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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십자군 전쟁과 백년전쟁
개괄
게르만족의 이동과 서 로마제국의 몰락으로 유럽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역사의 무대가 지중해로부터 유럽 대륙으로 옮겨갔으며 게르만족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로마문명과 크리스트교, 그리고 게르만족 요소가 서로 합쳐지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우리가 중세(中世)를 봉건사회(封建社會)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로마제국의 몰락 후 로마에 의하여 하나의 세계로 통합되었던 광대한 지역은 크게 3개의 문화권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 첫째가 유럽세계, 다른 하나는 서 로마 제국의 멸망 후에도 천 년 동안이나 국운을 보존한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이며 마지막 하나는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나 급성장한 이슬람세계이다. 그 중 유럽세계는 비잔틴세계나 이슬람세계에 비하여 문화적으로 뒤떨어져 있었고 특히 민족이동기 직후의 혼란과 무질서 상태 때문에 암흑세계(暗黑世界)라고 불려지기도 하지만 오늘날의 유럽세계는 바로 이 시기를 거치면서 발전해 나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시기의 유럽세계를 지탱하던 두 기둥으로는 봉건제와 카톨릭교를 들 수 있다.
10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사회는 전반적인 안정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9세기에 있었던 노르만족, 마쟈르족 및 이슬람교도들의 침입도 점차로 약해지고 장원제도를 바탕으로 한 봉건제도가 나름대로 틀이 잡혀서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봉건사회가 안정을 가져오자 농업 생산력이 커지고 인구가 증가했으며 도처에서 개척과 개간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규모는 작지만 남는 농산물의 처리를 위해 지방단위의 시장이 생겨나고 도시(都市)가 교역의 중심지로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1세기에는 유럽 전체에 새로운 활기가 넘쳐흐르게 되었다. 이러한 유럽의 새로운 활기는 11세기말 십자군(十字軍)전쟁으로 나타났다. 십자군은 그동안 일방적으로 공격만 받았던 유럽이 이슬람세계에 대하여 반격을 가할 만한 힘이 생겼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의 세력이 얼마나 강성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일례라 하겠다. 비록 성지회복(聖地回復)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으나 십자군으로 말미암아 원거리 통상을 비롯한 활발한 상업활동이 촉진되고 이에 따라 중세도시가 발달하게 되었다.
국경과 팽창
중세에는 국경이란 개념이 없었다. 이것은 당시에는 토지 소유의 가치가 평가 절하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경작지를 측량하기 시작했던 12세기에야 경계선을 점차로 확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영토소유권에 대한 주장들 역시 종종 불명확했고, 상황에 따라서 상이한 판결이 내려졌다. 이처럼 중세의 공간 질서는 상당 기간 불명확했다. 이러한 와중에 지리적 발전은 정치 권력의 논리와 함께 이루어지고 있었다. 교황의 주도 하에 시작되었던 서유럽의 팽창은 봉건 관계라는 법적 토대를 배경으로 했는데, 이러한 유럽의 팽창은 경작지 개발, 도시 건설, 통치 구조의 세밀화, 그리스도교의 심오화, 용어와 필체에서의 법 조직화를 통한 힘의 축적과 같은 집중화의 과정을 거쳤다. 발전은 일련의 사건들로 가속화되었다. 11세기 초반 농업 혁명에 관심을 집중했던 프랑스에서는 같은 세기 말인 1096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1042 ?~1099.7.29]의 십자군 원정에 대한 주창이 수만 명을 불러모았다. 이런 새로운 대중 운동은 유럽의 대팽창을 불러왔으며, 서유럽의 거의 모든 민족들이 이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점차 형성되었던 민족 의식에 자극되어 민족 공동체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십자군 원정
십자군 원정은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후 8회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이다. 그 때 이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 원정을 십자군이라 부른다. 십자군에게서 종교적 요인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을 간단히 종교운동이라고 성격 지을 수는 없다. 봉건영주, 특히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였다. 그밖에 여기에는 호기심?모험심?약탈욕 등 잡다한 동기가 신앙적 정열과 합쳐져 있었다. 대체로 십자군 시대의 서유럽은 봉건사회의 기초가 다져지고 상업과 도시의 발달도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어서 노르만인의 남 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정복,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 동부 독일의 대 식민 활동 등에서 볼 수 잇듯이 주변 세계와의 경계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십자군도 정치적?식민적 운동의 일환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종교는 이 운동을 성화 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원인
고대 로마제국이 동서로 양분된 후 시리아는 동 로마 통치하의 속주가 되고, 7세기 전반에는 이슬람교도인 아라비아인에게 정복되었을 뿐 아니라, 638년 성도 예루살렘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한편 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더불어 예루살렘을 성도로서 숭앙하는 생각이 점차 높아졌는데, 11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많은 그리스도교도가 개인 또는 집단을 이루어 성지 순례를 떠났다. 그 당시 이 지방을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교도들은 그리스도 교도들의 순례에 대해서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았다.
그 무렵 동방의 이슬람 세계에서는 셀주크투르크가 세력을 신장시켜 비잔틴제국 영내에까지 진출하고 시리아 ?아르메니아 ?소아시아를 지배하고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였다. 1092년 셀주크(Seljuk)왕조1)의 통일이 깨어지고 그 영토는 왕족간에 분할되었다. 이 기회에 비잔틴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Alexius I) [1048~1118.8.15]는 비잔틴제국의 재흥을 꾀하여 군사적 원조를 청하는 사절을 로마 교황청으로 보냈다.2)
이에 대한 대답으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최초로 십자군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알렉시우스의 요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왜냐 하면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직서임권투쟁(聖職敍任權鬪爭)3)의 와중에 있었는데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Heinrich IV) [1050.11.11~1106.8.7]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방원정이라는 어려운 사업을 통하여 유럽에서 교황권을 확립하고, 비잔틴에서의 그리스정교회를 로마교회 산하에 통일하려 했던 것이다.
