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263명 ‘반민특위’ 殺生簿 초안 공개
임 정 국무위원 김승학이 金 九 지시로 작성한
이덕일 역사 평론가
“월간중앙”은
1948년 백범 김 구와 임 정 계열이 지목한 숙청 대상
친일 인사들의 명단 초안을
단독입수해 공개한다.
친일파 숙청의 민족사적 임무를 띠고 출범한 ‘반민특위'는
1949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강제 해산되기 전까지
7,000여명의 혐의자를 조사해 이중 221명을 기소했다.
그러나 기소된 친일 인사 중 재판이 종결된 자는 불과
38인,
그나마 전원이 집행유예 등으로 풀려나 실제로 처벌받은 민족반역자는 단 1명도 없었다.
이번에 “월간중앙”이 입수한 친일파 명단은 희산 김승학이 작성한 육필 원고를 통해 밝혀졌다.
김승학은 일반인에게는 생소하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남만주의 독립군을 이끌었던 ‘투사'이자,
상하이 “독립신문” 사장을 역임한 ‘언론인',
그리고 해방후에는 “한국독립사”를 편찬한 ‘역사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육필 원고가 비상한 관심을 끄는 이유는
1948년 원고 작성 당시의 김승학의 위치와 지위에 있다.
그는 이 명단을 작성할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자 정치부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해 구성된 ‘반민특위' 재판관과 검찰관 17인
중 12인의 명단을 정확히 예견하고 있다.
그가 임정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볼 때
이 육필 원고의 친일파 리스트는 ‘
반민특위' 친일파 명단의 초안, 또는 기초자료로 활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 자료에는 ‘반민특위'와 친일파에 대한 백범 김 구,
‘임정파’의 판단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식민지 잔재 청산의 ‘처절한 실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편집자>
2001년 7월12일 오후 2시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는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 선생
공훈선양 학술강연회’가 순국선열유족회 주최로 열리고 있었다.
김승학은 일반에게는 생소하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남만주의 독립군을 이끌었던 장군이자,
상하이 “독립신문” 사장을 역임한 언론인
그리고 해방후 한국독립사를 편찬한 역사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관심끄는 육필 친일파 명단
이날 고인의 120세 생일을 맞이해 열린 강연회 현장에서는
김승학 선생이 직접 쓴 친필 사료들 몇 점이 공개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갱지에 흐릿한 붓으로
쓴
‘반민족특별재판소 재판관·검찰관’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사료였다.
그 뒷장에는 ‘친일파 군상’(群像)이라는 중간제목 아래
‘(1)정계·관계·실업계 인물’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고 친일파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친일파 명단 아래에는
옛날 시골 학교에서 반장선거 때 했던 방식대로
‘정’(正)자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많은 경우는
‘正’자 셋, 즉 15부터 ‘一’까지 매겨져 있었다.
이 육필 원고는
반민특위와 친일파들의 명단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는데,
그 이유는 숫자를 부기한 친일파 명단에도 있었지만 그보다 원고 작성 당시 김승학의 지위 때문이었다.
김승학은
친필 명단 작성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자 정치부장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 원고는 김승학이 당시 임정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볼 때 단순히 개인 의사로 기록한 명단이 아니라
반민특위와 친일파에 대한 임정측 판단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관심을 끈 것이다.
친일파 문제에 대한 임정측 견해
김승학은 1948년 4월 임정 국무위원 겸 정치부장에 피선되었으며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도 겸하고 있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정 주도 정당이었으므로
김승학은 임정 내의 위치로 보나 한국독립당 내의 위치로 보나 당시 독립운동가 진영의 핵심인물이었다.
한국독립당은
1940년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조소앙(趙素昻)의 한국독립당 등이 합당해
중국에서 결성된,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주류이자
임시정부의 집권당이었다.
환국 후인 1946년 4월에는 조선국민당·신한민족당과
합당했으나
당명은 여전히 한국독립당이었고, 역시 임정이 주도하는 정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은 반탁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 좌우 합작과
남북협상 통일정부 수립 등의 노선을 갖고 있었으므로
1948년 5월10일 치러진 남한만의 단독선거에는 불참했기 때문에 의회에는 일부 무소속 외에는 진출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정은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들을 옹호하고, 심지어 이들로 하여금 독립운동가들을 억압하게 하는 데 커다란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일제 시기 많은 고난을 겪었던 김승학도
1948년 3월 신탁통치 반대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정도로 해방된 조국의 모습은 굴절되어 있었고,
해방 후에도 친일파들이 활개치는 모습은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통탄해 마지않던 바였다.
그러나 비록 한국독립당의 선거 불참 속에 구성된 국회지만
제헌국회는 개회 벽두부터 친일파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1948년 8월5일 국회의장 신익희의 사회로 열린 국회 제40차 본회의에서
김웅진(金雄鎭)의원(파주. 무소속) 의원 등이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 특별위원회’의 구성안을 긴급동의해 재적 155명의 의원 중 가 105, 부 16표의 압도적 지지로 가결되었다.
다음날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위원회 위원장에 김웅진, 부위원장에 김상돈(金相敦)이 선출되었고,
8월17일에는 김웅진 의원 외 27인의 이름으로
국회에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이 제출돼 9월7일의 제59차 본회의에서 재적 141인 중 가 103, 부 6표로 가결되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48년 9월 3일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반시킬 때가 아니다”라는 담화를 발표해 반민특위 구성
움직임에 제동을 걸려 했다.
그러나 온 국민의 열화와 같은 폭발적 반응에 밀려 법안은 9월21일 국무회의에 상정됐다.
특별재판부에 국회의원이 포함되는 것은 삼권분립 정신에 배치되는 사법권 침해라는 일부 국무위원의 반론이
있었으나
결국 22일 법률 제3호로 공포됐다.
이렇듯 친일파 숙청 문제가 공론화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의 결성이 기정사실화되자
정부나 국회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임정측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해야 했다.
단독정부, 단독국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친일파 숙청 문제까지 방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승학의 이 육필 명단이 주목받는 것은
임정측의 이런 필요에 의해 작성되었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임정측의 이런 필요성이 아니라면
김승학 개인이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연필로 꼼꼼히
옮겨 적고,
아마도 동지들과 같이 한 것이 분명한 ‘正’표시를 부기했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베일에 가려졌던 “친일파 군상”의 육필 초고
이 육필 명단은 그냥
사장되지 않았다.
반민특위 설치 법안이 공포될 무렵인
1948년 9월,
준비했다는 듯이 “친일파 군상”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삼성문화사에서 나온
이 책의 발간 경위는
그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이 책의 편찬자는 ‘민족정경문화연구소’이지만
그간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민족정경문화연구소가 어떤 성격의 조직이고
어떤 인물들이 관여하고 있었는지는 베일에 가려 있었다.
그런데 김승학의 육필 명단은
베일에 가려졌던 삼성문화사의 “친일파
군상”이
김승학의 육필 명단을 기초로 편찬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책은 ‘예상등장인물’이라는 부제가
붙었는데
이는 책이 반민특위를 겨냥해 출간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상등장인물’이라는 부제는
여기에 실려 있는 인물들이
반민특위에서 조사받아야 한다는 적극적 의사표시로 볼
수 있다.
이런 의사는 당시 김승학이
임정과 한국독립당 내에서 점하고 있던 위치로 볼 때
단순한 개인 의사가 아니라
임정측 입장임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임정 측의 입장이 반영된 이 자료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당시 한독당 김구 주석은 물론 임정계열의 여러 핵심 인사와 면밀한 토론과 합의 과정을 거쳤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다시 말해 ‘친일파 군상’의 초고가 거의 확실해
보이는 이 육필자료는 김구와 임정계열의 친일파 청산
의지와 방법론, 청산 대상을 기록한 거의 유일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정은 비록 단독정부와 단독국회는 거부했으나
임정이나 한독당 명의 대신 ‘민족정경문화연구소’ 명의로
반민특위와 친일파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표명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육필 명단에 친일파뿐만 아니라
이들 신상을 처리할 재판관, 검찰관의 명단까지 적어 두었다는 점 때문에 신빙성을 갖는다.
