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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17 - 카이사르는 갈리아 제패후 루비콘강을 건너 폼페이우스파와 내전을 벌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58년에 갈리아 총독에 부임해 아라르 전투에서 헬베티족을 저지하고 갈리아
부족과 브리타니아 및 게르만족과 10차례 전쟁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으며 52년에 빈게네 전투와
알레시아전에서 베르킨게토릭스가 지휘한 갈리아인 군대를 쳐부수고 갈리아를 로마 영토로 만들었습니다.
알레시아에서 포위된 베르킨게토릭스를 구하기 위해 모든 갈리아족은 대군을 이끌고 로마군의 포위망
을 공격하였고, 베르킨게토릭스도 이에 호응해 성 밖으로 나와 공격하니 카이사르는 앞뒤로
적을 맞이하는 셈이었으나 방벽과 참호를 만들어 양쪽의 적을 모두 제압했으니 전쟁의 신인가 합니다?
로마 군단병의 무장 수준과 전투력이 워낙 갈리아족 보다 뛰어난데다가 카이사르 라는 위대한
장군이 지휘를 했으니..... 갈리아족은 로마군을 역포위해 앞뒤로 공격한다는
전술적 우위와 자신들의 영토에서 많은 병력으로 공격한다는 이점을 안고도 패배하고 맙니다.
그 넓은 갈리아 전역을 단 7년만에 제패해버린 사건은 로마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는데..... 원로원은 갈리아
총독 임기가 끝난 그에게 루비콘강에서 군대를 해산한 뒤 로마로 올 것을 요구하는데, 카이사르
는 자신이 갈리아 총독을 유지한 상태에서 집정관에 출마할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지만 거부됩니다.
군대 지휘권을 반납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로마에 가서 집정관에 출마한다는 것은 원로원의 수많은
정적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이니 그가 원로원 허락 없이 브리타니아와 라인강 건너
게르만족을 공격한 월권행위는 바로 고발을 당할 것이니....... 이는 목숨을 걸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삼두정치 울타리가 있었으나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원정에서 무능력함을 보인 끝에 군대와 함께 카르헤
전투에서 전사했고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였던 율리아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으며.....
카이사르의 전공을 시기하게 된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의원의 딸과 재혼했으니 우군이 사라지거나 적이 된 것입니다.
원로원이 최종 권고를 발동하자 카이사르는 내전을 치르기로 결정했으니 소수지만 자신의 군대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넜으니....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 (ALEA IACTA EST) 는 말은 이 강을 건널 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로마는 외관상 공화정이지만 과두정에 가까웠으며 명문 대가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고위직을 차지해야
한다고 보았으니.... 속주 총독직은 집정관이나 법무관 역임자들이 1년 아니면 부득이한 경우 2년
씩만 돌아가면서 맡는 자리였고, 임기를 채운 총독은 당연히 물러나 원로원의 일원으로 남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모두가 동등한건 아니고 집정관과 재무관의 차이가 있었고, 같은 원로원 의원들끼리도 전직 집정관이냐
아니냐, 돈이 많냐 적냐, 가문이 얼마나 오래됐냐, 출신이 어디냐 등 갖은 조건에 따라서 같은 기사계급
인데 가문이 원로원에 진출을 언제 했느냐에 따게서 신참자 (Novus Homo) 니 하는 높고 낮음이 있었습니다.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도 순서대로 했으니 로마 과두정 사람들은 자신의 가문을 높이는데 필사적
이었는데.... 특정 정당이나 이념 보다는 자신과 가문을 위해서, 그리고 보호민 -
피호민 관계에 따라서 이합집산을 반복했으니 이렇게 쌓아올린 명예를 Dignitas 라고 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예외로 3개 속주와 6만명 지휘권을 10년씩이나 보유했으니 전직 정무관 30명이 1년씩 돌아가면서
맡을수 있던 자리를 혼자 차지했고, 거기에 폼페이우스 처럼 거대한 지휘권을 보유했으니 기존 명문
귀족들 자리는 줄어들었고, 북이탈리아나 에스파냐 같은 수익성 좋은 속주에서 재산을 모을 기회도 사라졌습니다.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경제적, 정치적 원조를 통해 자신의 피호민들을 공직에 진출시켰으니, 자신의 세를
불릴수록 Dignitas 가 더 올라갔으며 카이사르의 문제는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 이긴 다음 술라를 본받아 혼자
Dignitas 를 독차지한지라 야망 있는 명문가 자제들이 카이사르의 Dignitas 를 넘볼 수 없도록 횡포를 부린 것입니다.
