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수아 1;1-9, 반복하는 행동이 무의식을 훈련시킵니다. 2018. 2. 25
오늘 우리가 3d, 4d, 5g의 가상의 세계 속에 살아갑니다. 상상이 현실화 되어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첨단과 밀려오는 정보 속에 살아가지만 누구나 다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젊음을 앞세우는 청소년들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여전히 불안함과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어렵고 취업을 해도 그 직장이 평생 보장되지 않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생활을 편리하게 했지만 인공지능의 발달로 두렵기도 합니다. 의술의 발달로 인간 수명이 연장되었지만 사망의 두려움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사회가 그렇고, 나타나는 일이 그렇고, 사람이 그렇습니다. 주위와 환경과 여건이 여전히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들에게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스트레스는 극한 두려움 증에서 온다고 합니다. 공항장애 역시 그런 질병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씻기 위한 노력을 하지만 점점 더 두려움과 더 불안증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두려움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요? 환경의 지배를 받는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두려움 없이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반복하는 행동이 이런 두려움과 불안의 무의식을 훈련시킨다는 것입니다. 반복하는 행동이 무의식의 사고나 무의식의 감정을 자신도 모르게 행동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여러분, 무의식이 무엇입니까? 어떤 거부감 때문에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의 일종입니다. 화가 날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것 무의식입니다. 순간적인 말실수로 화를 자초하는 것,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그래서 반복적인 교육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솝우화를 잘 알지요? 이솝 우화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외나무다리」에서는 두 마리 염소가 외나무다리 한가운데서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고 밀치고 싸우다가 결국 두 마리 모두 물에 빠져 떠내려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무의식입니다. 이와는 달리 의식적인 행동의 필요성을 강조한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계획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면 쓸모없다는 점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반복해야 무의식을 일깨웁니다. 반복하는 행동이 우리가 목표한 것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에 대한 내용입니다.
1.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처하고 있는 상황이란 그야말로 강하고 담대한 마음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자신의 선배요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는 이제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백 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야 할 중차대한 임무가 바로 자신의 두 어깨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워진 막중한 중압감이 얼마나 컸을는지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바로 그런 여호수아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영적 담력을 배양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 어떤 대사를 앞에 두면 그 누구라도 두려운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또한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 대사를 결코 이루어낼 수가 없습니다. 목표한 바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큰일들을 이루어내고자 하는 저와 여러분은 그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오늘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는 말씀입니다. 시종은 히브리어, 메솨레트로 성막에서 봉사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모세의 시종이라는 말은 사환이나 심부름꾼이 아니라 개인적인 업무의 보좌관을 의미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먼저 약속하시고 명령하십니다. 5,6절에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왜 이렇게 할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1-1. 맡겨진 삶과 사역의 시작은 반복하는 행동에서 쉽게 이루어집니다. 반복하는 행동에서 늘 의식하는 사람이 됩니다. 무의식에서 의식하는 신앙인이 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신앙의 선배들과 함께 해 주셨음을 말합니다. 왜 이전의 은혜를 말씀할까요? 반복하는 행동을 통해서 여호수아가 마음을 강하게 할 용기를 얻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사십년 광야 생활 동안 모세의 시종, 모세를 돕는 자로 섬겼던 사람입니다. 그는 직책에 대한 구체적인 모든 경험을 사십 년 동안의 실무훈련을 통하여 잘 쌓아 왔던, 아주 적절한 후계자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과업은 초보자로서는 감당하기 벅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 곧 광야, 레바논, 유브라데 강, 헷 족속의 온 땅, 해 지는 편 대해까지 이르는 광대한 땅으로 백성들을 인도해야 할 막중한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입주하기만을 기다리는 빈 땅이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토착 이방 민족들이 이미 정착해서 살고 있는 땅이며, 이스라엘은 이 땅을 싸워서 빼앗아야 할 땅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여호수아가 경험해 보았던 업무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초기 시작부터 이런 막중한 일을 감당해야 할 위치에 세워졌습니다.