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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북한군중장 유성철씨 회고록서 폭로
【모스크바=연합】 북한의 김일성이 항일유격활동의 「빛나는 전공」으로 내세워 온 「보천보
전투」는 전설적인 항일용장인 진짜 김일성 장군이 치른 것이며 김장군이 전사한 후 김일성으
로 개명한 김성주는 이 때문에 해방직후 귀국시 자신의 신상에 대해 부하들에게 철저한 함구령
을 내렸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일성(성주)의 지휘아래 항일유격대원으로 편성됐던 전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씨(중장출신·74
세)는 재소교민 신문 고려일보에 지난달 24일부터 연재중인 『피바다의 비화』라는 회고록에서
이같은 내용을 폭로했다.
유씨는 한국에서 김의 과거행적과 6·25전쟁의 원인 및 진행과정 등에 관해 정확하게 실상이
알려지지 않아 회고록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 회고록중 보천보전투에 관한 요약.
『1937년 여름 진짜 김일성 장군이 이끈 유격대가 압록강을 건너 보천보 파출소를 급습하는 대
담한 전투를 해냈다.
40여명의 이 유격대는 습격하고보니 일본군은 없고 경찰 몇명뿐이어서 일인 경찰관 2명을 죽이
고 총기와 양식을 전리품으로 빼앗은 후 새벽녘에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 탈출했
다. 유격대는 뒤쫓아온 일본군과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여기서 김일
성 장군은 영웅적인 전사를 했다.
당시 김장군은 마흔이 훨씬 넘은 용장으로 아주 영리하고 현명했으며 전투에서는 용감무쌍했
다.
한편 동생 철주가 일본군의 포로가 돼 정신적인 타격을 받은데다 유격활동에 별로 큰 공을 세
우지못해 고심했던 김은 김일성장군의 전사 소식을 듣고 이 기회를 이용해 이름을 바꿔 활동하
기 시작했다.
김일성으로 개명한 김성주는 해방직후인 9월19일(추석)소련군 운반선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
항에 조용히 상륙했다. 당초에는 안동과 신의주를 거쳐 평양까지 기차로 갈 계획이었으나 압록
강 철교가 파괴된 것을 알고 배편을 이용했다.
원산시 인민위원회의 초청으로 추석행사가 한창인 공설운동장으로 가게됐는데 김은 우리 일행
을 모아놓고 이렇게 「교시」했다.
「동무들,오늘은 추석날인데 조심하시오. 술도 마시지 말고 방탕질도 하지 마오. 혹시 사람들이
김일성을 보았는가 물으면 우리는 선발대가 되어 보지 못했다고 하고 그 분은 뒤이어 올거라고
말하시오. 연세을 물으면 보지 못해서 모른다고 하시오.」
이것이 조국땅에서 김이 행한 첫 교시였다. 김의 교시를 듣고 밖으로 나온 일행중 최용진 동무
는 중국어로 혼잣말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나는 당시 최동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를 몰랐
으나 나중에 최에대한 사상검토를 보고 그의 말을 떠올리게 됐다.』
먼저,작고하신 이명영교수의 "김경천이 원조 김일성" 이외의 또 다른 주장("김일성중 한명은 참
수 당해")을 다시 옮겨오면 다음과 같음.
"이명영교수는 북한의 김일성은 본명이 김성주이며 제1로군 제6사장 김일성과는 상관이 없다는
논지를 편다. 그는 항일유격대 내에는 3명의 김일성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보천보전투를 치른
제1대 김일성은 본명이 김성주로 37년 11월13일 무송현 양목정자에서 전사했으며 제2대 김일성
은 본명이 김일성으로 38년 4월부터 제6사를 이끌고 활동하다가 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장
이 되었으며 40년 2월 일제의 대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들어가 44∼45년에 타계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명영교수는 아래에 녹색으로 칠해진 부분에 소개된 자료들에 근거해 위와 같은 주장을 폈던
것으로 보임.
그런데,일본 등지의 문서 및 신문 기사 외에, "김일성이 체포되어 참수"라는 내용의 아래와 같
은 조선일보 보도가 있었음.
(전체기사는 여기에 있습니다)
1937년 11월18일 조선일보 (2)면 反滿 抗日의 首魁 金日成 被捉 斬首? 討匪隊와 激戰 五時間
이 때는 동아일보 양일천기자가 잡지 삼천리에 "김일성 회견기"(클릭)를 쓴 지 약 1개월여 지난
시점임.
특히 양일천도 이 기사 작성 얼마후 체포(조선광복회)되었다 하는 게 어째 심상치 않은 듯(클
릭). 완전한 소설에 불과하지만...혹시 고문 등을 통해 김일성 활동 근거지를 알아낸 다음,체포한
후 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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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2-02-05
[TV 깊이보기] MBC '이제는…' , 항일투쟁 추적 돋보여
3일 밤 방영된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은 우리 사회
의 금기 하나를 건드렸다. 김일성 가짜론의 진위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그 추적의 출발점은 1937년 6월 4일 함경남도 갑산에서 일어났던 이른바 '보천보 습격 사건'.
당시 국내 언론은 그 주도자를 김일성으로 보도했다.
물론 그 앞에는 '비적'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그해 11월 일본 외무성은 '김일성이 일본 토벌대
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1945년 10월 평양 환영대회 때 처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젊은 김일성에게 '저건 가짜다'
라는 얘기가 나온 것은 이 연장선에서 였다.
하지만 증언자들은 '김일성 피살'자체가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프로그램
은 남한에서 김일성 가짜설을 본격 제기한 고 이명영씨의 '4인의 김일성론'등을 짚었다.
결론은 신빙성이 떨어지고 정략적 요소가 다분하다는 것. 그러면서 북한이 김일성 신격화를 위
해 활동상을 과대 포장하면서 생긴 문제점도 빠트리지 않았다.
'이제는…'은 중국에 흩어진 김일성의 유격활동 흔적과 기록들을 찾아냈다. 취재의 발길은 김일
성이 27년부터 다녔던 쑹화강변 육문중학에서 시작해 그가 처음 항일 유격대를 조직한 중국 안
도 소사하 마을을 거쳐 소왕청 항일 유격대 근거지, 홍기하 전투 유적지, 그리고 김일성이 일본
토벌대에 밀려 갔던 소련의 연해주 브야츠크에까지 닿았다.
하지만 중국 취재는 결정적인 증언 없이 현장을 스케치하는 수준에 그친 느낌이었다. 전 중앙
정보부장 이후락씨도 전화 인터뷰에 응했다.
이씨는 "이명영씨의 70년대 가짜 김일성 만들기에 개입한 바 전혀 없다"고 말하면서도 "김일성
의 항일 유격대 경력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실토했다.
프로그램은 김일성을 우리 독립 운동사에서 어느 위치에 놓아야 하는지는 여전히 숙제라고 끝
맺음했다. 여러 증언들이 나왔지만 진실을 규명하기엔 다소 산만했다.
특히 김일성과 항일투쟁을 함께 했던 전 헤이룽장성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인 이민(당시 이름 이
명순)등을 취재 대상에서 빠뜨린 게 아쉬웠다.
허의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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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91-06-12
횡설수설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 이시며 천재적인 군사전략가이신 김일성 동지께서 월4일 조선인민
혁명군 주력부대를 친솔하시고 일제의 전략상 요충지인 보천보를 들이쳐 일제침략자들에게 심
대한 정치 군사가격을 줌으로써 일제의 식민지 통치밑에서 신음하던 조선인민에게 민족해방의
서광을 안겨주신 전투」. 북한에서 발간한 「력사사전」의 「보천보전투」 항목이다. 김일성은
이 전투를 항일 유격활동의 대표적 전공으로 내세운다
◆서대숙 교수저서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을 보면 김이 이끄는 2백명 정도의 제1로군 제2로
군 제6사는 이날 만주 접경의 혜산진 부근 보천보 마을을 공격,일본경찰지서 지방소학교 우체
국 등에 방화하고 다음날 새벽 철수했다는 것. 일경이 압록강까지 추격했으나 김의부대는 일본
경찰서장 오카와등 7명을 살해했다고 되어있다. 이 공격이 대단한 전과는 아니지만 만주에서
국경을 넘어 본토에 들어와 일경을 공격했다는 사실 때문에 중요시하는 것같다
◆이 보천보 공격은 본명이 김성주인 김일성이 한 것이 아니라 전설적 항일용장인 진짜 김일성
장군이 지휘한 것이라는 내용이 폭로됐다. 소련에서 김일성과 함께 유격대원의 한사람이었던
전북 한군 중장 유성철씨(74)는 최근 재소 교민신문 고려일보에 연재중인 회고록 「피바다의
비화」에서 이같이 밝혔다. 유씨는 6·25 당시 인민군작전 국장으로 남침계획을 직접 작성한
인물로 뒤에 숙청위기에 몰리자 59년 소련으로 망명했다
◆유씨는 마흔이 헐씬 넘은 진짜 김일성 장군이 이끈 유격대 40여명이 보천보를 습격하고 보니
일군은 없고 일경 몇명뿐이어서 2명을 죽이고 양식 총기를 거둬 압록강을 건너 탈출했으나 뒤
쫓아온 일군과 전투가 벌어져 김일성 장군이 전사했다고 밝혔다. 이 소식을 들은 김성주가 장
군의 이름을 도용,김일성으로 행세해 왔다는 것. 이와 비슷한 설을 국내 일부 학자도 주장한 적
이 있다. 김일성의 역사 허위날조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허위는 언젠가는 껍질이 벗겨지게 마
련. 허위란 뜬구름이요 진실은 견고한 반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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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91-06-12 (외신)
김일성 「보천보전투」 전공 가로챘다
◎전 북한군 중장 유성철씨 회고록서 폭로
37년 진짜 김일성 전사뒤 이름바꿔 활동/해방후 귀국때 부하들에게 함구령 내려
【모스크바=연합】 북한의 김일성이 항일 유격활동의 「빛나는 전공」으로 내세워온 「보천보
전투」는 전설적인 항일 용장인 진짜 김일성 장군이 치른것이며 김장군이 전사한후 김일성으로
개명한 김성주는 이 때문에 해방 직후 귀국시 자신의 신상에 대해 부하들에게 철저한 함구령을
내렸던것으로 밝혀졌다.
김일성(성주)의 지휘아래 항일 유격대원으로 편성됐던 전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씨(중장출신
74세)는 재소교민 신문 고려일보에 지난달 24일부터 연재중인 「피바다의 비화」라는 회고록에
서 이같은 내용을 폭로했다.
유씨 특히 6·25전쟁직전 스탈린이 작성한 「작전 명령서」를 번역한 인물로 알려졌다. 다음은
북한의 김일성과 과련되 내용의 요약이다.
소련을 침공한 나치 독일군이 물러난 후인 1943년 봄 소련군 지원하에 제88특별저격 여단이라
는 유격부대가 편성됐다.
김일성(성주)은 제1대대 대장으로 자신과 함께 활동하던 유격대원들을 부하로 두었으며 팔지는
당시 제1대대 통역원으로 김일성을 보좌했다.
이 부대는 하바로프스크 외곽에 주둔하면서 42년 여름부터 소련군의 훈련강령에 의해 정규군
훈련을 받았다.
해방에 이르기까지 한곳에만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과 그의 부대는 「조선해방전투」에 참가하
지 않은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1937년 여름 진짜 김일성장군이 이끈 유격대가 압록강를 건너 보천보 파출소를 급습한 대담한
전투를 해냈다.
40여명의 이 유격대는 습격하고보니 일본군은 없고 경찰 몇명 뿐이어서 일인 경찰관 2명을 죽
이고 총기와 양식을 전리품으로 빼앗은후 새벽녘에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 탈출했
다. 유격대는 뒤쫓아온 일본군과 피할수 없는 상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여기서 김일성
장군은 영웅적인 전사를 했다.
김은 김일성 장군의 전사소식을 듣고 이 기회를 이용해 이름을 바꿔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으로 개명한 김성주는 해방직후인 9월19일(추석) 소련군 운반선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
항에 조용히 상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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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992-06-18
“6·25남침 참전 민족에 사죄”/훈장 등 25일 북에 반납
◎러시아교포 6명
【모스크바=김석환특파원】 6·25당시 북한 인민군의 고위장성 및 장교로 참전,김일성으로부터
훈장 등을 받았던 러시아교포 6명이 『민족상잔을 일으킨 남침전쟁에 참전,훈장을 받았다는게
부끄럽다』며 한민족에게 사죄하는 성명과 함께 훈장·북한군 계급장 등을 모아 오는 25일 북
한에 돌려보낼 것으로 알려졌다.
17일 모스크바 및 알마아타의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강상호(84·전 북한 내무성부상·중
장)·유성철(76·전 인민군 작전국장·중장)·박병률(86·전 강동정치학원장·소장)·김용옥(6
3·야·간호장)·정율(73·전 문화성부상·대좌)·장학봉(73·전 인민군 정치군관 학교장·대
좌) 등 6명은 최근 『6·25는 북한의 김일성이 민족상잔을 일으킨 남침전쟁인데 거기에 참전,훈
장을 받은 것은 창피하며 민족에게 죄지은 일이었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이를 공표하기
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를 위해 이미 이러한 의견을 담은 성명서를 작성,오는 19일자 고려일보(알마아타 한글
신문)에 공개게재하고 25일에는 6·25 참전공훈으로 김일성으로부터 받은 훈장과 당시 인민군
계급장을 모아 소포로 북한에 돌려보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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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영교수에 따르면 8일 사망한 김일성은 본래 6사장이었던 「김일성」의 동명이인이라는 것.
「진짜 김일성」, 즉 6사장 김일성은 1901년 함남태생으로 본명은 김성주이며 37년 11월 13일
전사한 반면, 북한 김일성은 본명이 김성주, 유격대시절에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6
사의 대원에 불과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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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링크
[유성철] 해방후 함께 입북한 빨치산 출신,인민군 작전국장의 증언내용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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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의 농담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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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경력과 관련,의문점을 대부분 설명해 주고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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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1990-11-01 (종합) 기획.연재 01면 1590자
당시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씨 부부 서울에
◎“6촵25 남침 「선제타격계획」 내가 짰다”/소 승인받고 한달 전 기안/“서울 점령하면 종
전” 판단
6촵25당시 북한 인민군 작전국장으로서 남침계획을 직접 기안한 재소 교포 유성철 전 중장(73)
은 31일 『내가 기안촵작성한 남침계획의 정식명칭은 「선제타격계획」이었으며 이는 당시 소
문에 떠돌던 이승만 정권의 북침설에 대한 선제공격이었다』고 증언,북한의 남침전모를 최초로
공개했다.
유씨는 또 김일성이 50년 3월 모스크바로 스탈린을 방문,남침계획을 논의했음도 재확인하고 최
근 밝혀진 소련군의 한국전 참가가 중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는 새로운 사실도 공개했다.
유씨의 증언은 북한의 남침전모와 소련촵중국군의 참전과정을 상세히 밝혀주고 있어 6촵25의
진상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유씨는 6촵25당시 인민군 중장으로 작전국장과 인민군 총참모장대리를 역임하면서 전쟁을 직접
지휘한 장본인이었으나 김일성의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적 자세로 인해 숙청위기에 몰리자 59년
소련으로 망명,타슈켄트에 정착,지금까지 살아왔다.
유씨는 부인 김용옥 씨(60)와 함께 내한,이날 본사와의 단독회견을 통해 그동안 숨겨져왔던 6촵
25의 비밀을 소상히 털어놓았다.
유씨는 이와 함께 지난 42년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직된 소련 극동군 산하 「88특별독립
저격여단」에서 김일성과 함께 항일활동에도 참가,논란이 많은 김일성의 항일운동 행적과 김정
일의 출생배경에 대해서도 결정적 증언을 했다.
유씨는 6촵25 발발배경과 관련,『49년 이후 38선에서는 빈번한 남북간 군사충돌이 있었고 50년
여름 이승만 정권이 북침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어 북한이 남침을 계획했다』며 『김일성이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승인을 받은 뒤 50년 5월께부터 본격적인 남침계획을 준비했었다』고 말
했다.
유씨는 『실질적인 남침계획은 소련 군사고문단이 작성했으며 소련은 당시 군사고문단장을 대
독전 경험이 있는 바실리예프 중장으로 교체했다』고 설명했다.
