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5가해15-2-1.zip
규봉:本論에 다만 세 가지 일(根, 境, 識:6근, 6경, 6식)을 색등으로 삼아 가리키신 것이니 自身과 報恩과 과보를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偈에 이르되 “자신 및 보은, 과보에 집착하지 말고 자기를 위하여 보시하지 말며, 별다른 수행(異事)을 구함도 막으신 것이라” 했다.
六祖:言復次者는 連前起後之辭니라 凡夫布施는 只求身相端嚴과 五欲快樂故로 報盡하면 卽墮三塗이기에 世尊이 大慈로 敎行無相布施하여 不求身相端嚴五欲快樂하고 但令乃破?心하고 外利益一切衆生이니 如是相應을 是名不住色布施니라
육조:復次라 한 것은 앞을 이어서 뒷말을 일으키는 말이다. 범부의 보시는 다만 몸의 단정하고 엄숙함과 오욕의 쾌락을 구하므로 과보가 다하면 곧 三途(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지기에 세존께서 대자비로 무상보시를 행할 것을 가르쳐 단엄한 몸 모양과 오욕쾌락을 구하지 않고 다만 안으로는 아끼고 간탐하는 마음을 깨뜨리고 밖으로는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니, 이와 같이 서로 응하는 것을 집착하지 않고 보시한다 하는 것이다.
圭峰:三은 總結이라
규봉:③은 전체를 맺는 말씀이다.
須菩提야 菩薩은 應如是布施하고 不住於相이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베풀되 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니라.
淸峯:보시는 과보를 바라는 탐욕을 내지 않아야 참 복덕을 짓는 것이니 집착함이 없고, 베풀었다 하는 상을 내지 말아야 참 보시가 되는 것이다.
圭峰:前에는 但指三事이나 今則心境空有를 微細盡?니라 故로 偈에 云하되 遠離取相心이라하다 論에 云하되 不見施物受者施者라하다 無着은 云하되 不住相想이라하다 有人이 將此結文하여 爲別答降伏이라하나 非也니라 前標次釋此結이 皆云無住가 都是脩中降伏之義인데 何忽偏配結文하여 爲別答問이리오
규봉:앞에서는 세 가지(三事)만 가리켰으나 지금은 마음과, 경계와, 비어 있음의 미세한 것까지 모두 제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偈에 이르되 “상을 취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고 하였다. 論에 이르되 “施物(보시물), 受者(받는 자), 施者(주는 자)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無着은 이르되 “相을 집착하는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이 글을 맺으면서 항복을 달리 표현한 답이라 하나, 틀린 것이다. 앞의 표한 것은 다음에 이 맺음의 글을 해석함이 모두가 “머묾이 없다”하는 것은 모두가 수행 가운데 마음을 항복한다는 뜻인데, 어찌 문득 결론적인 글에 치우쳐서 분별해서 달리 답한 것이라고 하겠는가?
六祖:應如無相心布施者는 爲無能施之心이고 不見有施之物이며 不分別受施之人이 是不住相布施也니라
육조:마땅히 상이 없는 마음으로 베푼다는 것은, 능히 베푼다는 마음도 없고 베푸는 물건도 생각하지 않으며 받는 사람도 분별하지 않는 이것을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라 하는 것이다.
圭峰:四는 顯益이라
규봉:④는 이익을 드러내신 것이다.
何以故하면 若菩薩이 不住相布施하면 其福德이 不可思量이니라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않고 베풀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라.
淸峯:보시는 탐욕을 내지 않아야 참 복을 짓는 것이다. 따라서 집착함이 없고 상을 내지 않아야 참 보시가 되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說誼:以智起行하면 獲福無邊이로다
설의:지혜로써 행함을 일으키면 복 얻음이 가이 없도다.
청봉착어:베풀되 베풀었다는 집착이 없으면 이것이 무상주 보시라 그 복덕이 한량없는 것이다.
六祖:菩薩이 行施에 心無所希이면 其所獲福이 如十方虛空하여 不可較量이니라 一說에 布者는 普也요 施者는 散也이니 能普散盡胸中의 妄念習氣煩惱하여 四相이 泯絶하여 無所蘊積이 是眞布施라 하며 又說하되 布者는 普也니 不住六塵境界하며 又不有漏分別하고 惟常返歸淸淨하여 了萬法空寂이라 하니 若不了此意하면 惟增諸業이니 故須內除貪愛하고 外行布施하여 內外相應하여야 獲福無量이니라 見人作惡이라도 不見其過이며 自性에 不生分別이 是爲離相이니라 依敎修行하여 心無能所가 卽是善法이라 修行人이 心有能所이면 不名善法이며 能所心이 不滅하면 終不得解脫이니 念念常行般若智하여야 其福이 無量無邊이니라 依如是修行하면 感得一切人天하여 恭敬供養하리니 是名爲福德이니라 常行不住相布施하여 普敬一切含生하면 其功德이 無有邊際하여 不可稱計也니라
육조:보살이 보시를 행함에 마음에 바라는 것이 없으면 그 얻는 복이 시방의 허공과 같아서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一說로 布란 넓다(普)요 施란 흩는다는 것(散)이니 가슴속에 있는 모든 망념, 습관, 번뇌를 능히 널리 흩어버리고 四相이 끊어 없어져서 오온의 집착으로 쌓임이 있지 않게 하는 것이 참 보시라 하며, 또 말하기는 布란 普니 육진 경계에 끄달리지 않으며 또 쌓여 흩어지는 것(有漏)의 分別도 하지 않고 오직 항상 청정한 데 돌아가서 일체가 공적함을 요달하는 것이라 하니, 만약 이 뜻을 요달하지 못하면 오직 모든 업만 더하므로 모름지기 안으로 탐애함을 없애고 밖으로 보시를 행해서 내외가 항상 따라야 복 얻음이 무량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악한 짓을 하는 것을 보아도 그 허물을 보려 하지 않으며 자성 가운데 분별을 내지 않음이 상을 여읜 것이다.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해서 마음에 주객의 차별(能所)이 없는 것이 바른 법(善法)인 것이다. 수행인이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바른 법이라 하지 아니하며 능소심이 멸하지 않으면 마침내 해탈을 얻지 못하니 생각생각 항상 반야지혜를 행하여야 그 복이 무량무변한 것이 된다.
이 같은 수행에 의지하면 일체 인간과 천상의 감응함을 얻게 되어 공경하고 공양함이 따르리니 이것을 복덕(복과 지혜인 양족존)이라 하는 것이다.
항상함에 머물지(執着)않고 보시를 행하여 널리 모든 생명을 공경하면 그 공덕이 끝이 없어서 가히 헤아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