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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12,32-48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사에 못 가시는 분들, 병원에서 유튜브 미사 드리시는 분들도 많이
계실 거고요.
또 해외에서는 보통 우리보다 하루가 늦는 데도 있겠지만 아무튼 또 미사에 참석하시는 신자들도 많이 계신 것으로 압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여러 가지 재난이 많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더위라든지 또 홍수, 산사태, 또 거기에다가 또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쟁들.
그 와중에 정말 많은 약자가 피해를 보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새로 교황님이 되신 레오 14세 교황님이 아주 따끔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점점 미사가 쇼가 돼가고 있다. 그리고 사제들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이 광고화 돼가고 있다.
그리고 침묵이라고 하는 거를 핑계 삼아서 의노를 보이지 못한다.
침묵을 용서라고 하는 프레임을 씌워서 바른말을 얘기해야 할 때 세상을 향하여 진실을 얘기하지 못하고 사는 게 교회다.’
그러면서 교황님은 그러셨어요.
‘교황 중심의 가톨릭교회는 나로서 끝이다.’
이제 앞으로 어떤 행보가 전개될지 깜짝깜짝 놀라는 얘기를 계속 요즘 하고 계십니다.
그 양반도 아주 가난한 곳에서 사목하셨죠, 원주민 사목도 하고.
전 교황님도 역시 아르헨티나에서 밑바닥부터 사목하셨어요.
이렇게 두 교황이 연달아서 수도회 사제로서 불의와 싸우고 계십니다.
그전 프란시스 교황님은 예수회 신부님이었고 지금 교황님은 오거스틴 수도회죠.
그런데 이 오거스틴 수도회는 한 500년 전부터 주홍 글씨가 쫓아다니고 있었어요.
그래서 오거스틴 수도회 수도자들은 괜히 주눅이 들어 살았어.
왜 그러냐? 교회를 분열시킨 마틴 루터가 오거스틴 수사 신부였어요.
자기네 수도회에서 이 교회를 가른 마틴 루터가 나왔다는 것이 창피한 거였죠.
그래서 한동안은 아예 그 수도회 자체가 없어졌던 적도 있었어요.
교회로부터 벌을 받은 거죠.
그런데 그 수도회에서 새로운 교황이 나와서 새로운 영적인 종교를 이루려는 하느님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가 아니겠는가!
저는 교황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참 나랑 사이클이 참 잘 맞는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이런 환난의 시대일수록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제들이 필요하죠.
교황도 사제죠.
사제들도 자기 PR이 아니라, 미사를 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교황님처럼 정말 참다운 미사가 돼야 하고,
복음을 전할 때도 진실을 외면하고 신자들한테 사탕만 먹여주는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죠.
그래서 사제들의 강론은 종합 비타민이 되어야 합니다.
잘못한 것을 꾸짖을 때는 준엄하게 꾸짖어야 하고, 마지막에는 희망을 줘야죠.
‘너 같은 죄인도 주님은 사랑하신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 돼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신부님은 시작부터 끝까지 혼내기만 하는 신부님이 있어요.
어떤 신부님은 시작부터 끝까지 돈 얘기만 하는 신부님이 있어요.
신자들이 그걸 듣고서는 무슨 기쁨을 느끼고 가겠느냐 이거죠.
교회는 그런 곳이 돼서는 안 되는 거죠.
그래서 교황님의 그 말씀, ‘미사가 쇼가 돼가고 있다. 사제들의 강론이 광고가 돼가고 있고,
진실 앞에서 침묵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아주 군더더기 없이 딱딱 집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500년 전에 그 수도회 대선배이고 대학자였던 마틴 루터는 교회를 분열시켰지만
500년 후 그 후배가 교황이 돼서 영적인 쇄신을 시작하고 계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닌가!
저는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감곡에 한 번 나갔더니 저녁때가 되니 외국인 노동자들이 바글바글.
근처에 농사고 뭐고 외국인 노동자 없으면 안 돼요.
요 옆도 잡목을 다 베고 묘목을 심었는데, 풀이 나겠죠?.
올해 두 번 깎았어요.
모두 외국인 노동자들이 깎았어요.
3일 전에는 한 4명이 깎는데 마실 것도 좀 가져다주다 보니 자꾸 여자 소리가 들려.
여자가 어딨지, 하고 보니까 풀 깎는 사람이 다 여자들이야.
이야, 돈 벌러 왔겠지만 정말 대단하다. 이 넓은 곳을 여자 4명이.
아무리 더운 나라에서 살았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저거 못해요.
나도 이 땡볕에 풀 한 30분 뽑으면 막 팽팽 도는데, 그분들은 그것을 하더라고요.
여러분들 지금 이 얘기 듣고 뭐 좀 느끼시는 게 있어야 해요.
내가 너무 안이하게 살고 있구나, 편하게만 살고 있구나, 생각하셔야 해요.
그래서 아무튼 저녁에 나가면 얼굴이 시커먼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헤이, 브라더’ 합니다.
인도 쪽에서 온 사람 같은데 나도 하도 새까마니 인도 사람으로 아는 것 같아요.
겨울이 되면 다시 하얘지겠지만, 여기는 어쩔 수 없어요.
내가 카페에 올린 거 있죠, ‘수염과 잡초’. 남자들은 동의하죠?
뽑고 돌아서면 그다음 날 보면 또 자라있어요.
우리 마음속에서도 자꾸 잡초가 나오죠.
고해성사라든지, 말씀을 들으면서 뽑았다고 생각했는데 보면 뿌리가 안 뽑힌 거야.
위에만 잘라내면 그렇죠. 다시 그다음 날 나와.
그래서 어저께 내가 뽑았는데 왜 또 나오나, 가만히 묵상하니까 뿌리째 안 뽑은 거야.
위만 이렇게 그냥 잡아서 뜯어낸 거야. 그러니까 소용이 없지.
거기다가 물은 계속 스프링클러가 돌며 들어가요.
그래서 힘이 들더라도 호미를 가지고 땅을 파더라도 뿌리째 뽑아야 하는구나.
내 마음 안에 있는 어두운 잡초들도 손으로 걷어 훑는 식으로 뽑으니, 뿌리는 그대로 있죠.
그러니 계속 아픈 거예요, 상처도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의 뿌리도 뽑아야 하고 미움의 뿌리도 뽑아야 하고 욕심의 뿌리도 뽑아야 하죠.
뿌리를 뽑는 게 중요한 거죠.
그러지 않으면 다 나와요. 이뻐 보이는 건 단 하루뿐이에요.
제대로 뿌리가 뽑히지 않은 상태로 고해소 들어갔다 나오면 마음 편한 건 단 하루죠.
이틀 지나면 다시 또 어두워져요.
이런 얘기가 있어요.
어느 수도자가 꿈속에서 천국을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기대했어요.
얼마나 편안할까, 아무것도 안 하고 너무너무 행복하겠다.
자기 수도원 선배들이 천국에 와 있었겠죠?
그런데 사는 모습을 보니까 살아있을 때랑 똑같아.
아침 5시에 기상하고, 기도하고, 아침 먹고, 오전 노동, 오후 노동, 하루 네 번 성무일도.
