식시키는 것이다.
여기를 봐요!
서울과 평양 사이
녹슨 가시철조망 속에
저 먼 먼 하늘에서
달걀 하나 내려오네요
70년을 피와 눈물로 품은
오, 젖은 흰옷으로 닦아낸
배달겨레의 둥근 달걀 하나!
밖에서 남녘땅 닭이 쪼고
안에서 북녘땅 닭이 쪼니
노오란 봄병아리가 나온다
어, 둥근 달걀 하나에서
7,500만 마리 병아리가
오종종 오종종 걸어나온다!
수탉은 홰를 치며
70년 만에 새벽하늘을 열고
좋다, 바야흐로 줄탁동시라!
―「좋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 전문
위의 작품은 『벽암록』 제16칙인 「경청줄탁기(鏡淸啐啄機)」를 인유하고 있다. “어느 날 한 중이 경청 화상에게 찾아와 “저는 이미 대오 개발의 준비가 되어 껍질을 깨뜨리고 나가려는 병아리와 같으니, 부디 화상에게 껍질을 쪼아 깨뜨려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경청 화상이 “과연 그래 가지고도 살 수 있을까, 어떨까?” 하자, 그 중은 “만약 살지 못하면 화상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죠” 했다. 경청은 “이 멍청한 놈!” 하고 꾸짖었다.”라는 실화가 본칙(本則)이다. 중이 고불(古佛)의 가풍에 함부로 대들었다가 혼나는 장면으로 그는 아직 껍질 속에 있는 것이다.
알 속에서 충분히 자라난 병아리가 때가 되어 알 밖으로 나오기 위해 부리로 껍질을 쪼는 것이 ‘줄’이고, 그 소리를 들은 어미 닭이 새끼가 나오는 것을 도와주려고 같은 부분을 쪼아 깨뜨리는 것이 ‘탁’이다. 불교에서는 수행자가 병아리이고, 깨우침을 일러주는 스승이 어미 닭이다. 병아리와 어미닭이 안과 밖에서 동시에 쪼아야 하듯이 제자와 스승도 같은 관계이다. 제자는 충분한 수양을 통해 알을 쪼아야 하고, 스승은 제자를 잘 보살펴 적당한 시기에 깨우침을 열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위의 작품은 “서울과 평양 사이/녹슨 가시철조망 속에/저 먼 먼 하늘에서/달걀 하나 내려”온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그 “달걀”은 “70년을 피와 눈물로 품은/오, 젖은 흰옷으로 닦아낸/배달겨레”를 나타낸다. 그리하여 “밖에서 남녘땅 닭이 쪼고/안에서 북녘땅 닭이 쪼”면 “7,500만 마리 병아리가/오종종 오종종 걸어나”오는 것이다.
남녘땅의 닭이 달걀의 밖에서 쪼고 북녘땅의 닭이 달걀의 안에서 쪼는 장면을 “줄탁동시”의 원뜻에 국한시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달걀을 쪼는 주체자의 위치보다도 쪼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한이 평등한 관계이자 협력하는 관계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서 교류하는 모습으로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북한이 남북한의 교류를 위해 스스로 체제를 바꿀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북한이 변화를 가져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남한이 좀 더 변해야 한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남한이 북한에 지원하는 ‘햇볕정책’을 퍼주기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지원에 대한 투명한 점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 반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지원은 퍼주기가 아니라 남북한 사이에 신뢰를 마련하기 위한 장기적인 투자로 여겨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 분단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통일(Reunification)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통일(New unification)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남북한이 분단 상태로 놓여 있는 한 상호간의 발전을 이루는 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통일을 역사적인 과제로 삼고 상호 협력하는 방법으로 실행해나가야 한다. 통일이야말로 국가적 모순과 문제들을 해결하는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분단 상황에 익숙해진 관습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평화통일을 노래한 김준태 시인의 작품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의 통일시는 구체적인 역사를 품고 있기에 진정성이 크고, 우주적인 이치까지 지향하고 있기에 전망을 준다. 그리하여 남북 정상회담에 즈음한 그의 시들은 더욱 새롭게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