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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 (水落山637.7m)
불암산 능선에서 바라본 수락산 전경
수락산(水落山)의 산 이름이 갖는 뜻은 이 산에서 불암산(佛岩山)을 거처 아차산(峨嵯山)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가 되어 동쪽으로 주금산(鑄錦山) 비금계곡에서 발원하는 왕숙천(王宿川)과 서쪽으로 불곡산(佛谷山) 북쪽계곡에서 발원하는 중랑천(中浪川)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큰 강 곧 한강으로 흘러 떨어져 내 천(川)자가 아닌 물 수(水)자의 획을 그어 산의 형세(形勢)가 마치 물이 떨어지는 듯 영락없이 수락(水落)모양이어서 수락산(水落山)이다. 매월당 김시습 (梅月堂 金時習1435~1493)이 세조의 왕위찬탈 후 수락산 동쪽 금류동천(金流洞天;내원암 부근)에 10년간 서울을 등지고 은거하며 눈물을 흘렸다 해서 수락산이라 하는 설도 있다. 이때 얻은 그의 아호는 동봉(東峯;한양 궁성의 동쪽에 있는 수락산을 지칭 )이다. 또 사람들이 하는 말은 이산은 서울주변의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과 더불어 4대 명산이지만 다른 3개의 산에 비하여 비교적 관심도 없어 나도 명산인데 아무도 눈길도 주지 않아 서운함을 눈물로 달랬다하여 수락산이라 한다 하고, 산세가 동쪽으로 한양을 등지고 앉아 금류계곡 수락3류(水落三流)인 금류(金流), 은류(銀流), 옥류(玉流) 등의 폭포가 흘려내려 수락계곡의 비경을 이루니 수락산이라 한다 하기도하고, 때문에 일명 반역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한다.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가 되는 수락산은 멀리서보면 여느 산과 다를 바 없는 산으로 보이지만 막상 산에 올라 보면 정상일대의 두리 뭉실 날카롭지 않은 바위들이 운집하여 그 경치에 감탄하게 된다. 높이에 비하여 동, 서, 남으로 계곡이 잘 발달했다. 정상 일대에는 바위가 많고 사질양토로 등산로에 모래가 깔려 미끄럼에 주의해야한다.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 지척지간에 북한산 도봉산이 건너다보이고 북으로 소요산 동북으로 운악산 천마산이 동쪽으로 멀리 용문산을 비롯 예봉산, 검단산이 보인다. 수락산만의 산행은 3시간 정도가 소요되므로 2시간 소요되는 불암산과 연계하여야 5시간 정도의 산행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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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이 빼어난 경치 나를 오라 불렀네
불암사 주차장에서 바라본 불암산
오늘 산행기점으로 삼은 불암동이다. 여기로부터 불암사 약1km, 불암산 2km이다. 멋진 불암산을 바라보며 07시30분 산행을 시작했다. 35년 전 내가 이곳을 처음 찾았을 적에는 당시 부천 복숭아, 안양 포도, 그리고 이곳 양주배가 경기 3대 명산물이었고 이곳 양주군 별내면은 배 밭이 많았던 전형적이고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다. 오늘 와서 보니 지금도 일부 배 밭이 보이고 인근에 별내 신도시가 들어서 도농이 혼합된 느낌이다.