원로원 의원들은 카이사르를 두려워하거나 싫어했지만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등 소수 보수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술라 - 마리우스 전쟁 처럼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더 두려워했으니
공포정치를 경험했기 때문에.... 또 독재자가 로마로 진격해서 내전이 일어나는 일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다만 카이사르의 다음 순번인 고명한 명문가들은 카이사르의 두번째 집정관 당선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내전도 각오하고 원로원 최종 권고를 통해 카이사르를 제거하는게 낫다는
생각이었던지라....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에서 카이사르와 맞설 군대의 지휘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제패하여 로마의 영광을 드러낸 것이 바로 자기인데 국가의 영웅인 자신을
원로원 최종권고를 해서 죽이려는게 말이 고 주장했고 친카이사르 성향의 호민관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원로원에서 쫓아냈으니 호민관의 신체 불가침 권한을 침해한 것을 성토합니다.
폼페이우스도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겠다는 명분으로 전 지중해 해안에서 50마일 내를 관장한다는 권한을 얻어
냈고 제한없이 지중해를 지배할수 있었으며 폼페이우스의 임기는 3년이었는데 이 일을 3개월만에 해냈으니
원래는 반환해야 하는 권한을 폰토스왕 미트리다테스 6세를 치는데 쓰자고 제안해서 지지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내전의 원인은 경제문제니, 포에니 전쟁 등으로 얻은 국유지를 원로원 귀족들이 차지하여 농장을 건설했으며.... 이런
토지를 목숨을 걸고 싸운 로마 중산층 병사들에게 분배하는 것을 온갖 방법으로 막았고, 이의를 제기한 그라쿠스
형제 같은 이들을 원로원 최종권고 라는 이름 하에 죽여버렸던 것이 발단이니 민중파의 후계자가 카이사르인 것입니다.
갈리아 전쟁에서 전격전과 기동전에 익숙해진 카이사르의 13군단은 원로원의 예상 보다 빠르게 로마 본토로
강행군해 왔는데..... 기원전 49년 1월 12일 루비콘강을 건넌후 이탈리아 속주와 로마 국경 사이에
리미니는 15km 이니, 로마군의 행군 속도는 시속 5 km 인지라 오전 10시에 도착했는데...
남쪽은 이탈리아 본국으로 로마는 600명 1개 대대 규모 병사도 주둔시키지 않은 군인이라고는 없는 땅입니다.
리미니에는 현직 호민관인지라 국경 밖으로 나갈수 없는 안토니우스와 카시우스 (훗날 원로원
에서 카이사르 암살범) 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원로원 의원 쿠리오는 국경 밖으로
나갈수 있었던지라..... 카이사르가 주둔한 라벤나까지 찾아와 함께 루비콘강을 건넜습니다.
당시 카이사르가 거느린 13군단은 10개 대대로 정원을 채우지 않아 4,500명에 불과했는데다가 더욱 전쟁
이 힘든 겨울철이라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은 그가 감히 루비콘강을 건너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거라고 믿어 방심했던게 불찰이었습니다? 원래 카이사르는 남의 예상을 뒤어넘는 군사행동의 천재라!
카이사르는 33세의 안토니우스에게 5개 대대를 주어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카시아 가도의 아레초를
공격하게 하고 같은 또래인 쿠리오에게는 3개 대대를 주어 아드리아해를 따라 아피아가도의
페사로, 파노, 안코나를 공략시키고 자신은 2개 대대로 플라미니아 가도가 지나는 리미니에 주둔합니다.
