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못
길 위에서 꽃을 만나고 연못으로 소풍 나온 구름하고 이야기 나누면서 매일 걷는다.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앞세워 비 마중을 나갔다. 걷는 일은 종교의식처럼 경건하고 신비로운 일이다. 고독한 시간을 보내면서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울고 싶을 때 화가 나서 어찌할 바 모를 때도 걸으면서 나를 달랬다. 나에게 연지못은 엄마의 품이었다.
초록 잎새들이 숨이 가쁘게 터지면서 세상이 초록으로 넘실거린다. 나무들이 보내주는 초록 문자에 걸으면서 늦은 답장을 보낸다. 나무와 바람과 풀꽃이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며 젖은 마음을 말린다. 연지못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민낯으로 만나는 나의 연인이다.
경산에서 조금 떨어진 진량읍 선화리로 시집 온 지도 30년이 되어간다. 달나라에서 유배 온 공주라 부르던 은사님이 <하진>이라는 아호를 주셨다. 연꽃처럼 살아가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 있는 동자못으로 매일 산책하러 나갔다. 회화나무가 물가에 그림처럼 걸려있고, 여름이면 연꽃이 피는 작은 연못이다.
동자못을 걸으면서 내 삶을 닦고 쓸고 다듬고 깎아냈다. 동자못의 연꽃으로 환생하는 꿈을 꾸면서 한 쪽 귀가 없는 우렁각시로 살았다. 연잎을 보면서 개구리 의자라고 노래하던 아이들, 죽은 벌레를 흙으로 무덤을 만들고 아카시아꽃을 이불이라고 덮어주며 토닥토닥하던 아이들, 불에 타서 시커멓게 속이 타들어 간 회화나무를 어루만지며 쑥을 찧어서 약이라고 발라주던 아이, 유모차에 앉아서 아장아장 걸으며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동자못은 아이들 놀이터였다. 아이들 유년의 추억이 오롯이 살고 있는 연못이다.
어느 해 여름, 강력한 태풍이 오던 날이다. 소나기가 퍼붓고 천둥 번개가 치고 벼락이 치던 날에 회화나무가 쓰러졌다, 힘겹게 버티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회화나무가 어깨가 잘려 나가고 허리가 꺾이고 말았다. 회화나무가 떠난 자리에 누군가 이팝나무를 심었다. 회화나무가 없는 동자못은 모두가 떠난 빈집처럼 쓸쓸하고 온기가 사라졌다. 빈자리가 너무도 컸다. 사진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회화나무가 되었다.
인연이 다하면 흩어진다고 했다. 연지못을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길 건너편에 커다란 연못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집에서 가깝고 아름다운 동자못이 있는데 굳이 멀리까지 갈 마음이 없었다. 연지못은 외진 곳에 있지만, 풀들도 무성하고 자연 그대로 보전이 되어있는 곳이라서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혼자서 연지못으로 산책하러 나가면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다. 동자못 회화나무가 보이지 않은 뒤로는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는 흙길로 된 산책로를 걸었다. 억새꽃이 피면 영화 속 비련의 주인공처럼 긴 머리카락 날리면서 쓸쓸히 멋을 내면서 걸었다, 가을 새벽에 짙은 안개 숲을 걸으면 머리카락이 다 젖어서 마치 샤워를 하고 막 나온 여인처럼 섹시한 내 모습에 반하기도 했다. 연꽃이 연못을 가득 채울 때 풍경은 경전을 펼쳐놓은 듯 마음이 경건해졌다. 해마다 연잎을 서너 장 따서 욕조에 띄워놓고 목욕을 했다. 연지못이 통째로 나에게로 오는 날이었다.
2016년도에 연지못에 연꽃생태경관 조성사업을 하면서 전망대도 만들고 산책로도 포장했다. 이전에는 억새가 사람 키보다 더 크게 자라서 길이 안 보였다. 인적이 드문 까닭에 혼자 산책하기에는 꺼려지는 곳이었다. 산책로를 말끔하게 포장을 해놓으니 운동하러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연지못으로 매일 산책하러 나가게 되었다. 산책하러 나가면서 동자못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잠시 들려 이팝나무의 안부를 묻는 내 마음은 무엇일까?
연지못으로 가는 길에는 순박한 꽃들이 피고 진다. 봄까치꽃부터 씀바귀 엉겅퀴 뱀딸기꽃 애기똥풀 양지꽃 민들레 별꽃 반지꽃이 산책길에 언제나 예쁜 얼굴로 반갑게 인사를 한다. 과일나무가 많은 경산에는 매화꽃이 피기 시작하면서 복숭아꽃 자두꽃 살구꽃 앵두꽃 모과꽃 명자꽃으로 봄이면 꽃 난리가 난다. 정신없이 꽃에 취해서 살다 보면 꽃이 온다고 말하고 오지 않았듯이 간다는 말도 없이 봄바람 따라 가버린다. 꽃 피듯이 물 흐르듯이 살라고 했다. 꽃이 진 자리에는 초록 바람이 집을 짓는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연지못을 지킨다. 다리를 심하게 절면서 매일 운동을 나오는 아저씨의 연꽃 같은 미소가, 일흔의 나이에도 길이가 2km 되는 연지못을 서너 바퀴 걷는 우리들의 센 언니가, 팔각정에 먼지떨이를 걸어놓고 매일 청소를 하는 보이지 않는 천사가, 팬플루트를 연주하는 연지못의 인디언 아저씨가,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매일 산책을 나오는 흰머리 소녀가, 팔각정에서 먼지떨이로 의자를 청소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새댁은 이곳 말고 어디에서 청소 일을 하느냐’고 묻는 바람에 모두에게 큰 웃음을 주었던 강아지 할머니가, 연지못 입구에 야생화를 심어놓은 꽃처럼 향기로운 사람이, 두 귀를 팔랑거리며 힘차게 달리는 사랑스러운 강아지가, 날씨가 풀리는 초봄부터 초겨울까지 귀틀집을 짓고 살아가는 강태공들이, 오래전부터 살았던 것처럼 연지못에 기대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연지못 둑길에 아름다운 기억을 쌓아가고 있다. 5월의 연지못은 연잎들이 옹알이하는 소리로 사랑이 넘쳐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