불암사 마애 입석불
아침인데도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산속으로 차량통행이 빈번하다. 길가에 학생이 “환영합니다!”라는 글이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어 “어디 무슨 행사가 있는가?” 하고 물었더니 천보산 기도원에서 집회가 있단다. 천보산기도원, 천보사, 불암사의 안내판이 있는 길을 따라 오르니 불암사다. 일주문에는 천보산 불암사 (天寶山 佛巖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지리산에서 삼신산 쌍계사(三神山 雙磎寺), 방장산 대원사(方丈山 大源寺)는 누구의 설명 없이도 쉽게 이해가 가지만 불암산 아래에 있는 절에서 천보산이라 하는 것도 이상하지마는 불암산(佛岩山)에서 불암사 (佛岩寺)라 하지 않고 불암사(佛巖寺)라 하는 것도 얼른 이해가 안 된다. 나는 이절 주지스님에게 물어봤지만 원래 불암산은 천보산이 이었다는 것과 불암산 자체가 부처님이시라 불암사에는 따로 부처님을 모실 필요가 없지마는 절에 부처님을 모시지 않으면 찾아오는 불자들이 이상히 여겨 부처님을 모신다는 설명을 들었을 뿐 흡족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암(岩)과 암(巖)은 음도 같지마는 뜻도 동일한 것으로 대개사람들은 생각하는데 엄밀히 분석하면 그렇지가 않다. 암(岩)은 보통바위지만 암(巖)은 월출산 영암(靈巖)같이 신령한 뜻을 가지고 신앙의 대상이 될 때 사용한다. 그래서 바위로 된 부처를 닮은 불암산(佛岩山)이 곧 부처이니 불암사(佛巖寺)라 이름 한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말았다.
滿虛堂相均之塔, 安震湖大禪師錫淵之塔
대웅전 뒤편에 있는 마애불을 둘러보고 나와서 오른쪽 능선 길을 따라 불암산 정상으로 오른다. 조금 오르니 갈림길이 나온다. 서쪽으로 깔닥고개를 거쳐 정상에 오르는 길인데 무난한 길이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사간도 많이 걸리고 험난한 바위투성이 암릉 길을 택하는 이유를 누가 알랴! 오르는 길에 전망 좋은 곳에서는 어김없이 불암동일대의 풍경을 감상했다. 인근 태릉선수촌과 육군사관학교 일대에는 숲이 좋아 보기 드문 말림지대로 보였다. 불암산 바위절벽아래에 있는 석천암을 지나 턱 밑에 계단을 타고 오르니 09시 불암산 정상이다.
석천암 오름길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불암동전경
불암산 암벽아래에 자리잡은 석천암
불암산(佛岩山508m)은 옛적에 필암산(筆巖山), 천보산(天寶山)으로도 불려졌다한다. 화강암으로 된 여러 개의 흰 바위가 뭉쳐서 하나의 산이 되어 왕숙천에서 바라보면 한눈에 멋지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불암산은 이름처럼 불교인이라면 천연 미륵대불로 보였을 터이다. 때문에 천하를 호령하던 왕들도 죽어서만은 부처님 앞에 잠들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이산 남쪽 능선을 타고 걸어서 한 시간 이내의 거리에 아홉 왕이 묻힌 동구릉(東九陵; 사적 제193호)이 있다. 좀 더 가면 방정환선생과 한용운선생 등 수다한 인물들이 묻힌 망우리 공동묘지도 있다. 더 가면 아차산 (峨嵯山285.8m)이 있고 아차산성아래 언덕배기에 워커힐이 있고 언덕아래가 광나루(廣津)다. 지금은 구리시(九里市)로 까지 발전했지만 동구릉이 있는 마을을 아홉 기의 왕릉이 있다 하여 구리(九里) 라 하고, 아홉 왕이 잠든 동구릉(東九陵) 앞을 흐르는 하천을 왕숙천 (王宿川)이라 부른다. 또 일설에는 태조 이성계가 왕자의 난으로 함흥에서 환궁하던 중에 왕숙천 발원지인 주금산(鑄錦山)아래 남양주 진접면 팔야리 (八夜里)에서 여덟 밤을 자고 갔다 해서 왕숙천이라 하기도 한다는 일설이 있기도 하다.