그리고 저녁 8시 되면은 자기 싫어도 자야 해.
‘아니 뭐 천국이 이래, 엄청나게 기대하고 올라왔는데.’
그렇게 꿈에서 깨고 그다음 날 성당에서 묵상하는데, 어젯밤 꿈이 자꾸 분심스러운거야.
그래서 원장 신부님께 상담하면서 ‘원장 신부님 제가 저 정말 천국 가고 싶거든요.’
‘그래야죠, 당연히 천국 가실 거예요.’
‘그런데 어제 꿈에서 보니 여기랑 똑같던데요. 굳이 갈 필요 있겠어요?’
그러니까 원장 신부님이 껄껄껄 웃더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수사님이 잘못 생각하는 게 한 가지가 있어요.’
그래서 무엇이냐 물으니, 명언을 했죠.
‘천국 안에 성인들이 있는 게 아니라, 성인들 안에 천국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 이해하셨어요?
난 이거 이해하는 데 30년 걸렸어요.
이거를 풀이하면 이거예요.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상태의 개념이다.’
물론 우리 교리는 죽으면 천국과 지옥과 연옥을 가죠.
그런데 천국도 발로 밟을 수 있는 땅이 있고 나무도 있는지 아무도 몰라요.
내가 볼 때 그건 아닐 것 같아.
월정리 여기처럼 힐링 하우스도 있고 연못도 있을까?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잖아요.
저 나무도 언젠가 다 죽어요. 연못도 언젠간 무너져요, 이 집도 언젠간 무너져요.
그런데 천국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안 받아요.
성화에도 많이 나와 있어서 우리들은 천국, 지옥, 연옥, 그러면 어떻다고 장소로 생각되지만,
천국은 장소라는 개념이 아니라는 거죠.
분명히 천국은 있겠죠. 연옥도 있고, 지옥도 있어요.
그렇지만 거기는 우리가 감각적이고 잡을 수 있는 그런 개념의 장소가 아니라 상태다.
우리도 보면 똑같은 환경에서도 천국을 사는 사람들이 있고 지옥을 사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가정이 지옥일 수도 있고 천국일 수도 있어요.
부부끼리의 싸움도 천국일 수도 있고 지옥일 수도 있어요.
또 본당 신부와 신자 사이에도 천국의 관계일 수도 있고 지옥의 관계일 수도 있어.
본당 신부 꼴 보기 싫다고 빨리 바뀌게 하는 9일 기도도 있대요.
그러니까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어떤 상태냐, 어떤 상황이냐, 이제 이해되시죠?
아까 원장 신부님이 ‘천국 안에 성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 안에 천국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도 마음이 괴로우면 거기가 천국이에요, 지옥이에요?
지옥임을 나도 체험을 수백 번 했고 여러분들도 수백 번 했을 거예요.
천국은 우리 안에 있어요.
따뜻한 말 한마디 들을 때 내 안에 천국이 생겨요.
사심 없는 미소를 볼 때 내 안에 천국이라고 하는 데가 만들어져요.
제가 ‘카페 궤짝’ 얘기 가끔 하죠.
오늘도 거기 가서 먹을 사람들이 있구먼, 얼굴에 쓰여 있어요.
물론 거기는 돈가스도 맛있고 커피도 맛있는데, 그 좁은 길을 기를 쓰고 가는 줄 아세요?
그 집 식구들 네 명, 아들, 딸, 아버지 엄마 얼굴에 그 미소 때문에 가는 거예요.
장사꾼이 억지로 웃는 미소가 아니에요.
그래서 그 사람들을 보면 치유가 돼서 가요.
들어가는 게 되게 좁아서 앞에 차가 오면 한 차가 뒤로 물러나야 해.
난 거기 들어갈 때마다 화살 기도해요, 앞 차 안 만나게 해달라고.
그렇게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왜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가겠냐, 이거야.
내가 왜 소개하겠느냐, 이거야. 그 집 식구들 얼굴 가서 봐라, 이거죠.
그 네 사람의 얼굴을 보면 천국을 느껴요.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고 천국을 느꼈던 사람도 있겠죠.
여러분들의 우거지상을 보고 연옥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죠.
본당 신부님의 차가운 눈빛을 보고 신자들이 지옥을 느끼고 연옥을 느낄 수도 있죠.
그러니 천국이라는 것은 어떤 장소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보다 상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중심으로 천국의 나라를 갈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얘기해 드릴 거예요.
세 가지가 오늘 독서와 복음에 나와요.
이 세 가지 조건을 채워야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살고,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어요.
세 가지 방법 가운데 첫 번째가 뭐냐?
순명이에요.
오늘 독서에 아브라함 이야기 나오죠.
정말 완전한 천상 고향을 갈망하면서 사는 거예요.
2독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것이에요.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일러 주시니 일러 주시는 대로 갔다’라고 나오죠.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버리고 내가 일러 주는 곳으로 가거라.’ 했을 때,
‘왜요? 왜 그것들을 왜 버리고 가야 해요?’ 따진 적 없어요.
순명이라고 하는 건 선택이 아니에요. 무조건 하는 거예요.
아마 내가 나중에 죽어서 예수님 앞에 섰을 때 ‘너 사제를 타면서 뭐 제일 잘하고 왔냐?’ 물으시면,
‘정말 짜증 난 적 많았지만, 죽을힘을 다해서 순명하다 왔습니다.
지옥에 가래도 가는 마음으로 순명하고 왔습니다.’
실제로 난 그렇게 살았어요.
왜 이런 걸 나한테 요구하실까? 그때 당시는 알아먹을 수가 없어.
나한테 순명을 요구하는 주교가 밉고 교회가 싫었지만,
그래도 아무튼 저 뒤에 하느님의 어떤 뜻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순명했더니,
나중에는 기적이 일어나더라. 이거야.
상상도 할 수 없던 어마어마한 하느님의 역사가 일어나더라. 이거예요.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일러 주시니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일러 주신 대로 간다고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설계자가 되시고 건축가가 되셔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주실 천상 도시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이에요.
어차피 이 지상에서는 우리들은 타향 사람들이야.
우리 원래 고향이 어디예요? 천국이야.
예수님 계신 그 천국이 원래 우리 고향이야.
예수님은 33년 살다가 고향으로 가셨잖아요.
우리들의 고향도 거기야, 이 지구촌 여기는 우리에게는 타향이에요.
70년 80년 살다가 떠나야 하는 타향이에요. 맞죠?
이 지상에서 우리는 나그네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살아야 해요.
2독서 히브리서 11장 13절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갔습니다.’라고 나와요.
이것보다 아름답고 거룩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숨 끊어지기 직전에 내 입에서도 여러분의 입에서도
‘나 김 신부는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주님께 돌아갑니다.’
이런 말을 하고 죽을 수 있다면, 이 한마디를 자신 있게 하고 죽을 수 있다면!
이런 것이 바로 우리의 마지막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죠?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
그 행복은 세상 행복이 아니었어요. 믿음 안에서의 행복이에요.
나는 믿음 안에서 행복하게 살다 갑니다. 그렇듯이 여러분들도 믿음 안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는 것이
요한 바오로 2세의 마지막 유언 말씀이었죠.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다.’