미리 예상한 반민특위 재판관, 검찰관 명단
반민특위 위원이나
재판부·검찰관 등의
명단이 “친일파 군상”에는 누락되어
있는데 반해 육필 명단에는 수록되어 있다. 이때는 아직 반민특위 구성원이나 특별재판관, 검찰관이
채 선정되지 않았을
때다. 육필 원고의 ‘반민법특별 재판관·검찰관’ 명단 중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위원장
김상덕(金尙德)이 포함되어 있다. 부위원장 김상돈과 10명의
조사위원 명단은 누락되었으나 실제 구성된 특별재판부와
검찰부 구성원은 육필 명단과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다.
특별재판부의
재판관장 김병로와
제1재판부 재판관 오택관·홍순옥·김호정과,
제2재판부 재판장 노진설 재판관과 고평·신현기·김장렬,
제3재판부 재판장 서순영과 재판관 이춘호·최영환·최국현
등
이 그들로 16명의 재판관 중 명단에 오른
인사가 12명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특별검찰부의
검찰장관 권승렬과
검찰관 차장 노일환을 비롯해
검찰관 서성달·곽상훈·이의식·심상준·김웅진·서용길·이종성 등 9명의 검찰관 중 7명의 검찰관이 모두
육필 원고에 들어 있다. 육필 명단의 신현상은 나중에
특별검찰관으로 선임되었다.
특별재판부나 검찰부가 선임되기 이전에 작성된 육필
명단이 거의 그대로 적중하고 있다는 것은
친일파 숙청 문제에 관한 한 임정측 견해가 상당부분 반영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는 반민특위가 임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일파 263명 ‘반민특위’ 殺生簿 초안 최초공개
임 정 국무위원 김승학이 金 九 지시로 작성한
친일파에 대한 임정측 자세
친일파 문제에 대한 임정측 시각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는 “친일파 군상”은 의외일 정도로 신중하다.
이 책의 범례(凡例) 1을 보자.
‘본집(本輯)에 등재된 전쟁 협력자는
1937년(소화 12) 7월, 즉 중·일
개전시부터 1945년(소화 20년) 8월15일,
즉 해방시까지 9년간 일본을 위하여 물질적·정신적 공헌자, 또는 위협에 피동되어 협력적 행동을 한 자로서
주로 세간에 발표된 자에 한함.’
이로 미뤄 임정측은 친일파 숙청이 무조건적, 보복적 차원에서 전개되어서는 안된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대상자를 중·일전쟁 이후 9년
간으로 한정하고 있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친일파 연구가 정운현은 “이완용과 같은 초기 친일파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라고 밝히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초기 친일파들은 일본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았거나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등에서 근무한 기록들이
있기 때문에 굳이 그 개인 명단을 발표하지 않아도 당연히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배제했을 가능성이 크다.
임정은 친일파 문제가 각 정당의 당리당략적 차원에서
이용될 것을 우려해 명단을 한정한 것처럼 보인다. “친일파 군상”의 서문은 이런 우려를 잘 나타내고 있다.
‘좌익정당에서는 우익정당에 친일파 반민자가 많은 것같이 선전하여 왔고, 우익정당에서는 도리어 좌익에 많음을 말하고 있음은 실로 이 문제가 정당의 선전자료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감이 있다.’
이처럼 친일파 문제도 좌우익에 의해 당리당략 차원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임정측에서는 신중한 자세를 보인 것이다.
“친일파 군상”의 서문에서 ‘본집에 등재될 인물 중에는 진정 협력자도 많지만 위협과 강요에 부득이하여
협력적 행동을 하게 된 자, 또는 형식적으로 협력하는
체 한 자 절대 다수라 아니할 수 없다"고 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 반민자 문제는 민족적인 양심으로 논의되어야 할 지상명제가 아닐 수 없다“고 말해 이 문제가
당리당략 차원에서 접근되는 데 대해 경계하고 있다.
즉, 김승학의 육필 명단은 일반 국민들에게 친일파 문제가 당리당략이나 한풀이 식으로 접근할 사안이 아니라
‘“민족적인 양심“'으로 접근해야 할 ‘지상명제'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친일파 군상”의 서문은 이런 원칙에서 친일파에 대한 입장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 당시의 심한 박해에와 위협에도 백절불굴하고
그 절조를 고수한 애국지사에게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직업의 지속, 재산의 보호, 신변의 안정 등을 위하여 관헌이 요구하는 이상으로 비굴한 행동을 한 자 적지 않았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또한 그 당시 위협에 행동된 인사나
그들의 과오보다 그들의 동원을 위하여 주역할을 하였던 친일협력단체의 주요 간부 및 친일 언론기관 경영자
등 소위 친일 선두부대의 죄과가 중대한 것을 특히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육필명단에 부기된 숫자의 의미
육필 명단은
(1)정계·관계·실업계 (6)적극 지원병,
(2)교육계·종교계 (7)1만원 이상 헌납자
(3)언론계·문학계·연예계
(4)기타 인물,
(5)거액(10만원 이상)의 국방헌금 헌납자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1)은 43명 (2)는 13명 (3)은 45명 (4)는 11명 (5)는
19명 (6)은 70명이고
(7)은 모두 73명인데 17명의 명단만 밝혀놓았다.
그런데 (1) (2) (3) (4)의 범주에 드는 인물들은 이름
밑에 ‘正’자 표시가 붙어 있다. 이름 밑에 숫자가 매겨진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비교적 높은 숫자가
매겨진 인물의 면면을 보면 의미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가장 많은 숫자가 매겨져 있는 인물은
이성환(국민동원총진회 이사장)·
이승우(국민동원총진회 이사)·
이광수(시인)로
이들은 모두 正자가
셋, 즉 15란 숫자가
매겨져 있다.
다음으로는
윤치호(연희전문 교장, 45년 12월 사망)와 주요한(시인)으로
13이라는 숫자가 매겨져 있으며,
뒤이어 김동환(시인)이 12, 고원훈(중추원 참의)·조병상(종로경방단장·중추원
참의)·한상룡(조선총력연맹 사무총장)’등에게는 10이라는
숫자가 매겨져 있다.
박인덕(청화여숙장)·이종린(천도교 간부)·김활란(이화여전 교장)·신흥우(목사)·유진오(교육자)
등은 9, 김연수(경성방직 사장)·손영목(도지사)·모윤숙(시인)·최린(천도교 간부) 등은 8,
박흥식(조선비행기공업회사 사장)·장덕수(보성전문 교수)·백철(문학평론가)·이성근(每新사장)·황신덕(교육자)은 6, 신태악(변호사)·김동원(평양상공회의소 회주)·박상준(귀족원 의원)·허하백(여성계 인사)·정인섭(교육자) 등은 5의 숫자가 매겨져 있다.
5 이상의 비교적 높은 숫자가 매겨진 인물들은 대부분
잘 알려진 친일파들이다. 그러나 민족 학살을 도모한 박춘금(대의당 당수)에게 2라는 비교적 낮은 숫자가 매겨지고, 1개군(郡)에서 비행기 1대씩 헌납하자고 주장했던 유명한 문명기(조선신문 사장)에게 1의 낮은 숫자가
매겨진 것은 이름 밑의 숫자가 친일 강도에 대한 절대적
분류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름 앞에 ‘가(假)’자가 부기된 두 인물이 있다. 이들은 박정형·정방오로, 반민특위가 구성될 무렵 애국지사로 자처하면서 상당한 세도를 부리던 인물이었다. 즉,
친일파이면서 애국자인 척하는 인물에게 ‘가’자를 붙인 것이다.
반민특위의 활동과 좌절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제1장에 죄,
제2장에 특별조사위원회,
제3장에 특별재판부의 구성과 절차 그리고 부칙 등
전문 32조로 되어 있다.
이 법의 제1장 1조의 ‘죄’는 ‘
일본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 및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 이상을 몰수한다’고 되어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5일 중앙청 205호실에 사무실을 차리고
1월8일 제1호로 화신재벌 총수 박흥식을 화신백화점 4층 집무실에서 검거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특위는 두 번째로
해방후 자신 소유의 “대동신문”을 앞세워
반민법 제정 반대를 주장한 일본 헌병의 앞잡이 이종형을 구속하고,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과 친일 변호사 이승우, 평안북도 경찰고등과장 등을 지낸 이성근을
구속하는 등
온국민의 열화와 같은 지지 속에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특위 활동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방해는 집요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10일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주권을 회복했다면 이완용·송병준 등 반역 원괴를 다 처벌하고 공분을 씻어 민심을 안정케 하였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관계로 또 국제정세로 인하여 실시를 연기하여 왔으나 국권을 찾고 건국하는 오늘에 있어서는 공분도 다소 풀리고 형편도 많이 달라졌고…”라면서
친일파 숙청을 반대하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해 반민특위의 반발을 샀다.