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여호수아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오직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반드시 이 백성으로 하여금 이 땅을 얻게 해 줄 지도자다. 임직을 위한 권면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격려의 첫마디가 너희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여호수아에게 처음 주어진 약속이 아닙니다. 바로 모세가 시내산 가시떨기 불 가운데서 첫 소명을 받을 때에도 똑 같이 해 주셨던 말씀입니다, 이 약속은 모세의 전 생애에 걸쳐서 나타납니다. 바로 여호수아가 그 사실의 증인입니다. 모세의 시종으로 사십년을 지내 오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 대선배 모세와 늘 함께 해 주시는 것을 자기 두 눈으로 친히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에게 바로 이 점을 반복하여 상기시켜 주고 반복하여 행동하게 하십니다. 여호수아가 보았던 그대로, 애굽 바로 앞에서나 홍해 도하나 광야 40년의 온갖 난관과 역경 중에도 변함없이 함께 하시고 끝까지 승리하게 해 주셨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다시 반복하여 마찬가지로 도와주실 것이라 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두려워할까요? 우리는 왜 불안할 까요? 같은 질문을 반대로 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왜 강하고 담대하며 평안하며 자유를 누리지 못할까요? 의지할 대상을 잘 못 찾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반복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연약한 인간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잘 버리고 잘 잊고, 의식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본성, 무의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사람과 함께 계시며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우리의 질병을 고치시고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싫어했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다시 반복하여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의식하게 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선배들이 길 닦아 놓는 것 따라가는 것과 아무도 해 보지 않은 일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여호수아는 모세와 함께 출애굽 하여, 모세의 기적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바로를 대적하여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고 바로의 결국은 홍해에 수장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손을 들고 있었고 여호수아는 아말렉에게 여호와 닛시로 승리했습니다. 출33;11에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위하여 시내산에 오를 때 동행했으며, 모세가 회막에서 하나님과 만나고 회막을 떠날 때에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군을 보낼 때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의 족장으로 가나안 땅을 정탐하였으며, 10명의 정탐군이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므로 못 들어간다고 했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취하자 우리가 능히 이기리라 했습니다. 민14;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말을 했던 사람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으로 살아남았고, 이제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여호수아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령한 지도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제 본격적인 리더십을 보여야 하는 중차대한 책임감이 그를 눌렀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장수 여호수아가 두려워하는 줄 아시고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 약속하시고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사람에 대하여 대담해야 합니다. 맡겨진 사역에 담대해야 합니다. 사역의 시작, 새로운 일을 위하여 반복하여 친히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무의식을 훈련시키시고 의식적으로 전진하게 합니다. 시작하게 하십니다. 그래야 우리 앞에 놓인 것이 그 무엇이라 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불안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반복되는 말씀과 약속에서 늘 시작과 새로운 일에서 이렇게 의식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비전도 반복하는 행동을 통해서 의식화 되고 의식화된 믿음과 신앙의 발걸음이 결국에는 비전의 열매를 가져옵니다. 여러분, 왜 재림하실 주님을 소망해야 합니까? 신앙인의 궁극적 비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 신앙이 없으면 궁극적 비전이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을 고대해야 합니다. 재림하실 주님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사람이 망쳐놓은 역사를 새롭게 하고 온전하시는 분이 재림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다윗의 뿌리입니다. 거룩한 성이고, 왕이십니다. 자기의 백성들에게 안식과 평화를 주시는 참 목자요 영원한 왕이십니다. 그래서 그 성에 거하는 자가 행복합니다. 주님은 광명한 새벽별이십니다. 새 날을 갖고 오시는 분, 새 아침을 여시는 분이십니다. 영원한 평화와 사랑의 새로운 시대를 여시는 분, 새 역사를 펼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소망해야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여러분, 마라나타! 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만날 때마다 예배할 때마다 나누었던 인사였습니다. 그러면서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 반복하는 신앙의 삶이 우리의 꿈과 소망을 이루고 현실에서 좌절하지 않습니다.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여러분,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사람만이 하루하루를 경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사람이 하루하루를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사람이 하루하루를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사람만이 하루하루를 인내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사람이 매듭을 짓고, 새로 시작을 합니다. 