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
(제1회) 역사소설 <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를 소개함에 있어
(제1회) 역사소설 <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를 소개함에 있어
역사소설 < 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 >를 소개함에 있어
이 역사소설 저자 목영일 박사님은 1936년 황해도 해주 태생으로 해방 후 남하하여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를 졸업, 군필후 도미 뉴욕대에서 공학 석, 박사 학위취득, MBA 취득, 듀뽕(Du Pont)사 중앙연구소 수석 연구원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초청으로 귀국하여 국방과학연구소 연구개발 부장, 아주대 교수, 대학원장, UC버클리 초빙교수, 유네스코 아, 태지역 에너지기구 사무총장, 한국화학공학회, 생물공학회, 기술경영경제학회 학회장,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상, 국방과학상 수상,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전국 과학기술인 협회 이사장등을 역임하셨던 사회지도자급 인물로 인류의 위대하신 대스승 '예수'에 대해 아무런 근거없이 이런 소설역사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자님의 '이 책을 집필하며'를 읽어보시면 종교가 처한 시대적 사명에 누구보다 관심과 애정이 많으시며 과학자적 의문에 대한 학자로서의 소신을 헤아리게 된다.
과학자로서 학자로서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양심은 물론 신앙적으로도 종조(宗祖)에 대한 존경심과 애뜻함이 없이는 이런 책을 내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 글을 씀에 있어 물심양면 큰 힘이 되어준 아들 헌은 현재 목사로 재직중에 있다. 그런 관계로 그의 책은 기독교 신도든 아니든 누가 보아도 수긍이 갈 만한 충분한 사적 史的자료로 무장된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없이는 이런 글을 감히 쓸 수 없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4대 복음서 어디에도 없는 예수의 잃어버린 16년에 대한 의구심과 사생활에 있어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어 항상 궁금하던 차에 이 책을 수령하자마자 밤을 새워 읽어 버렸다.
종종 언론에 보도된 바 있는 성인 예수의 신상과 잃어버린 생애및 기독교와 불교에 관련하여 저술된 서적들은 출판되자마자 보수 기독교 쪽에서 불온서적으로 간주하여 보이는 쪽쪽 책방에서 수거되는 진귀(?)한 현상 때문에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도 중고 서점에서 웃돈을 얹져 본인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며 평소 예수에 대한 신비스런 부분들및 알려지지 않았던 성경의 비밀스런 사실에 대하여 평소 관심이 많았던 차에 이 책을 읽음으로 이때까지 성인 예수에 대한 의문이 해결됨은 물론 인간 예수로서 고뇌하고 치열하게 살아온 예수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 이런 책은 구하기도 어렵고 접근하기도 어려우나 진실을 앎음으로 우리사회는 물론 종교계에서도 상호 불신을 없애고 서로 이해하는 풍토가 조성되어 국민화합에도 크게 기여하리라 하는 생각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많은 걸로 사료되어 본인의 의견없이 저자의 글을 간추려서 소개하고자 한다.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좌) / 이 책의 저자 목영일 박사(우)
저자는 "신학이나 역사, 고고학등에 정규교육을 받은 바가 없다. 다만 이 분야에 대해 30년 독학 자습하였다.
방관자(傍觀者) 청(淸)이라고 하지 않는가? 오히려 그에게 사물이나 사상(事象)이 더 깨끗하게 잘 보일지 모른다. 그는 과학기술과 교육 분야에는 여러 저서를 펴냈으나 그 외의 분야에는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이 책이 처음이다. 그는 이번 저술을 그가 일생 해 온 교육과 피교육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 이 책을 추천하며 고려대 영문학 교수 서지문
저자 목영일 박사의 「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는 기독교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예수의 생애를 원로석학 과학자의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신선함을 더해준다.
이 저서의 특출한 점은 흔히 성경에 대한 연구나 재해석이라면 도전적이고 공격적인 입장이나 어조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책은 지극히 온건하고 부드럽게 이 쳔년 묵은 성경의 의문점들에 대해 지극히 과학적이고 설득력있는 해답을 독자 스스로 얻도록 이끌어 간다.
성경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처녀수태라던가 사후 부활, 예수 생애의 공백기등 전기적 모호성, 사실적 부정확성에 의문을 갖게 마련인데, 저자는 예수에 대한 경의를 유지하며 신선하고 매력있는 해석과 자료를 제시하여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가게 만든다. 이 책을 읽다보면 어느 새 예수와 동행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와 직접 대화하고, 성서에서는 미처 알지 못하였던 예수의 참모습에 감동하게 되고, 예수를 더 인간적으로 가까이 느끼고, 더욱 더 그를 사랑하게 된다.