유씨는 소련의 남침안을 토대로 자신이 기안,작성한 남침계획서의 명칭은 「선제타격계획」이
었다고 밝히고 『그 내용은 ▲전투명령서 ▲각군별 이동계획 ▲후방보장(지원)계획 ▲군사이동
을 훈련으로 위장하는 계획 등이 포함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유씨는 『남침작전은 2개 지휘소(군단)가 38선지역에서 동시공격하도록 짜여져 있었으며 서울
을 점령하면 전쟁이 끝날 것으로 판단,공격목표를 서울점령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유씨는 이어 소련촵중국군의 파병과 관련,자신이 50년 10월당시 북한 외상 박헌영촵상업성부상
이상조(주촵소련 거주촵89년 6월 내한한 바 있음) 등과 함께 중국을 방문,모택동에게 직접 파병
을 요청했으며 소련군은 중국측이 미군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공군과 대공포병을 요청함으로
써 참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유씨는 『김일성이 하바로프스크에서 김정숙과 결혼,42년 장남 정일(소련명촵유라)을 낳았다』
며 『북한이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출생했다고 선전하는 것은 완전한 날조』라고 비난했다.
유씨는 『김일성 88여단에서 활동하다 일본이 항복하자 소련군 지시에 따라 나와 함께 선박편
으로 원산항을 통해 북한으로 귀국했다』고 밝히고 『김일성이 두만강을 건너 게릴라활동을 펼
치며 귀국했다는 것은 우스갯거리』라고 강조했다.<증언내용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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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1990-11-01 (해설) 기획.연재 05면 2431자
6촵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
◎소 「88여단」서 김일성 만나… 매우 허약/「동북연군」 김,일에 쫓겨 소로/「88여단」엔 김
일성보다 높은 조선인있어
전 북한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 중장은 지난 43년 이후 김일성과 함께 항일운동을 했던 동지이
며 해방 이후에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인민군을 창설했고 급기야는 비극적인 6촵25전쟁
을 입안,지휘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유씨는 김일성 정권의 탄생과정을 밝히고 사실보다는 왜곡
과 과장으로 포장된 김일성 신화의 허구를 파헤칠 수 있는 몇 안되는 역사의 증인이다. 한국일
보는 지난해 6월 전 북한인민 군부참모장 이상조 중장의 증언을 독점 발굴한데 이어 유씨의 회
고담을 연재,김일성정권의 숨겨졌던 비화를 공개키로 했다. 남북고위회담촵체육교류 등으로 남
북관계가 그 어느때보다 화해분위기를 보이고 있는 시점에서 이같은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남북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유씨의 기록을 게재하기로 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밝히려는 노력만이 실질적이고도 궁극적으로 남북화해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유씨의 증언 제1편은 일반에게는 생소한 하바로프스크 「88 특별독립저격여단」의
비화이다.<편집자주>
김일성과의 최초의 만남은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못했다. 나무토막집의 5평정도 넓이의 허름한
대대장 사무실에서 만난 김일성은 빨치산이란 느낌이 들지 않을만큼 마르고 연약한 체구였으며
비후염을 앓고 있는 탓인지 입이 항상 벌어져 있었다.
김일성은 반갑게 악수를 하면서 『동무,조선말 잘하오?』라고 물은뒤 『그렇다』고하자 『됐소,
내 러시아어 통역으로 일해주시오』라고 말했다.
김일성이 나에게 조선말을 물어온 것은 내가 소련에서 나서 자란 소련한인 3세라는 사실을 알
았기 때문이다.
1943년 9월 내가 김일성을 처음 만난 이곳은 소련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북서쪽으로 80㎞
가량 떨어진 브야츠크라는 산림지대안에 위치해 있던 88 특별독립저격여단 1대대장 사무실이었
다.
이름도 특이한 이 부대는 소련 극동군이 만주를 점령하고 중국전역을 넘보던 일본군의 군사정
보를 수집하기 위해 42년 7월에 창설한 비밀정찰부대였다.
부대 명칭은 여단이지만 실제로는 대대급 규모인 6백명 정도의 중국인촵조선인촵소련인으로 구
성된 다민족부대였으며 이중 조선인은 60명선이었다.
부대편제는 후방촵안전촵정치촵군의 등 5개 참모부산하에 4개 대대와 1개 통신대로 이루어졌으
며 이밖에 중국어강습소촵경리중대가 별도로 있었다. 김일성은 당시 소련군 대위계급을 갖고 1
대 대장을 맡고 있었으며 휘하에는 2백명 정도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부대는 사실상 소련군에
의해 운영됐지만 부대장은 중국인인 주보중 대좌였다. 주보중대좌는 김일성의 항일활동을 이야
기할때 빼어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 부대에 함께 있던 조선인 동지들에 의하면 김일성은 30년대 중반부터 만주일대에서 중국 팔
로군 산하의 항일 빨치산 유격대에서 활동했다. 동북항일연군이라는 이름의 이 부대에는 많은
조선인이 있었으며 김일성은 중간급 간부인 제2군 6사장으로 1백명 안팎의 병력을 지휘했다.
물론 이 부대에는 김일성보다 직책이 높은 조선인들도 있었다.
바로 이 부대 사령관중 한명이 주보중이었으며 주보중은 41년 일본 토벌대에 쫓긴 김일성이 소
련국경을 넘다 소련군에게 체포되자 신원보증을 해주고 김일성을 풀려나게 해준 은인이었다.
88여단은 일본군 주둔지역에 침투,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이에 맞춰 사격
술촵무전촵낙하산훈련 등을 받았다.
훈련은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1시까지 계속될만큼 고되고 엄격한 것이었다. 특히 소련군은 일
본이 패망한 이후 이들 부대원을 중국과 한국으로 보내 공산정권 수립을 주도케할 장기목적까
지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관한 정치교육이 매우 중시됐다.
어느정도 훈련을 마치면 실제로 부대원을 만주일대에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케한 경우도 많았
다.
내가 이 부대에 배치된 것은 김일성을 처음만난 43년 9월로 나는 김일성의 통역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직접 정보수집활동에는 나서지 않았다.
김일성은 지금과 달리 이 당시에는 몸이 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직접 부대를 이끌고 정찰활동을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김일성의 당시 체력은 형편없어 겨울에 스키를 타고 야외훈련을 나간적이 있는데 힘이 부쳐 다
른 대원의 허리에 밧줄을 매고 이동했던 사실을 이야기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두뇌가 뛰어나고 지도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소련인
들의 눈에 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일성은 러시아어는 능숙하지 않았지만 오랜기간 만주에
서 활동했던 탓으로 중국어는 뛰어난 편이었다.
88여단의 간부중에는 김일성외에도 김책(대대정치위원) 최용건(여단정치지도원) 강건(제4대대장
촵강성산 전 정무원총리의 아버지) 이동화(여단군의관) 등이 있었으며 이들의 직위는 김일성보
다 다소 높거나 비슷했다.
이들의 이름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당시 88여단에 있었던 조선인들은 해방후 북한에서 김일성
을 도와 정권수립에 1등공신이 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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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1990-11-02 (해설) 기획.연재 05면 3801자
6촵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2
◎42년 첩보교육 마친 뒤 극동으로/원산침투 실패… 만주로가 활동/귀대후 병 강등돼 「88여
단」 배속/남한 TV극 「김일성 항일」내용에 충격촵감회/지난 봄 북한방문… 김일성 신격화
모습 교차
지난달 15일 내한,남한의 이곳 저곳을 돌아 보았던 나는 며칠전 KBS TV의 「여명의 그날」이
라는 연속극을 보면서 큰 충격과 감회에 젖은 적이 있었다.
이 연속극이 김일성과 내가 함께 생활했던 하바로프스크 88특별 독립저격여단을 무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속극에 등장하는 친숙한 이름들,그들이 입고 있는 소련군 군복등이 나의 기억을 47년전 그
어느날로 되돌려 감격에 떨게한 것이다. 물론 연속극의 내용이나 인물의 성격묘사는 사실과 다
른 것이 많았지만 그것을 문제삼을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더욱 충격받은 사실은 김일성의 항일활동을 재연하는 연속극이 TV에서 방송된다
는 것이었다.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나는 이번 한국 방문에 앞서 지난 5월 북한 초청
으로 12일동안 북한을 돌아봤다. 지난 59년 모든 지위를 버린채 북한을 쫓기듯 떠난지 30여년
만의 귀국이었다. 그런 그들이 나를 초청한 속셈은 그 무렵 소련에 살고 있던 전 북한고위 인
사가 남한을 방문,북한체제를 비판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김일성에 대한 개인적 감정을 긴 세월에 묻어버렸던 나는 담담한 심정으로 그들의 초청에 응했
다.
그러나 북한 방문중 김일성을 중심으로 모든 역사를 왜곡하고 신처럼 받드는 것을 보고 나는
또다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경험 때문에 남한에서 김일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연속극을 보고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88여단 연속극에 내 이름이 등장했는지가 궁금하다. 내가 88여단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앞서
도 말했듯이 내가 재소한인 3세라는 점 때문으로 생각된다.
나의 조부께서는 함경북도 청진부근 부령이란 곳에서 사시다가 1870년께 소련으로 이주하셨다.
이 시기는 생활고에 허덕이던 많은 국경지역 조선인들이 살길을 찾아 간도나 연해주로 이주하
는 일이 흔했던 때이다.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의 스위푼이란 지역에 정착,황토를 개간,농사를 지으셨던 할아버지는 이곳
에서 장남인 나의 아버지 유인준을 낳으셨고 나 역시 레닌혁명이 일어났던 1917년 이곳에서 태
어났다.
우리 가족은 2남1녀로 내가 차남이었는데 아버지는 한량기질이 있어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
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나보다 10살 위인 형 성훈을 교육시키기 위해 아버지와 결별한 채 블라
디보스토크로 옮겨갔다.
형님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사범대학 역사학과에 다녔으며 스위푼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뒤
몸이 약해 학업을 중단했던 나도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사범대학 부설 노동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나는 병치레를 자주 할 만큼 몸은 약했지만 성격이 온순하고 글짓기를 좋아하는 소년이었
던 것 같다. 지금도 그때 읽었던 조명희 시인의 글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이 시기에 내가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된 것은 해방 후 북한에서 초대 김일성대학 부총장을
지낸 형님의 영향이 컸다.
역사를 전공한 형님은 자주 나에게 우리 역사를 이야기해 주었고 일제하의 조선현실을 설명해
줌으로써 민족의식을 갖게했다.
노동학원을 2년 중퇴한 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선보신문사에 채자공으로 취직했다. 이 신
문은 현재 소련 알마아타에서 발행되고 있는 한인신문 「레닌기치」의 전신이다.
그러던중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이 시작돼 우리 가족은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공화국
으로 옮겨가게 됐다. 소련이 일본과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지자 스탈린은 연해주 일대 한
인들이 일본을 도울 것으로 의심,단 이틀만인 48시간내 중앙아시아로 이주토록 내몬 것이다.
이 강제이주 과정에서 소련 한인들은 모진 고난을 겪었지만 우리 가족은 내가 신문사에 일했던
탓으로 특별대우를 받으며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이곳에 잠시 정착했다가 39년 형님이 타슈켄트의 조선족 국영농장 중학교장으로
부임해 형님을 따라 타슈켄트로 이사를 했다.
평소 교사직에 흥미가 있었던 나는 타슈켄트에서 다시 1년 과정의 러시아어 교원 강습소에 입
학했다. 내가 러시아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강습소를 마친 뒤 나는 형님이 있던 중학교에 일자리를 얻었으나 1주일도 못돼 신 사부로부터
징집영장을 받았다. 나는 내 운명을 바꿔놓은 이 징집영장을 받고 내심으로 기뻐했다. 그 까닭
은 당시 소련이 조선인을 의심,군인으로 뽑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적 능력을 인정받은 듯한 소
박한 기쁨이 있었다.
징집에 응하면서 나는 독소전쟁이 벌어지던 서부전선에 배치될 것으로 당연히 생각했으나 이와
달리 모스크바 부근에 있던 소련 최고사령부 직속 정찰학교에 다른 조선청년 16명과 함께 입교
했다.
이 학교는 조선인 외에도 독일인촵중국인들에게 첩보원 교육을 시켜 해당지역에 침투시키기 위
한 것으로 교육생들이 서로를 알지 못할 만큼 비밀속에 운영됐다.
나는 41년 9월 이 학교에 입교,15개월 동안 독도법촵무전술촵사진촬영술촵조선경제지리 등 전
문적인 첩보요원 교육을 받았다.
42년 12월 교육을 마친 우리 조선인 16명은 소위계급을 부여 받은 뒤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에
있던 소련 극동군 정찰대에 배치돼 본격적인 첩보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시하의 첩보활동은 생명을 내건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실제로 동료 16명중 5명이 1차
로 만주지역에 침투했으나 모두 일본군에게 체포되거나 행방불명된 적도 있었다. 이 사건이 있
은 뒤 소련군은 우리에게 일본어와 일본풍습 교육을 추가로 시켰다.
43년 6월 드디어 나에게도 조선 원산에 침투,현지에서 생활하며 고정간첩으로 활동하라는 명령
이 떨어졌다. 나는 일본 군복을 입고 무전기와 일본돈을 활동장비로 받은 뒤 부대를 떠나 설레
는 마음으로 조선으로 향했다. 국경지대에는 경비가 심해 주로 밤에만 산악지대를 통해 이동했
다. 마침내 두만강을 무사히 건넌 나는 강부근에서 처음으로 조선인 2명을 만났다.
그러나 이들은 내 말투를 듣고 소련출신 한인임을 쉽게 알아차렸으며 주변에 일본 군대가 많아
활동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낙심끝에 본부로 무전연락을 해본 결과 만주에서 공작활
동을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이때부터 한달간 만주를 떠돌며 정보수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민가에는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산속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임무를 끝낼때 쯤에는 식량도 떨어져 나무껍질이
나 산딸기 등으로 허기를 채우는 일도 많았다.
천신만고 끝에 본대로 귀환했을 때 정찰대 책임자인 소련인 이브레프 대령은 화가 잔뜩난 채
나를 맞았다.
이브레프 대령은 이미 모스크바 총참모부 정찰본부에 내가 원산에 침투한 것으로 보고했었기
때문이다.
이브레프 대령은 내가 최초 임무에 실패했다며 정찰장교 직위를 박탈하고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위협했다.
다행히 재판은 받지 않았으나 장교에서 일반병으로 강등된 나는 두달동안 비밀 개인막사에서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느날 소련군 소령이 나를 찾아와 나의 신상문제를 물어 차라리 서부전선에 보내달라고 요구
했으나 그가 『그쪽에는 충분한 병력이 있으니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빨치산 부대로 가라』고
제안,수락했다.
이에 따라 43년 9월 나는 일반병사의 군복을 입고 하바로프스크로 출발했다.
나는 하바로프스크 극동군 사령부에 일단 도착했다가 다시 자동차를 타고 2시간을 달린 끝에
브야츠크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한 부대로 들어갔다.
이 부대가 바로 김일성이 있는 88 특별독립저격여단이었다.
울창한 수림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 이 부대는 1만평이 넘는 넓은 땅에 반토굴식 막사와 통나
무집 50여채가 산재해 있었다.
토굴식 막사는 일반병사 숙소이고 통나무집은 간부숙소와 사무실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여단 정치위원이었던 최용건 대위에게 신고를 한 뒤 1대대장인 김일성을 처음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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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1990-11-03 () 기획.연재 06면 3617자
6촵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3
◎김일성 휘하병사 많아 구심역할/동지의식 「빨치산」만 신임/소 출신은 후에 모두 숙청/최용
진 변절 아버지 총살집행 일화/북한 6촵25 역사기록서 내존재 없애
1대대장 김일성 대위. 43년 9월 내가 처음 만난 김일성이 하바로프스크 88특별독립저격여단(약
칭촵88여단)에서 점하고 있었던 위치는 이같은 직책과 계급,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당시 31세였던 김일성은 지휘관을 뜻하는 「영장」「사장」이나 혹은 「동지」라는 호칭으로
불렸고 장군이란 명칭이 사용되지 않았음도 물론이다.