주의 재림을 소망하는 사람이 목표와 목적을 이룹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제, 오늘 모든 tv에서 高木 상을 장식 했습니다. 일본의 동계 올림픽에서 2관왕에 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메디스타트와 팀 추월에서 1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루었을까요? 반복된 훈련이 무의식에서 나오는 잘못된 것을 훈련시켜서 의식 속에 1등을 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비전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고 준비하는 반복된 믿음과 소망으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비전을 말씀하시면서 반복하여 말씀을 합니다. 오늘 6절에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여러분, 한국의 아이스하키 팀의 감독인 머리 감독이 남북한 단일 팀 선수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적을 기다리지 말고, 기적을 바라보지 말고, 기적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물론 기적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비전도 목표도 의식하지 않으면 기적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이상을 노예로 살았습니다. 땅이라는 소유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비전이 이 백성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라는 지도자가 없지만 이 백성들과 함께 비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면 흔들림이 없고 두려움도 없을 것 같은데, 여호수아는 여전히 의문을 갖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비전과 목표를 향해서 반복하여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라고 하십니다. 여호수아의 앞에 놓인 비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위와 생존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들을 이끌어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족속들과 용감하게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두려워 말라! 강하고 담대히 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 합니다. 공식을 찾고 방법과 수단을 찾아 살아가고자 하는 속성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런 보이는 수단과 방법으로 위안을 받고 두려움을 씻어 낸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씻어 준 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반복된 말씀과 반복된 약속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말씀만이 신실하다는 사실을 지난 40년간 스승 모세의 지도력을 통해 배웠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을 두 가지로 여호수아가 확인을 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모세처럼 따르겠다고 충성 맹세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난공불락의 여리고성 사람들이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군에 간담이 녹고 있다는 두 명 정탐꾼의 전갈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약속을 확인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바로 체험합니다. 그리고 행동합니다. 건너야할 요단강에 믿음의 첫 발을 내딛자 물 흐름이 멈췄습니다. 마른 땅 같이 건넜습니다. 무의식이 훈련을 받아서 의식화된 믿음의 행동이 이런 기적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넌 후 공략해야 할 여리고성이 멀지 않는 길갈에 머무는 중 또 다시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그 내용은 전투를 앞둔 모든 장정들에게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적군에게 몰살당할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할례는 무장해제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적군 앞에 버젓이 할례를 행합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을 공략하는데 있어서도 통상적인 방법이 아닌, 성을 단순히 6일 동안 한 바퀴씩 돌게 하고 마지막 7일째 7바퀴를 돌라는 명령을 합니다. 일반적인 전투상식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 말씀만을 그대로 믿고 따릅니다. 인간의 전투지혜나 전략과 수단을 전혀 동원하지 않고 무력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함락하는데 성공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요? 반복된 비전의 말씀 속에 이미 여호수아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호수아는 무의식의 본성을 반복하는 행동을 통해서 의식화 시킵니다. 그리고 의식한 믿음의 행동으로 성공인생, 백성들을 위한 지도자가 되고, 비전을 이룹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일을 하십니까? 무엇이 맡겨졌습니까? 비전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까? 반복된 행동이 우리의 습관적인 무의식을 훈련시킵니다. 무의식에서 의식화 된 이런 신앙과 믿음의 발걸음이 여러분의 비전을 이루고 여러분의 소망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반대로 반복하는 잘못된 의식과 잘못된 행동이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합니다. 이상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 烏有 先生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까마귀는 온통 검어서 이목구비 중에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다들 왜 그럴까? 계속해서 말을 했습니다. 글자도 까마귀 오자는 새 鳥에서 점이 하나 빠진 烏 자입니다. 그런데 빠진 점 하나는 눈을 뜻합니다. 오의 본 뜻은 까마귀지만 烏飛梨落, 烏合之卒, 長頸烏喙장경오훼 등의 사자성어에서 검다는 뜻이 있습니다. 烏骨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자는 왜, 어찌? 라는 强한 疑問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烏有는 어찌 그런 일이, 어찌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으랴?입니다. 그리고 烏有先生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있지만, 존재하지만 사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가 있을까? 