이 지상에서는 내가 손에 쥐고 싶은 것 당장 얻지 못하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하면서
그 너머에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믿음이죠.
물론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이 현실에 무관심하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질서를 지켜라, 이거예요. 순서를 제대로 깨달아라, 이거야.
하느님보다 윗자리에 다른 것을 올려놓지 말라, 이거예요.
그런데 우리들은 하느님보다 윗자리에 다른 것을 올려놓고 살잖아요.
자식이 될 수도 있고, 내 아픈 몸뚱어리가 될 수도 있고, 돈이 될 수도 있고.
오늘 복음에 보면 집사한테 맡기고 떠났잖아요.
그런데 돌아와 보니 내 것도 아닌데 주인이 안 올 줄 알고 흥청망청 신나게 놀다가 걸리죠.
질서와 순서를 지키고 살라는 것이지 이 세상에 무관심하라는 그 뜻은 아니에요.
제발 먼저 하늘을 생각하라는 거예요.
너의 마음 제일 깊은 곳에 하늘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 것은 덤으로 주실 것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다른 것을 먼저 내 안에다 채우잖아요.
항상 자식을 위해 기도했지.
그런데 하다 보니까 하느님보다 자식이 더 높은 자리에 있어.
은총의 비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서 밑으로 쏟지요.
땅에서 거꾸로 올라가는 은총의 비는 없어요.
하느님이 당신 자리에 딱 좌정하고 앉아 계실 때 그 밑으로 질서가 잡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자식을 올려놓고, 돈을 올려놓고,
내 명예를 올려놓고, 내 교만을 올려놓고, 그 무슨 신줏단지처럼 내 상처를 그 위에다 올려다 놓고.
절대 우리는 행복할 수가 없죠.
나그네 인생임을, 세상의 길손임을 제발 깨달으라는 것이지요.
세상에 푹 빠져서 허우적거릴 것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너의 삶을 바라보라는 것이지,
마치 지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너무 악착스럽게 살지 말라는 겁니다.
아멘
악착스럽게 살지 말라는 얘기는 포기할 건 미련 없이 포기하라 그거예요.
물론 영성중에서 제일 어려운 게 ‘포기의 영성’이에요.
세상 것을 포기하면 그 빈 자리를 하느님이 다 채워주시거든요.
아멘
이것이 하늘나라 가기 위한 첫 번째입니다. 어떻게 하라고요?
첫째 자리에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라.
순명,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그냥 일단 ‘네’ 해라.
하늘나라로 가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해 둬야 한다.’
무슨 창고?
오늘 복음에 참 재미난 말이 있어요.
재물이 있는 곳에 뭐가 있다? 네 마음이 있다.
통장이 있는 곳에 통장을 들여다보는 네 마음이 있다. 그렇죠?
손에 끼고 있는 다이아몬드를 볼 때 내 마음은 다이아몬드 안에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기가 막히게 말씀하셨는지 몰라.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어요? 맞아요? 그렇죠.
우리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그 재물 창고를 통장에다 두지 말라는 얘기야,
은행에 쌓아두지 말고 어디다?
하늘 창고에다가 쌓아둬라.
하늘만큼 좋은 곳이 없다고 돼 있죠.
거기에는 도둑이 들어가서 좀 먹는 일도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 외에도 아주 명백하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어떤 내용이에요?
어느 부자가 열심히 일해 추수할 것을 거두어 보니 현재 창고가 모자라.
창고 하나를 또 새로 지었죠.
거기다 가득가득 채워놓고 뒷짐을 지고 창고 2개를 보면서 뿌듯해하며 뭐라 그래요?
‘야 이 정도면 내가 그래도 부자에 속하지. 이제부터 실컷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자.’
이걸 줄여서 ‘쉬먹마즐’이라 그래~
그랬더니 하느님 목소리가 들려, 우르릉 꽝꽝하면서.
‘이놈아 내가 오늘, 네 목숨을 거둬간다면 네가 뿌듯하게 여기는 저 재산은 누구게 되겠냐?
너는 나한테는 그렇게 인색하면서 어떻게 네 자신만 그렇게 챙기냐? 너 숨이 끊어지자마자 네 새끼들 저거 가지고 싸울 거다.’
물론 자식들이 싸운다는 대목은 안 나왔어.
하지만 안 봐도 뻔한 거 아니에요?
아버지 갑자기 죽고 나면 재산 싸움하고 난리 나잖아.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겐 단지 경영권만 있지 소유권은 없어요.
내 생명도 경영할 뿐이야.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머리카락에서 발톱까지 내 마음대로 되는 거 하나도 없어.
난 장갑을 잘 안 끼는데 손으로 계속 풀을 뽑다 보니까 손톱 사이에 때가 계속 껴.
그래서 계속 자르니까 너무 짧아서 아파.
그래서 ‘손톱아, 멈추어라.’ 이러고 싶은데 손톱은 계속 자라.
이거 하나도 내 게 아니야.
손톱 하나도 내 게 아니고, 머리카락 하나도 내 게 아니고.
수염 하나도 내 게 아니잖아요. 날 힘들게 하고 짜증스럽게 하잖아요.
내 거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슬기로운 청지기는 주인이 원하는 대로 잘 경영하다가, 주인이 오셨을 때
‘주인님이 원하시는 대로 저렇게 재산을 늘려놨답니다. 저 한눈판 적 없어요.’ 하면,
‘착하다, 훌륭하다’라고 하면서 상을 받을 것이지만,
주인이 멀리 떠나간 사이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주인 재산을 자기 것인 양 마음대로 쓰다가 주인이 오면
그냥 아주 호되게 혼나는 거죠.
우리에게는 소유권은 없어요.
우리는 이기적인 대명사 쓸 때가 많아요.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내 집 내 차 내 몸뚱아리.
그러니까 조금 아까 얘기한 그 어리석은 부자는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합니다.
공동 번역에 그렇게 나왔어요.
‘내 영혼’. 영혼도 자기 거래.
이제부터 먹고 마시고 실컷 놀고 즐기자?
이놈아, 오늘 내가 네 목숨 걷어가면 어떡할 거여, 그렇게 자신 있어?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는 말이 왜 생겼겠어요?
밤새 죽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예요.
저녁 함께 먹고 그다음 날 아침에 카톡이 와요. 병원에서 친구가 죽은 거야.
심장마비로 죽든 교통사고로 죽든지, 너무너무 내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 입에서는 ‘나의’라는 이기적이고 소유적인 대명사를 쓰면 안 돼요.
난 교우들이랑 대화를 하며 이 사람이 종교인인지 신앙인인지 구별하는 기준 중 하나가 뭐냐?
종교인들은 죽을 때까지 ‘나의’라고 하는 말을 써요.
다 자기 거래요
내 몸뚱아리, 내 자식, 내 딸.
그런데 신앙인들과 얘기하다 보면 깜짝깜짝 놀래요.
‘아 신부님 제 재산이 어디 있어요? 저 움직이게 해주시어. 이렇게 먹고 살게 해주셨어요.’
그 사람 알고 보면 정말 선한데 일 많이 해요.
‘아유 자식이, 신부님 제 게 어디 있습니까? 성모님 자식이죠.’