88여단에 있던 60여명의 조선인중 계급상으로 가장 높았던 사람은 후에 북한 보건성 부상을 지
낸 이동화 여단군의소장(소좌)이었다. 제4대대장 강건(전북한 총참모장)촵여단정치 지도원 최용
건(전부주석)촵대대정치위원 김책(전전선사령관)촵안길(전총참모장)등은 김일성과 같이 대위였
다.
그러나 김일성은 휘하에 가장 많은 조선인 병사를 거느리고 있는 지휘관인 탓으로 조선인의 구
심적 역할을 했다.
특히 김일성은 만주 동북 항일연군 시절 생사를 같이하며 항일투쟁을 했던 25명의 빨치산 출신
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권위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이들 빨치산 출신들의 개인이력을 잠시 소개해야 겠다. 왜냐하면 이들은 나중에 북한으
로 돌아간 뒤 모든 경쟁세력을 물리치고 김일성 정권을 수립하는 친위부대가 되고 일부는 현재
도 권력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최용건은 중국 황포 군관학교 교관출신의 정통파 군인으로 중국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1920년대부터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는 투쟁경력면에서 김일성의 선배격이지만 88여단에서는 서로 격의 없이 친하게 지냈다.
김책 역시 만주에서 화려한 투쟁경력을 가졌던 인물로 군사전략보다는 정치조직 사업에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김책도 김일성과 절친한 사이였지만 6촵25개전 당시 전선사령관 재임중 51년 1월 의문의 죽음
을 당한다. 강건은 군사전술에 뛰어난 인물로 88여단에서 김일성보다 더 소련인의 신임을 받았
다.
그는 소련인의 명령에 절대복종했으며 일외는 한눈을 팔줄 모르는 전형적 군인이었다. 이 때문
에 그는 해방후 88여단이 해체된 뒤에도 동북만주에 남아 활동하다가 46년 뒤늦게 제2대 인민
군 총참모장으로 귀국,6촵25전쟁의 주역이 된다. 그는 강성산 전정무원총리의 아버지이다.
1대대 정치중대장 최현은 계급은 낮았지만 김일성과 반말을 주고 받는 사이였다. 그것은 최현
이 만주에서 오랫동안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했기 때문인데 그는 정규교육을 전혀 못받
았지만 상식이 풍부하고 중국어가 유창해 소련 공산당사를 부대원들에게 교육시키곤 했다.
안길은 목사 출신으로 공작원에게 포섭돼 만주에서 김일성의 빨치산에 합류한 이색적인 인물이
었다. 그는 목사답게 성격이 온순하고 친화력이 있었으며 궂은 일도 마다 않는 서민적 행동으
로 김일성도 그를 어렵게 대했다.
대대정치지도원 서철은 중국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학력이 변변치 못했던 빨치산 출신중에서는
가장 고학력자였다.
그는 초기에는 조선인중 지도자로 꼽혔으나 점차 김일성에게 그 지위를 뺏겨 김일성과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북한에 돌아가서는 김일성의 신임을 얻어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지냈고 정치국원으로 있다 은퇴했다.
현재 북한 부주석인 박성철에게는 88여단 시절은 수치스러운 과거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당시 소대장이었던 박은 어느날 소만국경의 일본군 배치현황을 정찰 보고하라는 임무를 받고
떠났다. 박은 1주일의 작전기한을 훨씬 넘기면서 매우 중요한 군사정보를 무전으로 보내왔다.
그러나 확인결과 이 정보는 허위로 밝혀졌고 박은 장교에서 사병으로 강등됐는데 수치심을 느
낀 박은 아편을 먹고 자살소동까지 벌였다고 한다.
1대대 1중대장이었던 최용진도 되새기기도 싫은 일화를 갖고 있었다. 성격이 과격했던 최는 역
시 빨치산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일경에 붙잡혀 변절했다는 이유로 빨치산 재판에서 총살선고를
받게 되자 자신이 직접 아버지를 사살했다고 한다. 그는 북한에서 군단장촵민족보위부상촵수산
상을 역임했는데 지금은 중풍을 앓고 있다고 한다.
김일성의 전기를 쓴 것으로 유명한 임춘추는 빨치산으로서는 무능한 편에 속했지만 한문과 중
국어가 뛰어났고 한의학에도 조예가 있었다. 그는 6촵25때 동해안 방어사령관이었다가 작전에
실패,처벌을 받았는데 김일성 전기를 쓰면서 복권됐고 나중에 국가부주석까지 올라갔다.
현재 북한의 인민무력부장인 오진우는 당시 1대대 1소대 부소대장으로 나와는 친교가 없었고
성격이 매우 깐깐한 편이었다.
이밖에 당시 김일성 휘하에 있던 빨치산 출신과 그들이 북한에서 맡은 직위를 소개해 보면 다
음과 같다.
▲한익수(전군총정치국장) ▲전문섭(현인민무력부 부부장) ▲김경석(전평양시 당위원장) ▲김익
현(현인민무력부 부부장) ▲이을설(현호위총국장) ▲이두익(현중앙군사위원) ▲조정철(현최고인
민회의 대의원) ▲김성국(〃) ▲김용연(〃) ▲이봉수(현출판지도국장) ▲황순희(현혁명박물관장)
▲태병렬(현조국해방박물관장)
만주 산악지대에서 무수히 많은 사선을 넘으면서 함께 싸웠던 이들 빨치산 출신들은 그들만의
끈끈한 정과 동지의식으로 뭉쳐있었다.
이들에 비해 나를 비롯한 12명의 소련 출신들은 덤덤한 감정으로 김일성을 대할 수 밖에 없었
다.
나는 경리중대에 배치된 뒤 김일성의 러시아어 통역으로 활동했지만 개인적으로 자주 김일성을
접하는 편은 아니었다.
88여단에는 중국인이 많고 만주에 침투,첩보활동을 했기 때문에 모든 교육과 훈련은 중국어로
실시됐고 조선인끼리도 중국어로 대화하는 일이 많았다.
중국어를 모르는 소련인이나 조선인들은 러시아어로 별도 교육을 받았고 빨치산 출신들과 소련
출신들은 할 수 없이 조선어로 말을 했다.
당시 김일성은 2년여동안 소련생활을 한 탓으로 간단한 러시아어를 구사할줄 알았으며 이 때문
에 통역은 크게 필요치 않았다.
나는 가끔 러시아 서적을 번역,김일성에게 주곤 했는데 지금도 「조선지리개관」이란 소책자를
정성스레 번역하던 일이 생각난다.
내가 그렇듯이 우리 소련출신들은 해방후 김일성과 함께 북한으로 돌아가 북한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지만 빨치산 출신들과는 달리 모두 도중에 숙청을 당하거나 소련으로 쫓겨났다.
그만큼 김일성은 빨치산 출신들만을 절대적으로 신임했고 다른 사람들은 좀처럼 신뢰하지 않았
다.
소련출신 12명중 유일하게 지금도 북한에 남아있는 인물은 인민무력부 부부장을 지낸 김봉률이
다.
그는 소련에서 한 국영농장 책임자로 있다가 실적이 나빠 쫓겨난 뒤 88여단으로 배치됐다. 그
는 88여단에서 일반병사로 근무했는데 인정이 많고 부대규율에도 잘 따르는 편이었다.
그는 해방직후 빨치산 출신인 김일이 신의주 당위원장을 할 때 그 밑에서 선전부장을 했는데
이때 김일에게 잘보인 탓으로 계속 김일성체제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88여단에서 통신대 소대장으로 나와 가까웠던 문일은 해방직후부터 오랫동안 김일성과의 부관
을 지낸 측근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버림을 받아 소련으로 쫓겨갔다.
나 역시 인민군 창설을 주도하고 인민군 작전국장으로 6촵25전쟁을 직접 치렀지만 59년 숙청때
계급과 당적을 박탈당하고 타슈켄트로 돌아가야 했다.
지난 5월 30년만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 나는 6촵25 당시 작전국장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기록돼 있는 것을 보았다.
김일성은 내가 젊은 시절 모든 정열을 바쳐 이룩한 과거 직위를 빼앗는 것도 모자라 나의 존재
자체를 북한역사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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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1990-11-04 () 기획.연재 06면 3778자
6촵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4
◎김일성 「보천보 전투활약」은 사실/북한 지나치게 과장촵선전/다툰사람엔 반드시 보복/김정
숙과 부대서 생활… 음식솜씨 좋아/당시 김정일 돌지나… “백두산출생” 왜곡
서울에 들어온지 3일만인 지난달 18일 나는 TV에서 강영훈총리와 회담하는 김일성의 모습을
볼 기회가 있었다. 31년만에 다시본 김일성은 세월의 흐름을 실감케할 만큼 달라져 있었다.
그는 비만하다고 느낄 만큼 풍채가 좋아져 있었다. 나보다 5살이나 많았지만 비교적 건강해 보
였고 목소리도 옛날보다 굵어진 것 같았다.
그의 건장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소련에 돌아온 직후 3차례나 풍을 맞아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내 모습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첫회에도 말했듯이 하바로프스크 88여단 시절 김일성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마르고 허약해 있었다.
그것은 아마 김일성이 만주를 떠돌며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할 때 극도로 열악한 환경속에서 생
활한 탓으로 몸이 많이 상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외모로만 본다면 최용건이나 최현이 더 빨
치산 용장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부대를 이끌고 직접 정찰활동을 나가는 일이 딱 한번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 언젠가 한 겨울에 스키를 타고 야외훈련을 했을 때는 김일성이 계속 대열에서 뒤처지자
1중대장 최용진의 몸에 끈을 묶어 이동한 적도 있었다.
이런 점들로 인해 나는 김일성에 대해 특별히 강한 인상을 받을 수 없었다.
또 88여단에서는 일본군과 실전을 벌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지휘관으로서 김일성의 자질을 체
험할 기회도 없었다.
군사 전술면에서는 김일성 보다 4대대장 강건이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한가지 김일성의 자질을 엿볼 수 있었던 일은 빨치산 출신들에게 들은 보천보전투에 있어서 김
일성의 활약상이다.
김일성은 항일빨치산을 하던 37년 6월4일 최현을 비롯한 2백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국경마을 보천보를 습격,일경 수명을 살해하고 지주들에게 식량과 자금을 거둔 뒤 퇴각했다.
이 단발적 전투는 현재 북한에서 수십 수백배 과장돼 김일성의 가장 화려한 항일투쟁경력으로
선전되고 있다고 한다.
이때 퇴각하던 김일성은 산으로 달아나지 않고 일본 군복차림으로 일본군가를 부르면서 당당히
대로로 행진토록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북한 역사서적은 당시 김일성이 주민들을 모아 놓고 애국적 연설을 했다고 자랑하는데 6촵25전
쟁중 우연히 나와 만나 보천보 얘기를 했던 최현은 『야,도망가기도 바빴는데 무슨 대중연설을
해』라고 내뱉었다.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와 역사왜곡은 내가 북한에 있을때 이미 시작됐지만 지금처럼 그렇게 노
골적이지는 않았다.
5년전 나는 타슈켄트에서 「력사」라는 북한서적을 보고 조선역사에 관한 것으로 알고 2루블을
주고 사서 보았다.
그러나 이 책은 김일성의 항일운동만을 다룬 책으로 나는 앞부분을 보다가 책을 덮어버렸다.
너무나도 왜곡과 과장이 심해 역겨워서 더이상 볼 수 없었다.
나는 이 책을 폐품으로 반납하고 소련 소설책 한권과 바꿔 버렸다.
이 책은 김일성을 독립투쟁의 가장 위대한 영웅이며 한없이 인자한 지도자로 묘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88여단에서 김일성의 인자로운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 그는 여단장 주보중이나
소련인 장교들에게는 순종적이고 다정다감했었지만 부하들에게는 엄격하고 차가웠다.
특히 김일성은 자신과 좋지않은 일이 있었던 사람은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 뒤에 반드시 보복
을 하는 옹졸한 면이 있었다. 후에 북한에서 김일성에게 숙청당한 사람들중 상당수는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먼 옛날에 있었던 김일성과의 불화 때문에 화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경우도 그러한 예중 하나다. 88여단 시절 어느날 나는 부대 규정에 따라 점심식사를 마친
뒤 나른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이때 김일성 대대장의 연락군관이 나를 깨워 급식부로 가서
김일성이 먹을 연어를 타오라고 했다. 우리 부대는 규율은 엄격했지만 병사들의 인격을 존중촵
장교라도 개인적인 심부름을 부하에게 시키지는 않았다. 때문에 나는 이 심부름을 거부했다.
또 한번은 여단본부에서 당직을 서고 있을 때 중대장 최용진이 『유가이(소련출신들은 성밑에
가를 뜻하는 북한말인 가이를 붙여 불렀다. 유명한 허가이도 허씨라는 뜻이다) 김일성 대위에게
내일 아침 회의장소가 변경됐다고 연락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회의장소가 어디로 변경됐느
냐』고 되물었으나 최는 『그런 것은 알 필요 없다』고 짜증을 냈다.
할 수 없이 김일성에게 가 회의장소 변경사실을 보고하자 김일성은 변경된 장소를 물었다. 나
는 전후사정을 설명했으나 김일성은 『무슨 심부름을 그따위로 하느냐』며 화를 냈다.
나 역시 기분이 나빠 『중대장이 안가르쳐 주는 것을 어떻게 하겠소. 내가 뭘 잘못했소』라고
반박하며 밖으로 나와 버렸다.
나는 이 하찮은 두 사건을 금세 잊어버렸지만 김일성은 이 일을 두고두고 되새기고 있었음을
후에 알게됐다.
김일성의 부관을 지내다 버림을 받고 소련으로 쫓겨났다고 앞서 설명했던 문일은 귀국직전에
나를 만나 김일성이 당시 일 때문에 나에 대해 나쁜감정을 갖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문일은 또 88연단 통신대 소대장이었던 박길남(6촵25 당시 공병국장)도 그의 부인이 김일성의
군복을 줄여달라는 부탁을 거절,김일성의 미움을 사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일러 주었다.
문일의 경고는 그뒤 우리 두사람도 숙청을 당함으로써 사실로 입증됐다.
나는 이같은 사례를 얼마든지 더 들 수 있다.
내가 88여단에 도착했을 때 김일성은 소련으로 건너와 결혼한 김정숙과 부대안의 장교관사에서
살고 있었다.
김일성과 같은 빨치산 출신인 김정숙은 88여단에서는 김일성의 뒷바라지만 했는데 음식솜씨가
좋았고 인심도 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때 두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정일(소련명촵유라)은 한돌 반으로 한창 걸음마를 배우고
있었고 44년 차남 평일(소련명촵슈라)이 또 태어났다.
그런데 지난 5월 북한을 방문해보니 백두산에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초가집이 세워져 있고 정일
봉이란 바위도 있어 실소를 금치 못했다.
내 소련 친구중 해방후 북한에서 소련 통역으로 일했던 김창국이란 사람이 있다. 이 친구는 올
해초 사망했는데 그의 부인은 김일성의 5촌 조카의 고모로 나보다 잠시 앞서 북한을 방문한 일
이 있었다. 그녀는 5촌 조카를 만나 『내가 김정일이 브야츠크에서 태어나 자란 것을 아는데
무슨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하느냐』고 질책을 하자 조카는 낮은 목소리로 『고모,우리
도 알아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도대체 김정일의 탄생지를 백두산으로 왜곡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지 지금도 이
해할 수 없다.
88여단에서 김일성에 대한 나의 추억은 별로 유쾌한 것이 못되지만 그 시기는 내가 조국의 해
방을 위해 뜻깊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차 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우리 조선인들은 자
신의 출신 배경에 관계없이 이같은 민족의식을 공유하면서 우정을 나누었다.
우리는 새벽 6시에 기상,밤 10시에 취침할 때까지 꽉 짜여진 훈련일정에 따라 바쁜 생활을 했
다. 훈련중에는 5분씩 밖에 휴식시간이 없을 만큼 훈련은 고된 편이었다.
훈련내용은 사격촵행군촵체육촵제식촵소부대교육 등이 주종이었고 낙하산 강하훈련까지 받기도
했다.
훈련은 대체로 소부대 단위로 진행됐고 여단 합동훈련 때에는 소련 극동군 사령부에서 지휘관
이 나와 직접 감독을 했다.