그런 의미입니다. 이 말은 중국의 한 무제 때에 희대의 풍류시인이 무제에게 바친 상림부라는 시에 나오는 등장인물입니다. 이 사람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子虛나 烏有先生, 그리고 無是公이란 사람이 등장을 하는데, 허망한 사람, 어찌 이런 사람,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 사람들 모두가 이런 사람은 없다. 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표현입니다. 우째 이런 일이, 우째 이런 사람이! 요사이 한동안 우째 이런 일이 ! (豈有此理)가 流行하더니 이제는 우째 이런 사람이 ! 유행합니다. 그럴 듯한 지위와 체면에도 불구하고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행위를 일삼는 사람이 많은데 모두 현대 烏有先生들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반복하여 의식에 이르고 반복하여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의식과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후회를 하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성경적이나, 복음적인 의미에서, 해도 후회가 남고 안 해도 후회가 남는다면 해야 좋을까요? 안해야 좋을까요? 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고나서 후회는 경험을 통해서 앞을 보게 하지만 안하고 나서 후회하면 미련이 남아서 과거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느 것이 좋아요? 내일과 미래를 보는 것이 낫잖아요. 하고 매듭을 지으면 됩니다. 다시 시작을 하고 의식하면 됩니다. 여러분, 1년이 몇 칠입니까? 괜한 것 묻지요? 그런데 일 년을 12달로 나누었습니다. 한 달은 30일입니다 몇 주로 나누었어요? 4주입니다. 한 주일은 7일입니다. 하루는 24시간입니다. 다 나누었습니다. 왜 나누었을까요? 하나로 다 연결이 되면 안 됩니까요? 누가 무엇이라고 하나요? 왜 나누었을까요? 매듭과 시작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일 년의 매듭, 한 달의 매듭, 일주일의 매듭, 하루의 매듭, 오전 오후의 매듭, 한 시간의 매듭 이런 매듭이 있습니다. 그러면 매듭만 있습니까요? 매듭과 함께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일 년의 시작, 한 달의 시작, 하루의 시작, 오전의 시작, 오후에 시작, 졸업과 시작이 있습니다. 그런데 매듭은 정리이고 시작은 소망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위대한 사람들은 이런 매듭과 시작을 잘 했던 사람입니다. 졸업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한 새로운 계획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함께 하심을 믿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기록된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작은 일에도 충성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 땅에 꼭 필요한 일꾼이 되는 시작입니다. 그런데 이런 매듭과 시작은 반복입니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반복이고, 도전에 대한 반복이고, 꿈에 대한 반복입니다. 그래서 우째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우째 이런 사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영국을 한 때 신앙의 강국으로 부흥시켰던 죤 웨슬리가 있습니다. 죤 웨슬리는 영국뿐만 아니라 영국의 전체 도시를 성시화 시켰습니다. 그가 지나간 모든 도시는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죤 웨슬리가 어떤 영향을 주었으면, 어떻게 오랫동안 영향을 끼쳤을까? 그 분이 평생 부르짖고 살았던 3S가 있습니다. Simplicity, Sincerity, Sacrifice. 단순, 진실, 희생 이 세 가지로 그분은 평생을 사셨는데, 이 단순, 진실, 희생을 주님의 사람으로서 반복을 합니다. 그래서 무의식을 깨우고 무의식을 훈련 시켜서 나라를 바꾸고 도시를 성시화 시켰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처음 시작부터 반복된 의식을 요구합니다. 반복된 행동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반복된 의식과 행동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을 받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그냥 얻습니다. 시작과 비전을 반복된 말씀과 반복된 비전의 약속을 의식화 시켰습니다. 그래서 비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여호수아가 수 2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력하게 말씀을 합니다. 마지막에도 반복하는 행동을 통해서 무의식을 깨우칩니다. 오늘 1장 처음에 나오는 여호수아는 수2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를 합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이제 늙어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의 고별설교 마지막 부분입니다. 누구든지 마지막이라면 귀를 기울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역사의 산 증인이요, 백전노장의 용사요, 아버지 같은 민족 지도자의 유언이기에 더 더욱 귀를 기울입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은 그토록 갈망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숱한 대가를 지불하고 이제 정착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정복 전쟁을 끝내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면서 가나안에서의 삶에 적응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여호수아는 죽음을 앞에 두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예견하면서 위대한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말씀합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어떤 결정과 결단을 촉구합니다.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이 설교를 듣고 어느 한 쪽을 선택하고 결정할 숙제를 떠안았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도 수 없는 결정의 연속으로 삽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것도 결정의 결과요, 산물입니다. 