‘합리적인’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이나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 책이 성경에서 더욱 깊고 정밀한 의미의 단서를 캐낼 수 있게 해 주는 고마운 길잡이이자 따뜻한 벗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의로운 의사 "슈바이처" 그의 명언: "행복의 열쇠는 성공이 아니다"
⊙ 이 책을 집필하며 저자 목 영일 박사
나는 10대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예수를 열심히 믿고, 자주 기도하고, 주일학교 성경공부와 성가대에도 빠지지 않고 잘 다녔다. 나에게 예수는 메시아요, 신의 아들이었다. 그는 자비와 사랑, 진실과 진리의 상징이었다.
나에게 친숙했던 이 예수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바울 같은 서기 1세기 사람들이 그린 「예수의 초상화」였다. 나는 그때 예수의 가르침과 언행 그리고 그의 진면목을 묘사한 「예수의 초상화」는 이것들이 전부인줄 알고 있었다.
나는 20대 후반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처럼 공부하고, 일하고, 가정을 이루며 바쁘게 살았다. 그리고 「예수의 초상화」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냈다. 그런데 30대에 들어서서 내 삶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가 늘 쳐다보던 종래의 예수가 아닌 전혀 새로운 「예수의 초상화」를 접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위대한 인도주의자이며 음악가요, 세계적 철학자이자 신학자로서 아프리카 가봉의 람바레네 Lambarene에서 종신 의료선교사로 헌신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알버트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를 통해서였다.
슈바이처 박사가 1906년에 발간한 그의 저서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서 그가 그린 「예수의 초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몹시 경악했다. 그가 그린 「예수의 초상화」는 1세기 복음서 저자들의 것과는 너무도 판이했기 때문이었다. 실로 충격적이었다.
1세기 것들은 「그리스도」, 즉 「신앙의 그리스도」를 묘사했던 것이고, 슈바이처는 「예수」, 즉 「역사의 예수」를 그렸던 것이다.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서 “예수는 임박한 우주멸망을 경고하는 묵시론적 신비가이고 몽상가였으며,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그일을 감행하는 인물이었고, 그 시도과정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다. 예수는 순전히 그가 가졌던 강력한 개성의 매력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사람을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는 인물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후, 나는 역사적으로 많은 「예수의 초상화」가 그려져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의 신앙을 공인하면서 채택한 「예수의 초상화」, 즉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그리고 바울이 그린 「예수의 초상화」만 남기고, 여기서 배제된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린 수십 개의 「예수의 초상화」들을 거의 다 파괴해 버린 사실도 알게 되었다.
소위 기독교 패권파의 선택에서 제외된 「예수의 초상화」들은 대부분 불태워졌거나 땅 속에 묻혀 자취를 감추었고, ‘예수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은 모진 박해를 받았다.
현대 과학기술은 예수에 대한 사실 史實과 물증을 속속 밝혀내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증거들이 쏟아져 나옴에 따라 여러 수정된 「예수의 초상화」가 더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예수’와 ‘그리스도’는 사실은 동일한 인물이며, 따라서 똑같이, 적어도 비슷하게는 그려져야 할 것인즉, ‘화가’에 따라 왜 이렇게 다른 것인가? 또한 예수는 아시아인이었는데 이제까지 예수상은 다분히 서구적인 것들이다. 서구의 생각과 서구의 감각으로 그린 ‘금발 벽안적’ 그림들이다.
이제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복음서가 주는 예수의 피상적 이미지에는 만족하지 않고 그의 참모습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것이다. 대관절 예수는 어떤 인물이었나? 2000년 전 지구의 궁벽한 한 구석, 서아시아의 작은 땅 팔레스티나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스무 세기 동안이나 두고두고 이 야단일까?
예수의 삶에 대한 진실에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를 역사적 견지에서 바라보는 길이 있다. 물론 다른 길들도 있다. 무조건적 신앙의 길이 있고, 근본주의적 문자주의적 신앙의 길도 있다. 존 쉘비 스퐁 John Shelby Spong주교의 “기독교는 반드시 변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왜?”가 제시하는 길 등 다른 길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하여, ‘예수의 초상을 그리는 화가’로서의 나의 시도는 신앙의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적, 역사적 「예수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나는 예수의 인간적 측면에 강세를 두고 서양사가 아닌 세계사적 접근로를 설정하여, 이 길을 따라 사료 史料의 태부족 상태는 나에게 익숙한 귀납적 방법론을 동원하여 흐름을 이어가며 그림을 그려 나아갔다. 따라서 이 책은 역사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역사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때로는 역사보다 소설이 더 진실하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것이 나의 선택이고 나의 시도이다.
예수의 인물과 삶의 위대함 그리고 거룩함은 그를 신 또는 신의 아들로 볼 때보다는 그를 인간으로 그리고 역사의 틀 속에서 볼 때 몇 십 배, 몇 백 배 가증 加增된다.
어느 길이 더 나은가, 더 옳은가의 판단과 선택은, 그 자체를 유보하는 것을 포함해서, 독자 여러분의 몫이 된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출처] < 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 > ( Jesus' Final Odyssey ) 제1회|작성자 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