제1회 십자군
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공의회 (Council of Clermont)4) 회의석상에서 십자군에 관한 연설을 했다. 그는 성지 해방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명명하고 종군하는 군사들에게 신의 구원을 약속하였다. 그 후 교황의 호소를 전하기 위하여 각지에 사람이 파견되었다. 교황권의 위세를 높이고자 노력하고 있던 우르바누스 2세는 투르크족을 공격하여 성지를 이교도(異敎徒)로부터 되찾고 비잔틴교회를 로마교회에 통합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웅변술이 뛰어난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지 예루살렘을 잃은 그리스도교도들의 비참한 생활과 동방에서 투르크인이 가해오는 위협을 조리 있게 설명하고, 이슬람에 대한 싸움은 성전(聖戰)이며 이 전쟁에서 전사하는 자는 모두 천국에서 그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였다. 나아가 그는 동방에 금은 보석 및 온갖 재화가 수없이 깔려 있음을 들어 세속 제후들의 이기심을 충동질하기도 했다. 이어 그는 프랑스를 순회하면서 십자군을 제창하였으며 많은 열성적인 설교사들이 여러 곳을 다니면서 십자군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리하여 때마침 팽배해 있던 유럽의 힘과 강렬한 신앙심이 결합하여 대대적인 십자군 전쟁이 전개되는 것이다.
교황이 계획한 십자군은 주로 기사(騎士)들로 편성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십자군에 지원한 사람들은 종교적 정열에 휩싸인 농민이 대부분이었다.
각 지방에 파견된 사람들과는 달리 멋대로 십자군에 대한 열을 부채질하고 다니는 자도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은자(隱者) 피에르는 십자군 사상의 창시자로 불릴 만큼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동쪽을 향해 떠난 것은 농민을 대부분으로 하는 민중십자군이었다. 우선 고티에가 이끄는 일단, 이어서 은자 피에르를 따르는 한 부대가 출발했다.
양군은 헝가리 ?불가리아를 통과할 때 이미 그곳에서 식량이 떨어져 약탈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수록 심한 보복 공격을 받았다. 양군은 합동하여 소아시아에 건너가 투르크군과 싸움을 벌이기는 했으나 결과는 대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이밖에도 3개의 민중십자군부대가 이어졌는데, 그들에 의해서 유대인 박해가 개시된 것이다. 특히 라이닝겐의 백작인 에미코의 박해는 처참하였다. 십자군에 대한 지나친 열성이 일찍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어 단 유대인에게로 쏠렸는데, 거기에는 부유한 유대인에 대한 경제적 증오심도 깃들어 있었다. 이 3개 부대는 헝가리인의 공격에 의해 괴멸되었다.
정규 십자군은 1096년 여름부터 4개 부대로 나뉘어 출발, 육해(陸海) 양로를 지나 이듬해 봄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였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큰 군세였는데 비전투원을 포함하여 5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 중 주력을 이룬 것은 프랑스인과 노르만인 이었다. 합류한 십자군은 니케아(Nicaea)5)공략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진군했는데, 그 길은 험난했다. 소아시아를 진군하는 동안 투르크인의 공격, 그리고 심한 더위와 굶주림 등으로 상당수의 인원과 말을 잃었다.
시리아에 도착하여 첫 공격목표인 안티오키아(antiochia)6)의 공방전에만 8개월이 걸렸다. 점령 후에도 전력 회복과 주변지역을 정복하는 데 6개월을 소비했으며 그 동안 유행병에도 시달렸다. 그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지휘자들이 분쟁을 일으킴으로써 부하들의 불평을 싹트게 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 전면에 도착, 99년 7월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거기서 처참한 유혈극이 벌어졌다. 십자군 병사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십자군의 이러한 행동은 일직이 로마의 그리스도 신자들이 "만일 누가 너의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다른 뺨도 내밀어라.“ ”칼을 잡는 자는 누구나 칼로 망한다.“하는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어떤 고통에서도 무저항으로 순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거리가 멀다고 하겟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설교사들이 성지탈환 외에 동방의 금, 은 보화와 미녀에 대해 선전했기 때문에 당연히 십자군중에는 물질적 탐욕을 목적으로 한 불순한 건달들이 많아서 그런 만행을 저지르게 되었다고도 설명을 한다. 열광적인 신앙과 이교도에 대한 격한 증오심이 한 덩어리가 되어 십자군의 정신을 형성한 것이다.
반면에 이슬람교는 인두세만 꼬박꼬박 납부하면 그들 고유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 ‘개종을 하던지 납세의무를 하던지’라고 말을 했다.
당초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도 십자군 병사들의 일부는 시리아에 정주(定住)하였다. 정복 지에는 예루살렘왕국 ?안티오키아후령(侯領) ?트리폴리백령(伯領) ?에데사백령 등 4개국이 들어섰다. 또 왕국 안에는 3대 종교기사단이 있었는데, 요한 기사단7) ?템플기사단(Ordre des Templiers)8), 조금 늦게 독일기사단獨逸騎士團 (Deutscher 0rden)-튜턴기사단이라고도 한다.- 등의 종교기사단이 편성되어 성지 방위의 주요 군사력이 되었다. 영주는 성을 거점으로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상인은 도시에서 특권을 얻어 이익을 증대시켰으나 농민은 희망도 없이 예속상태에 놓였다. 교회와 수도원이 건립되고 교회조직도 정비되어 유럽의 제도와 관습이 그대로 옮겨졌다.