여단장 주보중 대좌는 오랜 항일 빨치산 경력으로 군사전술면에서 매우 뛰어났고 성격도 인자
해 부대원들의 존경을 받았다. 주여단장은 장교들을 모아놓고 적과의 가상대치 상황을 설명한
뒤 각 장교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작전을 말해보라고 하며 그 작전을 일일이 평가해 주곤 했
다.
고된 훈련 속에서도 여름에는 부대 인근의 아무르강으로 나가 연어를 잡으며 어린이처럼 즐거
워하던 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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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1990-11-06 () 기획.연재 10면 3679자
6촵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5
◎김일성과 함께 해방한달후 원산에/목단강 동포들 환영성대/압록철교폭파… 귀로바꿔/추석전
날 도착… 김일성 “내 신상 함구”에/최용진 “헛소리 하고 있구만” 혼자말 불평
나와 김일성의 하바로프스크 88여단 생활은 45년 8월 일제가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끝나게 된
다. 우리는 일본군과 본격적인 전투 한번 해보지 못한채 소련에 의지하여 조국해방을 맞게된
것이다.
45년 5월 대독일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그 힘을 극동으로 돌려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
에 만주촵조선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소련 극동군은 이미 전투의지를 상실한 일본군을 파죽지세로 밀어붙이고 8월초 청진촵원산 등
에 상륙했으며 마침내 일본이 항복하자 북한 전역을 장악했다.
우리는 88여단에서 조국해방 전투소식을 들으며 우리도 하루빨리 전투에 투입되기를 갈망했으
나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채 해방을 맞고 말았다.
일본이 항복한 직후 우리부대에는 해체명령이 내려왔고 우리는 무장을 해제,모든 무기를 상급
기관에 반납했다.
나의 88여단 생활은 정확히 3년만에 이렇게 끝났으며 김일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국지도자 생각못해
그런데 북한 역사는 41년부터 시작된 김일성의 88여단 행적을 가능하면 은폐하려하고 있다. 위
대한 주체사상의 창시자가 소련군의 일개 간부로 타지에서 무기력하게 해방을 맞았다고는 설명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 역사는 김일성의 소련생활을 대체로 얼버무리고 지나간뒤 해방당시에는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지휘,소련군과 합동작전을 펼치면서 북한에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김일성은 일본이 항복하고도 한달이 지난 9월중순 소련군의 명령에 따라 나와
함께 북한에 들어 갔다.
88여단이 해체된뒤 중국인은 주보중 여단장의 인솔로 중국으로 귀환하고 조선인 60여명은 북한
으로 돌아온 것이다.
조선인 인솔책임자는 소련 극동군 정찰본부 소속 사이체트 소좌였으나 실제로는 김일성이 처음
부터 인솔을 지휘했다.
당시 소련군이 우리를 북한에서 어떤식으로 이용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계획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까지만도 우리들중 김일성이 북한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것이라
고 생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하바로프스크를 떠날때 장교들에게는 북한에서 맡을 임시직책이 부여됐는데 김일성의
직책은 평양 경무장(헌병대장)이었다. 이 직책부여는 장교들에게 월급을 지급하기 위한 의미가
강했고 때문에 그대로 시행되지도 않았지만 소련군의 당시 의도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벅찬 감격과 설렘을 안고 해방된 조국을 향해 출발했다.
처음 우리의 이동코스는 목단강촵만주를 거쳐 압록강을 넘은뒤 신의주로 진입하도록 계획돼 있
었다.
○김 초라한 귀국 감추려
목단강에 이르자 부근마을에 사는 조선인들이 소련군복을 입은 우리들을 보고 뜨겁게 맞아 주
던 일이 기억난다. 이들은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소를 잡는등 3일간 우리들을 성대하게 대
접해 주었다.
3일간의 환대를 받은뒤 우리일행은 압록강으로 떠날 준비를 했으나 소식을 들어보니 압록강 철
교가 폭파된 상태여서 하는 수 없이 육로입국을 포기하고 선박을 이용하기 위해 우스리코스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또다시 이동했다.
몇걸음밖에 남지않은 조국땅을 두고도 다시 만주로 발걸음을 돌리던 이때 우리들의 심정은 마
치 조국해방이 좌절된 것 같은 안타까움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우리일행은 소련군함 부가초프호편으로 9월19일 상오 그리던 조국땅
원산항에 첫발을 들여 놓았다.
이날짜를 지금도 내가 생생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 다음날이 음력으로 추석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당시 압록강을 건너 빨치산 활동을 펼치며 귀국한 것으로 왜곡선
전되고 있었다.
우리는 원산항 부근에 있는 국수집2층을 숙소로 정하고 조국에서 첫식사로 국수를 맛있게 먹었
다.
식사를 마친뒤 소련대위계급장을 달고 있던 김일성은 우리들에게 세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 첫째는 내일이 추석이니 밖에 나가더라도 술을 많이 마시지 말고 조용히 지낼 것,둘째는 누
가 묻더라도 우리는 선발대이며 김일성은 나중에 올 예정이라고 대답할 것,셋째 김일성의 나이
촵출신지촵경력 등 신상에 관해서는 일체 모른다고 할 것 등이다.
나는 지금도 당시 김일성이 왜 이같은 지시를 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본래 야심이 많았던 김일성은 이때 벌써 자신이 지도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개인 우상화를
준비했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추측으로는 그 당시 북한주민들사이에서 김일성의 만주 항일투쟁
에 관해 많은 소문이 퍼져 있었고 김일성은 이를 의식,자신의 초라한 귀국을 감추려했던 것 같
다.
○기차충돌… 죽을 뻔
나는 최근 소련에서 생활할때 남한에서 김일성이 가짜라든지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한 독립투
사가 여러명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며 이번 남한 방문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같은 학술적 논쟁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점은 현재 북한주석 김일성이 30년대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의 중간지휘관으로 빨치산 활동을 했고 하바로프스크에서 나와 같이 88여단에 있
었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뒤에 다시한번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해방당시 북한주민들은 김일성의 귀국소문을 전해
듣는 과정에서 사실이상으로 그를 영웅시 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특히 중요한 사실은 이로인해
그가 상당히 나이를 먹은 노장군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이같은 여론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자신에 대해 일체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것 같다.
김일성이 이 명령을 내리자 성격이 괄괄했던 최용진은 밖으로 나오면서 혼자 중국말로 『헛소
리 하고 있구만』이라고 중얼대며 불만을 나타냈다.
아무튼 추석 다음날까지 3일간 우리는 원산에서 머물렀다. 추석날에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씨름
도 구경하고 한가위 음식도 사먹으면서 모처럼 한가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에 소련은 북한 전지역을 완전히 장악,군정을 펴고 있었고 군정사령관은 소련극동군 제
25군사령관인 치스차코프대장이었다.
독소전쟁에 참가,명성을 떨쳤던 치스차코프대장은 김일성을 마중하기 위해 평양에서 기차편으
로 원산에 올 예정이었다. 소련군이 김일성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입증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약속날짜인 9월21일이 되어도 치스차코프대장이 오지않아 우리는 기차편을 마련해 이날
하오 1시께 평양으로 출발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일행과 치스차코프대장은 아슬아슬하게 생명의 고비를 넘긴 숨은 일화가 있
다.
우리가 탄 기차가 원산역을 빠져나와 한 산모퉁이를 도는 순간 같은 선로 반대편에서 마주오던
열차와 정면충돌한 것이다. 이 열차는 다름아닌 치스차코프대장이 탄 열차였다.
하지만 산모퉁이여서 열차가 속력을 줄이던 상태였고 두열차 기관사가 신속히 급브레이크를 밟
았던 탓으로 인명피해는 없었다.
○새임무 받고 헤어져
화가 난 치스차코프의 부관은 사고책임을 물어 우리 열차의 기관사를 그 자리에서 총살시켰다.
나는 지금도 자신은 아무죄도 없으니 살려달라고 무릎꿇고 애원하던 기관사의 모습이 선하다.
김일성은 기관사 처형을 막지 않았다.
남한에서도 그렇겠지만 이 시기에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말과 행동이 곧 법이었다. 소련군정 초
기에는 소련병사의 행패가 잦아 문제가 되곤 했다.
열차사고로 인해 우리일행은 다음날인 9월22일에야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서 우리는 소련군이 관장하는 평안남도 경비사령부에 거처를 정했다. 며칠전까지만도 악
명 높은 일본헌병대사령부였던 곳이다.
며칠뒤 우리들은 각자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고 뿔뿔이 흩어지게 됐으며 이때부터 우리의 운명
도 전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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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1990-11-07 () 기획.연재 10면 3935자
6촵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6
◎“소 고당 포섭자리에 나도 동석”/김,88여단 동료 통역촵치안 배치/소군 눈촵귀 장악 박헌
영도 제쳐/평양 기생 구해 소 장군에 향응공세/“고당 따님과 결혼” 비서가 내게 권유
북한에 귀환한 김일성은 소련 군정하에서 북한의 새 지도자로 선택될 수 밖에 없는 여러가지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김일성 자신도 그 조건들을 십분활용하여 치밀하게 권력장악을
준비했다.
해방후 북한은 소련 극동군 점령하에 있었으며 제25군이 군정업무를 실무 관장했다.
이때 소련 극동군의 수뇌부는 사령관 마실리예프 원수,정치위원 슈티코프 중장이었으며 25군은
사령관 치스차코프대장,참모장 샤닌 중장,정치위원 레베데프소장,군정장관 로마넨코 소장 등으로
짜여져 있었다.
25군은 실무행정을 대령급 장교들이 맡도록 했는데 가장 중요한 민간행정 담당자는 이그나체프
대령이었다. 평양과 각 도 단위 지역에는 소련 주둔군 경비사령부가 설치됐고 역시 대령급이
사령관을 맡았다.
이들 소수 소련군 장교들이 오늘의 김일성 정권을 탄생시킨 장본인들이었다.
특히 치스차코프 25군사령관,레베데프 정치위원,로마넨코 군정장관,이그나체프 대령 등 4명의 역
할은 실로 막중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평양 도착후 별다른 직책이 없이 소련군 장성들과의 교제에 주력하면서도 군정업무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나를 비롯한 나머지 88여단 일행들에게는 새로운 직책이 부여됐는데 이때 우리들에게 배분된
직책을 주의깊게 음미해 볼만하다.
○일부는 김일성 호위병
우선 소련 출신인 나는 평안남도 경비사령관 무르진 대령의 통역으로 임명됐으며 문일은 김일
성의 러시아어 통역,박길남은 레베데프 소장 통역으로 각각 선발됐다. 빨치산 출신들은 오진우
가 평양시 보안서장,최용건은 임시인민위 보안국장 등 주로 치안책임자로 임명되고 일부는 김
일성의 호위병으로 남았다.
이런 식으로 김일성은 심복들을 소련인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통역으로 박아놓고 한편으로 치
안조직을 장악함으로써 권력도전에서 쉽게 경쟁자들을 제칠 수 있었다. 그는 중요한 책임자 자
리에 심복을 배치하지 못할 때에는 부책임자로라도 심어 놓았다.
나는 통역일을 하면서 소련군의 비밀전문촵중요문서 등을 접할 기회가 많았으며 이를 통해 북
한 지도급 인사들에 대한 소련군의 평가를 알 수 있었다.
잘 알려진대로 소련군은 처음엔 북한지도자로 민족주의자인 고당 조만식선생을 내세우려고 했
었다.
나는 평안남도 경비사령부 정치담당 부사령관이었던 브고르카 중령의 통역으로도 잠시 일하면
서 브고르카 중령이 조만식선생을 만나는 자리에 3번이나 동행했었다.
그러나 조만식선생은 소련이 생각하는 사회주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소련군정에 협조하기
를 거부했다. 그뒤에도 소련군은 여러 사람을 통해 조만식선생을 포섭하려 했으나 결국 성공하
지 못했고 이에 따라 그는 일찌감치 소련의 관심권에서 제외됐다.
다음으로 남로당 지도자인 박헌영이 물망에 올랐다. 지식인 출신이면서도 화려한 투쟁경력을
지니고 있는 박헌영은 서울 주재 소련공사를 지낸 샤브닌에 의해 모스크바로 천거됐으며 남북
한에 탄탄한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다.
○변절소문에 관심 줄어
하나 소련 군정 당국은 그가 서울에 공산당 본부를 둘 것을 주장했고 또 일제하에서 지하활동
을 할 때 일시 변절했다는 소문도 있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만주에서 활동했던 김두봉 무정등의 이른바 연정파들도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았지만 중국의 영
향력을 우려한 소련군정의 견제로 권력에서 소외됐다.
연안파가 45년 10월 무장병력을 이끌고 귀국할 때 소련이 이들을 무장해제 시킨뒤 입국케한 일
이 그 대표적 사례였다.
또 하나의 세력은 해방 이후 소련 군정 업무를 돕기위해 소련에서 입국한 허가이 등 소련파이
다.
그러나 이들은 통역촵행정요원으로 개별적으로 입국,종적촵횡적 연대가 없었기 때문에 대권에
도전할 처지가 못됐다.
자연히 소련의 최종선택은 그들이 잘알고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김일성 집단으로 기울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직접 만나본 조만식촵김두봉촵무정촵허가이촵박헌영 등은 경력이나 능력면에서 아무래도
김일성 보다는 나아 보였다.
특히 조만식선생은 인품이 너그러우면서도 자기주관이 분명해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인품 좋고 주관 뚜렷해
내가 조만식선생을 만나러 다닐 때 그의 비서는 나를 좋게봤는지 『총각이면 고당선생 따님과
결혼하라』고 권유한 일도 있었다.
허가이는 타슈켄트에서 지역당 비서를 지낸 거물로 나의 형 유성훈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허가
이는 술을 좋아해 역시 술을 즐기는 김일성과 밤새껏 대작하는 일이 많았는데 나중에 꼭 술주
정을 하는 나쁜습관이 있었다. 박헌영은 쾌활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대인관계가 좋고 언변도 뛰
어났다.
무정은 전형적인 무인스타일로 성격이 호방했으나 고압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김일성은 이 결정적 시기에 소련 장성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기억된
다.
김일성은 치스차코프 사령관,슈티코프 중장,레베데프 소장들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자주 주연을
베풀었다.
이같은 향응공세와 함께 가담한 사람이 88여단에서 의무소장을 지냈고 해방후에는 북조선 노동
당 조직부장이었던 이동화였다.
88여단 당시 계급인 소좌를 따서 「마이요르촵리」라고 불렀던 그는 가끔 나에게도 술자리 이
야기를 전해주었다.
당시 평양의 대동강변에는 비밀리에 기생집이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동화는 이 평양기생이나
해방후 잔류한 일본 여성들을 구해 김일성과 소련 장성들간의 술자리에 시중을 들게했다.
이러한 다각적인 노력에 힘입어 김일성은 북한지도자로 낙점을 받게됐으며 이같은 사실을 공식
화한 계기가 45년 10월14일 지금의 모란봉경기장인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개선 환영대회」였다.
○열광적 인기에 놀라
하오 1시 양복차림에 가슴에는 소련군 훈장을 단 김일성이 연단에 나타나자 군중들은 운동장이
떠나갈듯이 「김일성 장군만세」를 외치며 열광했다.
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10분간 대중연설을 했는데 사실 그 연설문은 25군 정치부에서 작성하고
시인 전동혁(소련파로 군정사령부의 조선어신문 발행에 관계)이 번역한 것이었다. 이날 집회에
참석했던 나는 김일성의 인기를 보고 내심 크게 놀랐으며 그를 다시한번 쳐다보게 됐다.
그러나 김일성의 연설이 계속되면서 군중들 사이에 「가짜 김일성」이란 쑤군거림이 들렸고 심
지어 「로스께 앞잡이」라고 욕설을 하며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군중들의 동요는 내가 지난회에서도 언급했듯이 연단의 김일성이 자신들이 생각해 왔던 김일성
장군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워낙 오래전부터 「김일성 장군」의 전설
적 투쟁을 들어왔기 때문에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 정도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김일성은 몸도 지금처럼 건장하지 않았고 짧은머리 탓인지 33세의 실제나이보다도
더욱 어려보이는 새파란 청년모습이었다. 나는 내옆에 있던 한 여인이 『저거 아이아냐. 무슨
김일성 장군이 저래』라고 말하는 것도 직접 들었다.
