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3일 (고후3 문자와 영).hwp
2019년 11월 3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고린도후서 3:4-6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
설교의 제목은 고린도 후서 3장 6절 하반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구절만 놓고 보면 말은 알겠는데, 그 말뜻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문자가 사람을 죽이고, 영이 사람을 살린다는 말 속에 담긴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이 편지글을 쓴 바울의 생각은 무엇이고, 이글을 읽는 우리는 어떤 의미로 해석을 해야 제대로 된 해석을 할 수 있을까요?
짧은 구절이지만, 이 구절 속에는 대비법이 두 번이나 사용됩니다. <죽임과 살림>이라는 두 단어가 대비되어있고, 이 대비는 <문자와 영>이라는 단어의 대비를 설명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입니다. 많이 사용하는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문자>라는 말 대신 <율법조문>이라고 번역해두었습니다. 이것은 개역성경을 개정하기 전에 <의문,儀文>이라고 번역했던 것을 고쳐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자하는 의도가 드러납니다.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하기 쉽게 바꾸면, “율법의 여러 법조문들은 죽이는 역할을 하지만, 살리는 역할을 하는 것은 (그 법조문 뒤에 숨겨있는) 정신이 하는 것입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바울의 생각을 우리의 오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매우 선언적으로 단언합니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고 말입니다. 이 어법을 우리가 다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 문장이 또 우리를 죽일지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바울의 어법을 해석할 때에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영적”으로 해석해야 이 말이 우리를 살리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문자는 죽이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러니 문자는 버려야한다는 결론만 남습니다. 반대로 영은 살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니 무조건 붙잡아야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어법이란 언제나 그렇듯이, 강조하고 싶은 것을 내세우다 보면, 그 본뜻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제가 몇 가지 단어대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1) 첫째 그룹은, <죽음과 삶>, <악과 선>, <불의와 정의>, <악취와 향기>, <전쟁과 평화> 이런 것들은 둘 중에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선택해야할지 분명한 것들입니다. 오늘 바울이 사용한 <죽임과 살림>에 해당합니다.
(2) 두 번째 그룹은, <자비와 정의>, <형식과 본질>, <육신과 정신>, <엄격함과 너그러움>, <노동과 휴식> 같은 것들입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경우에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속합니다.
(3) 세 번째 그룹은, <절제와 풍요>, <절약과 소비>, <자신감과 겸손>, <모험과 안정>, <환경보호와 자연개발>, <재물과 하나님>, <평등과 차등> <무력과 평화>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경우는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도 어렵고, 둘 중 하나는 선택하기도 어려운 애매한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 대비들을 제가 열거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상상을 하셨습니까? 제가 기대한 것은 신앙적인 입장에서 이런 대비적 단어들을 들은 느낌이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대비는 신앙적인 입장에서 결정하기에 분명한 것들입니다. 그마저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세 번째의 그룹에 속한 대비들이 신앙의 눈만 가지고 보면 당연히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익숙한 기준으로 볼 때에 우리의 속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들입니다.
바울이 죽음에 비유한 문자와 살림에 비유한 영은 위의 세 그룹 중에 어디에 속할까요? <문자와 영>은 <죽임과 살림>에 비유한 것으로 보아서 분명히 첫 번째 그룹, 선택이 분명한 그룹입니다. 하지만 앞뒤 내용을 읽어보면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돌 판에 새겨준 문자인 율법도 좋지만, 가슴 판에 보이지 않는 글로 하나님의 영이 쓴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문자와 영>은 두 번째 그룹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문자와 영>은 세 번째 그룹에 더 가깝습니다. 문자와 영은 마치 형식과 본질처럼 보이기도하고, 육체와 정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때가 오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선택하게 되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입니다.
6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옛 언약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도 대비가 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입니다. 구약성경이 옛 언약이라면 새 언약은 아직은 성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입니다. 세월이 지나서 교회는 이것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고정시켰습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문자와 영>의 관계가 다시 <문자와 문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구약도 문자고 신약도 문자입니다. 그러니 그 속에서 영을 찾아내는 일이 쉽겠습니까?
성경에 쓰여 있지 않은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오늘의 현실에서 성경의 <문자>는 아무런 답도 주지 못합니다. 그때 <영>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들어야 하는데, 듣는 사람마다 다 다른 소리를 들으니, 이제는 무엇이 죽이는 문자이고 무엇이 살리는 영인지 판단하기조차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즘 인기 있는 방송 중에 <골목식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유명한 사업가인 요리사가 골목상권을 활성화한다는 목표로 개선하기 원하는 동네 식당들을 컨설팅해주는 오락 프로그램입니다. 여러 평가들은 차치하고 제가 본 핵심을 하나 말씀드립니다.
컨설팅을 요청한 식당주인들은 단순합니다. 백선생이 가르쳐주는 레시피대로 음식을 쉽게 만들어 사업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컨설팅 하는 백선생은 전혀 생각이 다릅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깨우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접근합니다. 그래서 음식장사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식당주인은 무조건 맛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백선생은 그 식당이 있는 지역의 주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깨달으라고 조언합니다. 그리고 다른 식당과 다른 자기만의 특징을 만들어가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음식장사 컨설팅은 음식이 아니라 정신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문자와 영>처럼 말입니다. 음식은 맛있어야하지만, 이익이 남아야 장사가 됩니다. 그래서 식당주인은 이익구조를 생각하고 요리하지만, 식당손님은 가성비를 생각하고 옵니다. 식당 하나를 운영하는 일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변화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식당을 오픈한 주인은 사실 돈을 벌 생각인데, 백선생은 돈 버는 것은 당연히 따라올 일이니, 정신 차리고 식당운영을 하라고 충고합니다. 세상에 쉬운 게 어디 있냐고 다그치면서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절대로 완성된 기성품이 아닙니다. 성경의 기록이 다 끝났으니, 쓰인 대로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성경을 문자로만 이해하면, 오히려 우리를 죽이는 문자가 된다고 바울은 걱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쓰인 문자를 넘어서서, 하나님이 우리의 깊은 마음속에 전해주시는 문자 뒤에 담긴 깊은 의미를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고린도 후서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바울의 가르침을 수용하면서 그 의미를 되짚어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정확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문자가 죽이고 영은 살린다고 말하지만, 이제는 이 말의 어순을 바꾸어 읽어야합니다. “죽이는 것은 문자이고,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무엇이 다른지 느껴지십니까?
바울 당시에 율법적 문자가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했던 것이기에, 문자가 사람을 죽인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문자가 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하면 그것이 문자에 속한 신앙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이란 배타(排他)가 아니라 이타(利他)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신앙이 나에게 이기적(利己的)인 판단을 요구하면, 그 신앙은 사람을 죽이는 문자입니다. 영적 신앙이라면 공생(共生)과 상생(相生)을 넘어서 이타적인 결단을 하게합니다.
그러니 오늘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간직할 새로운 약속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죽이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문자적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은 살리는 일이고 그것이 성령께서 인도하는 영적인 삶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이렇게 바꾸겠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고, 죽이는 것은 문자입니다.” 평화목 교회 교우들의 평생의 삶 속에서 살리는 신앙의 모습이 아름답게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