제2회에서 제4회까지의 십자군
12세기네 접어들면서 사정은 급작스럽게 변한다. 이슬람 세력권에서 반격을 가했던 것이다. 여기서 흥미 있는 것은 유럽에서 십자군의 예루살렘 탈환을 성전(聖戰)으로 생각한 것처럼 이슬람 측에서도 예루살렘 탈환을 그들 나름대로 성전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1144년 에데사 (Edessa)9)가 이슬람 군에게 탈취되자 제2회 십자군이 파견되었다. 프랑스왕 루이 7세(Louis VII) [1120?~1180.9.18]10)와 독일왕 콘라트 3세(Konrad III) [1093~1152]11)가 지휘자가 되었다. 시리아에서 다마스쿠스 공격이 계획되었으나 시리아 주재 십자군 병사가 적측의 감언에 속아 전열을 이탈했기 때문에 중도에서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두 국왕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귀국하였다.
12세기 후반에 이집트의 명군(名軍) 술탄12) 살라딘이 하틴전투에서 그리스도교군에게 승리를 거두자 그 여세를 몰아 각지의 도시와 요새를 점령하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이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제3회 십자군이 파견되었다. 이번에는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1122 ?~1190.6.10]13), 프랑스왕 필리프 2세(Philippe II) [1165.8.21~1223.7.14]14), 영국왕 리처드 1세(Richard Ⅰ) [1157.9.8~1199.4.6]15) 등이 참가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소아시아의 키리키아강에서 빠져 죽었고 남은 군사만 시리아를 향해 진군하였다.
현지에서는 아콘 포위작전이 벌어졌는데도 필리프왕은 1년 8개월 늦게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게다가 그는 아콘 공략 후 곧바로 귀국해버렸다. 리처드왕은 키프로스섬 정복 때문에 필리프왕보다 2개월이나 늦게 도착했다. 그 후 리처드는 살라딘과 교전, 몇 개의 도시를 탈환하지만 예루살렘 해방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그리스도교도의 성도 순례와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 후 아콘은 시리아에서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16)
제4회 십자군17)은 교황권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 [1161~1216.7.16]18)에 의해 발동되었다. 군단의 편성은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황제나 국왕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최초의 십자군과 비슷하였다. 다만 먼젓번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이슬람군의 거점이된 이집트가 원정의 목표로 결정되었다.
이에 대해 군대의 수송을 담당한 베네치아는 이집트와의 평화적 교역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한 수송비가 모금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19) 그들은 우선 달마티아(Dalmatia)20)의 츠아라를 치고 이어서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군하였다. 전부터 베네치아는 비잔틴제국 내에 유리한 상업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최근의 정변으로 그것을 잃은 상태에 있었고 제노바와 피사에 눌려 있었다.
1204년 십자군은 정정(政情)의 혼란을 틈타 비잔틴제국를 무너뜨렸다. 수많은 성유체(聖遺體)와 보물을 약탈당하고 수도의 일부와 항만과 섬은 베네치아 영토가 되었다. 그 밖의 비잔틴 영토도 십자군의 지휘자들에게 분할되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라틴제국이 성립되었다. 이 제국은 약 반세기 동안 존속하였다.
제5회 이후의 십자군
제5회 십자군은 또다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제창으로 이루어졌다. 이 십자군은 아콘으로부터 이집트에 원정하고, 다미에타 (Damietta)21)를 포위하였다. 작전은 성공하였으며 이슬람 측은 다미에타와 시리아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이를 거절하고 카이로에 진격하였으나 격퇴되었다.
제6회 십자군은 신성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행해졌는데 이제까지와는 다른 특징을 가진다. 프리드리히는 ?세례를 받은 시칠리아의 술탄?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라비아의 풍습에 매혹된 황제였다. 그는 무력이 아닌 외교수단으로 이슬람 측으로부터 예루살렘과 그 밖에 영토를 양보 받았다. 그러나 그가 돌아간 뒤에는 시리아 주둔 십자군 병사들 사이에 내분이 격화되어 그 사이에 예루살렘도 잃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왕 루이 9세 (Louis IX) [1214.4.25~1270.8.25]22)가 이끄는 제7회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루이 9세는 키프로스 섬에서 이집트로 건너가서 다미에타를 점령했다. 이때에도 이슬람 측은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을 제안해왔으나 전과 같이 이를 거부하고 카이로를 향해 진군했으나 만슬러전투에서 대패하여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잠시 시리아에 머물면서 약간의 항구와 요새를 탈환하고 철수하였다.
그 후 안티오키아가 이슬람 군에게 함락되자 루이 9세는 최후의 십자군을 이끌고 출발하였는데, 튀니스를 공격하였을 뿐 그곳에서 죽었다. 시리아에서는 요새가 잇따라 함락되었고, 1291년 아콘마저 빼앗기자 십자군 국가와 그 운동은 종말을 고했다.
실패의 원인
제1회 십자군의 성공은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분열을 한 데에 큰 이유가 있었다. 그 후 이슬람 세력이 통일되자 반격을 당하는 상태가 되었다. 십자군은 전력도 충분하지 못하였지만 시리아 주둔 십자군 병사와 종교기사단, 새로 도착한 십자군병사, 상인 등은 상호간, 또는 각 내부에서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거기에는 영토문제와 경제적 이익의 문제가 있었고, 또한 형성되어가고 있던 국민적 감정 등에 의한 대립이 얽혀 있었다.
또 십자군 국가에서는 소수의 정복자가 많은 피정복민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그 기초는 항상 흔들리는 상태였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무지와 광신과 편협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슬람교도들의 증오심만 부채질하였다. 그리스도교도를 성지로 가게 한 서유럽의 팽창운동은 그 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십자군도 종말을 고하였다.