○“저거 아이아냐” 실망
김일성에 이어 조만식선생이 머리에 흰수건을 동여매고 흰두루마기 한복차림으로 등단,40여분
간에 걸쳐 연설을 했다. 김일성에 실망한 탓인지 이 연설에 대한 반응도 냉랭했다.
소련군 25군사령부는 대회를 마친 뒤 자체적으로 여론을 수집해본 결과 가짜 김일성이라는 부
정적 반응이 많자 적잖이 당황했다.
이에 따라 그뒤 소련군은 무엇보다 김일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선전활동에 치중했으며 나는 이
것이 김일성 우상화의 뿌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한번은 소련군이 김일성의 고향이라는 만경대에 북한지도급 인사들을 초청,연회를 베풀고 김일
성이 진짜임을 역설한 적도 있었으나 참석자들은 선뜻 수긍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런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김일성은 소련군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
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북한의 실권자가 된다.
그러나 김일성이 완전한 지도자의 지위를 굳힌 것은 민족적 비극인 6촵25를 도발하고 수많은
그의 동지들을 무참히 숙청한 뒤이다.□공동집필 최평길 교수(연세대)
「유성칠 나의증언」은 이번 6회부터 유성칠씨와 최평길 교수(연세대촵북한군사 관계 전공)가
공동집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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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1990-11-08 () 기획.연재 10면 3794자
6촵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7
◎48년 인민군 작전국장으로 전보/「보안대대 본부」가 인민군 모체/김일성 처 김성애는 타자
수 출신/민족보위성 안전부 근무중 김눈에 들어/첫부인은 한성희… “여성편력” 잘 알려져
김일성이 권력을 향해 줄담음치고 있던 45년말과 46년초 나는 소련 군정에서 일하게돼 자연히
김일성과 대면할 기회도 적어졌다.
46년 여름 어느날 나는 모처럼 김일성의 호출을 받았다. 이때 김일성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정권수립에 막바지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비서였던 나의 친구 문일은 내가 있던 평남 경비사령부로 전화를 걸어 『김일성과 같
이 갈 곳이 있으니 대기하고 있으라』고 전했다.
얼마후 문일을 대동하고 사복차림으로 나를 찾아온 김일성은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 뒤 그
가 타고온 소련제 승용차에 오르도록 했다.
우리를 태운 승용차가 평양을 빠져나가 1시간여를 달린 끝에 도착한 곳은 평양과 남포의 중간
지점인 대안리에 있는 인민군 보안간부학교였다. 이 학교는 인민군 창설을 위해 군관들을 양성
하는 곳으로 내가 갔을때 막 개교를 서두르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교장 박효삼 대좌(대령
및 준장급) 부교장 박성철 중좌(중령)가 마중을 나왔다. 박효삼은 연안파로 38년 중국 화북지방
에서 조직돼 항일투쟁을 벌였던 「조선의용군」 지대장과 참모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부교장 박성철은 지금의 북한 부주석이며,나와 함께 88여단에 있었던 박길남도 중좌로 사격학
주임을 맡고 있었다.
김일성은 1시간 정도 담소를 나눈뒤 『유가이(나를 지칭)를 부탁한다』고 박효삼에게 당부하고
돌아갔다.
나는 전술학 주임으로 임명됐으며 처음으로 중좌계급을 부여받았다.
보안 간부학교는 전술촵사격촵통신 등 3개 학부로 나눠졌는데 전술촵사격학부에 각 1백20명,통
신학부에 60명 등 3백여명의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교육기간은 1년으로 교육을 마친 학생들은
인민군 소대장으로 임명됐으며 가장 성적이 뛰어난 학생은 중대장으로 특채됐다.
당시 우리는 독자적 교재가 없었기 때문에 소련군 학습교재를 번역해 사용했다. 해방직후 북한
에 군대가 필요하게 되자 김일성은 소련의 양해를 얻어 46년초 88여단 출신들을 중심으로 북한
인민군의 모체인 「보안대대본부」를 창설했다. 이때 남한에서도 국방경비대가 조직되고 있었
다. 보안대대 본부는 최용건이 책임자로 산하에 훈련촵항공촵문화촵포병부가 있었다. 정치사업
을 담당하는 문화부장은 동북항일연군과 88여단에서 김일성의 직계 부하였던 김일이었고 포병
부장은 중국 팔로군 포병사령관을 지낸 무정이 맡았다.
이 보안대대본부는 48년 2월8일 조선인민군으로 정식 출범했으며 역시 최용건이 국방장관 격인
초대 민족보위상에 취임,김일성 정권의 방패역할을 했다.
여기서 북한의 역사왜곡에 대해 또 한마디 해야겠다.
북한은 2월8일을 인민군 창건기념일로 축하해왔으나 70년대말부터는 갑자기 인민군이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을 하던 32년 4월25일 남만주에서 이미 창건됐다고 주장하면서 기념식 날짜를 4월
25일로 바꿔버렸다고 한다.
나는 88여단이나 북한에서 생활할 때 김일성이 만주에서 인민군을 조직했다는 말을 결코 들어
본 적이 없다.
다시 이야기를 뒤로 돌려 나는 보안간부학교에서 48년 9월 인민군 작전국장으로 임명될때까지
2년여 동안을 근무했다. 그 사이에 나는 2번 보직이 변경됐으나 그때마다 보안간부학교에 파견
된 소련군 고문관들이 반대해 다시 학교로 돌아오곤 했다.
한번은 민족보위성 정찰국장으로 전보됐다가 3일만에 돌아왔고 그뒤 역시 민족보위성 안전부장
으로 하루 근무하다 또 학교로 불려왔다.
이는 순전히 소련군 고문이 내가 학교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항의했기 때문인데 나는 이때
소련군이 내게 보인 호의적인 자세가 김일성의 심기를 자극,그뒤 내가 숙청 당하는 발단이 되
지 않았나 생각한다.
근런데 나는 민족보위성 안전부장으로 하루동안 근무할 때 김일성의 현재 부인인 김성애를 처
음 보게 됐다.
당시 김성애는 안전부 부부장 김성국의 타자수로 일했고 이름은 김성팔(나는 그녀가 언제,왜 이
름을 바꿨는지는 알지 못한다)이었다. 그녀는 빼어난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귀엽고 특히
애교가 많았다.
내가 부장으로 부임하던날 그녀가 잘익은 군고구마를 가져와 권하던 일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
녀의 상관인 김성국 역시 만주에서부터 김일성과 행동을 함께해온 심복중 한명이다.
어느날 김일성이 김성국의 사무실을 불시 방문,이야기를 나누던중 옆에서 타자를 치던 김성애
를 발견하고 한동안 시선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김일성이 돌아간 다음날 그의 부관이 김성국
에게 전화를 걸어 『수상 동지가 타자수를 구하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눈치가 빠른 김성국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고 곧 김성애를 김일성의 비서로 올려보냈다. 이것이 김성애
가 김일성의 세번째 부인이 된 숨은 비화이다.
말이 나온김에 내가 알거나 혹은 전해들은 김일성의 여자관계 이야기를 잠깐 해보겠다.
김일성이 김성애를 만날 당시 그의 부인은 김정숙이었다. 이미 말했듯이 김정숙은 88여단에서
김일성과 결혼,정일(소련명 유라)촵평일(소련명 슈라) 등 두아들을 낳았고 북한에 돌아온 직후
딸 경희(소련명 애라)를 출산했다. 둘째아들 평일은 4살때인 48년 김일성 관사에 있는 연못에서
놀다가 빠져 죽었다.
그뒤 김일성과 김성애 사이에 난 4명의 아들중 장남 이름도 평일(현 불가리아대사)인데 죽은
슈라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생각된다.
김일성의 여성편력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만주와 소련을 떠돌며 엄격한 규율 속에서
생활하다 북한에 돌아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된 김일성은 그동안 억제해온 욕구를 분출하듯
여자관계가 문란했다.
김일성은 김성애 외에도 한 인민군 고급군관의 부인을 농락하고 그 군관을 소련으로 유학보낸
일도 있으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할때는 위원회에서 일하던 오찬복이란 타자수에게 키스를 하
려다 빰을 맞은 적도 있었다.
김일성은 그의 엽색행각이 부하들 사이에서도 불만을 사게되자 1호촵2호 등 일련 번호가 붙은
비밀저택을 곳곳에 마련하고 아리따운 처녀들을 불러들여 은밀히 즐기기도 했다. 이 저택의 관
리도 지난회에 이야기한 이동화가 맡았다. 즉 이동화는 김일성의 채홍사였던 것이다.
이렇게 김일성의 여자관계가 문란해지자 부인 김정숙과의 관계도 좋을리가 없었다. 김정숙은
49년 네번째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만주에서 김일성의 동지로,88여단에서는
그의 부인으로 고난을 함께 해왔지만 영화는 누려보지도 못하고 불행한 죽음을 당했다.
내가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김일성의 첫번째 부인은 한성희란 여인으로 30년대 만주 항일동북
연군에서 부녀청년부장으로 활약하다 김일성과 진중 결혼을 했다.
그러나 한성희는 39년 일본 토벌대에 체포돼 그뒤 소식이 끊어졌다.
김일성은 북한에 돌아온 뒤 곧 한성희의 행방부터 수소문했고 그녀 고향인 강원도에 빨치산 출
신 부하를 보내 찾아보도록 했다.
마침내 47년 김일성은 한영숙이란 새이름으로 강원도 여성동맹 부위원장을 맡고있던 한성희를
찾아냈다.
한성희는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국내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풀려났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
해 더이상 항일투쟁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일본 경찰의 강권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향
에서 개가를 했기 때문에 김일성의 귀국을 알고도 찾지않았던 모양이다.
7년여만에 감격적으로 재회한 두사람은 그후 한동안 계속 만났으나 김일성이 김성애와 가까워
지면서 다시 관계가 끊어졌다고 한다.
내가 알기로는 김일성과 김성애는 공식적인 결혼식은 하지않은 것으로 기억된다.
이야기가 빗나갔지만 어쨌든 나는 보안간부학교에서 전술주임을 거쳐 48년 군사담당 부교장으
로 승진하면서 계급도 대좌로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인민군 작전국장으로 전보됐으며
이 인사로 나는 우리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인이 되고 만다.<공동집필 최평길교수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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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의 농담사례(1920~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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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 1991-10-05
“북한,김정일 출생지 조작”/유모 이재덕씨,“백두산 태생은 거짓”
◎42년 소 하바로프스크부대서 출생
북한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는 북한의 주장과 달리 42년 2월16일 소련 하바로프스
크 인근 88독립여단 브야츠크 야영에서 태어난 사실이 확인됐다.
중앙일보는 이같은 사실은 당시 김일성의 첫부인 김정숙의 동료전사이자 김정일의 유모였던 이
재덕씨(74·북경 거주)의 증언을 통해 확인됐다고 4일 보도했다.
북한은 김정일 후계체제를 굳히기 시작한 80년대부터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의 귀틀집에서 태어
났다고 주장,김정일의 정통성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그 일대를 성역화하고 있다.
이씨는 『41년 만주 항일빨치산에 대한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항일연군 전체가 소련으로 이
동해 갔으며 내가 속한 동북항일연군 3군 3지대가 하바로프스크 동북 75㎞ 아무르강변 브야츠
크 야영에 도착한 11월 김정숙을 처음 만났다』고 전하고 『그때 김정숙은 김일성과 결혼,임신
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이씨는 『김정숙은 다른 조선족여인 9명과 함께 교통연대 무선전 통신대(무선반)에 근무했으며
계급은 전사였다』고 말하고 『42년 2월 황량한 야영천막에서 김정일을 낳은 후 곧 탁아소에
맡겨야 했으며 정일이는 유라라는 소련이름으로 불렸다』고 전했다.
이씨는 또 『김정숙은 몸이 약해 정일에게 제대로 수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42년 7월부터 젖을
뗄때까지 내가 젖을 먹였다』며 자신은 45년 8월 남편을 따라 중국해방전선에 투입되고 김일성
일가가 북한으로 가면서 헤어졌다고 말했다.
평남이 고향인 이씨는 중국건국 이후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상임위 비서국에 근무하다 지난 70년
대초 퇴직,현재 중국 북경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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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 1991-12-22
소 콤소몰스카야지서 보도/“어릴적 김정일 거칠고 변덕쟁이”
◎「빨치산 투쟁영웅」과는 거리 먼 보통아이/김정숙은 「김일성김성애 불륜」 알고 자살
김일성의 본처 김정숙(김정일의 생모)은 김일성의 당시 비서였던 현재의 처 김성애와의 불륜관
계에 대한 충격으로 지난 49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자살했다고 일본의 지지(시사)통신이 21일
소련의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지를 인용 보도했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김정일은 김일성이 소련군 제88대대장 시절이었던 지난 42년 소련 하
바로프스크 교외의 바츠코예 마을에서 태어나 53년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소련과 중국을 전
전했다고 보도,김정일이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투쟁에 참여했다는 「전설」을 전면 부인했
다.
김정일은 유년시절 조국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던 평범한 어린이로 「민족의 아들」이니
「빨치산 투쟁의 영웅」이니 하는 북한측 선전과는 거리가 멀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김정일
은 오히려 성질이 온순치 못하고 변덕스러웠으며 어른을 공경할줄 모르는 어린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지는 48년 김이 생모 김정숙과 함께 평양의 조용한 요양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장면의 사진과 함께 김정일에 관한 기사를 보도했다.보도에 따르면 김정일은 해방후 김
일성과 함께 평양으로 돌아왔으며 김정일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소련에 의해 안전지역에서 보
호되었다는 것이다.
이 신문은 또 김정숙의 사인과 관련,김정일은 김일성과 김성애사이에서 태어난 김평일(전불가리
아대사)및 김성애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덧붙였다.<도쿄=이창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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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의 농담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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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 1992-06-17
6·25「남침」 입증 소문서 첫 공개/러연 군사연구원
◎“평양시민 개전사실 전혀 몰라/김일성항일투쟁 소군이 지시”
【모스크바 연합】 북한주석 김일성이 자신의 위업으로 내세우고 있는 항일 빨치산투쟁의 진상
과 스탈린에 의해 지도자로 선택된 과정,그리고 한국전쟁 기원 등에 관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진상들이 담긴 구소련의 비밀문건들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러시아 국방부직속 군사연구소 책임연구원 가브릴 코로트코프 박사(역사학·아카데미준회원)는
16일 연합통신과 가진 단독회견에서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투쟁은 자발적인것이 아니라 소련군
의 명령에 의해 수행된 것이며 한국전쟁이 북한에 의한 남침임을 여실히 증명하는 비밀문건들
을 제시했다.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당시 평양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가 개전 첫날인 6월25일 스탈린에게 긴
급히 보낸 암호전문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이 강을 습격,서울을 향해 매우 빠른 속도로 진격하
고 있다.평양은 평온한 분위기이며 시민들은 전쟁이 일어난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돼있어 어
느 쪽이 전쟁을 일으켰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코로트코프박사는 소련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후인 지난해 10월 당시 국방장관 샤포슈니코프
원수(현재 독립국가연합 통합군 총사령관)로 부터 『한국전쟁에 관한 진실을 규명,공식적인 입
장을 정립하라』는 특별지시를 받고 93년7월까지 작업완료를 목표로 자신을 팀장으로 한 5명의
연구원이 현재 비밀문건들을 중심으로 연구중이라고 밝혔다.
[대한매일] 1992-06-18
6·25관련 구소 극비문건 공개/러시아 군사연 코로트코프박사
◎「남침 D데이」 김일성이 선택했다/“인민군 서울 진격” 소대사 본국 급전/미군 인천상
륙하자 김일성 “나는 실패했다” 당황/스탈린 수습책임 중국에 떠넘기며 김에 등돌려
다음은 러시아 국방부직속 군사연구소 책임연구원 가브릴 코로트코프박사가 비밀문건을 중심으
로 밝혀낸 한국전쟁과 북한 김일성의 항일빨치산투쟁,집권과정등에 관한 내용의 요약이다.