대통령 이승만의 이런 태도에 힘입어 반민특위에 가장 적대적으로 나온 세력은
당시 친일세력의 온상이었던 경찰과 친일인사 원용덕이 사령관으로 있던 헌병사령부였다.
친일경찰과 헌병사령부는 친일파는 남이
아니라는 듯
반민특위에 쫓기는
친일경찰들이 헌병사령부로 찾아가면 원용덕은 이들을 영관급으로 임용해 보호하기도 했다.
반민특위가 경찰청
수도청 부청장 최연,
김제경찰서장 이성엽, 전북도경 사찰과장 이안순, 경주경찰서장 서영출 등 30여명의 친일경찰을 구속하자
친일경찰들은 반민특위 요원을 암살하려
하였다.
수배중이던 유명한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은
시경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차석 홍택희 등과 함께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사주해 김병로·권승렬·김상덕·김상돈 등을 암살하다 백민태의 자수로 폭로되기도
하였다.
악질 친일경찰 최연과 노덕술이 체포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내무장관 신성모와 법무장관 이인을
불러
“반민특위에서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이고 고문한다”며 대책을 수립할 것을 지시하는 등
반민특위에 적대적인 모습을 드러냈으나
반민특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일제시대 1,000여건의 사상범을 검거한 평북 고등과 사찰주임 김덕기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등
친일파 숙청작업을 계속했다.
특위 활동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 정부는 국회에 대한 직접 공격으로 나섰다.
반민특위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949년 5월
제1차 국회 프락치사건이 발생해 국회의원 이문원·최태규 등 4명이 구속되고,
이어 6월에는
제2차 국회 프락치사건이 발생해 특위 위원 노일환과
서용길 등 13명의 의원이 구속됐다.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국회 프락치사건은 국회를 현저하게 약화시켰다.
행정부의 이런 자세에 힘입은 경찰은 관제 군중을 동원해 특위를 직접 공격하기도 했다.
1949년 6월3일에는
관제 시위대가 특위 사무실을 포위하고 난입하려 했는데,
조사 결과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의 사주로 밝혀져 그를
구속하자 사찰경찰 150여명이 사표를 내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드디어 친일경찰들은 직접 행동에 나섰다.
“웃어른께서도 말씀이 계셨으니 안심하고 특위 특경대를 무장해제시키라”는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시에 따라 경찰은
그해 중부서장 윤기병 등의 지휘로 특위 특경대를 무장해제 시킨 것이다.
친일경찰들의 특위 습격사건을 놓고 국회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국회 내무치안위원장 라용균은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난 사실을 보고하면서 “특경대 무장해제는 국무회의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친히 명령한 것”이라는 대통령의 전언을 공개해
이 사건의 배후에 이승만 대통령이 있음을 시사했다.
이런 와중에 국회 프락치사건까지 겹치자
극도로 위축된 국회는 1950년 6월20일까지였던 반민법 공소시효를 1949년 8월31일로 단축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김상덕 위원장 이하
전 위원은 이에 반발해 사표를 제출하고
특별검찰관들도 잇따라 사임서를 제출했으나 이미 특위는 무력화됐다.
그 뒤를 이어 평소 반민법에 반대해온 이인이
반민특위 위원장이
되었으나 그는 친일파 체포 대신 자수 기간을 설정해 형식적으로 친일파 숙청을
끝맺고 말았다.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그 임무는 법원과
검찰로 이관되었다.
검찰과 법원은 실형
7명, 집행유예 5명,
공민권 정지 17명 등
30명에게 제재를 가했으나
실형을 선고받은 7명도 이듬해 봄까지 모두 재심청구 등으로 풀려나 실제로 처벌받은 친일파는
한명도 없었다.
‘태산명동에 서일필(鼠一匹)’도 아닌 ‘서무필’(鼠無匹)로 끝난 민족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내가 죽지 않고 너희 日帝가 망하는 것을 목격하리라”
독립군 맹장이자 “독립신문”사장-金承學 일대기
김승학은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비교할 만한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은
다채로운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文武를 겸비한 인물로,
그를 아는 사람들은
“독립신문” 사장으로보다 한때 압록강 일대를 전쟁터로
만들었던 독립군 맹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구한말 한성사범학교를 나와 교육사업에 투신했던
교육자이기도 했으며,
해방후 “한국독립사”라는 독립운동가의 시각에서 본 독립운동사를 저술한 역사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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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上海)의 프랑스 조계 늑로(勒路) 동익리(同益里)에 독립신문사가 있었다.
1919년 8월21일 상해에서 창간된
신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이자
이광수가 사장 겸 주필을 맡았던
신문으로 기억된다.
이광수로서는 “독립신문” 사장
겸 주필을 맡고 있던 이 무렵이
전성기였다.
자신이 기초한 2·8독립선언서를 들고 상해로 온 이광수는
안창호의 권유로 “독립신문”을 맡게 되었는데 비록
일신은 편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가장 화려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광수의 “독립신문” 사장 시절은 2년에 불과했다.
그는 망명객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상해로 찾아온 애인 허영숙과 귀국하면서 논란 많은 인생 후반부의 문을 연다.
허영숙은 여의사였으므로 안창호의 권유대로 개업해도
되었으나
그는 모든 권유를 물리치고 귀국해 버렸다.
이광수가 “자서전”에서 ‘아니나 다를까
조선일보에서 내가 귀순하고 돌아왔다는 기사를 낸 것을 시초로
거의 모든 신문과 잡지에서 나를 독립운동을 배반한 자라고 공격하였다’고 쓴 것처럼 그의 귀국은 결코 환영받지 못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 “독립신문”
이광수가 떠나자 “독립신문”은 위기를 맞았다.
그렇지 않아도 구독료를 선불하지 않으면 신문 발송을
중지한다는 광고가 계속 실리는 형편이었다.
그 위에 일제의 상해 총영사는 독립신문사가 프랑스 조계에 있는 것을 구실로 신문사의 폐쇄를 거듭 프랑스에
요구했다.
김승학(金承學)이 만주에서 상해에 도착한 1921년 3월
중순은 독립신문이 창간 이래 최대의 위기에 처했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김승학의 짤막한 자서전 “망명객행적록”(亡命客行蹟錄·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2집 별쇄)은
이때의 일을 생생하게 적고 있다.
‘독립신문사 책임자 이광수는
그 애인 허영숙의 유인으로 상해 일조계(日租界;각국
공동조계)에 은거하여 국내로 투항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신문사 주간 이영렬(李英烈)은 이광수와 함께 투항할 생각을 가지고….’
김승학의 회상대로 일제의 골칫거리였던 “독립신문”은 사실상 끝난 신문이었다.
김승학의 “망명객행적록”에서 이 무렵의 일을 좀더
보자.
(이영렬은) ‘신문 발간할 지가(地價)가 부족하니 금(金)500원만 대여하여 달라’고 한다.
나는 그 내막을 모르고 금 500원을 주었더니,
그 돈을 여비로 하고 국내로 투항하면서, 신문사 소재처와 삼일인쇄소 비밀 처소까지 왜(倭)영사에게 일러주어서,
왜적(倭敵)은 프랑스 영사관에 교섭하여 독립신문사를
봉쇄하고, 삼일인쇄소 기구는 프랑스 영사관에서 압수케 되었고….
독립신문 사장이자 주필이었던 이광수는 애인과 함께
일본 조계에 숨어 귀국을 엿보고,
주간 이영렬은 신문사 소재지와 인쇄소 위치까지 일본에 밀고하고 떠난 상황이었다.
한글 자모를 구할 수 없어 기자 조동호(趙東祜)가 성경책의 글자를 오려 한글 판형을 만들었던 독립신문은 이렇게 그 수명을 다해 가고 있었다.
이때 상해에 나타난 김승학은
안창호의 권유를 받아 독립신문을 인수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 영사관은 안창호에게 독립신문사의 인쇄소
기구가 한국인 소유가 아니라면 묵인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터였다.
그런데 김승학은 중국 국적도 갖고 있었으므로 인수의
적임자였다.