불암산 정상풍경
산은 낮지만 인근에 높은 산들이 없어 조망이 좋아 원근에 내가 올랐던 15개의 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만에 와보니 예전에 없던 계단이 설치되어 오르기는 한결 쉬워졌으나. 바위를 부여잡고 기어오르던 옛적이 훨씬 좋았고 계단을 설치하여 안전에는 도움이 되지만은 경관은 볼품없이 되었다. 어제는 주말이라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텐데 오늘은 비교적 한산하다. 경험상으로 한 주간 가장 등산객이 적은 날이 월요일이다. 나보다 먼저 도착한 별내 신도시에 산다는 당년 88세 된 아버지와 58세 된 아들을 만났다. 외국에 오래 살다가 연로하신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최근에 귀국했다는 아들은 아버지는 매일 이곳에 오른다고 소개했다. 아버지 되신 분은 자신은 평생 불암산 아래를 떠나 살아본 적이 없다했다. 산 아래 수락산남쪽 중랑천 변 상계, 중계, 하계, 월계 등 노원구를 가리키며 30년 전 중랑천 하류 판잣집이 철거되면서 이주민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은 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찬 주거지역으로 변했지만 40년 전만 해도 이름은 서울이지만 저기는 들판이었다며 회고했다.
불암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중랑천 변 노원구일대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문득 북한산 중흥사, 도봉산 망월사에 이어 세조의 왕위찬탈 후 수락산 동쪽 금류동천 상류(지금의 내원암 부근)에 10년간 은거하며 노원초색(蘆原草色)과 수락잔조(水落殘照), 노원즉사(蘆原卽事), 증준상인(贈峻上人)등의 시를 남긴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1435~1493)의 시가 생각났다.
蘆原草色 (노원초색)
長堤細草何毿毿 (장제세초하삼삼) 긴 언덕 가는 풀 어찌 그리 길게 자랐나
萋萋風堤香唵唵 (처처풍제향암암) 수북한 곳 바람일면 향기도 그윽하여라
江淹別浦色愈碧 (강엄별포색유벽) 강 적셔 이별하던 나루터엔 빛도 푸르고
李白漢曲思何堪 (이백한곡사하감) 이백의 한강구비 생각 어찌 참을 손가
蒙茸壟上沒黃犢 (몽용농상몰황독) 몽실몽실한 언덕위엔 송아지 누워 있고
蔥蒨橋邊含翠嵐 (총천교변함취람) 검푸른 다리 가엔 푸른 아지랑이 끼어있네
惹得王孫多少恨 (야득왕손다소한) 왕손의 많은 한 덩어리 되어 자아낼 것인가
淡煙疎雨懷江南 (담연소우회강남) 맑은 연기 섞인 비에 강남이 그리워라!
불암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중랑천(中浪川)은 이름이 그러하듯 옛적에는 큰 비가내리면 물이 넘치는 상습 침수 지역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중랑천 변에는 습지와 호수가 많았던가? 도봉산 도봉서원에 머물던 촌은 유희경(村隱 劉希慶1545~1636)선생이 원족(遠足)을 할 때마다 중랑천을 따라 도봉산에서 광나루를 오갈 때 월계마을을 지나면서 지은 시가 있다.
月溪途中(월계도중)
山含雨氣水生煙 (산함우기수생연) 산은 비기도 머금고 물가에선 안개 피어나는데
靑草湖邊白鷺眠 (청소호변백로면) 푸른 풀 우거진 호수 가엔 백로가 졸고 있네
路入海棠花下轉 (로입해당화하전) 드는 길을 해당화 아래로 굽이 처 돌아드니
滿枝香雪落揮鞭 (만지향설낙휘편) 가지가득 향기로운 눈이 휘두르는 채찍에 떨어지네!
도솔봉 정상의 풍경
가장 멋지게 생긴 하강바위
불암산 정상에서 내려와 능선을 타고 북으로 진행했다. 서울외곽 순환 고속도로가 지나고 수락산과 불암산의 경계가 되는 덕릉고개에 내려섰다가 다시금 수락산으로 오른다. 산 아래 동막골을 내려다보며 수락산에서 첫 번째 만나는 암봉 탱크바위가 있는 도솔봉(兜率峰541m)을 지나서 최고로 멋진 하강바위(564m)를 감상했다. 하강바위는 멋지고 기이하게 생겨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자세히 감상하면 여성에게 없는 남성의 상징물처럼 보여 인기가 대단한 바위다. 혹자는 이 바위에 빌면 불임여성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나? 곰보 바위를 지나고 철모바위를 지나 수락산정상으로 오른다.