영향
십자군운동은 우선 유럽에서 교황권의 후퇴, 국왕 권력의 강화와 중앙집권화, 도시와 상업의 발달, 이슬람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문화의 발달 등 모든 일과 관계가 있다. 즉 교황에 의해 제창된 운동의 실패는 그대로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전사(戰死)에 의해 단절된 귀족 가의 소유영지는 왕령(王領)에 편입되어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였다.23)
십자군운동으로 최대의 경제적 이익을 본 것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였다. 십자군에 참가한 유럽인들은 미지의 이질적인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향을 과대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왕권의 강화는 봉건사회 내부 전개에 기본적 요인을 가지고 있었다. 봉건적인 분열상태에 있을 때에만 유럽세계를 관념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교황권은 왕권에 의한 중앙집권화와 더불어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십자군운동의 전제조건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규모의 군대를 먼 곳까지 보낼 수도 없었고 다량의 식량과 무기를 모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동방문화 유입의 중심지는 시칠리아와 에스파냐였다. 유럽인은 이교문화(異敎文化)에 접하면서도 최후까지 관용의 정신을 배우는 일이 없었다.
또한 제4회 십자군에 의해 와해된 비잔틴제국은 다시 부활하지만 이미 소국에 지나지 않았으며 몰락은 결정적이었다. 그 때문에 비잔틴제국은 이제까지 수행해오던 유럽의 방벽 역할을 잃게 되었다. 이슬람세계에 대한 영향도 컸다. 이슬람교도는 관용의 정신이 풍부했다. 그러나 십자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그들 사이에 점차 비관용성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었으며, 성전(聖戰)에 대한 정열은 높아갔다.
헤게모니24)와 세력균형
기원 후 1000년경 유럽에서는 권력의 상호관계가 복잡하게 형성되지 않았고 이슬람 세력으로 인해 지중해 연안에서는 지속적인 위협이 있었지만 서유럽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라틴 유럽도 마찬가지였지만 중부 유럽에서만 오토 3세(Otto III) [980.7~1002.1.23]25)와 로마교회의 동맹 관계유지로 교황의 도움을 받아 폴란드, 헝가리와의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그 후 하인리히 3세(Heinrich III) [1017.10.28~1056.10.5]26) 에 의해 북, 동, 남동 방향으로 봉건적인 결속이 이루어진다. 반면 보헤미아 공국은 이미 동프랑크 왕국 시대부터 지속적으로 결속되었다.
서임권 투쟁으로 정치구조상 매우 불명확했던 황제와 교황의 이원주의가 중부유럽, 프랑스, 영국에서 진행되었다. 유럽의 각 왕국들에서 성직-세속 지배권의 다양화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부 유럽에서 광범위한 정치판도가 형성되고 전체적으로는 오토 3세와 하인리히의 봉건적 결속은 무의미하게 되고 각 상황에 따른 동맹관계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2세기가 경과하면서 세력 중심의 추이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왕국이 쌍벽을 이루고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 발을 뻗으려는 영국과 대립한다. 13세기 이래로 라틴 유럽에서는 광범위한 각축장이 형성되고 확산되어진다. 특히 지중해 연안에서의 주도권 쟁탈전이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간의 대결도 전개되었고 12세기 초반부터 독일과 영국의 이해관계가 뒤섞이게 되었다. 독일 상인들에게 발전 가능성이 있는 경제구역인 발트해 도 또 하나의 각축장인데 덴마크의 지배권 주장과 스웨덴의 동방 진출로 긴장이 고조되었고, 라틴 그리스도교 세계의 확장, 통합과정, 그리고 해안선 진입로를 놓고 벌어진 주도권 싸움이 시작되었다. 또한 14세기에는 중부 유럽의 동쪽에서 헝가리와 초지역적으로 성장한 보헤미아 왕국간의 긴장도 고조되었다.
위인들의 세계로
비록 궁정 시인들과 궁정 연대기 작가들이 10, 11세기에 로마-독일의 통치자들이 유럽의 권력을 장악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있지만, 서임권 투쟁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무기와 정치적 입지를 무력화시켰다. 힘겹게 안정을 찾은 제국 내에 대립왕이 등장했고, 제후들로 하여금 왕에 대항한 연합 전선을 구축하도록 했던 교황의 노력이 이어졌다.