김승학은 32세 때인 1912년
만주 봉천성의 사관학교인 강무당(講武堂)에 입학하면서 김탁(金鐸)이란 중국 이름으로 입적(入籍)했던 것이다.
프랑스 영사관에서는 신문사와 인쇄소의 봉쇄를 해제하는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걸었다.
1. 인쇄소 기구는 중국인에게 교부하고 프랑스 조계 내에 두지 말 것.
2. 독립신문 발간소는 다른 지방으로 신문 지상에 명기할 것.
3. 신문사를 혹 프랑스 조계지에 비밀리에 설치할 경우에는 그 장소를 프랑스 공무국에 보고할 것.
4. 프랑스 공무국의 통지가 있을 때에는 24시간 내에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 일본에 발견되지 않게 할 것.
5. 신문사나 인쇄소의 비밀한 장소는 다수의 한인이 알지 못하도록 할 것.
이는 사실상 프랑스 조계지 내에 신문사를 두어도 좋다는 뜻이었고,
이런 경로를 거쳐 1921년 6월 인쇄소의 폐쇄로 정간되었던 독립신문은 그해 8월15일자로 속간되었다.
사장은 김승학이었고,
주필은 박은식(朴殷植), 편집국장 차리석(車利錫), 기자
조동호·김문세·박영·이윤세, 인쇄소 책임자 고준택(高俊澤)이었는데,
신문 좌측 상단에 발행지가 ‘중국 남경’(Published
in NanJing, China)으로 표기된 것은 프랑스 당국과의
합의 때문이었다.
“독립신문”이 다시 발간되자 크게 당황한 일제는 다시 방해 공작에 나섰는데,
김승학은 일제의 이런 의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1922년
7월 중순에는 중국어판 “獨立新聞”까지 발행했다.
중국어판 독립신문 창간호는 ‘우리의 광복전쟁의 진상을 우리의 친애하는 4억 동지에게 소개할 길이 열리며…’라고 적어 발행 목적이 중국과의 연대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약 1,500∼2,000부 정도 찍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독립신문은
상해와 만주는 물론 미주와 국내에도 보내졌는데, 국내에는 임시정부의 연통제 산하 만주 이륭양행(怡隆洋行)과 부산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연락원들이 몸에 숨기고
반입했다.
다채로운 이력의 소유자
김승학이 독립신문을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활약하던 남만주 독립군 계열의 자금 지원 덕이었는데, 만주에서 후원하던 인물들은 독립군 장교 채찬(蔡燦:백광운)·장기초(張基礎) 등이었다. 그러나 김승학이 인수한 독립신문도 곧 사정이 어려워져 1922년 6월3일자 독립신문은 ‘독립운동과 독립신문’이라는 기사에서 기자나 인쇄소 직원들이 월급 없이 일하고 있다면서 재정적, 인적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이런 형편에서도 독립신문은 일제의 정보망에 걸릴 것에 대비해 항상 빈 집 한 곳을 확보하고 있다가 프랑스
영사관의 통보가 오면 즉각 이전해야 했는데, 김승학은
6년 동안 무려 28차례나 인쇄소를 이전했으며, 그때마다 마차 2량과 인력거 20여 채가 동원되었는데 당일 통고받고 한밤중에 이전한 일도 있다고 회고했다.
독립신문은 1주일에 세번씩 발행하다 1924년에 접어들면서 자금사정 때문에 1개월에 1회 정도밖에 발간하지
못했으나 여전히 한국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자 희망이기도 했다.
김승학은 그의 자서전에서 ‘4233년(1900) 겨울 압록강을 건널 때는 대한제국을 부흥하여 본다는 망상으로
활동하여 보려던 것’이라고 했듯 황실의 복벽(復?)을
꾀했던 복벽주의자였으나, ‘4252년(1919)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된 후로는 임정(臨政)
기치 하에서 헌신하고 일생을 희생하였다’고 말한 것처럼 임시정부 학무차장과 학무총장(지금의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역임한 공화주의자로 변했다. 또한 해방
후인 1949년에는 단군을 모시는 민족종교 대종교(大倧敎)의 총본사(總本司) 전교(典敎)에 선임된 대종교인이기도 했다.
그는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비교할 만한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은 다채로운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문무(文武)를 겸전한 인물로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독립신문 사장으로보다 한때 압록강 일대를 전쟁터로 만들었던 독립군 맹장으로 그를 기억한다. 뿐만 아니라 구한말
한성사범학교를 다니고 교육사업에 투신했던 교육자이기도 했으며, 해방후 “한국독립사”라는 독립운동가의
시각에서 본 독립운동사를 저술한 역사가이기도 하다.
고종 18년(1881)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면에서 태어난
김승학은 서북 출신으로는 드문 공신 가문이었으나 그가 태어났을 때는 소작농의 신세로 몰락해 있었다. 등겨와 송피(松皮)범벅이 주식인 어려운 집안 형편이었으나
학문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어 짚신을 삼고 돗자리를
짜면서 공부를 계속하다 19세 되던 1899년에는 평생 스승이 되는 국동(菊東) 조병준(趙秉準)에게서 본격적인
한학(經義)을 배웠다. 조병준은 위정척사론의 대가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역시 강렬한 척사론자였는데, 1900년 3월 이항로의 문인이자 자신의
스승이기도 했던 운암(雲菴) 박문일(朴文一)의 제사를
마친 뒤 이렇게 통탄했다.
“왜노(倭奴)는 지난 을미년(1895)에 국모 명성황후를
참시했으니, 왜노는 우리와 하늘을 같이할 수 없는 원수이며, 더욱 우리 선비로서는 거의(擧義)하여 왜노를 토벌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 그러므로 삼남의 학자들은
여기저기서 거의하여 혈전하는데 우리 고장 선비들은
묵묵부동하니 이런 수치가 어디 있는가.”
이에 격동된 김승학은 그해 10월 고종(姑從) 고효겸(高孝謙)과 만주로 떠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때는 대한제국을 부흥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김승학은 자서전에서 ‘4243년(1910) 재차 압록강을
건널 적에는 대한제국 황실이 너무나 부패하여 다시 회복할 여지가 없으니
민주국을 건설하여 보자는 결심으로 활약했다’고 적고
있듯 만주에서 돌아와 대한제국의 부패를 목도하고는
복벽주의를 버렸다.
24세 때인 1904년 집 뒤에 있는 광제봉(廣濟峯)을 오르다 발견한 산삼을 팔아 서울로 올라가 한문 박사과 시험을 보았는데,
정작 합격한 인물은 면강(面講)시험때 논어 제1장 1절도 외우지 못한 사람이었다.
물론 뇌물을 쓴 덕이었다. 그의 항의를 받은 학무국장이
추천해준 한성사범학교를 다닌 그는 이후 교육자로 변신한다.
당시 바른 역사관을 가진 교육자의 삶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그는 고향 의주에 구시(求是)학교라는 일본어학교를 설립한 의주 유생 장도천(張道薦)이 향교 재산을 가로채려는 것을 막으려다
한성지방법원에 구속되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구금되었다.
27세 때인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퇴위당하자 종로 각지를 돌아다니며 배일(排日) 강연을 하다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평리원(平理院)구치소에 다시 수감되었다.
석방후 고향에 의성(義成)학교를 설립하고 극명(克明)사범학교의 교감으로 근무했는데,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비현면 면감(面監)으로 있던 1908년
순종이 서순(西巡)하자 13개 학교 연합체인 친목(親睦)학교 학생 1,000여명을 동원해 환영하면서도
태극기만 들고 일장기를 내리게 하여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갖은 악형을 당하는 등 수난이 계속되었다.
1910년 8월 나라가 망하자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한 그는 봉천성에서 설립한
강무당(講武堂)에 들어가 군사학을 익힌 후
만주 오지에 있는 한국 의병단에 가담했다.
그는 각 단체 통합에 전력해 여러 차례 분열된 독립운동계를 통합시킨다.
1919년 3·1운동후 만주 각지의 의병과 포수단, 향약계
등이 연합해 대한독립단을 결성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유하현 삼원보 대화사에 본부가 있던 이 단체의 재무부장에 피선되었는데,
그의 활약으로 대한독립단에는 그해 8월까지 국내에서
장정 1,500여명과 군자금 3만원이 모금되는 등 세를 떨쳤다.