쿠리오는 13일에 파노, 14일에는 100km 남쪽인 안코나를 수중에 넣었고 안토니우스도 15일에 아레초에 입성
하니 이는 갈리아 정복의 영웅에게 열광한 주민들이 도시를 지키는 대신에 열렬히 환영한 때문입니다.
이때 15일에 법무관 로시우스는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넌 12일 보다 닷새 전인 1월 7일에 의결된 “원로원 최종
권고”를 가져 왔는데 라벤나에서 전달할 생각이었지만 국경 안쪽인 리미니에서 전달하게 되는데.... 대권을
부여받은 폼페이우스는 따르지 않으면 카이사르를 국가의 적으로 간주할 것이고 후임은 에노발부스로 임명 합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게 편지를 썼으니 당신은 임지인 스페인으로 떠날 것, 당신도 나도 군대를 해산할 것,
그리고 나의 집정관 출마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인데 로시우스가 편지를 가지고 로마에 도착하니
폼페이우스와 마르켈루스와 렌툴루스 현직 집정관 2명에 원로원 의원 다수는 이미 로마에서 달아난 이후 였습니다.
빠른 속도로 행군해 온 카이사르에 맞설 병력의 소집이 미처 완료되지 않은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보고 함께 그리스로 넘어가서는 그곳에서 군단을
편성하는데..... 그리스와 동방은 과거 폼페이우스가 군사 활동을 했던 근거지 였었기 때문 입니다.
카이사르의 후임 갈리아 총독 에노발부스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군단 편성을 시작하는 중이었고
본토에는 카이사르에게서 빼앗은 2개 군단이 카푸아에 주둔중이지만
원래 카이사르 휘하에서 갈리아 전쟁을 하던 자들이라 그들의 충성을 믿을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들이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는 모습은 정치적 불리함을 안겨주게 되고,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의
오판은 이탈리아 도시들의 빠른 이탈이니.... 동맹시 전쟁의 여파로 동맹시들은 원로원파와 폼페이우스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고, 이들에게 더 많은 시민권과 권리를 약속한 민중파 카이사르는 당연하게 환대를 받았습니다.
폼페이우스는 17일 군단이 있는 카푸아로 떠났고 다음날인 18일에 집정관과 원로원 의원들은
가족과 하인에 재산까지 짐수레에 싣고 로마를 떠났는데.... 당시 로마의 국고는
개인들이 짐부터 챙기느라 수레가 없어 반출하지 못했으니 온전한 상태로 남겨졌다고 합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떠난걸 알고는 로마로 가지 않고 폼페이우스를 추격했으니 폼페이우스의 근거지인
오시모주민들은 저항하지 않았고 아드리아해를 따라 남진하니 아스콜리피체오에는 1개 군단을 거느린
옛 집정관 렌툴루스가 달아나자 더 내려가 로마로 갈수도 있는 발레리아가도가 시작되는 삼거리인
코르피니오에 접근했는데 이때 갈리아에서 12군단이 뒤따라 왔으니 기존 13군단과 2개 군단을 거느렸습니다.
2월 15일 교통의 요충지 코르피니오에는 폼페이우스가 파견한 비블리우스 루프스가 13개 대대를
지휘해 먼저 도착했는데 갈리아 총독 에노발부스가 서부 카푸아에서 편성한 20개 대대와
합류했으니.... 곧 갈리아에서 8군단이 도착한다고 듣고는 폼페이우스에게 지원군을 요청합니다.
폼페이우스는 120km 남쪽 루체라에 있었으니 카이사르에게 뺏은 2개 군단에 새로 모집한 신병을 합쳐 30개 대대
를 가졌는데 그는 북상하지 않는 가운데 갈리아에서 종다리 군단 22개 대대가 도착하니 에노발부스가
주눅이 든 가운데 폼페이우스는 철수하라 전령을 보내니 포위망을 뚫기 어려워 난감한 가운데 병사들이 동요합니다.
