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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장희
▲ 인수정 |
우리 종족(宗族)은 뿌리 깊은 나무와 깊은 샘물과 같이 그 연원(淵源)이 2000여년을 넘어 신라초기(新羅初期) 6촌의 촌장회의를 주재(主宰)하신 양산촌장(楊山村長)으로 경주이씨시조(慶州李氏示祖)이신 표암공(瓢岩公) 휘(諱) 알평(謁平)이 우리 종족의 비조(鼻祖)이다.
그 후 일천여년이 지난 고려인종(高麗仁宗)때 경주이씨 48세손 소판공 거명(蘇判公 居明)으로부터 13세손), 승고(升高), 양식(陽植) 형제분에서 우계이씨 시조(始祖) 양식(陽植)로 분적(分籍)되었다.시조께서는 고려(高麗) 상서성(尙書省)의 좌복야(座僕射) 및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중서사인(中書舍人)직(職)을 역임하시면서 휘(諱) 양식공(陽植公) 이하 7세간(七世間) 이백여년을 고려의 저성(著姓)으로 활약했지만 당시 고려(高麗)의 극심한 상극기[(相剋期, 1170년 ~1258년, 고려 무신(武臣) 정중부(鄭中夫) 및 최충헌(崔忠獻)의 난(亂) 등]이후 상계선조(上係先祖)의 영역(榮域)이 실전(失傳)되었다. 우계(羽溪) 강원도 강릉의 옛 지명(地名) 일명(一名) 옥당(玉堂)이라고도 했다. 고구려때는 우곡현(羽谷縣)이라고 불리워졌는데 신라 경덕왕때 우계현(羽溪懸)으로 변경되고 근년에 명주군(溟州郡) 옥계면(玉溪面)이 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부로 강릉시 옥계면으로 변경되었다.
◎ 영주(榮州) 입향조 유래(由來)
▲ 취사별묘(사당) |
우계 이씨(羽溪 李氏)가 영주지역에 터전을 잡기 시작한 것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처가 고장인 순흥(順興)땅에 내려와 은둔(隱遁)한 이억(李薿)으로 부터이다. 그후 그의 현손 수형(秀亨)이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기자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순흥의 도지리(道知里:지금 봉화 沙堤)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마을의 형성은 봉화읍에서 서쪽으로 15리, 영주에서 동북쪽으로 30리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백산(太白山)에서 뻗어 내려온 봉황산(鳳凰山)의 노인봉(老人峯)이 있고, 남쪽에는 사령당 봉화(沙令堂 烽火)가 있으며, 마을 앞에는 낙하암천(洛霞巖川)이 사제와 음평을 중심으로 흘러 가며, 동구(洞口)의 (동산대(東山臺)는 옛 부터 아름답게있어 온아한 곳으로 단종(端宗)이 폐위되고 이곳으로 낙향한 도촌(桃村) 이수형( 李秀亨)이 1465년 마을을 형성한지 570년동안 세거해온 곳이다.
도촌(都村)이란 지명의 유래는 도지미, 도짐, 도촌(桃村), 도촌리(都村里)로 이수형의 호를 따서 처음에는 도촌(桃村)이라고 부르다가 그 뒤 도촌(都村)으로 바뀌어 불려졌다.
우계이씨는 처음에는 경주를 본관으로 했는데, 고려에 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이양식(李陽植)을 시조로 하여 고려 인종 무렵 우계(羽溪:지금 강릉 玉溪)로 분적 했다.
2세 순우(純祐)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提學)으로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지고, 그 증손 구(球)가 18세 소년으로 원나라 과거에 급제, 예빈경(禮賓卿)에 올랐으며, 현손 백경(伯卿)이 영동정(令同正), 그 아들 사성(思誠)이 중추원사(中樞院事)를 지냈는데 그가 곧 영주에 처음 입향한 억(薿)의 아버지로, 대대로 고려에 벼슬을 했다.
수형(秀亨)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분연히 벼슬을 던지고 이곳에 낙향, 사제(沙堤)에 숨어, 단종(端宗)을 사모하는 일념으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아들 대근(大根)이 음보(蔭補)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증손 흥문(興門)이 생원으로 임진왜란에 의병장, 효린(孝麟)이 또한 함께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냈다.
대근의 증손 찬(讚)이 학행으로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 효신(孝信)의 아들 여빈(汝馪)이 선조말에 문과(文科)로 광해군때 조정이 어지러워 벼슬을 버리고 물러와 권간(權奸)을 탄핵하고 순흥 감곡(鑑谷)에 숨어 절조(節操)를 지켰으며, 나라에서 불천위(不遷位)로 내려졌다.
효린(孝麟)의 아들 평(坪)이 진사 ․ 문과로 홍문관부수찬(弘文舘副修撰), 잠(埁)이 문과로 홍문관교리(校理), 홍문의 아들 징도(徵道)가 숙종때 문과로 직강(直講)을 지냈으며, 汝馪(여빈)은 1556년(명종 11)~1631년(인조 9). 자는 덕훈(德薰)이고 호는 취사(炊沙)이며, 참봉 효신(孝信)의 아들로 도촌(桃村) 수형(秀亨)의 현손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현손 귀윤(貴胤)의 딸이다.