물론 우리의 선택 중에는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불가항력적 요인도 있고, 선택이라고 해서 다 중요한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결정은 일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결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결정을 많이 하면 아름다운 결과물이 산출되고, 나쁜 결정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인생은 힘들어 집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에 최고의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몫인 자유의지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몫인 이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인생이 전혀 달라집니다. 이 자유의 행사 여부에 따라 길이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그러면 왜 여호수아가 이런 결정과 결단을 요구합니까? 여호수아의 마음속에 무엇인가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정착한 가나안 땅의 문화와 문명은 대단합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살았던 유목민의 떠돌이 인생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정착생활 하는 것이, 안주하는 것이 당연한 문화입니다. 이 상황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도, 이 도시와도 정확하게 맞물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만만한 구조가 아닙니다.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순교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그 모두를 견뎌내야 하는 것은 형태는 다르지만 일종의 순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 똑같이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자기들의 순수한 신앙을 유지해 갈 것인가 하는 것은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보다 더 어려운 과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염려하면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믿고 섬길 대상에 대해 결정과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여호수아는 막무가내로 하나님만 섬기라고 촉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현재를 이야기 하면서 한 번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다른 신들과 비교를 해 보라는 거예요. 24;15절,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그러면서 여호수아 본인은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선언합니다. 이 말 속에는 강제적인 프레스가 있지만 은연중에 너희들이 조금만 비교하고 조금만 생각해도 누구를 섬겨야 될 것인가 답이 나오지 않느냐? 예전에 기준하고 살았던 기본을 다시 반복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태도를 지금 결정해라! 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결정하고 결단해야 할 주제는 누구를 섬기며 어떻게 살 것인가? 입니다. 14-18절 사이에 이 섬기다. 라는 동사가 10번 가까이 반복됩니다. 그만큼 중요하기에 계속 반복되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를 섬기며 살까에 따라 갈립니다. 내 인생의 모든 줄기가 거기서부터 나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나 결정이나 선택은 누구를 섬기느냐에 따라 파생되는 문제이고,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Yes와 No 양 갈래 길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스라엘에게 복 주시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복을 주십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나 쉽게 변질된다는 점입니다. 세상 문화에 금방 영향을 받고, 일부 그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근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너희가 정말 하나님만 섬길 것이냐를 반복 확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복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복 주시는 것에 대해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계속 복을 받고 계속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른 의식과 바른 행동의 반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있어야 될 사람, 필요한 사람,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살고 있나요? 여기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은 긍정적입니다. 아주 강하게 결정을 하고 결단을 합니다. 16절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 하오리니. 아멘! 이 고백이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일어나며 처음 우리의 생각을 지배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근심과 걱정꺼리들 아니었는지요. 불안과 두려움이 눈을 뜨면서부터 우리를 지배하려 합니다. 우리 주변은 여리고성으로, 그리고 골리앗이 이끄는 블레셋으로 둘러 싸여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내 지혜와 능력이 넉넉하다고 생각하는 한 우린 여호수아나 다윗처럼 강하고 담대할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경험 많은 장수입니다. 다윗은 목동이지만 곰과 사자와 싸워 이겼던 경험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이나 능력을 의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의 문제를 친히 해결해 주시길 원하십니다. 내 뜻을 내려놓으며 내 의지하던 것을 내려놓아야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으며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부활 하신 후 제자들을 만나신 예수님은 역시 평안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하반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21절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에 있을 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오늘 본문은 다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주님은 여러분을 버리지도 아니하시고 떠나지도 아니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점 하나가 빠진 우째 이런 일이 아닌, 우째 이런 사람이 아닌, 진실로 여호수아와 같이, 다윗과 같이 우째 이런 기적이, 우째 이런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 감탄하시고 축복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