병사들이 항복을 요청하자 카이사르는 이를 받아들여 총독 에노발부스등 지휘부는 석방하고 병사들만 휘하
에 편입한후 2월 21일 바로 남진을 시작했는데.... 원로원파인 키케로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에서 “적을 용서하는 카이사르와 자기편을 버리는 폼페이우스는 얼마나 다른가” 라고 적을 정도 였습니다.
아군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고 50개 대대에 집정과 원로원 의원들을을 데리고 달아나는 폼페이우스는
2월 25일 항구인 브린디시에 도착했는데 불완전한 상태로 싸우기 보다는 동방으로 가서
‘클리엔테스’ 들을 총동원해 대 병력으로 싸우기로 한 것이니 .... 때문에 카이사르는
본국에서 대결을 끝장내고 싶었던지라..... 6개 군단(60개 대대 3만 6천명) 으로 급히 추격을 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배가 모자라니 3월 4일 두 집정관이 30개 대대를 배에 태워 1차로 출항했고 폼페이우스는
20개 대대와 함께 남아 아드리아해를 거너간 배가 되돌아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는데..... 닷새
후인 3월 9일 뒤따라 도착한 카이사르가 편지를 보내오자 거부한 가운데 17일 배가 되돌아
오자 20일 폼페이우스의 20개 대대는 출항했고 선박이 없는 카이사르는 저지나 추격이 불가능 했습니다.
로마의 특이한 제도는 파트로네스와 클레엔테스인데 파트로네스는 보호자고 클레엔테스는 피보호자이지만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서로 끈끈하게 연결된 공동체이니.... 폼페이수스는 지중해 해적을 소탕했으니 지중해의
파트로네스였고 지중해 항구도시나 오리엔트 국가는 그의 클리엔테스 였으니 군대를 모을 우군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카이사르의 클리엔테스는 북이탈리아와 남프랑스 속주에 4천만 세스트리우스 속주세의 갈리아지만 폼페이우스는 2억
세스트리우스 속주세를 내는 부유한 소아시아와 시리아에 그리스와 팔레스타인에 이집트가 있었으며 또
스페인에는 폼페이우스의 부하 세 사람이 7개 군단을 보유했으니 앞으로 총력전에서 국력이 훨씬 우세하다는 뜻 입니다.
카이사르는 브리디시 주민들에게 반년 안에 10개 군단(6만명)을 수송할수 있는 배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으며,
다음은 식량이니 로마는 밀의 자급자족을 포기하고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및 북아프리카에 수입에 의존
했는데 문제는 제해권을 폼페이우스가 장악하고 있으며 저 3곳도 폼페이우스의 부하가 다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소규모 부대를 보내 사르데냐를 손에 넣었으며 반 카이사르 파인 소 카토가 버티는 시칠리아 섬에는
폼페이우스 병사로 항복한 병사를 딸려 쿠리오를 파견했고 자신은 갈리아 고참병을 이끌고 12일만에 로마에
도착해 원로원 회의를 소집했는데 그기 군단을 가느린지라 로마로 들어갈수 없으니 회의는 성벽 밖에서 열립니다.
사투루누스 신전 지하 금고를 열어 금괴 1만 5천개와 은괴 3만개에 30톤이나 되는 3천만 세스테르티우스 은화
를 확보한 카이사르는 법무관 로시우스를 시켜 루비콘 이북 북이탈리아인 갈리아 키살피나 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돌라벨라에게 20개 대대를 주어 아드리아해 제해권 확보를
맡겼으며 밀 산지인 사르데냐섬에 이어 시칠리아섬을 확보한 쿠리오에게는 북아프리카를 확보하라고 지시합니다.