수락산정상 풍경
정상주변 풍경
수락산(水落山 637,7m)정상이다. 수락산은 불암산(佛岩山)과 아차산(峨차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북에서 남으로 획을 긋는다. 동쪽에 왕숙천(王宿川)이 주금산(鑄錦山812m) 비금계곡(秘錦溪谷)에서 발원하여 아홉 왕이 잠든 동구릉(東九陵) 앞을 지나 구리시와 남양주시의 경계를 그으며 한강으로 떨어지고, 서쪽의 중랑천(中浪川)은 불곡산(佛谷山)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의정부시와 노원구를 거처 장안평을 지나면서 청계천과 만나 한강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수락산은 물 수(水)자 모양의 획을 완벽하게 그려내어 수락산(水落山)이 된다.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1435~1493)은 수락산에서 10년간 은거하며“노원초색(蘆原草色)”과 “수락잔조(水落殘照)” 등의 시를 남겼다. 호곡 남용익(壺谷 南龍翼1628~1692), 서계 박세당 (文節公 西溪 朴世堂1629~1703)선생 등 수다한 인물들이 수락산에 은거했고 심온 천상병(深溫 千祥炳1930~1993)시인은 수락산 기슭 상계동에 8년간 거주하며 “수락산변”과 “계곡흐름” 등의 시를 남겼다. 서계 박세당 선생과 관련하여 수락산 서쪽 기슭에 서계종택(西溪宗宅)과 서계선생과 아들 정재선생의 묘소가 있다.
수락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석천동 계곡과 건너편 도봉산전경
매월당 김시습 (梅月堂 金時習1435~1493)의 시
水落殘照(수락잔조)
一點二點落霞外 (일점이점낙화외) 차츰차츰 떨어지는 저녁노을 밖으로
三介四介孤鶩歸 (삼개사개고목귀) 서너 마리 오리들 둥지로 돌아가네
峰高利見半山影 (봉고이견반산영) 산봉우리가 높으니 아직도 그늘진 것을 볼 수 있고
水落欲露靑苔磯 (수락욕노청태기) 물이 잦아지니 푸른 이끼들이 드러나려고 하는 구나
去雁低回不能度 (거안저회불능도) 돌아가는 기러기는 낮게 날아 산을 넘지 못하고
寒鴉欲棲還驚飛 (한아욕서환경비) 갈 까마귀 돌아오려다 도로 놀라서 날아가네!
天外極目意何眼 (천외극목의하안) 하늘 밖으로 눈을 들어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데
黔紅倒景搖晴暉 (검홍도경요청휘) 붉은 색이 와 닿는 경치는 맑은 빛이 흔들리누나!
정상에서 내려서면 서쪽으로 장암역으로 내려가는 계단길이 있고 조금 더 가서 내원암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난 계단을 타고 내려서면 내원암을 거쳐 수락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지금의 내원암 부근이 매월당이 10년간 은거했다는 설이 있다. 아래로 43번 도로와 만나는 계곡입구 수락유원지까지 약4km에 이르는 금류동천 계곡에는 금류폭포, 은류폭포, 옥류폭포 등 수락3류(水落三流)가 있다, 매월당의 시
水落山 聖殿庵 (수락산 성전암)
山中伐木響丁丁 (산중벌목향정정) 산속에 나무하는 소리 쩡쩡거리고
處處幽禽弄晩晴 (처처유금농만청) 곳곳에 깊숙히 산새는 늦게 갠 날을 노래한다
棋罷溪翁歸去後 (기파계옹귀거후) 바둑을 마친 개울가 늙은이 돌아간 뒤
綠陰移案讀黃庭 (녹음이안독황정) 시원한 그늘에 책상을 옮기고 황정경을 읽는다.