그는 순정독실(醇正篤實)한 천품에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다.
▲ 취사의 묘 |
처음엔 한우(韓佑)에게 배우다가,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문하에 들어가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에 까지 두루 섭렵했으며, 문사(文詞)에 능하여 붓을 잡으면 문장이 물 흐르듯 했다.
1591년(선조 2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 증광(增廣)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벽사찰방(碧沙察訪)이 되었으나 병중의 늙은 어머니를 생각하여 사임하고 물러왔다.
1610년(광해군 2) 성균전적(成均典籍)에 승진 되었으나 사양했으며, 이듬해 모친 상사를 당하여 죽을 마시며 3년을 여묘(廬墓)했다.
여빈의 현손 진만(鎭萬)이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 학행으로 추중(推重)되고, 진주(鎭周)가 진사 ․ 문과로 현감(縣監)을 지내는 등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과환(科宦) ․ 문한(文翰)이 잇달아 배출되었다. 감곡(甘谷)은 옛부터 “감실(鑑室)”이라고도 불리어 졌는데 옛날 이 마을 앞에는 “감호(鑑湖)”라고 불리는 못(池)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못에 물이 가득차기를 빌어 그때마다 못에 물이 가득차서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며, 그로 인해 훗날 마을을 감실 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계이씨가 이곳에 터전을 잡은 것은 도촌의 현손(玄孫) 취사 여빈에 의해서이다. 그는 광해초에 벼슬에서 물러와 감실(鑑谷,현재 부석면)에 소요(逍遙)하며 인수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생애를 자적(自適)했다.
그의 <사우록(師友錄)>에는 이희득(李希得) ․ 남몽오(南夢鰲) ․ 금인(琴軔) ․ 이교(李교) ․ 금응훈(琴應勳) ․ 권동보(權東輔) ․ 김부륜(金富倫) ․ 김늑(金玏) ․ 오운(吳澐) ․ 권춘란(權春蘭) ․ 황여일(黃汝一) ․ 김개국(金盖國) ․ 박선장(朴善長)등이 적혀 있다.
그의 저서로 시문(詩文)과 의병활동과 처절한 난리의 온갖 정황을 생생히 서술한 <용사록(龍蛇錄)>이 있어 임진왜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그는 고장의 향토사(鄕土史) 정리에 뜻을 두어 만년에 여러 분야에 걸쳐 자료를 모으고 다듬어 ‘영주지’ 편찬사업이 이루어 졌다.
1625년(인조3) 이산서원(伊山書院)에서 향내(鄕內) 관계인사의 모임을 열어 그 심의를 거치고, 서문(序)까지 써 놓았으나 간행은 보지 못했다. 사제에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 되었다.
감실 마을은 순흥도호부의 2부석의 7동네중 한 곳으로 마구령에서 근원한 임곡천(林谷川)과 미내재(美乃嶺), 자개봉(紫蓋峰)에서 근원한 사문천(沙文川)이 부석에서 합쳐져 동남으로 흘러 낙하암천(落霞岩川)을이루고 있으니 이 물이 감실을 안고 흐른다.
태백과 소백의 양산이 길게 뻗어 봉황이 되어 만나고 낙하암천은 그 아래로 남쪽 10여리를 쉼없이 흘러 감곡에 이르러 산과 물을 평탄하고 온유하게 돌아 흐르게 하고 있으니 이곳은 선비들이 터전을 자리잡을 만한 곳이다.
또한 낙화암천의 맑은 물과 우곡, 도탄, 감실, 석남으로 이어진 10여리의 넓은 들판은 감실의 풍요를 상징한다.
▲ 최초영주지 |
상망동 보름골의 유래를 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계이씨 일족이 강원도 강릉시 우계에서 난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보름(15일) 만에 지금의 보름골에 이르러 터전을 이루어 살게 되었다고 하여 보름 “望” 마을(洞) 자를 써서 망동(望洞)이라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오면서 마을 이름이 한글로 바뀌어져 보름골(上望)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상망(웃보름골) 마을 아래쪽에 있는 아랫 보름골은 아래 하(下)자를 써서 하망동이라 하였다.
우계 이씨는 전국에 1,800여 세대 약 19,000여명이 살고 있으며, 이곳 영주,봉화에 570년을 세거(世居)해 오고있는데 사제(沙堤)에 약80호, 감실(浮石面 甘谷)에 약 30호, 보름골(영주시 上望洞)에 약30호, 알람 (丹山面 玉帶里)에 30호 등 170여호가 살고 있다.
현재, 우계이씨 영주종친회장은 이삼희(73세), 사무국장 이기찬(60세)이 활발한 종무활동으로 칭송을 받고 있으며, 금번 취재는 영주유선회(儒宣會)회원이며 소수서원 별유사인 이교수(66세)께서 많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송인선 실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