모든 것을 전부 다 이렇게 사랑의 대명사 양보 대명사 주인한테 돌리는 대명사를 써요.
그래서 우리가 천국 가려면 이 두 번째가 뭐냐?
본인이 소유권자라고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우리는 오로지 경영권자다.
그래야만 내가 천국에다가 재물을 쌓아놓을 수 있다.
우리 주변에 보면 무엇 하나 나보다도 더 가진 것도 없고 만족스러운 것이 없어 보이는데도
감사할 건더기가 없어 보이는데도 감사하면서
오염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게 돼요.
여러분들 본 적 있어요?
그런데 보면 가짜 웃음이 아니고 가짜 행복이 아니라는 거죠.
우리 주변에 보면 숨어서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이들에게는 내적 기쁨이라는 게 있어서 이 기쁨은 누가 뺏어갈 수가 없어요.
아멘
그러면 영적인 재물은 과연 무엇일까?
하늘에다 돈 쌓아두라는 거 아닌 것은 알죠?
다이아몬드를 하늘 위에다가 던지라는 거 아니죠?
영적 재물.
우리가 함께 봉헌하는 미사와 기도도 하늘에 큰 재물을 쌓아두는 겁니다.
또 작은 친절, 따뜻한 말 한마디, 다정한 미소와 사심 없는 봉사, 숨은 선행 이런 모든 것이 바로 영적 재물이에요.
이런 것들이 바로 하늘의 재물을 쌓아두는 재료들이에요.
세 번째, 어차피 유튜브로 다시 볼 수 있어 여러분들이 얼마든지 정리하실 수 있는 겁니다.
세 번째 오늘 복음에 뭐라고 나와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한마디로 사형수처럼 살아라, 이야기예요. 교도소에만 사형수가 있는 거 아니죠?
우리 사형수예요. 아니에요. 언젠간 한 번 죽죠.
언젠간 한 번 죽는 거를 사형수라는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 사형수들이야.
그날 그 시간을 아무도 몰라.
김웅열 신부한테 몇 년이 남아 있는지 모르잖아요.
여러분들한테도 몇 년이 남아 있는지 몰라.
내년 내후년 10년 후에 우리가 다시 몇 명이 와서 만날지 몰라요.
그래서 나는 항상 피정하면서도 미사를 드릴 때도 그래요.
조금 전에도 이 제의 입을 때 하는 기도가 있어요.
‘주님, 오늘 이 미사가 내 생애 마지막 미사처럼 드리게 해 주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미사를 드린다면 어디 분심 잡념이 어디 들어가요.
그리고 복음 읽을 때도 ‘오늘 제 입에서 선포되는 이 말씀이 내 생애 마지막 말씀 선포처럼 힘 있게 나가게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하루를 마지막으로 산다면 우리는 당연히 졸 수가 없어요.
‘오늘 드리는 내 이 묵주 기도가 마지막으로 굴리는 묵주 기도구나.’
어디 묵주 기도하면서 딴생각을 해?
‘오늘 영하는 성체가 내 마지막 성체구나.’
어딜 졸아?
오늘 듣는 이 강론이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 강론이 될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가지면 어디 졸음이 옵니까?
많은 신자가 저한테 ‘신부님 어떻게 해야 성인처럼 돼요?’ 물어봐요.
‘성인처럼 살면 되죠.’ 하면, ‘성인이 어떻게 사셨는데요?’ 물어요.
성인이 어떻게 사셨어요? 지금 답이 이미 다 나왔어요.
하루를 매일 같이 어떻게 해요? 늘 마지막 날처럼 알고 살았어요.
마지막 날처럼 알고 산다면 그 사이에 마귀가 끼어들 틈이 없어요.
우울증이 들어올 틈이 없고.
하루가 마지막으로 안다면 용서 못 할 사람 어딨어요?
포기 못 할 것이 어디 있어?
그런 날들이 모이고 모여서 성인들의 인생이 된 거예요. 그게 비법이야.
성인들은 눈곱만큼도 죄를 안 지었기 때문에 성인이냐? 그건 아니야.
우리처럼 수도 없이 걸려 넘어지고 분노하고 비슷해.
하지만 그분과 우리들과 다른 게 있다면 그분들은 하루가 가기 전에 밤에 철저하게 회개했다는 거예요.
왜? 이 밤에 내가 불려 갈 수도 있기 때문에.
아침에 눈을 뜨면 ‘주님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게 해 주십시오.’
이러한 종말 신앙이 사라지면 그리스도교가 아니에요.
그리스도교는 종말 신앙이야.
종말 신앙이 있어야 우리는 부활을 기대하죠.
매일매일 마지막처럼 사는 삶, 바로 여기에서 삶의 활력이 탄력이 힘이 에너지가 솟아나요.
오늘 못하면 내년에 하면 되지, 하면 마냥 늘어져.
하루밖에 안 남아 있다고 그런다면 1분 1초 얼마나 뜨겁게 살겠어요. 맞죠?
저는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고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벌써 사제 생활 42년이 지나갔잖아요.
그리고 은퇴해서도 그냥 혼자서 아파트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지만, 그래도 사목하잖아요.
바로 이런 것이 진정 살아있는 삶이죠.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을 때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주님’ 대신에 ‘죽음’으로 단어를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또 다르게 와닿아요.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을 때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그래서 어느 자매님이 자기는 연도를 매일매일 바친대요.
그 연도에 ‘누구누구를 위해서’에 자기 세례명을 올린대요.
그러면 느낌이 다르대요.
본인이 ‘안나’면, ‘성 베드로, 안나를 위해 빌으소서.’
그 많은 성인 호칭 기도에 자기 세례명을 집어넣고 하니 열심히 안 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지난번에 택시를 탔더니 내가 사제인 것을 알고 기사가 그래요.
‘대한민국 이러다 다 망해요. 희망이 없어요. 정신들이 썩었어요. 말로만 떠들죠.
정치인이고 종교인이고 실천하는 사람들 없어요. 도덕과 윤리가 무너진 지 오래전이고요.
어른, 애가 없어요. 질서 없어요. 모든 인간관계를 돈으로만 해결하려고 해요.’
택시 기사들이 자기는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난대요.
아들뻘 되는 사람한테 귀싸대기도 맞아보고, 별놈들이 다 있대.
그때 그 기사님의 다소 과격한 표현을 들으며 동의하고 끄덕거려 줬지만, 분명히 맞는 말이었어요.
사회의 병폐를 지적한 말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늘을 잃어버린 결과죠.
사람들이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가질 않아요.
세상에 빠져 있고 현세 지향적이고 교회도 신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회복돼야 합니다.
교황님이 얘기하셨듯이 미사가 쇼가 돼서는 안 되고,
사제들의 강론이 광고가 돼서는 안 되고,
미사 때 예수님이 이 자리에 오시도록 우리들은 준비해야 하는 거죠.
하늘은 회복돼야 하고 그래야만 하늘나라가 우리 안에 머물 수 있죠.
그래서 하늘에 더 나은 고향을 갈망하면서 우리의 재산 재물을 거기다 쌓아둘 때,
하늘을 기다리면서 깨어서 살 때,
비로소 우리 안에 하늘나라가 도래할 것임을 믿습니다.