홈통바위 (일명 기차바위)
북쪽 능선 길을 택하여 직진하여 한 개의 봉우리(608m)에서 내려서는 암벽이 홈통바위(일명 기차바위)다. 홈통을 중심으로 길이 약 20m에 이르는 팔뚝만한 두 개의 밧줄이 달려있어 잡고 오르내린다. 초보자나 고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애를 먹는다. 바위 위쪽이나 아래쪽에서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배꼽을 잡을 만큼 재미가 있다. 가만히 보면 여자보다 남자들이 더 쩔쩔맨다. 오늘도보니 그들 일행 중에 쩔쩔매는 남자를 보고 어느 여성이 농담을 한다. “군대도 안 갔다 왔느냐”고. 옆에 있던 다른 여성이 그녀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여자들은 남자들이 못 낳는 애도 낳지 않느냐”고 거들어 댔다. 나도 속으로 웃으면서 “요즘 여성들이 더 큰 소리치는 세상에 참, 남자 망신 다 시키네”했다. 홈통바위에 내려섰다고 밧줄이 다 끝난 게 아니다. 아래로 여러 차례 밧줄을 잡고 내려서야 끝난다. 이제부터 석천동 계곡을 따라 장암역으로 하산할 참이다. 능선을 따라 3개의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중에 서쪽으로만 방향을 틀면 장암역으로 갈수가 있다. 어느 길을 택하던 급경사를 내려서는데 석천계곡 숲속에는 때는 구월인데 가는 세월 아쉬운지 매미소리도 요란하다. 좀 더 가니 파란 지붕의 석림사가 나오고 이어 노강서원이 나왔다.
노강서원 전경
노강서원(鷺江書院 시도 기념물 제41호)이다. 이 서원은 영남의 서원들처럼 규모가 크지도 않고 역사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노강서원은 서계 박세당 (文節公 西溪 朴世堂1629~1703)선생의 둘째아들 정재 박태보(定齋 朴泰輔1654~1689)선생이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숙종임금의 노여움을 사 진도로 귀양 가는 길에 36세로 노량진에서 별세 했다. 정재선생을 추모하여 노량진에 서원이 처음 건립되었던 것을 1989년 그의 고향이며 아버지 서계선생이 묻힌 수락산 기슭에 이건 되었다. 그래서 수락산 기슭에 있으면서 노강서원 이름은 노량진 곧 노들 강을 뜻한다. 생전에 정재선생이 남긴 시 중에 두 편을 감상해 본다.
踰水落山腰 (유수락산요)
溪路幾回轉 (계로기회전) 골짜기 길 몇 번을 돌고 돌아
中峰處處看 (중봉처처간) 산봉우리 여기저기 바라보노라苔巖秋色靜 (태암추색정) 이끼 낀 바위에는 가을빛 맑고
松籟暮聲寒 (송뢰모성한) 솔바람부니 날 저물어 더욱 차구나
隱日行林好 (은일행림호) 해가진 숲길은 걷기에 좋고
迷煙出谷難 (미연출곡난) 자욱한 안개에 골짜기 벗어나기 어렵네
逢人問前路 (봉인문전로) 사람을 만나 앞으로 갈 길을 물으니
遙指赤雲端 (요지적운단) 저 멀리 붉은 구름 끝을 가리키네!
落花巖 (낙화암)
風雨年年滿古臺 (풍우년년만고대) 비바람은 해마다 언덕위에 몰아치고
君王不復賞花來 (군왕부복상화래) 왕은 영영 꽃구경을 하러오지 못 하누나
千秋過客傷心地 (천추과객상심지) 천년토록 나그네들 이 땅에서 슬퍼하니
莫遺殘芳近水開 (막유잔방근수개) 꽃들아 강기슭에서 무심히 들 피지마라!