옥시타니아
부빈 전투(Battle of Bouvines)27)와 더불어 유럽 정치에 큰 파장을 끼쳤던 또 다른 변화가 있었다. “아라곤 왕국”이 그것인데, 아라곤 왕국은 몇몇 기존 세력들을 인적 연합이나 봉건적 예속 관계를 통해 결속시켰다. 그 결과 왕국은 에브로 강에서 론 강까지 확장될 수 있었다. 공격적인 지배 구조를 형성하여 상업적 이해 관계에 따라서 곧바로 서부 지중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알프스 이북의 발전과정에 대한 우리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불명확하기만 한 지중해 연안의 역사는 아라곤 해양 왕국과 그 적대 세력의 형성과 성장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알프스 이북 지역의 발전 과정에 연구가 집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453년 투르크에 의한 동 로마 황제권의 쇠망, 1476년 아라곤 독립의 종언,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거점 상실, 투르크의 침입과 종교개혁을 계기로 지중해 세계가 다시금 유럽인들의 의식 속에서 사라져버릴 때까지 모든 시대는 고대 세계와 연관되었다. 그러나 이미 대서양으로 관심이 쏠려 있었다. 프랑크족과 서고트족으로 구성된 스페인 왕국은 산초 3세의 통치 기간 동안에만 안정되었다. 그의 네 명의 아들들은 왕국을 분할했고, 이 과정에서 적출인 막내아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아라곤을 상속받고 그 외에 두 개의 백작령을 얻었다. 아라곤은 지중해 연안의 여타의 비독립적인 백작령들과 결합해서 마르세유까지 팽창했던 바르셀로나 백작령과 1164년 인적 연합 관계를 맺으면서 이후 해양국으로 변모했다. 물론 정치적으로 고대 옥시타니아는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이 지역은 십자군의 이름으로 카타리파 (Cathari)28) 혹은 알비파(Albigenses)29)를 진압했던 북부로부터의 팽창에 눌리고 말았다. 페드로의 뒤를 이은 하이메 1세의 정책은 이웃 바스크족(Basques)왕국인 나바라(Navarra)30)에 대해서 반신 반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아라곤 본연의 정책이었다. 나바라는 아라곤과 카스티야(Castilla)31) 사이의 완충 국가로, 왕위 계승 문제와 종종 프랑스 왕국으로부터의 자극이 있었지만 두 국가 중 어느 국가도 다른 국가에 양보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라곤과 카탈루냐인들은 프랑스인들과 적대 관계에 있었는데, 이는 급작스럽게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입지를 위협했던 알비파 정벌 십자군 원정 이후에는 확실히 그러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왕자인 앙주의 샤를로 인해서 프랑스는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서 슈타우펜 영지를 상속받게 되었다. 14세기 중엽이 되자 팽창이 추진력이 사리지게 되었다. 아라곤 왕국은 국내 문제와 스페인 내부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 프랑스 적인 전선과 카탈루냐 상인들의 이해 관계에 자극되어 지중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특별한 정치적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포르투칼은 12세기 이래로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었다. 기후적, 지형적으로 대서양을 향하고 있고, 정치적으로도 국가 간의 구분이 명확했던 이베리아 반도의 협소한 서부 해안국은 정치적 독립을 할 수 있었다. 정복왕 아폰수 (Afonso) 역시 이곳에서 남쪽으로서의 재정복 전쟁을 전개하여, 1146년 주로 프랑스 십자군 기사들의 지원을 받아서 리스본을 탈환했다. 이로써 그리스도 교도들은 남서부 최근단에 도시 문화가 만개했던 거점을 획득했지만 이들은 감사할 줄 몰랐다. 이슬람 세력 하에서 서고트족의 그리스도교를 보존해 왔고, 포르투칼은 스페인-카스티야의 정치와는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서 카스티야어가 최종적으로 스페인 표준어를 특징짓는 동안에, 포르투칼어는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에 이들은 이미 대서양을 향해서 첫 번째 대발견의 향해를 시도하여 카나리아 제도, 마데이라 제도, 아조레스 제도에 도달했다. 특히 이러한 시도들은 향해자 엔리케(Henrique O Navegador) [1394.3.4~1460.11.13] 왕자의 보호 아래 이루어졌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통합으로 이루어진 스페인은 마지막으로 협소하지만 고도로 발달되었던 남부의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를 정복하자 포르투칼인들의 뒤를 따랐다. 콜럼버스는 카스티야의 이름으로 아메리카를 발견했고, 2년 후인 1494년에는 소규모의 포르투칼과 이보다는 다섯 배 더 큰 스페인 두 해상 국가가 전 세계를 분할하게 되었다. 포르투칼은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스페인은 신세계를 소유하게 되었다.
왕, 신분, 계층 그리고 공익
13세기와 14세기 초반의 유럽 정치에는 두 개의 특징적인 주류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정치적 참여, 즉 공동 결정을 점차적으로 집요하게 요구하는 신분 계층에 대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 지배권을 추구했던 왕권의 대내외적인 팽창이 바로 그것이다. 프랑크 제국의 핵심 지역을 벗어나면, 교회는 몇몇 영향력 있는 주교의 입지를 제외하고는 대 제후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카롤링 왕조의 중심부에서는 주목할 만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곳의 몇몇 대 제후들은 왕과 동등한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그들은 관리와 그들에 의해서 건설된 사유 도시들, 특히 이들에 집중된 행정 조직, 교회 문제에 대한 공동 결정권 혹은 심지어 지배권 주장과 같은 것들에 의존했다. 이러한 지배권 확립 방법들은 다향했으며,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오래 된 보호권, 후견인권, 재판권과 이들로부터의 조세 수입이 첨가되었다. 1215년 영국의 귀족들은 실지왕 존의 어려운 상황을 자신들의 권리를 문서상으로 보장하는데 이용했다. 실지왕 존의 후계자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이 시기에 대헌장은 여러 면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이 역사적 순간에 미래의 영국 의회의 윤곽이 드러났다. 이는 미래에도 마찬가지로, 왕권과의 대립은 점차로 완화되었고 죽음을 부르는 전투 대신에 다른 수단과 방법이 나오게 되었다. 다른 수단이란 무엇보다도 영국 의회주의의 가능성이었다.
필리프와 보니파키우스
필리프 4세(Philippe IV) [1268~1314.11.29]32)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Bonifacius VIII) [1235?~1303.10.11]33)의 대립은 유럽의 정치 판도를 단숨에 변화시켰다. 이는 교황이 구금되었기 때문도 교황이 구금의 후유증인 화병으로 서거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그리스도교 세계의 최고 세속권자인 황제가 아니라, 유럽에서 자신의 주도권을 과시하려는 한 왕에 의해서 교황권과의 극단 적인 권력 투쟁이 전개 되었기 때문이었다. 교황 측에서도 서임권 투쟁기간에 대두된 주장들에 근거하고 그 이후 제시된 상당수의 교황의 권리를 첨가함으로써, 전 그리스도교 세계를 포괄하고 교황권을 명목상이나마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은 법 체계를 구축했었다.