아멘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사에 못 가시는 분들, 병원에서 유튜브 미사 드리시는 분들도 많이
계실 거고요.
또 해외에서는 보통 우리보다 하루가 늦는 데도 있겠지만 아무튼 또 미사에 참석하시는 신자들도 많이 계신 것으로 압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여러 가지 재난이 많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더위라든지 또 홍수, 산사태, 또 거기에다가 또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쟁들.
그 와중에 정말 많은 약자가 피해를 보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새로 교황님이 되신 레오 14세 교황님이 아주 따끔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점점 미사가 쇼가 돼가고 있다. 그리고 사제들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이 광고화 돼가고 있다.
그리고 침묵이라고 하는 거를 핑계 삼아서 의노를 보이지 못한다.
침묵을 용서라고 하는 프레임을 씌워서 바른말을 얘기해야 할 때 세상을 향하여 진실을 얘기하지 못하고 사는 게 교회다.’
그러면서 교황님은 그러셨어요.
‘교황 중심의 가톨릭교회는 나로서 끝이다.’
이제 앞으로 어떤 행보가 전개될지 깜짝깜짝 놀라는 얘기를 계속 요즘 하고 계십니다.
그 양반도 아주 가난한 곳에서 사목하셨죠, 원주민 사목도 하고.
전 교황님도 역시 아르헨티나에서 밑바닥부터 사목하셨어요.
이렇게 두 교황이 연달아서 수도회 사제로서 불의와 싸우고 계십니다.
그전 프란시스 교황님은 예수회 신부님이었고 지금 교황님은 오거스틴 수도회죠.
그런데 이 오거스틴 수도회는 한 500년 전부터 주홍 글씨가 쫓아다니고 있었어요.
그래서 오거스틴 수도회 수도자들은 괜히 주눅이 들어 살았어.
왜 그러냐? 교회를 분열시킨 마틴 루터가 오거스틴 수사 신부였어요.
자기네 수도회에서 이 교회를 가른 마틴 루터가 나왔다는 것이 창피한 거였죠.
그래서 한동안은 아예 그 수도회 자체가 없어졌던 적도 있었어요.
교회로부터 벌을 받은 거죠.
그런데 그 수도회에서 새로운 교황이 나와서 새로운 영적인 종교를 이루려는 하느님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가 아니겠는가!
저는 교황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참 나랑 사이클이 참 잘 맞는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이런 환난의 시대일수록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제들이 필요하죠.
교황도 사제죠.
사제들도 자기 PR이 아니라, 미사를 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교황님처럼 정말 참다운 미사가 돼야 하고,
복음을 전할 때도 진실을 외면하고 신자들한테 사탕만 먹여주는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죠.
그래서 사제들의 강론은 종합 비타민이 되어야 합니다.
잘못한 것을 꾸짖을 때는 준엄하게 꾸짖어야 하고, 마지막에는 희망을 줘야죠.
‘너 같은 죄인도 주님은 사랑하신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 돼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신부님은 시작부터 끝까지 혼내기만 하는 신부님이 있어요.
어떤 신부님은 시작부터 끝까지 돈 얘기만 하는 신부님이 있어요.
신자들이 그걸 듣고서는 무슨 기쁨을 느끼고 가겠느냐 이거죠.
교회는 그런 곳이 돼서는 안 되는 거죠.
그래서 교황님의 그 말씀, ‘미사가 쇼가 돼가고 있다. 사제들의 강론이 광고가 돼가고 있고,
진실 앞에서 침묵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아주 군더더기 없이 딱딱 집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500년 전에 그 수도회 대선배이고 대학자였던 마틴 루터는 교회를 분열시켰지만
500년 후 그 후배가 교황이 돼서 영적인 쇄신을 시작하고 계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닌가!
저는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감곡에 한 번 나갔더니 저녁때가 되니 외국인 노동자들이 바글바글.
근처에 농사고 뭐고 외국인 노동자 없으면 안 돼요.
요 옆도 잡목을 다 베고 묘목을 심었는데, 풀이 나겠죠?.
올해 두 번 깎았어요.
모두 외국인 노동자들이 깎았어요.
3일 전에는 한 4명이 깎는데 마실 것도 좀 가져다주다 보니 자꾸 여자 소리가 들려.
여자가 어딨지, 하고 보니까 풀 깎는 사람이 다 여자들이야.
이야, 돈 벌러 왔겠지만 정말 대단하다. 이 넓은 곳을 여자 4명이.
아무리 더운 나라에서 살았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저거 못해요.
나도 이 땡볕에 풀 한 30분 뽑으면 막 팽팽 도는데, 그분들은 그것을 하더라고요.
여러분들 지금 이 얘기 듣고 뭐 좀 느끼시는 게 있어야 해요.
내가 너무 안이하게 살고 있구나, 편하게만 살고 있구나, 생각하셔야 해요.
그래서 아무튼 저녁에 나가면 얼굴이 시커먼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헤이, 브라더’ 합니다.
인도 쪽에서 온 사람 같은데 나도 하도 새까마니 인도 사람으로 아는 것 같아요.
겨울이 되면 다시 하얘지겠지만, 여기는 어쩔 수 없어요.
내가 카페에 올린 거 있죠, ‘수염과 잡초’. 남자들은 동의하죠?
뽑고 돌아서면 그다음 날 보면 또 자라있어요.
우리 마음속에서도 자꾸 잡초가 나오죠.
고해성사라든지, 말씀을 들으면서 뽑았다고 생각했는데 보면 뿌리가 안 뽑힌 거야.
위에만 잘라내면 그렇죠. 다시 그다음 날 나와.
그래서 어저께 내가 뽑았는데 왜 또 나오나, 가만히 묵상하니까 뿌리째 안 뽑은 거야.
위만 이렇게 그냥 잡아서 뜯어낸 거야. 그러니까 소용이 없지.
거기다가 물은 계속 스프링클러가 돌며 들어가요.
그래서 힘이 들더라도 호미를 가지고 땅을 파더라도 뿌리째 뽑아야 하는구나.
내 마음 안에 있는 어두운 잡초들도 손으로 걷어 훑는 식으로 뽑으니, 뿌리는 그대로 있죠.
그러니 계속 아픈 거예요, 상처도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의 뿌리도 뽑아야 하고 미움의 뿌리도 뽑아야 하고 욕심의 뿌리도 뽑아야 하죠.
뿌리를 뽑는 게 중요한 거죠.
그러지 않으면 다 나와요. 이뻐 보이는 건 단 하루뿐이에요.
제대로 뿌리가 뽑히지 않은 상태로 고해소 들어갔다 나오면 마음 편한 건 단 하루죠.
이틀 지나면 다시 또 어두워져요.
이런 얘기가 있어요.
어느 수도자가 꿈속에서 천국을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기대했어요.
얼마나 편안할까, 아무것도 안 하고 너무너무 행복하겠다.
자기 수도원 선배들이 천국에 와 있었겠죠?
그런데 사는 모습을 보니까 살아있을 때랑 똑같아.
아침 5시에 기상하고, 기도하고, 아침 먹고, 오전 노동, 오후 노동, 하루 네 번 성무일도.