▷한국전쟁 관련◁
한국전쟁이 어느 편에 의해 발발됐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모스크바와 평양이 「해방전쟁」
을 일으키기로 결정을 내렸으며 다만 시기에 관해서는 김일성이 6월25일 단추를 눌렀을 뿐이
다.당시 평양주재 대사 스티코프가 개전 당일 스탈린에게 보낸 긴급 전문에는『조선인민군이
강을 습격하고 아주 빠른 속도로 서울로 진격하고 있다.평양은 아주 조용한 분위기이며 사람들
은 누구도 전쟁개시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씌어 있다.
○평양시민도 몰라
또 국방부 문서보관소에 있는 「작전계획 초안」에는 『6월25일,○○탱크연대는 ○○도시로 향
한다.○○보병사단은 ○○방향으로 진출한다』는 식으로 연대급 이상 부대의 목표가 구체적으
로 명시돼 있으며 이밖에 「서울점령 초안」도 포함돼 있다.
전쟁이 초기 승세에서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김일성은 크게 당황했
다.당시 스티코프가 스탈린에 보낸 전문에는 『김일성이 쇼크를 받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
다.그의 군대지휘와 국가지도는 엉망이 되고 있다.김은 지하사령부에서 본인에게 「나는 실패했
다.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나는 또다시 빨치산투쟁을 하는 것외에는 다른 길이 없을 것같
다.(미군의 진격이 너무 빨라서)상황이 긴박하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부탁해 나의 생명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돼있다.
○“김일성 무능” 불만
스탈린은 10월 전쟁이 실패했음을 느끼자 수습책임을 중국에 떠넘기기 시작함과 동시에 초기에
는 매우 빈번히 김과 전문을 주고 받았으나 이때부터는 김에게 아무런 답신도 보내주지 않음으
로써 실망감을 표시했다.
당시 스탈린측근으로 총참모부 작전부장이었던 스테멘코 장군은 후일 본인과의 인터뷰에서 스
탈린이 『김은 아주 무능한 장군이다.그가 어려운 시기에 처해 의지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대체인물이 없으니 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털어놓았다.또한 본인이 극
동군총사령관 말리노프스키원수 휘하에서 한국전 정보담당 장교로 재직시 그는 김일성을 한번
도 이름으로 호칭하는 법이 없이 오직 「모자를 쓴 대위」라는 별칭으로 부르면서 『그는 진짜
군인이 아니다.군대지식도 적고 전쟁도 제대로 지도하지 못한다』고 불평했다.
▷한국과 관련된 소련군◁
45년 8월 소련군의 북한 진주부터 53년 종전까지 한반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은 군인은
모두 약 1백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특히 한국전쟁과 관련,훈장을 받았거나 전사자·부상자 및
유가족들은 2차대전 심지어는 최근의 아프간전쟁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아무런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이러한 상황은 소련당국(지금은 러시아정부)이 한국전 개입사실을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본인 역시 한국전쟁과 관련해 적성훈장을 받았다.그러나 훈장증서
에는 이상하게도 「조선전쟁에서 주어진 과업을 수행했으므로 이 훈장을 수여함」으로만 돼 있
고 구체적인 공적사항은 전혀 없다.이는 극히 이례적인 것이다.
▷항일빨치산투쟁◁
김일성이 붉은 군대에 정식 입대한 것은 1942년 7월17일이었다.이같은 사실은 45년 8월30일 그
가 적기훈장을 수여받은 훈장증서에서 명백히 나타나 있다.김이 훈장을 받게 된 공적사항으로
는 항일빨치산투쟁을 훌륭히 수행했다고 돼 있다.그러나 이에 앞서 김이 소련군 대위로 진급시
승진 상신서에는 「진지첸(김일성)을 만주에서 빨치산대장으로 활동하도록 파견했다」는 내용
이 들어있다.이는 김일성이 북한당국의 공식 선전에서 처럼 스스로 빨치산부대를 편성,지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소련극동군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군이 항일 명령
특히 김일성이 45년 9월 중순 북한지도자로 선발되기 위한 면접을 하기 직전 심사위원격인 극
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상급대장과 동 군사위원 슈킨대장 앞으로 제출된 김의 인물평가서
에는 ▲동만주에서 빨치산활동 참가 ▲하바로프스크 군사학교에서 특수과정 수료 ▲수차 걸쳐
사령부로 부터 표창 ▲42년 입대,현재 대대장등 연대순으로 기록돼 있는데 입대 전에 이미 소
련군 당국으로 부터 표창을 수차 받은 사실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이지도자로선택된과정◁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따라 김일성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특수저격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
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이
때 김은 『특별인터뷰를 위해 즉각 하바로프스크로 돌아가라』는 돌연한 명령을 받았다. 하바
로프스크에서 당시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와 군사위원 슈킨을 면접했다.
두 장군은 몇가지 경력을 물은 후 김에게 『소련정부의 결정에 따라 한국국적을 가진 전문가들
이 북한에 보내지고 있다.현재 북한은 새 조국을 건설할 전사들이 필요하다.귀관은 가장 빠른
시일내에 특별임무를 받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들의 이같은 발언은 김일성이 이미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도자후보 분석
이에앞서 모스크바에서는 북한의 새 지도자감으로 많은 후보들이 심도있게 분석,평가되었다. 주
로 장시우,박동홍 등 코민테른그룹과 박헌영,김두봉 등 자생적 공산주의자,김일성등 만주그룹,그
리고 조만식선생등 비공산 민족주의자들이 대상이었다.그러나 스탈린은 이들이 군대지식이 없
다는 이유로 모두 거부했다.
스탈린은 결국 그의 구미에 딱맞는 인물을 물색한 결과 김일성이 돌연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하여 지도자로 선택을 받은 김은 45년 10월2일 부터 「진지첸」이란 이름을 버렸으며 8
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소련함정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에 도착했다.
당시 원산시 소련 군정책임자인 크루지코프 대좌가 영접했는데 그는 후일 본인과의 면담에서
김일성 영접은 평양의 스티코프 대장의 긴급명령으로 행해졌다고 말했다.<모스크바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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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의 농담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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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1991-07-17
“김일성 빨치산 아니었다/항일전투 참가한적 없이 해방후 귀국”
◎일 아사히신문 보도
【동경=연합】 김일성 북한주석이 북한측의 공식 주장대로 2차대전말 백두산 비밀기지에서 항
일투쟁을 벌인 것이 아니라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도 않은 채 소련 하바로프스크지방의 시골에
거주하다 해방을 맞아 귀국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일본 아사히신문이 16일 재일 한인작가 김찬
정씨(52)의 말을 인용,보도했다.
김씨에 따르면 『김주석이 2차대전말에 항일 게릴라전을 지휘해 북한을 해방시켰다는 북한측의
주장이 사실에 반하는 것으로 실제로는 하바로프스크지방의 한인부대에 있었다』는 소공산청년
동맹기관지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의 보도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 8일 김주석이 거주했
다는 하바로프스크 북방 70㎞ 지점의 아무르강변 백퀘마을을 방문했다는 것.
이 마을에는 김주석과 그 가족을 잘알고 있는 러시아인 시로노와씨(67·여)등이 지금도 살고
있었다며 시로노와씨등에 의하면 김주석 일가는 1942년 가을 남쪽에서 옮겨와 이 마을에 거주
했으며 김주석은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은 채 해방이 되자 45년 8월께 귀국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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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92-03-11
“김일성 항일 경력 날조”
◎자칭 이념교사 소 교포가 폭로 주목/“농부 출신으로 정규교육은 못 받아”
북한정권 수립 초기에 김일성에게 이념교육을 시켰다는 한 소련교포가 김의 항일투쟁 경력은
날조된 것이며 김은 평범한 농부였다고 주장해 주목을 끌고 있다.
구 소련 카자흐스탄공화국 수도 알마아타에 살고 있는 올해 80세의 페테르 알렉산드로비치 박
씨는 10일 로이터통신과의 회견에서 이같이 말하고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 KGB 비밀인
이 사실을 털어놓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씨는 자신이 알마아타에서 마르크시즘 강의를 하고 있을 무렵인 1946년 어느날 당국으로부터
특별임무를 부여받았다. 평양에 가서 이념교육을 하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평양에 도착해 평양대학의 부학장으로 임명된 박씨는 자신의 제자가 북한의 최고권력자인 김일
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후 박씨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인 김두봉에게도 교육을 실시했다. 제대로 정규교육을 받은 적
이 없었으며 어려서부터 중국인 사이에서 자라서인지 한국어도 서툴렀다면서 그러나 그의 재질
은 총명했고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고 술회했다.
박씨는 또 『김일성이 빨치산에 참가는 했지만 북한에서 선전되는 것처럼 항일 독립투쟁을 했
다는 것은 근거없는 것』이라면서 김은 소련 국경지대에서 농사를 짓다가 1942년 소련군에 끌
려간 뒤 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 등지를 전전하다가 스탈린의 「원대한 계획」에 따라 인
질로 선택됐다고 말했다.<알마아타(카자흐스탄)=로이터 본사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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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의 농담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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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김일성사를 잘 아는 것으로 보이는 탈북인사의 증언을 "탈북자동지회"홈(잠정 폐쇄중)으
로부터 가져온 것임.
http://www.nkd.or.kr/bulletin/2000/0003/month003-4.htm
http://www.nkd.or.kr/bulletin/2000/0003/month003-3.htm로부터 옮겨다 놓았음.
김일성 전기에 따르면 7살인 1919년 3.1운동을 주도했고, 18세때에는 주체사상을 창시한 천재였
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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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설
북 한 의 인 권 문 제(2)
- 편 집 부 -
그러면 수령은 누가 선출하겠습니까.
북한 위정자들은 <수령은 누가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이 추대>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
다.
김일성의 경우 역사적 사실은 쏘련의 스탈린이 그를 북한의 통치자로 임명하였다는 것입니
다. 그러나 북한의 통치자들은 김일성이 14살때인 1926년에 "타도제국주의 동맹"을 조직하고,
18살때인 1930년에는 주체사상을 창시하여 조선혁명이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등 기적을 창조하
였기 때문에 조선인민이 자연히 그를 수령으로 추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김정일의 경우에는 출생할 때부터 <광명성>이 탄생하였다고 사람들이 떠들면서 큰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의 탄생을 축하하는 글을 썼으며, 그를 김일성의 후계자로 추대하였다는 것입
니다.
그러다보니 김정일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된 것도 추대되는 형식이었으며 김일성 사망후
당 총비서로 된 것도,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된 것도 다 추대되는 형식을 취하였습니다.
인민이 수령을 추대한다는 논리에 따르면 "수령은 인민에게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
혜만을 베풀며, 인민은 수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충성만을 다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데로 부터 "수령은 당과 국가와 인민우에 서 있는 신성불가침한 존재이며 인민의 운명
개척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궤변이 성립되게 됩니다.
북한통치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수령은 혁명과 건설에서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며 결정적 역
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 "수령에 대한 충실성은 당에 대한 충성, 노동계급에 대한 충성, 인민
에 대한 충성의 최고 표현"이며 "수령에게 몸과 마음을 다바치는 것은 최고의 도덕"이라는 것
입니다. 북한 통치자들이 인권불모의 지대우에 앉아서도 <우리 나라에는 인권문제란 있을 수
없다>고 세계에 대고 <호통>을 치는 것은 수령의 지위와 역할만이 인정되고 있는 북한 사회에
서는 나름대로 충분한 논거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면 북한 수령절대주의의 사상적 지반은 무엇이겠습니까.
북한통치자들은 수령절대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크게 두가지 선전에 힘을 집중하고 있는데
첫째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이른바 혁명역사라는 것을 터무니 없이 위조, 과장하여 선전하는 것
이며. 둘째는, 봉건사상으로 왜곡한 주체사상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 김일성·김정일 혁명역사의 과장과 위조
역사는 김일성과 그의 전우들이 항일투쟁에 참가한 것을 응당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항간에서는 북한의 김일성이 가짜 "김일성"이라는 설도 나돌고 있지만, 가짜건 진짜건 항일
투쟁에 참가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마땅히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는
반드시 사실 그대로 밝혀지는 법입니다. 앞으로 통일이 되면 북한 김일성이 진짜 김일성인가
가짜 김일성인가 하는 것은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북한 위정자들이 김일성의 혁명역사를 터무니없이 과장·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입니
다.
실례로, 김일성이 18살때 주체사상을 창시하였다는 주장인데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
라면 그것을 도저히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운명개척을 위한 사상을 창시하려면 풍부한
투쟁경험과 해박한 지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1930년 18살 난 김일성은 중학교과정
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투쟁경험도 없었습니다. 누에도 뽕잎을 먹고서야 실을 뽑는 법인데
똑똑한 지식과 경험도 없이 어떻게 새로운 지도사상을 창시할 수 있겠습니까.
북한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원래 6.25전쟁 이전에는 "주체"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주체를 세워야 한다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김일성이 쏘련파와 중국파를
숙청할 때부터이며, 주체사상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에 들어와서입니다.
그러므로 김일성이 18살때에 주체사상을 창시하였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또 다른 대표적 실례는 "구호나무"소동입니다.
김정일이 실권을 잡기 시작한 때부터 북한위정자들은 김일성이 중국동북지방에서 중국공산
당의 지도밑에 항일을 한 것이 아니라 백두산근거지를 중심으로 주로 조선국내에서 독자적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진행하였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증거로 "구호나무"를
내들었는데 나무껍질을 벗기고 거기에 "일본제국주의타도", "조선독립만세" 등 여러 가지 구호
를 붓으로 써 놓은 것이 국내도처에서, 지어 남한의 한라산에서까지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어느 빨치산 참가자가 회상기에서 자기들이 어느 밀림에 주둔하고 있을 때 그곳의
나무껍질을 벗기고 항일을 호소하는 구호를 써놓은 일이 있었다고 회고한데서 암시를 받고 북
한위정자들이 대대적으로 날조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상한 것은 그러한 구호나무가 빨치산들
의 기본 활동지역이었던 중국동북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없고 북조선 도처에서만, 그것
도 자그만치 1만 수천개나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국내에 비밀공작원을 파견하였다면 한 두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또 김일성이 국내에 비
밀공작원을 파견하면서 설마 나무껍질을 벗기고 구호를 써넣을 것을 기본과업으로 주지는 않았
을 것입니다. 그들은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며 비밀공작을 하였겠는데 어느 겨를에 나무껍질을
벗기고 먹을 갈아서 붓으로 구호를 쓰고 앉아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수십년전에 써 놓은 글이 비바람에 다 지워진 것을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특수
약을 발명해서 하나하나 재생시켰다고 하는데 그 특수약을 본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이러한 역사날조 사업은 중앙당 역사연구소가 김정일의 지시밑에 극비밀리에 진행한 것입니
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칭송하는 구호나무는 평양의 모란봉 초입구에서도 여러 그루 <발견>되
었는데 어느 <철없는> 기자는 자기 팔뚝만한 굵기의 애솔나무에 <불멸의> 구호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 이 나무는 자라지 않는 종자인가 보다"라고말을 했다가 하루밤 사이에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1940년과 1941년 경 중국동북지방에서 활동하던 항일빨치산들은 일제의 대규모적인 토벌을
피해 모조리 쏘련경내로 넘어가 쏘련이 조직한 88특수여단에서 군정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때
김일성과 함께 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88특수여단 군인은 약 200명 가량이었는데 그 중 조
선사람은 60명뿐이고 나머지는 중국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여단장도 중국사람이었고 김일성은
4개 대대가운데 조선사람들로 구성된 한 개 대대의 대대장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써도 우리
는 김일성이 했다는 항일빨치산 투쟁의 규모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공작원이 그렇게도 많아서 조선내부를 드나들며 평양의 모란봉에까지 구호나무
를 남기었겠습니까.이것이야말로 삼척동자도 믿지 않을 역사위조사기입니다.
더 기막히는 역사위조는 김정일이 1942년 2월 16일 백두밀영에서 <광명성>으로 탄생하였다
는 것입니다.
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일성이 1940년 이후부터는 쏘련땅으로 넘어가 88특수여단에서
쏘련군 대위로 복무하면서 김정숙과 결혼하여 김정일을 낳았고, 그 이름도 쏘련식으로 "유라"라
고 불렀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역사적 사실입니다. 1945년 말부터 1946년 말까지 김일성의
경위원으로 복무하였던 현 노동당비서 전병호는 김정일이 자기의 생모인 김정숙과 함께1945년
백두밀영이 아니라 구 쏘련으로부터 기차를 타고 평양에 들어왔으며, 이름은 쏘련식으로 "유라"
라고 불렀었다고 수 차례 회고하였습니다.