끔찍한 황제 공위 시대
56세의 프리드리히 2세가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황제권은 그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는 독일의 역사가들이 중세 말기의 전반적인 위기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1247년 14세의 왕자로서 반란 음모에 관련되어 잠시 동안 아버지에 의해서 성에 구금되기도 했던 프로세미슬 오타카르는 18세 때에 정치적 고려하에 나이가 두 배나 연상이었던 미망인과 결혼하기도 했다. 제국 내에 정주하고 있는 통치자의 필요성을 인식한 독일의 선제후들이 영방 통치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었지만 큰 정치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아르가우 (Aargau)34)출신의 함스부르크가의 백작 루돌프를 로마-독일의 왕으로 선출한 1237년, 프르세미슬 오타카르는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력적인 합스부르크 사람을 과소 평가했던 그도 3년 후에는 그를 왕으로 인정했으며 25년의 통치 후에는 자신의 오스트리아 영토를 포기해야만 했다.
새로운 콘스탄티누스
프랑스의 세력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필리프 2세(Philippe II) [1165.8.21~1223.7.14]는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고전적인 경칭인 ‘아우구스투스’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는데, 실제로 그는 가장 강력한 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확실히 당대의 가장 유능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왕의 정책과는 관계없이 이 시기에 제 4차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프랑스의 십자군 원정대는 동로마 제국의 상당 부분을 정복했고, 그리스 적인 제국을 “라틴” 제국으로 만들었으며, 이를 서로 봉건적인 관계로 조직되어 있는 수많은 제후령들로 분할했다. 심지어 교황조차도 몇 년 후에 이 제국을 새로운 프랑크(Nova Francia)라고 불렀다. 1223년 필리프 2세의 후계자인 루이 8세(Louis Ⅷ)가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고, 그 후 3년 뒤에 성왕 루이 9세(Louis Ⅸ)의 오랜 통치기간(1226-1270)이 이어졌다.
루이는 기존의 토대 위에 프랑스 왕권을 더욱 확고히 조직화했다. 최고위 궁정 관리들은 1300년경,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통계 수치에 위하면 대략 500명 정도의 궁정 국가를 구성했다. 프랑스의 봉건 피라미드는 이 시기에 최고의 법적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로마의 왕이자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194~1250] 역시 많은 칭송을 받았던 그의 “전근대적” 국가 조직 형성에서 이에 상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는 독일이 아닌 자신의 노르만 유산인 남부 이탈리아에서였다. 프리드리히의 남부 이탈리아 정책의 의도는 거의 비슷한 시기의 성왕 루이(재위 1226-1270)의 노력과, 비록 차이는 있지만,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교황에게 십자군 원정 참여를 약속하기도 했으나, 이들의 의도와 그 결과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예견되었던 교황의 불신을 없애는 것이 주목적이었고, 반면에 루이는 종교적 열정으로 십자가를 짊어졌다. 프리드리히는 협상을 통해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루이는 무모한 전투에 전력을 소모해버렸다. 루이가 왕위에 있던 기사의 모범으로 상징되었다면, 프리드리히의 행위는 이미 당대인들 사이에 이중적인 메아리를 남겼다. “새로운 콘스탄티누스”가 되고자 했던 그의 욕심은 자명한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가 통치했던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통치 행위의 결과로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점차 문제점들이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고, 독일에서는 지배권의 양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교황과 롬바르디아 도시들과의 치열한 최후의 접전을 치른 후, 프리드리히의 정책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중부 유럽의 동쪽
오타카르를 제거한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재위 1273-1291)35)는 도나우 강 유역에서 대규모 정치 세력 형성의 조짐에 쐐기를 박을 수 있었지만, 유럽적 차원의 정치에 대해서는 시간을 거의 가지지 못했다. 그는 “왕령지(王領地) 회복”을 위해서 제국 도시들로부터 조세를 거두고, 합스부르크 왕조의 후계자 옹립문제로 18년 동안 제도적으로 우위에 있던 이웃 프랑스의 팽창 정책에 대항해서 제국 서부의 국경을 수호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실제로 합스부르크가의 왕위계승은 나사우 백작 아돌프(재위 1292-1298)와의 6년 간의 줄다리기 끝에 확정되었고, 알브레히트 1세(재위 1298-1308)36)는 정력적이고 정치를 이해했던 인물이었으나 불과 10년만 통치했다.
독일의 상황은 이처럼 혼란스러웠던 반면에, 중부 유럽의 동쪽 보헤미아의 왕권은 프르셰미슬 오타카르의 몰락의 충격으로부터 회복을 하고 새로운 명성을 얻게 되었다. 보헤미아의 바츨라프 2세(재위 1278-1305)37)는 피아스트 왕가의 공주와 재혼하면서 수세대 동안 지속되고 있던 폴란드의 왕위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그는 1300년 크라코프에서 폴란드의 왕으로 등극했고, 이 시기에 헝가리에서 아르파드 왕조가 소멸하자 1301년 동명의 아들(바츨라프 3세)을 위해서 남부 이탈리아 출신의 경쟁자 앙주의 샤를 로베르(카로이 1세)를 누르고 헝가리의 왕위를 차지했다. 이 역사적 순간에 느슨한 권력 연합이었지만 한 왕조가 세 개의 왕위를 차지하면서 발트 해와 아드리아 해 사이의 광대한 지역을 통합하게 되었다.