그리고 저녁 8시 되면은 자기 싫어도 자야 해.
‘아니 뭐 천국이 이래, 엄청나게 기대하고 올라왔는데.’
그렇게 꿈에서 깨고 그다음 날 성당에서 묵상하는데, 어젯밤 꿈이 자꾸 분심스러운거야.
그래서 원장 신부님께 상담하면서 ‘원장 신부님 제가 저 정말 천국 가고 싶거든요.’
‘그래야죠, 당연히 천국 가실 거예요.’
‘그런데 어제 꿈에서 보니 여기랑 똑같던데요. 굳이 갈 필요 있겠어요?’
그러니까 원장 신부님이 껄껄껄 웃더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수사님이 잘못 생각하는 게 한 가지가 있어요.’
그래서 무엇이냐 물으니, 명언을 했죠.
‘천국 안에 성인들이 있는 게 아니라, 성인들 안에 천국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 이해하셨어요?
난 이거 이해하는 데 30년 걸렸어요.
이거를 풀이하면 이거예요.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상태의 개념이다.’
물론 우리 교리는 죽으면 천국과 지옥과 연옥을 가죠.
그런데 천국도 발로 밟을 수 있는 땅이 있고 나무도 있는지 아무도 몰라요.
내가 볼 때 그건 아닐 것 같아.
월정리 여기처럼 힐링 하우스도 있고 연못도 있을까?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잖아요.
저 나무도 언젠가 다 죽어요. 연못도 언젠간 무너져요, 이 집도 언젠간 무너져요.
그런데 천국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안 받아요.
성화에도 많이 나와 있어서 우리들은 천국, 지옥, 연옥, 그러면 어떻다고 장소로 생각되지만,
천국은 장소라는 개념이 아니라는 거죠.
분명히 천국은 있겠죠. 연옥도 있고, 지옥도 있어요.
그렇지만 거기는 우리가 감각적이고 잡을 수 있는 그런 개념의 장소가 아니라 상태다.
우리도 보면 똑같은 환경에서도 천국을 사는 사람들이 있고 지옥을 사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가정이 지옥일 수도 있고 천국일 수도 있어요.
부부끼리의 싸움도 천국일 수도 있고 지옥일 수도 있어요.
또 본당 신부와 신자 사이에도 천국의 관계일 수도 있고 지옥의 관계일 수도 있어.
본당 신부 꼴 보기 싫다고 빨리 바뀌게 하는 9일 기도도 있대요.
그러니까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어떤 상태냐, 어떤 상황이냐, 이제 이해되시죠?
아까 원장 신부님이 ‘천국 안에 성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 안에 천국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도 마음이 괴로우면 거기가 천국이에요, 지옥이에요?
지옥임을 나도 체험을 수백 번 했고 여러분들도 수백 번 했을 거예요.
천국은 우리 안에 있어요.
따뜻한 말 한마디 들을 때 내 안에 천국이 생겨요.
사심 없는 미소를 볼 때 내 안에 천국이라고 하는 데가 만들어져요.
제가 ‘카페 궤짝’ 얘기 가끔 하죠.
오늘도 거기 가서 먹을 사람들이 있구먼, 얼굴에 쓰여 있어요.
물론 거기는 돈가스도 맛있고 커피도 맛있는데, 그 좁은 길을 기를 쓰고 가는 줄 아세요?
그 집 식구들 네 명, 아들, 딸, 아버지 엄마 얼굴에 그 미소 때문에 가는 거예요.
장사꾼이 억지로 웃는 미소가 아니에요.
그래서 그 사람들을 보면 치유가 돼서 가요.
들어가는 게 되게 좁아서 앞에 차가 오면 한 차가 뒤로 물러나야 해.
난 거기 들어갈 때마다 화살 기도해요, 앞 차 안 만나게 해달라고.
그렇게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왜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가겠냐, 이거야.
내가 왜 소개하겠느냐, 이거야. 그 집 식구들 얼굴 가서 봐라, 이거죠.
그 네 사람의 얼굴을 보면 천국을 느껴요.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고 천국을 느꼈던 사람도 있겠죠.
여러분들의 우거지상을 보고 연옥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죠.
본당 신부님의 차가운 눈빛을 보고 신자들이 지옥을 느끼고 연옥을 느낄 수도 있죠.
그러니 천국이라는 것은 어떤 장소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보다 상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중심으로 천국의 나라를 갈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얘기해 드릴 거예요.
세 가지가 오늘 독서와 복음에 나와요.
이 세 가지 조건을 채워야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살고,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어요.
세 가지 방법 가운데 첫 번째가 뭐냐?
순명이에요.
오늘 독서에 아브라함 이야기 나오죠.
정말 완전한 천상 고향을 갈망하면서 사는 거예요.
2독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것이에요.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일러 주시니 일러 주시는 대로 갔다’라고 나오죠.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버리고 내가 일러 주는 곳으로 가거라.’ 했을 때,
‘왜요? 왜 그것들을 왜 버리고 가야 해요?’ 따진 적 없어요.
순명이라고 하는 건 선택이 아니에요. 무조건 하는 거예요.
아마 내가 나중에 죽어서 예수님 앞에 섰을 때 ‘너 사제를 타면서 뭐 제일 잘하고 왔냐?’ 물으시면,
‘정말 짜증 난 적 많았지만, 죽을힘을 다해서 순명하다 왔습니다.
지옥에 가래도 가는 마음으로 순명하고 왔습니다.’
실제로 난 그렇게 살았어요.
왜 이런 걸 나한테 요구하실까? 그때 당시는 알아먹을 수가 없어.
나한테 순명을 요구하는 주교가 밉고 교회가 싫었지만,
그래도 아무튼 저 뒤에 하느님의 어떤 뜻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순명했더니,
나중에는 기적이 일어나더라. 이거야.
상상도 할 수 없던 어마어마한 하느님의 역사가 일어나더라. 이거예요.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일러 주시니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일러 주신 대로 간다고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설계자가 되시고 건축가가 되셔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주실 천상 도시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이에요.
어차피 이 지상에서는 우리들은 타향 사람들이야.
우리 원래 고향이 어디예요? 천국이야.
예수님 계신 그 천국이 원래 우리 고향이야.
예수님은 33년 살다가 고향으로 가셨잖아요.
우리들의 고향도 거기야, 이 지구촌 여기는 우리에게는 타향이에요.
70년 80년 살다가 떠나야 하는 타향이에요. 맞죠?
이 지상에서 우리는 나그네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살아야 해요.
2독서 히브리서 11장 13절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갔습니다.’라고 나와요.
이것보다 아름답고 거룩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숨 끊어지기 직전에 내 입에서도 여러분의 입에서도
‘나 김 신부는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주님께 돌아갑니다.’
이런 말을 하고 죽을 수 있다면, 이 한마디를 자신 있게 하고 죽을 수 있다면!
이런 것이 바로 우리의 마지막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죠?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
그 행복은 세상 행복이 아니었어요. 믿음 안에서의 행복이에요.
나는 믿음 안에서 행복하게 살다 갑니다. 그렇듯이 여러분들도 믿음 안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는 것이
요한 바오로 2세의 마지막 유언 말씀이었죠.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다.’
