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부 김항수(金恒壽)
[생졸년] 1655년(효종 6)~1708년(숙종 34) / 향년 53세
[생원] 숙종(肅宗) 5년(1679) 기미(己未) 식년시(式年試) (生員) 3등(三等) 37위(67/100)
[본관] 광산(光山)
[거주지] 한성([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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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주부 김공 묘표(主簿金公墓表)
전의현(全義縣: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전동명 일대) 북쪽 고도촌(高道村)에는 넉 자 높이의 봉분이 솟아있으니, 장흥고 주부 김공(金公) 휘 항수(恒壽)와 영인(令人) 우봉 이씨(牛峰李氏)의 무덤이다. 김씨(金氏)는 신라 왕자 흥광(興光)에게서 나와 대대로 광산(光山) 사람이 되었다.
8대에 걸쳐 평장사를 지냈고, 휘 약시(若時)는 고려 말의 충신이었다. 여러 세대가 지나 관찰사를 지낸 지남(止男)은 광해군 시절 맑은 의론을 내세워 이름이 났으니, 공이 바로 그의 현손이다. 조부 휘 우인(宇仁)은 현감을 지냈고, 부친 휘 만익(萬翼)은 좌랑을 지냈다. 모친 선산김씨(善山金氏)는 부사 종필(宗泌)의 따님이다.
공은 재기(才氣)가 일찍 성취되어 8세에 시를 짓고 9세에《소학》에 통달하였다. 장성해서는 타우[打愚 이상(李翔)] 선생의 집안에 장가들었는데 선생이 훌륭한 그릇으로 여겼다. 무오년(戊午年,1678, 숙종 4)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때부터 성균관에서 유학하였는데 사론(士論)을 힘써 부지하였다.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 타우 선생이 화를 입고 두 아들이 함께 세상을 떠나자 공이 뒷일을 경영하였다. 공이 처음에는 선생을 따라 살다가 뒤에 풍계(楓溪)로 이사하여 좌우에 도서(圖書)를 두고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하였다. 만년에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는데 그 공로로 원직(原職)에 올랐다가 곧 경미한 잘못으로 인해 파직되었고 후에 다시 제수되었다.
또 어버이 상을 당해서는 슬픔이 지나칠 정도로 집상(執喪)하였고, 종손(宗孫)이 빈약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스스로 사당을 짓고 제전(祭田)을 마련하였다. 상을 마쳤을 때 벼슬살이하라고 누군가 권하면 공은 근심스런 낯빛으로 말하기를,
“모의(毛義)가 격소(檄召)를 받고서 기뻐한 것은 어버이가 살아계셨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관복을 도둑이 훔쳐가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시골 노인이 이 관복을 어디에 쓰겠나.”
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699, 숙종 25) 과옥(科獄) 때 공의 글도 급제 취소자 명단에 들었는데 공은 개의치 않았다. 공이 어릴 적 타우 선생을 곁에서 모실 때에 우암(尤菴) 선생을 뵈었는데, 선생이 진실한 바탕에서 각고의 공부를 하라는 면재(勉齋 황간(黃榦))의 말을 외워 권면하니 공은 종신토록 그 말을 잊지 않았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는데 특히《주역》과 주자(朱子) 글을 좋아하였으며, 좌우(座右)에 고인의 격언을 내걸고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평소엔 급하게 말하거나 낯빛을 바꾸는 일이 없었고 남들에게 너그럽고 온화하게 대하였으니 한 번만 만나면 공이 중후하고 덕망이 높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을미년(乙未年, 1655, 효종 6) 5월 2일 태어나 무자년(戊子年, 1708, 숙종 34) 모월 모일 세상을 떠났다.
영인(令人)은 어려서부터 예교(禮敎)를 익혀 공손하고 단정하였으며 부도(婦道)를 다하였다. 타우 선생이 화를 당했을 적에 매일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기도하였고, 종사(宗事)의 주인이 없음을 애통해하여, 임금의 행차 때 상소하여 족형 이만경(李晩慶)을 후사로 삼기를 청하니 숙종께서 가엾게 여겨 허락하였다.
이에 영인이 말하기를,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였다.
공이 죽고 4년 뒤 신묘년(辛卯年, 1711, 숙종 37) 세상을 떠나니 향년 58세였다. 2남을 두었으니, 생원시에 합격한 철근(鐵根)과 박근(璞根)이다. 철근은 문장으로 이름이 났는데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들 득성(得性)과 득운(得運)을 두었는데, 막내는 박근의 후사가 되었다.
박근이 공의 묘 앞에 묘표를 세우려고 철근이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내게 비문을 청하였으니, 내가 타우 선생의 종손(從孫)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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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주부 김공 묘표 :
저자가 김항수(金恒壽, 1655~1708)를 위해 쓴 묘표이다.
[주02] 광해군 …… 내세워 :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주장하는 정조(鄭造)와 윤인(尹訒)을 논박하여 한동안 폐모론을 중지시켰다.
《龍洲遺稿 卷14 監司龍溪金公墓誌銘》
[주03] 타우 …… 입고 :
이상(李翔, 1620~1690)은 기사환국 때 옥사하였다.
[주04] 모의(毛義)가 …… 것 :
후한(後漢) 때 모의가 어머니는 늙고 집이 가난한 상황에서 뜻밖에 수령(守令)으로 부르는 부(府)의 격소(檄召)를 받고는 희색이 만
면하였는데, 그를 본 이들이 모두 그를 천히 여겼다. 그 후 어머니가 죽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아 사람들이
그때서야 그의 진의(眞意)를 알고 감탄하였다.《後漢書 卷39 劉平列傳》
[주05] 기묘년 과옥(科獄) :
1699년(숙종 25) 10월 단종의 복위를 경축하는 증광(增廣) 전시(殿試)를 실시하여 한세랑(韓世良)을 포함한 34명을 합격시켰는
데, 정언 이탄(李坦)이 시험에 부정이 있었음을 상소하여 부정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급제자 33명 중 15명의 급제가 취소되었고,
시관(試官) 등 10여 명이 유배에 처해졌다.
[주06] 진실한 …… 하라 :
주희(朱熹)의 문인 황간(黃榦)이 임천현(臨川縣)에서 현승(縣丞)의 아들인 하기(何基)를 제자로 받아들일 적에 “학문은 반드시 진
실한 마음 바탕 위에서 각고의 공부를 해야만 가능하다.[必有眞實心地, 刻苦工夫, 然後可.]”라고 일러 주었다.
《宋史 卷438 何基列傳》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