“내가 죽지 않고 너희 日帝가 망하는 것을 목격하리라”
독립군 맹장이자 “독립신문”사장-金承學 일대기
국내에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다
김승학은 독립군이 국내로 진공(進攻)해 일제를 무찔러야 독립이 된다는 무장독립 노선을 갖고 있었다. 만주의
독립군이 진공하면 국내의 동포들이 호응해 궐기해야
일제를 물리치고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국내에 대한독립단의 지단(支團)을
많이 설치해야 했다. 그가 1919년 8월 도총재 박장호(朴長浩)의 승낙 아래 국내에 잠입한 것도 바로 독립단
지단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그의 스승 조병준은 관전현(寬甸縣)에 망명해 있으면서 임시정부 평안북도독판부 독판을 맡고 있었다.조병준이 김승학에게 대한독립단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연통제 지부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이를 흔쾌히 허락하고 압록강을 넘었다. 김승학은 이듬해 1월까지 평안남북도 전역을 순행하면서 의주·태천·용천·정주·구성·강서 등 무려 52개에 달하는 연통제 기관과 독립단 지단을 결성하는 왕성한 조직력을 보였다.
광산으로 유명한 운산(雲山)에서는 1,000여명에 달하는
광부가 모두 단원이 될 정도로 호응이 높았던 것이다.
하루는 광부 수십명이 찾아와 “우리가 오늘밤 이곳 경찰서를 습격하고 전 시가를 점령할 터이니 지휘해 달라”고 요청해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설득해 보내야 할 정도였다.
물론 어려움도 많았다. 개천과 덕천 사이의 알길령을 천신만고 끝에 넘어 박씨 한약국에서 저녁을 먹는데 헌병
둘이 나타나 함께 가자고 요구했다. 약 10리쯤 떨어진
헌병대로 끌려가던 그는 헌병 주재소가 가까워질 무렵
소변을 본다는 핑계로 길 옆의 돌멩이를 명주수건에 싸서 헌병을 후려쳤다. 헌병이 쓰러진 틈을 타 북쪽 산으로 도주하자 헌병대 전원이 동원되어 뒤를 쫓는 바람에
깊은 산 속 나뭇단을 의지해 밤을 새운 일도 있었다.
그가 좁쌀장수로 변장해 무사히 국경을 넘어 안동현의
대한독립단 비밀기관인 비현정미소를 찾아가니 주인 김재엽(金載燁)이 국내에서 벌써 많은 청년들이 찾아왔고
독립운동자금도 수만원이 모집되었다며 전해 주었다.
그가 만든 국내 조직이 벌써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서간도로 귀환한 김승학은 만주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이 급선무라고 느꼈다. 여기저기
산재한 독립운동단체들끼리 각 지방의 교포를 확보하는
와중에서 분쟁의 조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가 조직통합을 역설하자 대한독립단은 물론 평북독판부와 대한청년단연합회가 모두 찬성해 통합을 이룩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했다.
1. 각 단체의 행동통일 기관을 설치해 국내 왜적의 행정기관을 파괴하되, 각 단체의 개별명의로 하지 말고 반드시 상해 임시정부에서 지정하는 명의로 할 것.
2. 연호는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할 것.
3. 통일 기관은 국내와 가까운 압록강 연안의 적당한 곳에 설치할 것.
4. 통일 기관의 경비는 각 단체가 나누어 부담하되, 국내로부터 들어오는 수입금은 통일 기관의 군사비에 충당할 것.
이들은 압록강 근처의 관전현(寬甸縣)에 통일 기관을
설치하고 행동을 개시하기로 했으나 곧 시련에 부닥쳤다. 청년단연합회 대표 안병찬이 중·일 군경에 체포되면서 독약을 마셔 부상을 입은 것이었다. 안병찬은 관전현 지사(知事) 황조안(黃祖安)의 특별주선으로 석방되자 이탁과 함께 상해로 피신했다.
김승학은 그 뒤를 따라 상해로 향했다.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단체 통합 사실을 보고해 통일 법명을 부여받고 무기를 구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1920년 2월 보름 무렵
김승학은 안동 이륭양행의 기선에 올랐다.
이륭양행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후원하던 아일랜드인 조지 쇼(J. Show)가 운영하던 회사여서 김승학은 배삯도
면제받고 1등실로 안내되었다. 양식을 먹을 줄 몰라 중식만 먹으며 73시간만에 상해 프랑스 조계 황포탄 부두에 도착한 김승학은 선장의 주선으로 프랑스 조계 보강리(寶康里)의 제50호 집에 유숙했다. 이 집은 임시정부의 영빈관 같은 곳으로, 임정 외교총장 박용만(朴容萬)의 당숙(堂叔)이 맡고 있었다.
상해에서 무기를 구입하다
김승학은 병원으로 가서 안병찬을 문병하고 이탁과 함께 임정 내무부로 가서 통일 기관의 법명을 요청하는 신청서를 제출한 후 안창호에게 무기 구입 알선을 부탁했다.
김승학은 또한 남만주 독립운동단체 대표 명의로 임정
직원과 무관학교 생도, 독립신문사 직원, 민단 직원
150여명을 영안공사(永安公司) 연회당으로 초대해 위로연을 베푸는 한편 임정과 무관학교, 독립신문사에 일부
경비를 지원했다. 곤궁한 상해 교민 사회에서 이런 행보는 이례적인 것이어서 곧 소문이 났다. 김승학의 “망명객행적록”에서 이때의 회상을 들어보자.
‘…법조계 일대에는 남만주에서 어떤 인물이 와서 다액의 금전으로 무기를 사들인다는 낭설이 자자하게 되어, 매일같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모두 돈을 꾸어 달라는
것이다. 나는 숙소를 비밀스런 데로 옮기고 무기 구입건은 동행들과도 통정(通情)하지 않고 극비리에 진행했지만 그래도 협잡배에게 사기도 몇번 당하고 위협을 당한
일도 한두번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판국에 임정은 통일 기관의 법명 하나조차 신속히 처리하지 못해 두세번 재촉하고, 이탁과 국무회의실로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2월에 제출한 이 안건은 6월에 비로소 통과되었는데 기관 명칭은 광복군 사령부와 광복군 참리부(參理部)였다.
광복군 사령부는 임정 군무부 직할로 남만의 독립군 군정 일체를 관할 지휘하고, 광복군 참리부는 임정 내무부
직할로 남만 거주 동포에 관한 사무 일체를 맡는다는 것이 임정의 결정이었다. 광복군 사령부에는 사령장 이하
참모국 등 7국(局)을 설치하고, 참리부에는 참리부장
이하 내무사 등 7사(司)를 설치했다. 김승학은 군정국장 겸 군기국장(軍機局長)에 선임되었다.
그가 군정국장 겸 군기국장에 임명된 것은 무기 구입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지극히 민감하고
위험한 일이었다.
김승학은 우여곡절 끝에 7월 말까지 권총과 소총 240여
정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 무기가 만주 독립군에 전달되면 독립전쟁에 큰 효력을 일으킬 것이었지만
문제는 이를 만주까지 무사히 가지고 가는 일이었다.
김승학은 철궤(鐵櫃) 4개를 사서 내부를 변조하고 그
속에 무기를 넣은 후 칠을 다시 하고 나무 상자로 포장했다. 그리고는 중국인 장해봉(張海峯)에게 만주의 관전(寬甸)·환인(桓仁) 등지에서 생산되는 누에를 사다
팔면 많은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철궤를 관전현
장음자(長陰子)의 조모(趙謀)에게 전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면 조씨가 누에를 사줄 것이라는 권유였다.
철궤 속에 든 것이 무기인 줄 모르던 장해봉은 이익이
남는다는 말에 쉽게 동의해 김승학은 그와 함께 이륭양행 기선을 타고 안동으로 향했다. 그런데 안동에 도착한
기선이 닿은 곳은 평소에 닿던 삼도랑두(三道浪頭)가
아니라 신의주와 안동현을 연결하는 철교 밑이었다.
조지 쇼는 일본 경찰이 특별히 주목하고 있다며 삼도랑두에 정박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하선하지 말라고 전했다. 조지 쇼는 철궤를 이륭양행에 맡겼다가 2~3일 후에 찾아가라면서 배 위에 나타나지 말고 자신의 연락을 기다려 하선하라는 것이었다. 배 안에서 5일을 기다렸으나 다음날 배가 상해로 돌아간다는 소식만 들릴
뿐 하선하라는 통지는 없었다. 무기를 버려 두고 상해로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김승학은 소형선 한척을 빌려
하선하기로 결심했다.