이 지상에서는 내가 손에 쥐고 싶은 것 당장 얻지 못하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하면서
그 너머에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믿음이죠.
물론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이 현실에 무관심하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질서를 지켜라, 이거예요. 순서를 제대로 깨달아라, 이거야.
하느님보다 윗자리에 다른 것을 올려놓지 말라, 이거예요.
그런데 우리들은 하느님보다 윗자리에 다른 것을 올려놓고 살잖아요.
자식이 될 수도 있고, 내 아픈 몸뚱어리가 될 수도 있고, 돈이 될 수도 있고.
오늘 복음에 보면 집사한테 맡기고 떠났잖아요.
그런데 돌아와 보니 내 것도 아닌데 주인이 안 올 줄 알고 흥청망청 신나게 놀다가 걸리죠.
질서와 순서를 지키고 살라는 것이지 이 세상에 무관심하라는 그 뜻은 아니에요.
제발 먼저 하늘을 생각하라는 거예요.
너의 마음 제일 깊은 곳에 하늘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 것은 덤으로 주실 것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다른 것을 먼저 내 안에다 채우잖아요.
항상 자식을 위해 기도했지.
그런데 하다 보니까 하느님보다 자식이 더 높은 자리에 있어.
은총의 비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서 밑으로 쏟지요.
땅에서 거꾸로 올라가는 은총의 비는 없어요.
하느님이 당신 자리에 딱 좌정하고 앉아 계실 때 그 밑으로 질서가 잡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자식을 올려놓고, 돈을 올려놓고,
내 명예를 올려놓고, 내 교만을 올려놓고, 그 무슨 신줏단지처럼 내 상처를 그 위에다 올려다 놓고.
절대 우리는 행복할 수가 없죠.
나그네 인생임을, 세상의 길손임을 제발 깨달으라는 것이지요.
세상에 푹 빠져서 허우적거릴 것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너의 삶을 바라보라는 것이지,
마치 지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너무 악착스럽게 살지 말라는 겁니다.
아멘
악착스럽게 살지 말라는 얘기는 포기할 건 미련 없이 포기하라 그거예요.
물론 영성중에서 제일 어려운 게 ‘포기의 영성’이에요.
세상 것을 포기하면 그 빈 자리를 하느님이 다 채워주시거든요.
아멘
이것이 하늘나라 가기 위한 첫 번째입니다. 어떻게 하라고요?
첫째 자리에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라.
순명,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그냥 일단 ‘네’ 해라.
하늘나라로 가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해 둬야 한다.’
무슨 창고?
오늘 복음에 참 재미난 말이 있어요.
재물이 있는 곳에 뭐가 있다? 네 마음이 있다.
통장이 있는 곳에 통장을 들여다보는 네 마음이 있다. 그렇죠?
손에 끼고 있는 다이아몬드를 볼 때 내 마음은 다이아몬드 안에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기가 막히게 말씀하셨는지 몰라.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어요? 맞아요? 그렇죠.
우리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그 재물 창고를 통장에다 두지 말라는 얘기야,
은행에 쌓아두지 말고 어디다?
하늘 창고에다가 쌓아둬라.
하늘만큼 좋은 곳이 없다고 돼 있죠.
거기에는 도둑이 들어가서 좀 먹는 일도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 외에도 아주 명백하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어떤 내용이에요?
어느 부자가 열심히 일해 추수할 것을 거두어 보니 현재 창고가 모자라.
창고 하나를 또 새로 지었죠.
거기다 가득가득 채워놓고 뒷짐을 지고 창고 2개를 보면서 뿌듯해하며 뭐라 그래요?
‘야 이 정도면 내가 그래도 부자에 속하지. 이제부터 실컷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자.’
이걸 줄여서 ‘쉬먹마즐’이라 그래~
그랬더니 하느님 목소리가 들려, 우르릉 꽝꽝하면서.
‘이놈아 내가 오늘, 네 목숨을 거둬간다면 네가 뿌듯하게 여기는 저 재산은 누구게 되겠냐?
너는 나한테는 그렇게 인색하면서 어떻게 네 자신만 그렇게 챙기냐? 너 숨이 끊어지자마자 네 새끼들 저거 가지고 싸울 거다.’
물론 자식들이 싸운다는 대목은 안 나왔어.
하지만 안 봐도 뻔한 거 아니에요?
아버지 갑자기 죽고 나면 재산 싸움하고 난리 나잖아.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겐 단지 경영권만 있지 소유권은 없어요.
내 생명도 경영할 뿐이야.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머리카락에서 발톱까지 내 마음대로 되는 거 하나도 없어.
난 장갑을 잘 안 끼는데 손으로 계속 풀을 뽑다 보니까 손톱 사이에 때가 계속 껴.
그래서 계속 자르니까 너무 짧아서 아파.
그래서 ‘손톱아, 멈추어라.’ 이러고 싶은데 손톱은 계속 자라.
이거 하나도 내 게 아니야.
손톱 하나도 내 게 아니고, 머리카락 하나도 내 게 아니고.
수염 하나도 내 게 아니잖아요. 날 힘들게 하고 짜증스럽게 하잖아요.
내 거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슬기로운 청지기는 주인이 원하는 대로 잘 경영하다가, 주인이 오셨을 때
‘주인님이 원하시는 대로 저렇게 재산을 늘려놨답니다. 저 한눈판 적 없어요.’ 하면,
‘착하다, 훌륭하다’라고 하면서 상을 받을 것이지만,
주인이 멀리 떠나간 사이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주인 재산을 자기 것인 양 마음대로 쓰다가 주인이 오면
그냥 아주 호되게 혼나는 거죠.
우리에게는 소유권은 없어요.
우리는 이기적인 대명사 쓸 때가 많아요.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내 집 내 차 내 몸뚱아리.
그러니까 조금 아까 얘기한 그 어리석은 부자는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합니다.
공동 번역에 그렇게 나왔어요.
‘내 영혼’. 영혼도 자기 거래.
이제부터 먹고 마시고 실컷 놀고 즐기자?
이놈아, 오늘 내가 네 목숨 걷어가면 어떡할 거여, 그렇게 자신 있어?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는 말이 왜 생겼겠어요?
밤새 죽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예요.
저녁 함께 먹고 그다음 날 아침에 카톡이 와요. 병원에서 친구가 죽은 거야.
심장마비로 죽든 교통사고로 죽든지, 너무너무 내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 입에서는 ‘나의’라는 이기적이고 소유적인 대명사를 쓰면 안 돼요.
난 교우들이랑 대화를 하며 이 사람이 종교인인지 신앙인인지 구별하는 기준 중 하나가 뭐냐?
종교인들은 죽을 때까지 ‘나의’라고 하는 말을 써요.
다 자기 거래요
내 몸뚱아리, 내 자식, 내 딸.
그런데 신앙인들과 얘기하다 보면 깜짝깜짝 놀래요.
‘아 신부님 제 재산이 어디 있어요? 저 움직이게 해주시어. 이렇게 먹고 살게 해주셨어요.’
그 사람 알고 보면 정말 선한데 일 많이 해요.
‘아유 자식이, 신부님 제 게 어디 있습니까? 성모님 자식이죠.’