로마 내정은 법무관 레피두스에게 맡기고 국방 책임자로 호민관 안토니우스를 지명한후 갈리아 트란살피나
(남프랑스) 에 주둔중인 6개 군단에 에스파냐로 남하하라는 지시후 카이사르는 3개 군단을 데리고
로마를 출발해 해군이 없는지라 육로로 에스파냐로 향하니 제노바를 거쳐 기원전 49년 4월
19일 마르세유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폼페이우스의 부하 장수 3명이 7개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업도시국가로 통상으로 부유해진 마르세유는 철옹성을 자랑하는지라 성문을 닫았으니 카이사르군은 보름에
걸쳐 육지쪽 포위망을 완성했으며 바다쪽 공격을 위해 12척의 배를 건조해 5월 4일 공성전이 시작되었는데
마르세유는 전쟁준비를 철저히 한지라 장기전이 되자 폼페이우스는 에노발부스를 사령관으로 16척 원군을 파견합니다.
공성전이 한달이 넘어가자 에스파냐로 파견한 파비우스 3개 군단이 위험에 처해지니 트레보니우스 3개 군단이
육지쪽 공격을 맡도록 하고 바다쪽은 대서양에서 베네티족을 격파한적이 있는 데키우스 브루투스
에게 일임한 후에 카이사르는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3개 군단에 기병 900기를 이끌고 에스파냐로 출발합니다.
나르본을 지나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바르셀로나 에서 130km 레리다에 도착한건 6월 22일 로 파비우스 3개 군단은
폼페이우스파 루푸수의 5개 군단 3만명과 대치중이었으니.... 아군은 정원을 채우지 못한데 비해 적에게는
기병 5천에다가 에스파냐 원주민 80개 대대 4만 8천명 지원군 까지 있었으며 남부에는 2개 군단이 더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6개군단 2만 7천명에 기병 3천이었으니 8만 3천 대 3만이라.... 내전기에 보면 카이사르는 병력이 적어
불리하자 꾀를 내어 이때 대대장과 백인대장에게서 돈을 빌려 병사들에게 보나스를 주었으니 지휘관들은
전투에서 패하면 돈을 떼일까 싶어 열심히 싸웠고, 병사들은 돈 까지 받았으니 감격해서 죽기 살기로 싸웠다는?
폼페이우스군은 기원전 60년에 집정관을 지낸 아프라니우스인데 고지대에 포진하자 카이사르는 아래쪽에서 공격해
올라가는 것은 불리하니 적 진지 아래쪽에 4.5 미터 깊이 참호를 파서 보급기지가 있는 레리다와 교통을
차단했는데 비가 내려 홍수가 지니 나무다리도 떠내려가버려 곤경에 빠졌는데 로마 돌다리는 적이 장악한 상황입니다.
카이사르는 급류를 헤치고 상류에 작은 배를 연결해 다릴르 만들어 우군 보급부대와 연락을 이은후 마르세유
에서 아군 해군이 적 해군에 승전했다는 소식에 가라앉았던 사기를 되살리고는 9미터 넓이 운하를
파서 물길을 돌림으로써 세그레강의 수위를 낮추자 역 포위를 걱정한 원주민 병사들의 탈영이 시작됩니다.
그러자 아프로니우스는 에스파냐 남부로 가서 바로의 2개 군단과 합치고 또 지중해로 폼페이우스의
지원을 받기로 하고는 7월 26일 새벽에 철군을 시작했는데 카이사르는 급류인지라 기병을
위아래 2열로 세우고 그 가운데에 중무장 보병이 강속에서 머리와 어깨만 내놓은채 강을 도하합니다.
이제 적군이 40KM남쪽에 에브로강을 건너는 것을 막아야 하는지라 카이사르군은 밤낮없이 행군을
계속해 강을 8KM 남겨둔 지점에서 적군을 따라잡으니 절망한 아프로니우스는 돌아
서서 응전하다가 다시 후퇴를 하니 카이사르군이 급속행군으로 앞질러가서 산 아래에서 저지합니다.
그러자 적군은 다시 돌아서 북상해서 레리다 남쪽 1KM 자점에 있던 원래 진영에 도착하니 카이사르
는 적군을 포위했는데, 아프로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식수라도 얻기 위해 징영에서 강
까지 방어 공사를 하며 직접 감독하러 나가자 병사들은 카이사르 병사들과 만나 항복을 타진합니다.