이튿날 새벽 그가 권총을 휴대한 채 소형선으로 갈아타고 육도구(六道溝)로 가는데 뒤에 일본 경비선이 따라왔다. 육지 근처에서 뛰어내린 김승학은 신발이 벗겨지고 하반신은 흙투성이가 된 채 산으로 달아났다. 뱃사공을 구타하던 일본 경찰이 쫓아오자 김승학은 옥수수밭
속으로 숨었다. 일경은 경비견까지 풀었으나 다행히 그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옥수수 밭에서 이틀을 새우면서 김승학은 한시 한 구절을 지어 보았다.
사냥개가 오는 것은 두려울 것 없지만/모기떼가 덤벼드니 이건 가장 무섭구나(不백)偵犬入 最畏蚊群侵)
목마를 때는 오줌으로 목을 축이고/배가 고프면 옥수수를 그냥 씹더라(渴含自己水 飢餐玉蜀黍)
3일째 되던 날 일경의 교대 시간을 이용해 도망치다 발각되어 형제봉으로 달아나던 김승학은 바윗돌을 굴려
대항하면서 겨우 포위망을 벗어나 안동현의 비현정미소를 찾아갈 수 있었다. 주인 김재엽은 화들짝 놀라며 경찰이 10여일 동안 매일같이 찾아왔다며 다른 곳으로 가라고 말했다. 중간에 밀정을 만나 겨우 따돌리는 등 천신만고 끝에 관전현 조병준에게 도착한 것이 1920년 8월 보름이었다.
장해봉이 맡기고 떠난 철궤에서 소총과 권총 240여 정과 탄환 수만발이 나오자 독립운동가들은 경탄해 마지
않았다. 이제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 무기를 관전현 수혈립자(水穴砬子)로 운반해
무기 수여식을 거행했는데 이 자리에서 김승학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광복군 사령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직속 군단으로서 임정 군무부를 대표해 우리의 원수 왜노(倭奴)와 혈전하는 기관이요, 제군에게 주는 무기는 국내의 동포들이 피와 땀을 모아 마련한 것이며, 내가 몇
번이나 위험한 경우를 무릅쓰고 다니면서 모집하였고,
4,000리 되는 상해를 왕래하면서 수륙 양로로 갖은 곤란을 겪으며 구입한 것이다.
내가 작년 대한독립단 도총부 소속 청년들이 훈련하는
것을 보았는데 무기라고는 구 러시아식 장총 2정과 화승총 2정이 있을 뿐이요, 그 외는 전부 목총을 메었기에
… 제군은 무기 없는 것에 낙심하지 말고 훈련만 잘 받으라고 권면한 일이 있었다.
이 무기는 국내 동포들이 주는 것이며, 임시정부 군무부에서 주는 것이니
제군은 그렇게 알고 무기를 생명과 같이 사랑하여 일발의 탄환이라도 헛되게 쓰지 말고,
1탄에 왜적 1명씩 잡기로 결심해야 한다.”
“내가 죽지 않고 너희 日帝가 망하는 것을 목격하리라”
독립군 맹장이자 “독립신문”사장-金承學 일대기
당황하는 일제
목총으로 군사훈련을 받던 독립군들은 무기가 생기자 사기가 충천해 국내로 달려갔다.
만주의 광복군 사령부는 산하에 6개 영이 있었고
각 영은 6∼7개 대대로 구성돼 있었다. 광복군은 40∼50명 단위로 국경을 넘은 다음
5∼10명으로 분대를 편성해 각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렇게 일제의 혼을 빼놓은 후 다시 약속한 장소에 모여
대단위 전투를 전개하는 기동전을 전개했다.
광복군은 평북 삭주군 경찰주재소를 습격한 것을 비롯해
평북 용천·의주·선천·창성·초산·운산·강계 등지와 함남 단천을 비롯한 평남 내륙까지 들어가 성천·광동·영변 등지에서도 일제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불과 3∼4개월만에 일제 기관에서 발표한 것만으로도
교전 78회, 주재소 습격 56회, 면사무소 및 영림서 소각
20개소, 일제 군·경 사살 95명의 혁혁한 전과였다.
광복군측도 13명이 전사하고 9명이 부상했지만
이 갑작스러운 국내 진공작전으로 압록강 연안 일대와
평안남북도 지역은 일시에 전쟁터로 변해 일제는 크게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일제는 압록강 연안에 3리 혹은 5리마다 파출소를 두고
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대규모 군병력을 동원했다.
동만주에 출병했던 부대를 남만주까지 오게 한 것이었다.
일제는 1920년 10월 만주 출병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마적 장강호(長江戶)를 매수해 ‘훈춘사건’을 조작하고는 이를 명분으로 동만주로 출병했다. 그러나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에 각각
청산리와 봉오동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 패배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닥치는 대로 만주교포들을 학살하는 경신참변(1920)을 일으켰다.
화룡현 장암동에서는 28명의 기독교인을 소총 사격연습
도구로 삼아 죽였으며, 연길현 의란구에서는 30여 호의
전 주민을 몰살하고 4형제를 불타는 가옥 속에 밀어 넣어 태워 죽이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목격한
미국인 선교사는 “젖은 만주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한탄했다. 이같은 참사는 마틴(Martin. S.H)과 푸트(Foote)의 수기에도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동만주에서 이런 학살을 자행한 일제는 학살 대부대의
진로를 남만으로 돌려 광복군 사령부와 교포들을 공격하게 했다. 광복군 사령부는 일제 대부대와 정면충돌해서는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일시 부대를 피신시키기로 했다. 김승학은 이 결정에 따라 광복군 제3·4영을 오지로 피신시켰다.
교포들이 살던 가옥은 모두 불타버렸고 중국인들은 두려움에 떨어 누구 하나 아는 체하려 하지 않는 등 일제의 만행은 만주의 민심을 일변시켜 버렸다.
무수히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때 희생되었다.
안동현 교통원 차의룡(車義龍)이 피살되고,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던 홍문산·고득수·백의범·김용준·정신보·조시목 등 6인이 의주 비현면과 용천 양광면에서
교전하다 전사한 것도 이때였다.
광복군은 살아남은 독립군들을 중국 취관소(聚官所·경찰분서)나 보갑대(保甲隊) 등과 교섭해 위장입대시켜
안전을 도모했으나 당분간은 활동이 불가능했다.
김승학은 만주를 떠나 다시 상해로 가기로 하고 봉황성을 지나 해성현(海城縣)에서 숙박하려다 그만 중국관헌의 취체(取締)에 걸려 해성현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김승학은 현 지사 장화걸(張和杰)에게 임정 직원 이세창(李世昌)이라면서 일본 영사관에 인도하면 사형당할 것이니 불가피하면 중국 국법에 의해 처리하고 일제 기관에는 알리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3부 통합을 위해 진력하다
상부의 보고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현 지사의 말을 듣고
기다린 지 40일만에 김승학은 겨우 석방되어 천진에서
기선을 타고 상해에 도착한 때가 1921년 3월 중순이었다. 앞서 기술한 대로 김승학은 이때부터 1924년 말까지 상해에서 독립신문 사장으로 활약했다.
1926년 3월 김승학은 임정과 각 사회단체의 모든 직책을 사임한다. 그 원인은 남만주 독립운동단체들끼리 벌어진 파쟁에 있었다. 김승학이 떠난 후 남만주 독립운동단체들은 1922년 봄 남만통일회의를 개최하고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했다. 대한통군부는 그해 8월
더 많은 단체들을 포함시켜 통의부(統義府)를 결성하고
산하 무장부대로 의용군을 두었다. 의용군은 1923년 6월 신의주 영산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펴는 한편, 만주의 친일 주구 처단 작전도 전개했으나
곧 내부 파쟁에 휩싸이게 된다. 공화파와 복벽파(復?派·대한제국의 부활을 꾀하는 파) 사이의 이념대립이 주요인이었다.