석천동 계곡풍경
다산 정약용선생과 교우했던 실학자 문절공 서계 박세당 (文節公 西溪 朴世堂1629~1703)선생은 매월당 김시습 (梅月堂 金時習1435~1493)에 이어 수락산을 사랑한 사람으로 마흔 살에 석천동에 들어와 은거했다. 청풍정유지(淸風亭遺址)는 서계 박세당선생이 충렬사를 지어 김시습을 배향했던 곳으로 지금은 터만 남았다. 서계는 매월당을 흠모해 매월당 김시습의 아호 동봉(東峰 수락산을 지칭)을 대칭해 그의 호를 서계(西溪;수락산 서쪽계곡 곧 석천동 계곡을 뜻함) 라 하고 서계는 처남인 남구만(南九萬1629~1711)과 담소를 나누던 석천동 계곡 궤산정(簣山亭) 부근에 남구만이 쓴 石泉洞(서천동)이라는 바위 글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넓은 잔디 정원과 노거수가 우거진 서계종택 풍경
석천동천(石川洞天) 입구 서계종택(西溪宗宅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93호)이다. 계곡입구 수락산줄기가 내려앉은 언덕에 은행나무 등 노거수가 우거진 숲속에 계곡 도로에서 보아도 고풍스런 한옥이 보인다. 이집이 서계 종택이다. 어떤 안내 표지판에는 서계종택이라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안내판에서는 서계고택이라 적혀있다. 내가 생각해도 약간은 혼동스럽다. 이는 서계 생존 시에 지어진 건물은 서계선생이 학문을 강론하고 손님을 맞이하던 사랑채 하나뿐이고, 종손이 살고 있는 살림집은 서계선생의 사후에 지어진 건물이다. 종택 정문은 굳게 닫혀있다. 주말에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오늘은 월요일이라 쉬는 걸까? 안내문에는 문화재 해설위원의 안내를 받은 사람만이 관람을 할 수 있다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갈수는 없지 않는가? 주인을 만나 서계선생이 남긴 한시 중에서 대표적인 한시 두 편을 가능하면 소개 받기로 하고 왔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으니 문제가 생겼다.
서계종택 사랑채 앞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도봉산 전경
대문에서 종택을 들여다봤다. 잔디가 깔린 드넓은 정원이다. 사랑채에는 방문이 열렸고 여러 사람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관람 시간이 아닌 이때에 등산복 차림의 내가 들어가면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겠지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닫혀 진 문 틈바구니로 비집고 들어섰다. 고풍스런 한옥에 뜰 앞에는 보호수 시 나무로 지정된 은행나무 등 노거수가 우거지고 수락산 산자락이 꼬리를 내리는 이곳에 사랑채 정면으로 도봉산이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오후에 와서 산그늘이 져 도봉산이 검게 보이나 해 뜰 무렵에 왔더라면 저 도봉산 하얀 암봉들이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보였으리라! 그런데, 내가 사진을 찍는다고 정원을 두 바뀌 째 돌고 있는데도 누군가 나를 보았을 터인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보아하니 모르긴 해도 문중에 중대사가 있는 모양이다. 나의 뜻을 이루려고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꿈을 접고 종택을 나왔다. 종택 앞 석천동 계곡입구 마을이 산행들머리다. 수락산행 5회째인 오늘 수락산 총정리를 한다는 생각으로 느긋하게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단독산행을 했다. 식당에서 마지막 휴식을 취한 다음 길 건너 장암역에 도착하니 14시50분이더라.
불암동~불암사~석천암~불암산정상~덕능고개~도솔봉 수락산정상~홈통바위~노강서원~서계종택~장암역 약14km에 7시간 20분간 산행이다.
2013년 9월2일 월요일 가끔 구름
첫댓글 좋은 산행하셨네요
산과 막걸리님께서는 가까이 사시니까 수락산과 도봉산은 자주 가시지요?
수도권에는 좋은 산들이 많아서 참 좋겠습니다.
저는 자주 갈수 없는 산이라 5시간 정도의 거리를
2시간 이상 연장하면서 즐거이 산행했습니다.
엄청난 크기의 기차바위 대단해요
수락산의 풍광도 시원스럽고, 멀리 보이는
도봉산의 자태도 예사롭지 않네요. 저도 등산 마니아입니다.
수도권 근처산도 이렇게 좋은곳이 많네요. 사진 자주 올려주세요. 감사합니다.
한달 후 일교차가 더 벌어질 때 갔으면 조망이 더 좋았을 텐데,
더울 때 가서 시야가 그리 깨끗하지 못 하네요.
이제부터는 억새산행과 단풍산행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연예인은 박수를 듣고 자라고, 法泉님의 격려처럼 저는 격려의 말씀을 듣고 자라지요.
산행과 어울어진 시소개 멋지게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주 찾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