아프로니우스는 비축 식량이 동나고 물이 떨어지자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다시 포위되자 항복하니
카이사르는 전원 제대를 하라고 말하면서 에스파냐에 남거나 아니면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까지 행군한 후에는 해산해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며 자신이 군대를 일으킨 이유를 변명합니다.
기우너전 49년 8월 2일 3만 5천명중에 3분지 1은 에스파냐 여자와 결혼했거나 집이 있아 남고 나미지는 귀향하며
아프로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폼페이우스를 찾아 그리스로 갔고 카이사르는 남진해 바로 2개 군단의
투항을 받았고 9월 17일 최남단 카디스에 도착했고 여기서 해로로 북상해 타라고나에 입성한게 9월 25일입니다.
술라는 반대파를 무조건 죽였으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지만 카이사르는 원로원과 폼페이우스 체제를
타도하는게 목적이니 가급적 동료 시민들인 폼페이우스파 군인들을 죽이지 않고
끈기있게 추격하고 기다리면서 오해되기를 바랬던 것이니..... 시원한 전투 다운 전투는 없었습니다.
10월 중순에 마르세유에 도착햇는데 7월 31일 벌ㅈ어진 2차 해전에서도 데키우스 브루투스가 승리하니 패한
에노발부스는 도망친뒤라 마르세유 함락은 시간문제 였는데... 공성전 6개월 만인 10월 25일 요새
도시인 마르세유는 함락되는데, 공격군은 3개 군단 1만 5천이니 3년이 걸린 카르타고에 비해 빠른 셈입니다.
카이사르는 승자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으니 주민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지 않았고 병사들의 약탈 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마르세유가 독립된 도시국가로 존속하는 것 까지도 허용했으니, 다만 마르세유가 가진 인근 영토들은
몰수해 남프랑스 속주로 편입시켰고 아테네나 스파르타처럼 내정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자치도시로 존속시킵니다.
카이사르가 이탈리아로 돌아갔을 때, 9군단이 파업을 한다는 보고를 받고는 로마로 가지 못하고
피아첸차로 달려갔는데.... 당시 로마는 병역이 권리이자 의무로 상당한 재산을 가진
시민들이 직접세를 내는 대신에 중무장 보병이었으니 하층민이나 노예는 병역 의무가 없었습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후 급료를 2배 올린건 동족을 상대하는 전쟁이라 약탈하거나 포로를 노예로 팔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데 이제 징병에서 지원제로 바뀌긴 했으나 이민족은 어디까지나 아우실리아리아스(지원군) 이고
로마 중산층만 레기오나리우스(군단명) 이었으며 제대후 토지를 받을수도 있고, 보너스를 받을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파업을 당하지 않은 지휘관은 한니발과 술라 정도이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한니발을 이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조차도 군대 파업을 당하곤 했으니.... 반란으로 변질되기 전에 수습해야 하는데,
저 9군단은 초기 부터 카사르와 함께 갈리아 전쟁을 수행해 10군단과 더불어 가장 충성스러운 심복이었습니다.
병사들은 급료 인상을 바라면서 제대를 요구하니 카이사르는 로마 시민으로서 올바른 처신을 망각하는걸
용납할수 없다며 병사들의 급료인상 요구를 거부하고는 최고의 중벌인 10분지 1형을 내리는데,
이 데키마레는 추첨으로 열명 중에 한명씩을 뽑아 아홉명이 한명을 몽둥이로 때려서 죽이는 벌 입니다!
병사들은 찬물을 끼얹은듯 얼어붙으니 참모들이 나서서 처벌을 거두어 달라고 하자 카이사르가 미동도 하지 않으니
대대장들이 나서고 또 이어 백인대장들이 나서 애원을 하니.... “형 집행을 당분간 연기하겠다며
여러분 얼굴을 남동쪽 항구 브린디시에서 다시 볼수 있느냐는 여러분에게 달렸다” 라고 말하고는 로마로 떠납니다.