김일성 혁명역사 왜곡에서 성과를 거두는데 따라 김일성과 김정일의 욕망은 더 크게 자랐는
바, 그들은 김정일이 1942년 백두밀영에서 <탄생>하였다는 전설을 만드는데로 한 걸음 더 전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역사조작을 위해 김일성은 삼지연 휴양소에서 휴양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박영순을 비롯한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을 불러다 놓고 "김정일이 탄생한 백두산밀영 자리를 찾
아내라"는 과업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없는 밀영을 찾아 낼 리는 만무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김일성은 "아무래도 내가 찾
아주어야 하겠다"고 수선을 떨면서 주변을 돌다가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내어 "여기가 밀영지
였다"고 지적한 다음 그 뒷 산을"정일봉"이라고 이름까지 지어주었습니다.
중앙당 역사연구소에서는 거대한 화강석바위를 구해다가 거기에 엄청나게 큰 글씨로 "정일
봉"이라고 새기고 그것을 산봉우리에 올려붙이는 어려운 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밑
에 <백두산 밀영 고향집>이라는 것을 건설해 놓고 "바로 이 집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이 같이
살면서 사령부를 표시하는 붉은 깃발을 띄우고 빨치산투쟁을 지도했으며, 김정일은 여기서 태
여나서 빨치산들의 총성을 들으며 자랐다"고 선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일성이 1940년 말에 쏘련땅으로 넘어갔다가 1945년 9월에 처음으로 평양에 들어왔다는 것
이 역사적 사실인데 어떻게 1942년에 백두산밀영에서 김정일을 낳을 수 있단 말입니까.
김정일은 구 쏘련 극동지역의 어느 촌락에서 출생한 자신의 경력을 영원히 숨기기 위해
1990년대에 들어와서 막대한 외화를 들여 출생당시에 한 출생신고문서를 러시아로부터 사들이
는 망동도 서슴치 않고 감행하였습니다.
북조선을 쏘련의 붉은 군대가 아니라 88특수여단의 몇십명 김일성빨치산부하들이 해방했다
고 주장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은 더 논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새빨
간 거짓말이 불쾌감은 주어도 김일성·김정일의 인격에 대한 직접적인 혐오감까지는 덜 느껴집
니다.
하지만 김일성이 인민들에게 전혀 속일 필요가 없는 자기의 경력을 속이고 김정일의 출생지
까지 속이기 위해 일을 꾸미는 사실을 놓고서는 김일성·김정일이 혁명가로서의 품성은 고사하
고 파렴치하기 그지없는 속물이라는 것을 통절히 느끼게 됩니다. 이런 저열한 품성을 가진 자
들만이 수백만 인민을 굶겨 죽이고 온 나라를 하나의 감옥으로 만들어 놓고서도 "세상에서 가
장 행복한 지상낙원을 건설해 놓았다"는 거짓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위조한 "허위선전의 종합본"은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입니다.
원래 김일성은 항일빨치산투쟁을 선전하기 위해 "항일빨치산참가자들의 회상기"를 출판하도
록 하고 당원들과 근로자들 속에서 회상기학습을 강화하도록 하였습니다. 물론 그 회상기들은
예외 없이 기자, 작가들이 사실들을 흥미 있게, 특히 김일성의 업적을 부각시키는 방향에서 대
필해준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북한의 노동당원들과 청소년학생들 속에서 김일성과 항일빨치산에 대한 존경
과 흠모의 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기부터 김정일이 당중앙에 들어와서 선전사업을 주관하면서 빨치산참
가자들이 쓴 회상기들을 모두 회수해 버렸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회상기들이 김일성우상화에 집중되지 못하고 일개 빨치산참가자들의 공적
을 내세우는 면이 있기 때문에 대중속에서 그들에 대한 환상이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이며,
둘째 이유는, 회상기 집필자들이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해 최대로 노력한다고 해도 당시의
사건진실이 일정하게 반영되면 김일성의 혁명역사를 과장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
니다.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모조리 회수한 다음부터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빨치산 참가자들의 이름으로 회상기를 발표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될 때에는 중앙당역사연구소
가 검토·개작하여 대중보도기관들에 넘겨주기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빨치산 참가
자들이 개별적으로 출판사나 신문사와 교섭하여 회상기를 발표하는 것이 완전히 금지되었습니
다.
이때부터 김정일은 김일성의 혁명활동을 주제로 하는 소설을 대대적으로 쓰고 영화를 많이
만들도록 직접 조직 지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예작품과 영화는 김정일의 지도 밑에
만든 것이라 하여 김정일의 이름으로 발표한 저작과 꼭 같은 비중을 두고 전당, 전민이 의무적
으로 학습하도록 엄격한 규률을 세웠습니다.
예컨데 중앙당과 중앙기관 일군들을 위한 학습반에서는 매주 1회식 영화를 보게 되어 있는
데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 등의 혁명활동을 주제로 한 영화는 "문헌영화"라고 하면서 최고위급
간부들도 의무적으로 보아야 하며, 영화를 본 소감은 반드시 당조직에 써내도록 통제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학습 대신에 김일성의 혁명역사를 주제로 한 소설과 영화
를 의무적으로 학습하고, 학습총화때에 시험까지 치기 때문에 북한 인민들의 머리속에서는 회
상기를 읽은 기억은 사라지고 소설과 영화의 내용만을 역사적 사실과 같이 생각하게 되었습니
다.
이러한 바탕이 마련된 조건에서 김일성의 회고록을 쓰는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이 사업은 김
정일의 지시에 따라 당역사연구소가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집필은 혁명소설을 창작했던 작가
들이 맡아하기로 하고 혁명역사자료와 관련된 문제는 당역사연구소 일군들이 동원되어 고문역
할을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집필에 동원된 사람들은 소설 "시대의 탄생"을 창작한 석윤기, 소설 "평양시간"을 창작
한 최학수, 그리고 작가 김정 등 북한의 중견작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혁명소설이나 혁
명영화 시나리오를 써본 경험이 있는 것만큼 김일성의 회고록을 흥미 있게 잘 엮어냈습니다.
회고록 제1권이 나왔을 때 대중의 평판은 아주 좋았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소설
과 영화에서 본 내용과 일치할 뿐 아니라 내용서술 또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 있
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과 김정일도 회고록이 잘 되었다고 만족해하면서 작가들을 크게 고무하고 선물들을
하사해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김일성의 회고록은 김일성의 노작으로 전당, 전민의 필독문헌으로 지정되었으며
모든 급의 학습반들에서 의무적으로 학습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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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 명 역 사
거짓과 위선에 찬 김일성의 혁명역사
- 편 집 부 -
▣ 항일투쟁시기 김일성의 대표적 역사위조
⊙ 1923년 2월 평양창덕학교 입학
북한 위정자들은 김일성우상화를 위해 김일성이 1923년 3월에 <배움의 천리길>을 걸어서 평
양으로 왔다는 소설을 꾸미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1923년 2월이라고는 북한 조차 주장한 일이 없다.
사실을 따지면 김일성은 1922년 여름 중국 장백현 팔도구의 중국소학교로부터 평양의 창덕학
교로 <입학>이 아닌 전학을 하였다.
⊙ 1925년 무송 제1소학교 <지도>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은 반공(反共), 민주주의 독립단체인 "대한 의정부"의 무송지방 간부였
고 우익단체인 "백산무사단" 단원이었다. 백산학교는 이 무사단과 관계가 있었는데 1925년 당시
이 학교는 교실도 없어서 중국 무송소학교 교실을 빌려쓰고 있었다.
김일성은 여기서 잠시 조선인 학생들에게 노래와 춤을 배워준 적이 있었다. 북한 역사위정자
들은 김일성이 무송소학교에 <전학>해서 공부를 했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그 당시의 학교문건
을 보관하고 있는 중국 측은 김일성의 이러한 학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 1927∼1929. 9 길림육문중학교 중퇴와 공산주의청년 동맹 가입
조선 공산주의청년동맹은 1929년 5월 초 길림에서 정의부 좌경 청년들에 의해 조직되었는데
이해 5월 중순 일제의 검거선풍이 불자 금방 맹원이 된 길림육문중학교 학생 김일성도 다른 맹
원들과 함께 남만방면으로 도망쳤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자기가 1929년 9월에 조선혁명의 <활무대>로 나가기 위해 육문중학교
를 중퇴했다고 쓰고 있는데 그는 그해 5월에 도망감으로써 자동적으로 중퇴되었다.
⊙ 1929년 동만지구 공산주의 청년동맹 <서기> 설
북한 위정자들은 영화 "조선의 별"과 김일성의 혁명역사를 소설화한 총서작품들에서 김일성
이 마치도 동만 공산주의 청년동맹 서기였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김일성은 정의부 산하 "남만조선인청년동맹"의 일개 평 맹원이었다. 김일성은
<초기혁명활동> 전 기간 그 어느 조직에서도 서기를 한 적이 없다.
⊙ 1931년 중국공산당<입당>
김일성은 자기의 회고록에서 "1931년 중국공산당 입당"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당시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조직이 전혀 없었던 무송에서 살았다.
중국측은 김일성의 1931년 <중국공산당입당>설에 대해 그 어떤 보증도 해 주지 않았다.
⊙ 1936년 5월 "조국광복회" 조직
"남만한인 조국광복회" 창립선언과 강령이 나온 것은 1936년 6월 10일이다.
이 조직은 남만에서 활동하던 오성륜, 이상준 등이 중국인 위중민의 지도하에 만들었다. 이
상준은 중국공산당 남만성위에서 위중민 다음가는 유명한 조직일군이었던 이동광의 별호이다.
당시 동만에 있던 김일성은 장백지방에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을 만들라는 중국공산당의 지
시를 수행하였다.
김일성은 해방후 소련을 등에 업고 이미 조직되어 있던 "조선공산당"을 탈취했지만 조선 독
립에는 쥐뿔만한 업적도 없다.
그래서 김일성은 항일전에서 전사한 이동광의 업적을 가로채서 중국공산당의 지도 밑에 조
직되었던 "조국광복회"를 자기가 조직하고 자기의 영도밑에 운영된 "조국광복회"로 허위날조 하
였다.
⊙ 1941년 소련 입국
김일성은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백두밀영에 사령부를 두고 조선혁명을 지도한 것처럼 역사
를 완전히 왜곡하였다.
이를 위해 김부자일당은 70년대 중반에 소위 백두밀영자리를 찾아내는 소동을 벌리었으며
지금은 그 곳에 사령부를 표시하는 가짜 귀틀집과 <정일봉>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북한인민
들에게 참배를 강요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시기에 반일부대들에 대한 일제의 토벌이 강화되자 김일성은 불과 수십명
의 대원들을 끌고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소련은 김일성의 입국을 인정하지 않고 즉시 그를 감옥에 처넣었다. 김일성이 석방되게 된
것은 그의 회고록에도 나오는 중국공산당 간부 주보중의 보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 소련군 대위었던 김일성
김일성은 주보중의 보증으로 감옥에서 나온 후 1942년부터 1945년 해방되는 날까지 소련 극
동군사령부 정찰국소속 88특수여단 대위로 복무하였다.
당시 부대는 소련 하바롭스크근교 부야츠크에 있었는데 김일성은 여기서 김정숙과 결혼하여
김정일을 낳았다.
⊙ 1945년 해방 당시 소련군 소좌로 입북한 김일성
김일성은 소련군을 따라 조선해방전투를 하면서 <개선>하지 않았다.
소련군은 해방직후 88교도여단을 해산하고 이 부대에 있던 조선인 중국공산당원들로 "조선
공작단"을 조직하였으며 그 단장으로는 김일성을 임명하였다.
김일성은 소련군의 지시하에 이 공작단을 이끌고 비밀리에 원산으로 들어왔다.
⊙ 1945년 10월 김일성의 평양귀환,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비서(부책임자)로 활동
김일성은 1945년 9월 19일 비밀리에 원산에 상륙하였으며 1945년 9월 22일 평양으로 들어갔
다. 당시 김일성의 가명은 김영환이었다.
평양에 들어간 후 김일성은 소련군의 평양입성과 함께 평안남도 강서군의 어느 과수원속에
자리잡은 소련국가안전위원회(체까) 북조선지국의 지시밑에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부책임자
로 활동하면서 스탈린의 대조선정책집행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당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자는 소련에서 국제당학교를 졸업하고 당사업을 하다가 소
련의 지시를 받고 귀국한 김용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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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의 농담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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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94-07-10
김일성(이규태코너)
만약 시험문제로 「김일성이 고유명사냐 보통명사냐」는 문항이 있었다 하자. 서슴없이 고유
명사라고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명사라 답했다 해서 또한 틀린 답은 아니다. 김일성이 보
통명사라는 연유는 이렇다. 60∼80대의 노장년들은 어릴적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자주 듣고
자랐다. 당시 일본 정부가 조사했던 김일성에 대한 유언비어를 모은 것을 보면 이렇다. 김일성
은 만주벌판에 신출귀몰하면서 1백리 간격으로 있는 3명의 왜장수들 목을 동시에 벤다. 김일성
이 휘파람을 불면 1백리안에 있는 말들이 순식간에 몰려든다. 김일성은 일본군의 날아오는 대
포를 손바닥으로 막아 쏜 곳으로 되돌려 폭발시킨다. 김일성은 손오공이 갖고 있던 요술방망이
를 들고 다닌다는 등등―.
당시 나라를 강탈당한 백성의 응어리가 형성시킨 김일성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민족의 원한을
풀어줄 대망의 인간으로서의 보통명사였던 것이다. 보통명사이기에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태어
나기 이전부터 수십명의 김일성이 태어나 죽어갔던 것이다. 지금 새문안 경희궁 맞바라지에 있
었던 구한국군 사관학교 출신으로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하고 있던 신팔균 지석규 김광서는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하늘에 맹세하고 그 증거로서 하늘 천자를 돌림자로 개명을
했다.
신동천 지청천 김경천이 그것이다. 바로 이 기병장교 김경천도 김일성으로 불렸고 그 이름으로
행세했었다. 「남만삼천」으로 왜병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이 김일성은 소련군대령으로 편
입되어 싸우다가 광복 직전 전사했다. 서대숙의 「조선공산주의 운동사」에 보면 일제시대 만
주지방에서 활약한 김일성이란 이가 9명이나 열거되고 있다. 김창순도 그의 저서에서 1920년대
정의부에서 싸우다 전사한 김일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밖에 보천보전투의 동북항일연합
군 6지대장에 김일성이 있었고 항일연합제일로군 제2방면군장에도 김일성이 있었다. 이 모두
30대에 전사하고 없는 김일성들이다. 이름이 갖는 선입감으로 왜병을 두렵게 하고 또 통수력을
강화시키며 민족의 여망을 결집시킬 수 있어 이 김일성을 자칭하길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엊그제 북한에서 사망한 김일성은 2차대전 종전까지 하바로프스크 근교에서 소중한혼성부
대인 88여단의 대위로 있었던 김성주임은 알려진 사실이다. 1920년 이래 수십명의 김일성이 죽
어오더니 이제 보통명사로서의 김일성의 그 마지막 사망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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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겨 레] 1998-08-13
항일투쟁 김경천 선생 건국훈장
◎시베리아서 활동… 러 누명씌워 유배/중앙아시아 거주 후손 오늘 고국 찾아
국내학계에서 한때 ‘진짜 김일성’으로 알려지기도 했던 대표적인 항일무장투쟁 독립운동가
김경천(본명 김광서) 선생의 후손들이 13일 잠시 귀국한다.
현재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이들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지난 3월로, 당시 러시아 모스크바에
파견된 감사원의 정창영 감사관이 모스크바대에서 교수로 근무중인 선생의 막내아들 기범(67)
씨의 사위를 만나면서 비롯됐다.
이에 따라 정부는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유족들을 한국으로 초청하고, 선생의 항일투쟁을 기
려 건국훈장을 추서하기로 했다.