이념대립은 급기야 유혈참극으로 번져 복벽파가 공화파를 공격하게 된다. 이 와중에 희생된 인물이 채 찬이었다. 채 찬은 압록강 철교 준공식때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薺藤實)를 공격하기도 하는 등 의용군 제1중대장을 맡은 독립군 맹장으로 김승학이 상해에서 독립신문을 발행할 때 자금 등 여러 면에서 지원한 인물이기도
했다.
김승학이 독립신문 1924년 10월4일자(제177호)에 ‘소위 남만 통의부는 연래 동족전쟁으로 전업’ 등 통의부의 내홍(內訌)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은 것은 더 이상 동족상잔의 비극을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채 찬이 사망한 1924년 9월13일 직후 이 보도가 나갔던
것은 채 찬의 죽음에 김승학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독립신문은 ‘통의부가 임정을 적대기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본이 임정을 적대시하는 것과 같다’면서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을 적대시하고도 독립당이 될 수
있는가’라며 통의부를 공격했다. 이런 논조는 통의부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자신의 세력권이 미치는 범위에서 독립신문 구독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김승학은 채 찬 같은 독립군 맹장을 죽여 놓고도 오히려
독립신문을 공격하는 데 격분했다. 그러나 독립신문의
보도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자 이에 모든 책임을 지고
독립신문 사장직을 비롯한 임정 학무총장 등 모든 직책에서 사임했던 것이다.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김승학은 북중국 수원성(綏遠省)
포두현(包頭縣)에 있던 스승 조병준의 농장에 은둔했다. 그러나 임정은 1926년 10월경 그를 육군 주만 참의부 제4대 참모장으로 임명하면서 남만주 독립운동단체의 파쟁을 조정하고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라고 재삼
요구했다. 참의부의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駐滿) 참의부인 데서 알 수 있듯 임정 군무부
산하 무장 독립운동단체로, 광복군 사령부를 계승한 단체였다.
김승학은 지엽적인 문제로 독립운동단체들끼리 파쟁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상심한 마음을 접고 다시 활동에 나섰다. 당시는 만주군벌 장작림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이(三矢)와 이른바 ‘삼시협정’(三矢協定)을
맺어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일제에 넘겨주던 상황이어서
내홍에 싸일 때가 아니었다.
단체 통합에 전력하기로 한 김승학이 참의부 소재지인
서간도 환인현에 도착한 것은 1927년 3월이었다. 당시
만주에는 참의부 외에도 정의부와 신민부가 있어서 3부가 정립(鼎立)상태였다. 김승학은 이 3부 통합 운동에
나선 것이었다. 때마침 정의부에서도 3부 통합 운동 기운이 일어나 1928년 5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전민족 유일당 촉성대회가 열렸으나 김승학을 비롯한 참의부 대표는 중·일 관헌의 심한 단속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김승학은 이런 사정을 ‘양년(兩年:1927∼28) 동안에
왜적과 중국 경찰에 침습(侵襲)당했다가 구사일생으로
행면(幸免)한 것이 여러번이었다’고 적고 있다.
1929년 7월 길림성에서 다시 3부 통합회의가 열렸다.
이때 김승학은 박희곤(朴熙坤) 등과 함께 참의부 대표로 참석했다. 정의부에서는 김동삼과 이청천 등이, 신민부에서는 김좌진과 정 신(鄭信) 등이 대표로 참석했다.
그러나 통합운동은 쉽지 않았다. 정의부가 단체 중심의
통합을 주장하는 촉성회파와 기성단체 해체와 개인본위
조직을 주장하는 협의회파로 갈려 있었던 데다 통합회의가 진행되던 중 참의부 내에서 쿠데타까지 발생했던
것이다. 참의부 제3중대장 심용준 일파가 중앙호위대장
차천리(車千里)를 살해한 것이다. 김승학은 이 하극상
사건에 대한 조사보다 통합회의가 더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회의를 계속 강행해 약 4개월만에 군민의회(軍民議會·일제 자료는 혁신의회)를 결성할 수 있었다.
군민의회의의 중심인물은 참의부의 김승학, 신민부의
김좌진·김동진(金東鎭), 정의부 촉성회파의 김동삼·지청천(池靑天) 등이었다. 군민의회는 당(黨)으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는 ‘이당치국론’(以黨治國論)에 따라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그 당군(黨軍)으로 한국독립군을 두었다.
이로써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은 당·정·군의 체제를 갖추며 불완전하나마 통합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었다. 김승학은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및 군민의회 민사위원(民事委員)에 선임되었다.
통합된 군민의회는 한인 교민 보호와 자치 실시, 친일파
숙청 등을 주요 목표로 정하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곧 커다란 시련에 봉착했다. 일제가 3부 통일회의
개최 사실을 알고 교통의 요지에 매복하고 있다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거나 살해했던 것이다. 신민부의 김동진과 정 신이 중동선과 화피전자 부근에서 살해되었으며, 군민의회 의장 김동삼은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갔다. 아나키스트들과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한
김좌진은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되는 등 시련이 잇따랐다. 뿐만 아니라 김승학도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통화현과 환인현 접경에서 일·중 연합부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내가 죽지 않고 너희 日帝가 망하는 것을 목격하리라”
독립군 맹장이자 “독립신문”사장-金承學 일대기
출옥후 다시 독립운동 전선으로
김승학은 통화현 일본영사관을 거쳐 국내로 압송되는
도중 압록강을 건너면서 한시 한 수를 지었다.
나라를 버리고 집을 떠난 지 20여년만에/죄인 싣는 수레로 돌아오며 고향 하늘을 볼레러라
(去國離家二有年/檻車回見故鄕天)....
신의주경찰서 사법부장 모근(牟根)은 통화현 영사관에서처럼 두가지를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상해에서 무기를 얼마나 구입하였는가 하는 것과
독립운동사 사료 수집한 것을 어디에 두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김승학이 일절 진술을 거부하자 일경은 꿇어앉힌 후 직경 3촌(寸)쯤 되는 통나무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양 끝에 두 형사가 올라가 짓밟는 등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다.
김승학은 해방후 출간한 “한국독립사” 서문에서 ‘불행히 왜경에 체포된 후 수각(手脚)이 절골(折骨)되는 수십차례 악형(惡刑)이 주로 이 사료 수집 때문이었다’고 썼다. 49세의 김승학은 일절 굴하지 않고 사료 소재지를 대지 않았다.
김승학은 1931년 10월 옥중에서 스승 조병준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데 이어 다음달 13일에는 부친이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상심한
김승학은 ‘그날부터 염세병이 발하여 단식을 전개하다
절실하게 각오하기를 내가 죽지 않고 너희들(일제) 망하는 것을 목격하리라’고 결심하면서 단식을 풀었다.
1929년 11월에 체포된 그는 35년 4월에 출감했다. 수감중 ‘감옥서’(監獄署)라는 제목으로 ‘국경선을 그어놓은 붉은 벽돌담이 멀리 하늘에 닿았는데/그 가운데
작은 나라를 세운 지 묻노니 몇해나 되었는가(定界紅墻遠揷天/中建小國問幾年)…만약 이런 악굴을 쳐 묻어 버리지 않으면/대중의 원하는 바를 마침내 펴볼 수 없더라(若不打埋此等窟/大衆所願終難宣)’라는 시를 지어
죄가 추가되기도 했다.
‘적(敵)형무소’에서 출옥한 그는 고향 비현역에서
100여 인이 출영나오는 환영을 받았다. 이런 환대를 뒤로 하고 찾아간 집은 자식 3형제 중 둘은 2년 전에 참의부 소재지인 남만주 환인현 방면으로 갔고, 늙은 아내가
며느리 둘과 손자·손녀 등과 함께 사는데 ‘생활 정도는 불가형언’으로 어려웠다.
그해 8월 김승학은 자식들을 찾기 위해 다시 압록강을
넘어 남만주 환인으로 갔다.
이때는 만주국이 수립된 다음이어서 환경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과거의 독립군 간부들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선무반 명색으로 활개치며 세력을 부리는 상황이었다. 두 아들이 일본 영사관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김승학은 통화현 영사관 근처의 여관에서 숙박했다. 영사관에서 밤새 죄인들이 취조받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했다.
김승학은 봉천 영사관에 구금되어 있던 장남 영달(榮澾)을 만났다. 영달은 선무반에 가입해 옛 참의부 인사들을 귀화시키라는 요청을 거부해 체포당했으며, 지금은 환인현 일본영사관 송운봉(宋雲峯) 암살사건의 범인으로 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송운봉은 과거 김승학을
일제에 밀고한 자이므로 그런 혐의를 받은 것이었다.