모든 것을 전부 다 이렇게 사랑의 대명사 양보 대명사 주인한테 돌리는 대명사를 써요.
그래서 우리가 천국 가려면 이 두 번째가 뭐냐?
본인이 소유권자라고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우리는 오로지 경영권자다.
그래야만 내가 천국에다가 재물을 쌓아놓을 수 있다.
우리 주변에 보면 무엇 하나 나보다도 더 가진 것도 없고 만족스러운 것이 없어 보이는데도
감사할 건더기가 없어 보이는데도 감사하면서
오염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게 돼요.
여러분들 본 적 있어요?
그런데 보면 가짜 웃음이 아니고 가짜 행복이 아니라는 거죠.
우리 주변에 보면 숨어서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이들에게는 내적 기쁨이라는 게 있어서 이 기쁨은 누가 뺏어갈 수가 없어요.
아멘
그러면 영적인 재물은 과연 무엇일까?
하늘에다 돈 쌓아두라는 거 아닌 것은 알죠?
다이아몬드를 하늘 위에다가 던지라는 거 아니죠?
영적 재물.
우리가 함께 봉헌하는 미사와 기도도 하늘에 큰 재물을 쌓아두는 겁니다.
또 작은 친절, 따뜻한 말 한마디, 다정한 미소와 사심 없는 봉사, 숨은 선행 이런 모든 것이 바로 영적 재물이에요.
이런 것들이 바로 하늘의 재물을 쌓아두는 재료들이에요.
세 번째, 어차피 유튜브로 다시 볼 수 있어 여러분들이 얼마든지 정리하실 수 있는 겁니다.
세 번째 오늘 복음에 뭐라고 나와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한마디로 사형수처럼 살아라, 이야기예요. 교도소에만 사형수가 있는 거 아니죠?
우리 사형수예요. 아니에요. 언젠간 한 번 죽죠.
언젠간 한 번 죽는 거를 사형수라는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 사형수들이야.
그날 그 시간을 아무도 몰라.
김웅열 신부한테 몇 년이 남아 있는지 모르잖아요.
여러분들한테도 몇 년이 남아 있는지 몰라.
내년 내후년 10년 후에 우리가 다시 몇 명이 와서 만날지 몰라요.
그래서 나는 항상 피정하면서도 미사를 드릴 때도 그래요.
조금 전에도 이 제의 입을 때 하는 기도가 있어요.
‘주님, 오늘 이 미사가 내 생애 마지막 미사처럼 드리게 해 주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미사를 드린다면 어디 분심 잡념이 어디 들어가요.
그리고 복음 읽을 때도 ‘오늘 제 입에서 선포되는 이 말씀이 내 생애 마지막 말씀 선포처럼 힘 있게 나가게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하루를 마지막으로 산다면 우리는 당연히 졸 수가 없어요.
‘오늘 드리는 내 이 묵주 기도가 마지막으로 굴리는 묵주 기도구나.’
어디 묵주 기도하면서 딴생각을 해?
‘오늘 영하는 성체가 내 마지막 성체구나.’
어딜 졸아?
오늘 듣는 이 강론이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 강론이 될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가지면 어디 졸음이 옵니까?
많은 신자가 저한테 ‘신부님 어떻게 해야 성인처럼 돼요?’ 물어봐요.
‘성인처럼 살면 되죠.’ 하면, ‘성인이 어떻게 사셨는데요?’ 물어요.
성인이 어떻게 사셨어요? 지금 답이 이미 다 나왔어요.
하루를 매일 같이 어떻게 해요? 늘 마지막 날처럼 알고 살았어요.
마지막 날처럼 알고 산다면 그 사이에 마귀가 끼어들 틈이 없어요.
우울증이 들어올 틈이 없고.
하루가 마지막으로 안다면 용서 못 할 사람 어딨어요?
포기 못 할 것이 어디 있어?
그런 날들이 모이고 모여서 성인들의 인생이 된 거예요. 그게 비법이야.
성인들은 눈곱만큼도 죄를 안 지었기 때문에 성인이냐? 그건 아니야.
우리처럼 수도 없이 걸려 넘어지고 분노하고 비슷해.
하지만 그분과 우리들과 다른 게 있다면 그분들은 하루가 가기 전에 밤에 철저하게 회개했다는 거예요.
왜? 이 밤에 내가 불려 갈 수도 있기 때문에.
아침에 눈을 뜨면 ‘주님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게 해 주십시오.’
이러한 종말 신앙이 사라지면 그리스도교가 아니에요.
그리스도교는 종말 신앙이야.
종말 신앙이 있어야 우리는 부활을 기대하죠.
매일매일 마지막처럼 사는 삶, 바로 여기에서 삶의 활력이 탄력이 힘이 에너지가 솟아나요.
오늘 못하면 내년에 하면 되지, 하면 마냥 늘어져.
하루밖에 안 남아 있다고 그런다면 1분 1초 얼마나 뜨겁게 살겠어요. 맞죠?
저는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고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벌써 사제 생활 42년이 지나갔잖아요.
그리고 은퇴해서도 그냥 혼자서 아파트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지만, 그래도 사목하잖아요.
바로 이런 것이 진정 살아있는 삶이죠.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을 때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주님’ 대신에 ‘죽음’으로 단어를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또 다르게 와닿아요.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을 때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그래서 어느 자매님이 자기는 연도를 매일매일 바친대요.
그 연도에 ‘누구누구를 위해서’에 자기 세례명을 올린대요.
그러면 느낌이 다르대요.
본인이 ‘안나’면, ‘성 베드로, 안나를 위해 빌으소서.’
그 많은 성인 호칭 기도에 자기 세례명을 집어넣고 하니 열심히 안 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지난번에 택시를 탔더니 내가 사제인 것을 알고 기사가 그래요.
‘대한민국 이러다 다 망해요. 희망이 없어요. 정신들이 썩었어요. 말로만 떠들죠.
정치인이고 종교인이고 실천하는 사람들 없어요. 도덕과 윤리가 무너진 지 오래전이고요.
어른, 애가 없어요. 질서 없어요. 모든 인간관계를 돈으로만 해결하려고 해요.’
택시 기사들이 자기는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난대요.
아들뻘 되는 사람한테 귀싸대기도 맞아보고, 별놈들이 다 있대.
그때 그 기사님의 다소 과격한 표현을 들으며 동의하고 끄덕거려 줬지만, 분명히 맞는 말이었어요.
사회의 병폐를 지적한 말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늘을 잃어버린 결과죠.
사람들이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가질 않아요.
세상에 빠져 있고 현세 지향적이고 교회도 신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회복돼야 합니다.
교황님이 얘기하셨듯이 미사가 쇼가 돼서는 안 되고,
사제들의 강론이 광고가 돼서는 안 되고,
미사 때 예수님이 이 자리에 오시도록 우리들은 준비해야 하는 거죠.
하늘은 회복돼야 하고 그래야만 하늘나라가 우리 안에 머물 수 있죠.
그래서 하늘에 더 나은 고향을 갈망하면서 우리의 재산 재물을 거기다 쌓아둘 때,
하늘을 기다리면서 깨어서 살 때,
비로소 우리 안에 하늘나라가 도래할 것임을 믿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