일본 육사 기병과 출신인 김경천 선생은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했다가 한러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섬멸한 니콜라예프스키항 사건을 계기로 일본군이 대대적인 보복에 나서자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나섰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직접 ‘김경천 기병부대’를 구성해 지휘하고, 1922년에
는 고려혁명군의 동북지역사령관을 지내는 등 활발한 항일무장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같은해
말 항일운동을 하던 러시아 적군들에 의해 ‘인민의 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강제이주와 유배
생활을 하다 1942년 소련 북동쪽의 한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김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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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98-08-13
전설적 抗日 영웅 뒤늦게 ‘햇빛’/김경천 선생 훈장 추서
◎업적유족 생존 확인/15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시베리아서 일군격파/‘백마탄 장군’ 불려
시베리아의 전설적인 항일 영웅으로 한때 「백마를 탄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졌던 독립운동가
김경천(1888∼1942·본명 김광서) 선생이 오는 15일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건국훈장 대통령
장을 받는다.
국가보훈처는 항일 영웅이면서도 그동안 「수수께끼의 인물」로 알려졌던 김 선생의 항일 업적
과 유족생존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선생에게 훈장을 추서키로 했다고 12일 밝혔다. 이에 따라
선생의 생존 유족인 막내딸 지희(70·카자흐스탄 카라간다 거주)씨와 막내아들 기범(67·러시아
노브고로드 거주)씨 등 2명이 훈장을 전수받기 위해 13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한다.
1912년 일본 육사를 졸업한 선생은 1919년 만주로 망명한 뒤 시베리아 일대를 무대로 항일 독
립운동을 벌였다. 특히 그는 1919∼1922년 시베리아 투쟁 때 백마를 타고 「김경천 기병부대」
를 지휘하며 일본군 및 러시아 백군을 무찔렀다는 기록으로 인해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인식과
함께 국내 사학계에는 한때 「원조 김일성」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선생은 1922년 시베리아 지역에서 일본군이 철수한 뒤 스탈린에 의한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
제이주를 앞두고 체포됐다. 1936년 3년형을 선고받고 일단 석방됐던 선생은 이듬해 카자흐스탄
으로 강제이주된 뒤 1939년 「인민의 적」이라는 혐의로 다시 체포돼 1942년 러시아 아르헹겔
스주 감옥에서 옥사했다.
보훈처 관계자는 『항일운동 이후의 선생의 행적을 몰라 서훈을 못하다 러시아에 거주하는 유
족들이 러시아 유학중이던 감사원 직원을 통해 확인된 자료를 제출함에 따라 이번에 포상을 하
게 됐다』고 말했다.<유용원 기자·kysu@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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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998-08-13
시베리아·만주 누빈 전설적인 독립군대장/김경천 선생 누구인가
◎기병 이끌며 러·日軍 격파… ‘김일성 元祖’說
시베리아와 만주의 설원(雪原)에서 기병부대를 이끌며 일제와 싸웠던 김경천(金擎天) 선생은
‘전설 속의 독립군대장’이었다.
1888년 서울 출생인 金선생은 부친인 김정우(金鼎禹)씨가 대한제국 포병부령을 지냈던 무인 집
안의 자손으로 본명이 ‘광서(光瑞)’다.
자료 부족으로 보훈처는 올해 초에야 국내외 관련 자료 등을 통해 러시아·카자흐스탄에서 金
선생의 유족을 찾을 수 있었다.
일본 육사(23기) 기병과를 졸업한 그는 도쿄(東京) 제1사단 기병1연대에 근무하던 중 1919년 육
사 후배인 지청천(池靑天·광복군 총사령관)과 만주로 망명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거쳐 1921년 연해주에서 창해청년단(創海靑年團)을 조직, 총사령관으
로 남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서 일본군과 러시아 백군(白軍)마적떼 토벌에 나섰다.
이후 그의 부대는 ‘김경천 기병부대’로 알려졌다. 1922년에는 연해주에서 러시아 백군을 섬
멸했으며, 그해 10월엔 시베리아 지역에서 일본군을 철수시켰다. 그의 활약상을 놓고 ‘원조 김
일성’논쟁이 학계에서 일기도 했다.
그는 일본군의 철수 직후 러시아 적군(赤軍)에 의해 무장해제 당했다. 그럼에도 26년 블라디보
스토크에서 한족군인구락부 등을 결성, 항일운동에 나섰다가 스탈린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강
제이주 당했다.
金선생은 그곳에서 ‘인민의 적’혐의로 체포돼 42년 소련 아르항겔스크주 감옥에서 심장질환
으로 숨졌다. 소련정부는 59년 그의 사후 17년 만에 그를 복권시켰다.<채병건 기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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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2000-01-14
김일성 항일투쟁 진위 도마위에 올라
김일성(金日成)전 북한주석의 항일빨치산 활동은 과연 어디까지 진실인가.
통일부가 지난 11일 배포한 '북한 주요인물 자료집'에서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을 명시함으로
써 김일성의 항일운동 진위와 이에 대한 정부의 인정 여부가 새삼스럽게 도마위에 올랐다.
결론부터 말하면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투쟁활동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史實)'로 학계에서 인정
받고 있어 논란거리가 안된다는 게 중론이다. 즉,김일성의 항일운동 경력은 오늘날 북한이 김일
성우상화 정책의 일환으로 지나치게 과장시키고 왜곡한 것이 문제이지 역사적 사실임에는 틀림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래전에 검증된 그의 항일운동을 정부가 인정하느냐 마느냐는 것도 학
계의 시각에서 볼 때 어불성설이라는 얘기다.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은 1941년 함흥지방법원에서 나온 '혜산 사건'판결문이 뒷받침한다. 일
제가 작성한 이 판결문에는 김일성이 1936년 5월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고 37년 6월4일 '보천보
전투'를 이끌었다는 사실이 명시돼 있다. 또 이 '조국광복회'조직은 37년 보천보 사건을 계기로
발각돼 이듬해까지 739명이 체포됐으며, 이효순 박금철 박달 허학성 등 훗날 '갑산파'란 이름으
로 숙청될 때까지 초기 북한정권을 이끈 거물들이 거의 포함돼 있다.
이종석(李鍾奭)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실장은 "이 사건은 45년 3월1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6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됨으로써 막을 내렸다"면서 "박달은 서대문형무소를 업혀나온뒤 북한으로 넘
어가 영웅이 되었으며 김일성은 배후인물로 지목됐으나 잡히지 않아 일제의 추적을 계속 받았
다"고 말했다.
이 판결문은 80년대말 국내 학계에서 입수,김일성 연구에 전기를 마련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
도 서대숙(徐大肅)하와이대교수,이명영(李命英) 전 성균관대교수,김창순(金昌順)북한연구소이사
장등 원로들을 주축으로 김일성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김일성의 항일운동 진위에 대한 설이 분
분했었다. 당시에는 김일성의 항일투쟁경력은 '가짜 김일성'이 날조한 것이라는 인식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
'김광서(金光瑞),김경천(金擎天),김일성이 동일 인물'이라는 '3대 김일성론'이 제기되기고 했고
김일성이란 이름의 투사가 11명이란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김광서는 일본육사(23기)를 나와 백
마를 타고 다니며 탁월한 항일전투를 벌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가짜 김일성론'을 불러일으킨 김성주(金成柱)도 김일성의 본명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
며,1935년 개명했다고 통일부 자료에도 명기돼 있다. 또 김일성이란 이름의 인물은 혜산사건 판
결문 등이 말해주듯,여러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은 가짜다''김일성은 신출귀몰하
다'는 논란도 이젠 이론의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 학계의 판단이다.
학계에 따르면 김일성은 1930년 만주 길림의 육문중학교 시절 조직사건으로 퇴학되면서 중국공
산당의 명을 받고 항일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항일투쟁을 하면서 가족 보호를 위해 '일성(一
星)'이란 가명을 썼으며 훗날 '일성(日成)'으로 바꿨다고 한다.
김일성이 '축지법을 쓰고 신출귀몰한 인물'이라는 부분은 일본군 토벌대와 항일 빨치산이 만든
말이라는 것. 1940년 3월 백두산 부근 안도현에서 마에다 토벌대가 김일성을 뒤다 180명이 전
멸하는등 잦은 전투 패배에 대한 '변명'의 일환으로 이같은 수식어를 붙였고, 동시에 빨치산 대
원들도 작전상 김일성을 '신비화'시키는 것이 유리했다는 주장이다. 이종석 실장은 "결국 김일
성의 '신격화'는 일본토벌대와 빨치산의 합작품"이라고 강조했다.
김일성 항일운동과 관련해 또하나 문제는 정부의 인정 여부. 정부가 자료집을 통해 이를 밝힌
것은 이번 통일부의 경우가 처음이 아니다. 최초의 공식기록은 지난 68년 당시 중앙정보부가
주축이 돼 발간된 '북한총감'이다. 이밖에도 87년 정보당국이 펴낸 '북한 인물록' 등에 김일성
의 항일투쟁경력이 수록돼 있다.
김남식(金南植.북한전문가)씨는 "북한총람의 발간은 당시 강인덕(康仁德.전통일부장관)중정 북한
과장이 자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밝혔다. 그는 "다만 냉전 이데올로기로 인해 공개적으로
김일성 항일투쟁사를 언급하는 것이 곤란했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조민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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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 2000-11-22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6)블라디보스토크·빨치산스크
1910년 국권상실 직후 의병들의 거점이었던 포시에트와 크라스키노를 돌아본 취재팀은 블라디
보스토크의 항일투쟁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러시아어로 ‘보스토크(동방)’와 ‘블라디’(정복)
를 합성한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연해주의 중심도시.금각만(金角灣)을 껴안은이 곳은 극동에
있는 러시아의 유일한 부동항(不凍港)으로 1860년대이래 러시아 극동진출의 발판이 돼왔다.특히
1903년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개통되면서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우리 항일투쟁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항일투쟁이 응집된 중요한곳이다.일제를 피해 포시에트
를 떠난 한인들이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이기 때문이다.
해삼위(海蔘威)라고도 불렸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먼저 찾아 나선곳은 뽀그라니치나야 스라보
카 거리였다.구한말 항일운동의 중심역할을 한 개척리가 세워진 곳이다.남향에다 바다로 향한
전망이 좋아 마을이 없던 당시 이주자들이 정을 붙이고 살기에는 최적지로 보였다.
그러나 개척리는 1911년 러시아 당국이 콜레라 근절을 핑계로 수천여명에 이르던 우리 동포들
을 몰아낸 뒤 병영을 지었고,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원형극장이 들어섰다.지금은 중국음식점으로
바뀌었다.
한인들은 쫓겨나기 1년전인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전해지자이상설 이범윤 홍범도 등을
주축으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9월 11일 러시아 극동공화국 당국이 일본의 요구에 따라 성명회와 십삼도의군 간부 200
여명을 체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대동공보’도 이 곳에서 발행됐다.국내 의병장,계몽운동가들
이 모여들면서 이 주변은 한인수가 한때 16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90여년의 긴 세월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을 남김없이지워냈다.기왓장 하나 남아
있지 않은 현실에 취재팀은 안타까움을감출 수 없었다.
개척리를 떠난 동포들은 십여㎞쯤 떨어진 언덕에 새둥지를 틀었다.바로 신한촌(新韓村)이다.그
러나 신한촌은 북향의 경사진 언덕이다.따뜻한 남향의 옥토에서 칼바람 부는 황무지로 옮겨온
우리 동포들의심정은 어땠을까.
우리 동포들은 신한촌에서 1911년 8월29일 한일합방 1주년을 맞아반대시위를 벌였다.그리고 조
국독립과 계몽활동,민족주의교육 등을주창하는 권업회(勸業會)를 창설했다.이 때 홍범도는 20명
의 동지와함께 ‘21의형제 동맹’을 결성했다.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앞서 1912년 신채호 이상설,장도빈 등은 ‘권업신문’을
발간했다.1919년 3월17일에는 고국에서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규모 시위를 가졌다.이듬해
3·1절에는독립문을 세웠다.이렇게 줄기차게 전개된 투쟁 때문에 독립운동사 연구가들은 독립
운동사에서 신한촌을 북간도의 용정과 명동보다 앞선것으로 평가한다.
일본군은 1918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군인 적위군과 차르의 백군간에 벌어진 내전에 국제간섭
군이라는 명분으로 파병해 있었다.1920년4월,일군이 러시아군과 한인부대 연합군과 충돌하자 이
를 기화로 신한촌을 기습하였다.주요 지도자들은 탈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최재형이 동포 60명
과 함께 체포되었다.그는 우수리스크로 끌려가서 처형되었다.
취재팀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를 피해 새로 정착한 빨치산스크로 향했다.우리식으로 수청(水淸)
이라고 이름지어진 이 곳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00㎞쯤 떨어진 산세 험한 소 도시이다.백마
탄 "김일성장군"으로 불렸던 김경천(金擎天) 장군이 이끄는 항일유격대가 치열하게 일본군과 싸
웠던 곳이다.
김경천은 창해(滄海)청년단과 수청고려의병대를 이 곳에서 이끌었다.
광복군사령관을 지낸 이청천(李靑天)보다 일본육사 3년 선배로서 조국 독립에 한몸을 던졌던
김경천.그는 1909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육사에 재학 중 조국이 강점당하는 비운을 겪었다.요
코하마에서 그는이청천 홍사익 등과 함께 뒷날 탈출하자고 결의했다.1919년 6월 그는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했다.
이청천이 중국 땅에 남은 것과 달리 김경천은 1919년 말 러시아로와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
렀다.1920년 4월 일본군의 신한촌 기습에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면한 그는 수청으로 가서 한
인들을 괴롭히는마적들을 제압하고 일본군과 싸웠다.그는 이 때부터 ’백마 탄 김일성 장군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김경천은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도 때때로 러시아 백군과 싸워
볼셰비키 혁명에도 공로를 쌓았지만홍범도가 그랬던 것처럼 강제 이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로 끌려갔다.그리고 1942년 수용소에서 불우하게 사망했다.
광산촌인 빨치산스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자동차는 첩첩산중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갔다.
간신히 3시간만에 도착한 빨치산스크의중심가는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갑자기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한참수소문한 끝에 빨치산스크 시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나탈리아라는여성 관리원의 도
움을 얻어 빨치산 사진과 문헌을 샅샅이 뒤졌지만김경천 등 한국식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한인
빨치산에 관한 어떤 기록도 없었다.기록에 따르면 이 곳에 있던 빨치산 중 절반이 한인이었다
고 하는데 아마 1936년 강제이주 뒤 자료들이 대부분 멸실된 듯 싶었다.나탈리아는 취재팀의
허탈해 하는 표정을 보고 “수장고에 다른자료들이 있는데 관장이 갖고 외출했고 그는 며칠뒤
에야 돌아온다”며 자기가 더 미안해 했다.취재팀은 어쩔 수 없이 벽에 걸린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다 한인으로 보이는 몇사람을 발견한 것을 위안으로삼으며 빨치산스크를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 박재범기자jaebum@kdaily.com.
* 빨치산스크의 고려인들.
빨치산스크에는 고려인(카레이스키)이 간혹 눈에 띄었다.1936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전
원 강제이주된 한인들의 후손들이다.그들은 최근 몇년새 한둘씩 다시 연해주로 돌아오고 있다.
대개 중앙아시아에 가까운 하바로브스크 등 대도시에 자리잡고 있으나 멀리 빨치산스크까지 오
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그러나 그들은 이미 선조들의역사를 잊었다.아니 아예 모르고 있었다.
빨치산스크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러 들어온 한 사람을 만났다.
생김새가 한국사람과 똑같아 “혹시 카레이스키가 아니냐”고 러시아말로 묻자 “그렇다.박이
다”라고 대답했다.“4∼5년전에 중앙아시아에서 이 곳으로 왔다”는 그는 “예전에 이 곳이
독립운동의 거점이었음을 아느냐”는 질문에 ‘처음 듣는 얘기’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바로브스크에는 고려인이 빨치산스크보다 훨씬 많다.고려인들은하바로브스크 시내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 등을 팔거나 구두를 고치는일 등을 주로 하고 있다.그들 역시 중앙아시아가 고향
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바로브스크 등 연해주가 그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뿌리내렸던 곳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역시 극히 드물었다.
박재범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