아들이 겨우 석방되는 것을 본 김승학은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늑막염에 걸려 고생하다 조금 차도가 있자 ‘초지(初志)를 관철하기 위하여’ 다시 압록강을 넘었다.
그는 조병준에게 맡겨 두었던 독립운동사 자료와 다른
비밀자료를 찾아 남중국으로 향하다 천진에서 안경근(安敬根)을 만났다. 임정의 천진 비밀기관 책임자였던
그는 남경으로 가지 말고 북경의 임정 비밀기관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김승학은 이를 승낙하고 북경 서성(西城)의 경조공우(京兆公寓)를 비밀 장소로 정하고 만주에 있는 옛 동지들에게 연락하여 청년들을 남중국으로 보내는 등 비밀활동을 전개했다. 2년후 안경근이 떠나고 박모(朴謀)라는 청년이 대신 그 직책을 맡았으나 경험이 부족한 그는
일제의 미인계에 빠져 천진 공동조계에 나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천진통신원으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김승학은 그날 밤으로 북경을 떠나 석가장(石家莊) 역 부근의 친우에게 갔으나 이곳에도 이미 일제 경찰의 손길이
뻗어 있었다. 그는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과 덕주(德州)·서주(徐州)를 거쳐 개봉(開封)으로 갔으나 역시 그곳에도 일제의 수배망이 뻗쳐 있었다.
그는 개봉의 노인들이 사는 고묘(古廟)에 숨었다 중국인 피난민증을 사서 비로소 남쪽으로 향할 수 있었다.
동행한 중국인에게 여비와 짐을 빼앗기는 등 우여곡절
끝에 김승학은 개봉을 떠난 지 70여일만에 2,500여리를
걸어 한구(漢口)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은 호구(戶口)가 급했으므로 한구 근처 효감현(孝感縣)의 상점 서기로 한달 일해 주고 받은 30원으로 파괴된 가옥 몇 동을 얻어 수리에 들어갔다.
꼬치구이나 떡을 팔면서 5∼6개월 동안 집을 수리한 후
8,000원에 타인에게 양도했으니 수백배의 이익을 남긴
것이었다. 이 직후 그의 이력을 들은 중국 국민당 비밀당원 등소신(鄧少臣)의 요청으로 옥중수기 “감옥실기”(監獄實記)를 저술하여 발행해 당시 일제의 침략에
시달리던 중국 각계의 커다란 환영을 받기도 했다.
임정을 찾기 위해 두번이나 배편으로 장사(長沙)까지
갔으나 하선이 허가되지 않아 다시 한구로 돌아온 그는
장사행을 포기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가기로 했다. 김승학은 “2년 동안 지내면서 시국을 정관하니 왜적의 패망은 재이(在邇:가까이 있음)함을 짐작”하고 남만주로
갔다고 적고 있는데, 남만주 사평성(四平省) 예문촌(禮文村)에 거처를 정하고 옛 동지들과 비밀리에 연락하던
중 드디어 그의 짐작대로 1945년 8월15일 일제가 패망하는 것을 목도했다.
해방 후에도 고난의 삶
예순다섯의 나이로 해방을 맞은 김승학은 정치바람에
날뛰어 서울로 올라가던 당시의 풍조와 달리
고향에서 동지 10여인과 신의주 노송정(老松町)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독립운동사편찬회를 조직했다. 그의 숙원이던 “독립운동사”를 편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정치보다 독립운동사를 편찬하고, 순국선열 기념사업을 하는 것이 독립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임무라고 여기고 있었다. 자신이 그들을 기록하고 추모하지
않으면 독립전쟁에서 죽어간 수많은 영령들을 위로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정국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1945년 9월 하순 서울에서 조상항(趙尙亢) 등 동지 5인이 와서 상경할 것을 촉구했다.
독립운동사 편찬 준비와 순국선열 추도회 행사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하자 일단 상경했다가 다시 돌아오면 되지
않느냐며 강권하는 바람에 상경한 것이 그리 쉽게 돌아가지 못하는 길이 되고 말았다.
서울에서 정당 가입 독촉에 시달리던 그는 과거 경험을
살려 오광선(吳光鮮)·전성호(全盛鎬)·조상항 등과 함께 한국혁명군을 조직했다. 한국혁명군은 며칠만에 수백명이 지원하는 등 호응이 대단했다. 한국혁명군은 아직 상해에 있던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의 권고로 ‘광복군 국내 제1지대’로 개편하면서 김승학은 참모장을
맡았다.
그해 11월 임정 요인이 환국하고 임정 군무부장 김원봉
산하의 좌익계 청년들과 마찰이 생기려 하자 김승학은
제1지대 참모장을 사퇴한다. 김구 주석은 그에게 국내
제2지대를 설립하라고 권고했다. 이를 받아들인 김승학은 38선 경계인 개성 만월대에 임시군영을 두고 민족군대 육성에 주력했으나 미 주둔군에 의해 강제해산당하고 말았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김승학은 1946년 재경평북도민회를 창설해 초대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남북 사이에 대립의 기운이 높아져 단독정부가 수립되려 하자 그 역시 정치의 한복판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1948년 3월에는 드디어 신탁통치 반대 죄목으로 행정령 제1호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일제때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옥고를 치른 68세의 노(老)독립운동가가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수감된 것이었으니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단면이었다.
그는 이후 1948년 4월에는 임정 국무위원과 정치부장을 역임하고 김구 등이 주도한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을 맡는 등 임정세력과 행동을 같이했다.
그러나 그의 뜻은 정치보다 독립신문을 속간하고 “한국독립사”를 출간하는 데 있었다.
그가 1946년에 복간한 독립신문은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공보국령으로 폐간당하고 말았다.
김승학은 ‘폐간의 이유로는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이며, 절대독립을 지지하며 남한 단독정부를 반대한다는
것’이라고 적었다.
절대독립을 지지한다는 말은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상해에서 일제가 그렇게 폐간시키려던 독립신문이 해방된 조국의 정부에 의해 폐간되었으니 독립신문의 운명
또한 기구하다 할 것이다.
6·25 전쟁을 맞아 부산으로 피난한 그는
그곳에서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를 조직해 이때부터 모든 노력을 기울여 1964년 “한국독립사”를
탈고했다.
그러나 김승학은 “한국독립사” 출간 직전인 1964년
12월17일 84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는 “한국독립사” 서문을 쓸 당시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듯 ‘일제 항복후 이 사료를 40년래 나의 혈한(血汗)의 결정으로 삼아 귀국하였다. 붓이 이에 이르매
백암(白巖) 동지의 추억이 새로워 눈물이 지면을 적신다. 슬프다! 사미반성(事未半成·일이 반밖에 완성되지
않았음)에 숙병(宿病)이 침중(沈重)하여 타세(他世·세상을 떠남)할 시점이 임한 듯하다’라고 적고 있다.
이 서문에서 죽음을 앞둔 노 독립운동가는 ‘내 이제 임종에 이르러 소회의 일단을 기록한다’며 후손들에게
전하는 말 한마디를 남긴다. 그 말이 지금도 낯설지 않은 것은 아직도 그의 말이 우리 역사에서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릇 한 국가를 창건하거나 중흥시키면 시정 최초 유공자에게 후중(厚重)한 논공행상을 하고 반역자를 엄격하게 의법 치죄하는 것은 후세 자손으로 하여금 유공자의 위국충정을 본받게 하고 반역자의 그 죄과와 말로를
경계케 하여 국가 주권을 길이 반석 위에 놓고자 함이다. …
우리나라는 반세기 동안 국파민천(國破民賤)의 뼈저린
수난중 광복되어 건국 이래 이 국가 백년대계의 원칙을
소홀히 한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일제의 주구로 독립운동자를 박해하던 민족반역자를 중용하는 우거(愚擧)를
범한 것은 광복운동에 헌신하였던 항일투사의 한 사람으로서 전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시정(施政) 중 가장 큰 과오이니 후일 지하에 돌아가 수많은 선배와 동지들을 대할까 보냐. 이 중대한 실정으로 말미암아 이 박사는 집정(執政) 10년 동안 많은 항일투사의 울분과 애국지사의 비난의 적(的)이 되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