브린디시에 도착했을 때 9군단 병사들 중에 빠진자는 한명도 없었다고 하는데.... 한편 4개 군단을 인솔해 시칠리아
를 전투없이 회복한 원로원 의원 쿠리오는 북아프리카(튀니지) 로 건너갔는데, 2개군단은 시칠리아에 남기고
나머지 2개 군단에 기병 500기만 데려가는 실수를 저지르니, 시칠리아를 너무 쉽게 차지한지라 안이해진 것입니다.
더구나 저 2개군단은 원래 카이사르 군대가 아니고 코르피니오에서 투항한 폼페이우스파 군인들인데다가
서쪽 누미디아왕국의 동향을 살피는 일도 게을리 했으니.... 전쟁경험이 적은 30대 원로원
의원이라 그런 것인데, 더욱 쿠리오는 1년전 호민관 시절에 로마의 속국이지만 과거에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는데 로마에 협력한 누미디아에 속주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제안한 적도 있었습니다.
49년 8월 11일 상륙후 적의 보급품 까지 탈취해 기고만장해잔 쿠리오는 항구 우티카에 진을 쳤고 2개군단
의 폼페이우스파군에 승리까지 거두었는데 그후에 코끼리 부대를거느린 누미디아왕의 군대가 다가
오자 쿠리오는 시칠리아의 2개 군단을 부르고는 코르넬리우스진지로 이동했다가 4개군단으로
전진했는데...... 60마리 코끼리에 2천명 기병과 1만명 보병인 누미디아 유바왕의 포위 공격을 받습니다.
좌우 양옆은 적군인 2천 기병에 둘러쌓이고 전면에는 60마리 코끼리 부대의 공격을 받는 중에
병사들이 공포에 빠지자 쿠리오는 퇴각 권유를 뿌리치고 창을 든채 적진으로
돌격해 전사했고 3.5개 군단 2만명에 이르는 카이사르군단은 전원 전멸하니 8월 20일 입니다.
도망친 기병의 보고로 참상을 알게된 코르넬리우스 진지의 5개 대대 3천명은 공포에 질렸고 해안에 대기중인 선원들은
바로 배를 띄웠으니 바다속에 뛰어들어 헤엄쳐서 배에 올라탄 병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게
항복하니.... 총독은 과거 깉은 편이라 살려주자고 했지만 승리한 누미디아왕은 소수의 병사는 포로로 데려가고
나머지는 살해하고 개선하니 51년 집정관을 지낸 술피키우스 루푸스 등 도망쳐온 원로원 의원도 여럿 따랐습니다.
그런데 결국 폼페이우스파로 달려간 키케로에게는 아픔이 있었으니 서른살 청년들인 아들과 조카
에다가 쿠리오와 사위 돌라벨라에 카일리우스와 훗날 ‘카틸리나의 음모’ 를 쓴 살루티우스
모두가 적인 카이사르에 가담해버린지라..... 키케로가 염세주의에 빠진 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카이사르에게서 아드리아아해 제해권을 확보하라는 명을 받은 2명 중에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는 그리스
서북쪽 아드리아해 크로아티아인 달마티아로 떠났고 돌라벨라는 선단을 이끌고 아드리아해에서
안토니우스를 돕고 있었는데.... 폼페이우스파 리보가 선단을 이끌고 공격하니 돌라벨라
의 40척은 아드리아해로 피신했다가 격파를 당했고 안토니우스도 섬으로 도망쳤다가 항복합니다.
안토니우스는 살루티우스와 일부 병력만 거느리고 도주했으며 항복한 15개 대대 9천명은 일부는 폼페이우스
군에 가담했고 또 많은 갈리아인 백인 대장들은 거부하고 죽음을 당했는데, 40척 배와 9천명을
잃고 제해권을 뺏긴 카이사르는 패배는 그대로 두고.... 다른쪽에서 성공해 정세를 단번에 만회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