루돌프와 그의 아들들이 1273년 아레 강으로부터 도나우 강 유역으로 진군했을 정도로 성장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에 맞서서, “세력이 미약한 백작”이었던 나사우 출신의 아돌프가 새로운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튀링겐을 놓고 벌어진 싸움에서 패배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로 진격할 무렵인 1308년에 합스부르크가의 왕 알브레히트가 살해당했다. 따라서 마침내 1310년 룩셈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에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헬베티가 동맹
합스부르크, 룩셈부르크, 비텔스바흐 가문은 세기말에 독일에서의 패권과 왕위를 놓고 서로 다투었던 3대 왕가로 기록될 것이다. 이들 모두는 영방 정책에서 유사한 정책을 구상하고 있었다. 차기 왕인 바이에른공 루트비히 4세 역시 동쪽, 부란덴부르크에서 왕조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동시에 교황과의 장기간의 팽팽한 법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인정되지 않았던 왕정 기간에(1314-1346), 그는 남쪽으로의 관문인 알프스 통행로를 차지하고자 했다. 같은 것을 룩셈부르크와 합스부르트 가문도 원하고 있었다.
티롤 협곡 지역의 지배권이 바뀌는 동안, 스위스인 들은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가 있었다. 이곳에 이른바 스위스 연방이 형성되었는데, 그 핵심인 유리, 슈비츠, 운터발덴의 계곡 지역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제국으로부터의 자유를 근거로 해서 통합되었다. 이른바 ‘헬베티가 동맹(Confoederatio Helvetica)'이 그것으로 오늘날에도 모든 스위스의 자동차 번호 판에서 이를 읽을 수 있다(스위스 자동차의 번호 판에는 헬베티카 동맹의 약자 CH가 적혀있다). 이렇게 하여 제후가 아닌 “공동체”에 의해서 행사되었던, 장래의 주권의 핵심과 같은 것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는 오랫동안 실현되지 못하다가, 스위스인 들이 1315년 모르가르텐, 1386년 젬파흐, 1444년 비르스 강변의 장크트 야코프에서 합스부르트가에 대항하여 그리고 1476년과 1477년 무르텐과 낭시에서 부르고뉴 공작과의 피나는 투쟁에서 승리한 후에야 달성되었다. 전설적인 전투들에 의거하면, 스위스의 자부심은 동맹 가담자들과 반대자들 사이에 팽팽히 진행되었던 중요한 타협 과정에서 성장했고, 14세기 이후로는 더 이상 농촌 적인 계곡시대가 아니라 도시의 주도 하에 있던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국경문제
13세기 중반에는 정치적 대립의 중심지가 지중해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이후 그것은 1300년경 교황과의 대립이 다시 시작되었던 프랑스로 옮겨갔다. 이미 아라곤 왕권의 성장은 상당한 정치 판도와 변화를 일으켜서, 한쪽에서는 영국과의 결탁이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에 대항하는 프랑스와 카스티야 사이의 동맹이 결성되었다. 마침내는 무력 지원의 대가로 앞으로의 십자군 원정을 저지한다는 아라곤과 이집트 술탄 사이의 동맹이 이루어지기까지 했다.
독일 제국 국가(國歌)의 첫 구절에서 낭만적으로 승화되어 읊조려지고, 역사지도가 늘 표기하지만은 않았던 사실은 옛 제국이 실제로 서쪽으로는 마스 강, 남쪽으로는 손 강과 론 강을 지나서 지중해까지 뻗쳤으며, 서쪽으로는 종종 이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언어상의 경계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쪽으로는 라인 강, 스위스의 쥐라산맥과 서알프스 산맥까지 언어의 혼합지역이 전개되었는데, 이는 12세기 이후 슬라브인들과 독일인들의 거주지에서 형성되었던 중부 유럽 동쪽의 언어 혼합 지역과 상황이 유사하다.
국가 의식
프랑스 왕권은 교황들과의 케케묵은 세력 싸움 속에서도 황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점차 박차를 가했다. 국가는 점차 교회 공동체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대관 되고 도유식을 거친 왕들의 초월적 정통성과 심지어 기적을 행했던 프랑스의 왕위 같은 기원에서 유래하는 “국가 의식”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영국 왕들은 신성(神性)의 명성에서도 이웃 프랑스와 비견될 수 없었다. “성왕” 루이 9세가 프랑스 왕의 이상에 상당히 근접했던 반면에, 윌리엄 1세, 윌리엄 2세, 헨리 2세 혹은 사자심왕 리처드는 그렇지 못했다. 이는 국가가 자립하는 데에 종교적 배경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영역과는 무관한 평화, 정의, 질서의 수호와 같은 국가 존립의 목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국가는 독자적인 법 제도였고, 황제는 법의 근원이며 동시의 최고 재판관이었다.
1338년이 경과하면서 주교들, 도시들, 선 제후들이 구분되기는 하지만, 차후의 제국 의회는 삼분법에 의거하여 소집되었고, 선 제후들에 의해서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서 선출된 자를 교황의 인준이 필요 없는 합법적인 로마의 왕이자 황제로 천명했다. 하지만 1250년의 황제권의 붕괴 이래로 1312년까지 대관 된 황제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청은 로마의 왕에 대한 인준권을 고수했다.
아비뇽은 수십 년 간 종교계의 최고 법정이었고, 주목할 만한 재정관리의 중심지였다. 또한 성직자, 구체적으로 성직 획득과 성직 임명 그리고 십일조와 면죄부와 관계해서 모든 그리스도교 세계를 관할하고 있었다. 당시 교황은 종교적 힘이 아닌 재정적 힘으로 세상에서 스스로를 주장할 수 있었다. 정치 게임에서 명확히 배제되었던 교황권은 최후의 카드를 내놓기 위한 독자적인 길을 찾았다. 이는 아마도 교회 독립의 존속에 필요했을 것이나, 정통 교리의 신봉자나 이단자 모두에게 스캔들이었다.
두 번째“백년”전쟁(Hundred Years' War)
1328년에 프랑스 왕위는 공석이 되었고, 프랑스 왕들이 “경이적인 다산”에도 불구하고 카페 왕가의 형통은 단절되었다. 프랑스 법에 따라서 방계인 발루아 가문(사촌 형제)의 필리프 6세(Philippe VI) [1293~1350.8.22]38)가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39) 이러한 왕조 교체가 이루어지고 10년 뒤인 1338년, 영국 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 [1312.11.3~1377.6.21](제위 1327-1377)가 자신이 프랑스와의 영토에 더 가깝다는 구실 하에 프랑스를 공격하자, 영국의 새로운 팽창 정책이 대륙으로 향하게 되었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영국인들의 행동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정치적 구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남프랑스에 있는 일부 영국의 옛 소유령들이 문제로서 특히 영국으로 포도주를 배로 실어 날랐던 가스코뉴가 문제, 영국과 프랑스 북부 그리고 프랑스와의 중요한 제적 관계의 문제, 또한 언어상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었다. 또한 영국 왕이 대륙의 소유지로 인해서 프랑스 왕의 봉신이었고, 모든 법적인 제소가 있을 때마다 매번 최고 법정인 “파리 의회”에서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는 사실 역시 논점이 되었다. 150년 이상 지속된 전쟁은 영국이 많은 승리를 거두고 플랑드르와 남서부의 옛 소유지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대륙에서 영국이 완전히 철수하는 계기가 되었고 유럽에서 프랑스 우위의 붕괴가 바로 확실해졌다.
의회
1300년경 영국의 발전은 프랑스와 유사했다. 섬나라의 정치적 통함은 상당히 진전되었고, 웨일스로의 팽창은 1295년에 종결될 수 있었다. 이후 영국의 왕은 스코틀랜드에서 최고 봉건 영주로서의 법적 지배권을 이유로 왕위 쟁탈전에 개입했고 그 결과 왕위 계승 문제에서 스코틀랜드의 독자적인 결정권을 고수하기 위해서 영국인들과 스코틀랜드인들 그리고 스코틀랜드인들 사이에 무차별적인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영국인들은 서로 결속을 했는데, 이는 왕에 대한 복종이라기보다는 그와의 적절한 공동 보조를 의미했다. 초반에는 “공동체적인 돌출 행동에 불과했으나”(F. W 메이틀런드). 의회의 정착은 왕의 정책 결정에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되어 1297년에는 적절한 기회에 “대표 없는 과세는 없다!”라는 기본 조항에 동의하게까지 되었다. 의회는 이때부터, 오늘날처럼, 항시 웨스트민스터에서 개최되었고, 점차 규칙적으로 하위 귀족-기사 계층과 함께-과 도시 대표자들을 흡수하여, 14세기 중반에는 하원이 상원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 의회는 특히 새로운 법의 공포와 보편적인 인정을 위한 합법적인 장소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웨스트민스트 의회는 “파리 의회”와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의회 안의 왕”은 일정한 장소, 정기적인 개회, 의회의 권한들과 참석자 범주의 확정 등으로 인해서 영국의 독특한 정치 구조를 창출했다.
크레시 전투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에서의 여성의 왕위 계승 금지를 수긍했다. 그 자신의 대관식에 있고 4년 후 그리고 프랑스의 왕권 교체가 있었던 3년 후인 1331년, 그는 봉건 서약을 했다. 그러나 7년 후에 그는 스스로를 프랑스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로 선언하고 프랑스를 공격했으며 결국 승리하였다. 1346년, 프랑스 북부에 새로이 상륙한 영국왕 에드워드는 파리와 안전한 해안 사이에 있던 크레시로 그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차진 속에 매복했다가 그곳에서 1346년 8월 26일, 대전투를 벌였다. 프랑스 편에 섰던 제노바의 궁수들은 습한 공기로 인해서 그들이 무기를 사용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반면에, 영국의 장궁수들은 이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고 이 우세는 기병대의 등장과 더불어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크레시 전투에도 제국의 문제가 역시 개입되었는데, “바이에른공” 황제 루트비히 4세는 교황들과의 지속되는 외교 대립 속에서 인정도 받지 못하고 그의 지지자들에게 내려진 파문령을 철회시키지도 못하고 있었다. 후에 교황에 대한 프랑스의 중재 가능성이 생기자, 루트비히는 영국의 동맹자에게 등을 돌리고 프랑스 측에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항시 프랑스 왕의 편에 섰는데, 크레시 전투 직전인 1339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가문은 그 사이에 제국 내에서 전혀 다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룩셈부르크의 요한, 즉 “장님왕” 얀(재위 1310-1346)이 매년 조세가 지불되는 봉이 주어졌던 왕에 불과했으나, 비텔스바흐, 합스부르크, 룩셈부르크 이 3대 왕가가 오랜 경쟁을 벌인 끝에 얀의 아들 카를이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만일 프랑스가 승리했다면 독일에서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루트비히의 지지자들은 그의 파문과 대립 왕의 선출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았으며, 이는 실질적인 정권 교체를 막을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크레시 전투에서의 프랑스의 패배는 룩셈부르크 가문에는 치명적이었다. 이 전쟁의 가장 중요한 결과로는 칼레의 정복으로, 이곳의 주민들은 강제로 추방되었고, 영국인들이 이주한 칼레는 18세기까지 영국의 중요한 거점으로 남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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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 백과사전 (http://www. yahoo. co. kr)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 이영주 옮김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M&B(2000)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