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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許筠
천지간의 괴물이다. 그 몸뚱이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것이다. 그의 일생을 보면 악(惡)이란 악(惡)은 모두 갖추어져 있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10년 1618년 9월 6일
양천허씨(楊川許氏)의 가족 묘역으로 용인시 백암면 맹리에 있다. 원래는 서울 서초구에 있었으나, 그 지역의 개발로 1968년 이곳 용인(龍仁)으로 이장하였다. 묘역 들어가는 입구의 모습이고, 천봉기념비(遷奉記念碑)는 묘의 이장(移葬) 사실을 기록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운 것...이 묘역에는 허균의 아버지 허엽(許曄)과 그의 세 아들인 허성(許筬), 허봉(許봉) 그리고 허균(許筠)의 묘와 딸인 하난설헌(許蘭雪軒)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으며, 허난설헌의 묘는 용인의 시가(媤家) 묘역에 따로 묻혀 있다.
아버지 허엽(許曄)과 그 세 아들 그리고 허난설헌은 당대의 5대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허균의 문학적, 역사적 가치 또한 특이한데,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고, 그저 가족묘로 방치되어 있다. 한편 허균은 대역죄(大逆罪)로 능지처참되어 그 시신은 갈기갈기 찢겨 전국에 흩어졌으므로, 이 곳의 묘는 시신이 없는 혼(魂)만 묻힌 가묘(假墓)이다.
허균 許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성수(惺瘦), 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학문에 뛰어난 집안이어서 아버지 엽(曄), 두 형인 성(筬)과 봉(封), 그리고 누나인 난설헌(蘭雪軒) 등이 모두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날렸다. 21세에 생원이 되었고, 26세에는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 이듬해 황해도 도사가 되었으나, 한양의 기생을 끌여 들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6달만에 파직된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파직(파직)이고 그 후 그는 춘추관기주관, 형조정랑을 지내고 1602년에는 사예, 사복사정을 역임하고 원접사 이정귀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으나, 1604년 수안군수(수안군수)로 재직할 때 불교(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고 그에 심취하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허균은 이때 술회하기를 ' 만약 내가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다면 한 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하였다 '라고 할 정도로 한때는 출가하여 중이 되려고도 하였다.
1606년에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주지번)을 영접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허균은 학문과 글 재주를 높히 평가 받아 그와 교유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누나인 허난설헌(허난설헌)의 시집(시집)을 중국에서 간행하는 계기가 된다. 허균은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는데, 이곳에서도 불상(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 일로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후 공주목사(공주목사)로 등용되었는데, 이곳에서는 그 지방의 서류(庶類)들과 가까이 지낸 관계로 또 다시 파직 당하였다. 파직 후 전라도 부안(扶安)으로 내려가 그곳의 산천을 유람하였고, 이때 그곳의 명기(명기)인 이계생(李桂生)을 만나 서로 깊이 사귀었다. 허균은 1609년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서 형조참의가 되었으나, 조카와 사위의 과거시험 합격을 도왔다는 탄핵으로 또 다시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 허균의 파란만장한 벼슬길은 실로 그 뒤부터 시작되는데, 앞의 수많은 탄핵(탄핵)과 사직(사직)은 오히려 그가 인생을 폭 넓게 살고 배움을 얻는 즐거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광해군 2년, 1610년에는 진주부사(陳奏副使)가 되어 明나라에 가서 한국 최초(最初)의 천주교(天主敎) 신도가 되었고, 같은 해에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과거시험에서 친척을 참방(參榜 .. 부정 합격을 시켜 줌)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 후 태인(泰仁)에서 창작에 전념하다가,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평소 친교가 두터웠던 박응서(朴應犀) 등이 처형되자,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권신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고, 대북파(大北派)의 일원(一員)이 되어 왕의 신임을 받아 승진을 거듭한다.
3년 뒤 조카 사위인 의창군(義昌君)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역모(逆謀) 혐의를 받았고, 하인준(河仁俊), 김개(金愷), 김우성(金宇成) 등과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1618년 가산이 먹몰(籍沒)되었고, 참형되었다. 당시 세자빈이 후사가 없자, 허균의 딸이 세자(世子)의 후궁(后宮)으로 간택되었는데.. 후궁이 소생을 낳으면 허균이 실세로 등장할 우려가 있어 모함에 의하여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허씨 5문장 許氏 5文章
예로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높인 집안은 많았으나, 허균이 태어난 '양천허씨(陽川許氏)' 집안은 조선시대를 통털어 제일가는 문장가(文章家)의 집안이라 이를 만하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許曄)은 첫째 부인 한씨와의 사이에서 허균의 이복형(異腹兄)인 허성(許筬)과 두 딸을 두었고, 둘째 부인 '강릉 김씨'와의 사이에서는 둘째 아들 허봉(許封)과 셋째 아들 허균(許筠) 그리고 딸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을 두었다.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許曄)의 사망 사실을 전하는 기록에서는 허균의 집안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 .. 세 아들인 성(筬), 봉(封), 균(筠)과 그 사위인 우성전(禹性傳), 김성립(金誠立)은 모두 문사(文士)로 조정에 올라 논의하여 서로의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컫기를 허씨(許氏)가 당파의 가문중에서 가장 치성하다 '고 기록되어 있다.
허균이 속했던 집안은 당대 최고의 명가(名家)의 하나이었다. 부친 허엽(許曄)은 호(號)가 초당(草堂)으로, 오늘날 유명한 강릉 '초당두부'의 그 초당이다. 허엽이 그 호(號)를 초당(草堂)으로 한 것은 그의 처가와 관련된다. 즉, 허엽의 두번째 부인인 '강릉김씨' 김광철의 딸의 집이 강릉(江陵)에 있던데서 유래한 것이다. 허균의 이복형(異腹兄) 허성(許筬)은 이조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동복형(同腹兄)인 '허봉'은 유희춘의 문인이면서, 허균을 가르칠 정도로 학문이 상당한 수준급에 달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허균과 동복형제로는 우리에게 여류문인으로 알려진 허난설헌(許蘭雪軒)이 있다. 부친 허엽은 동인(東人)의 영수이었고, 형인 허성(許筬)은 동인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라진뒤 남인(南人)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허엽 許曄
허균의 아버지. 호는 초당(草堂), 자는 대휘(大輝)이다. 그는 어려서 나식(羅湜)에게서 글을 배웠고, 서경덕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조정에서 東,西人으로 대립할 때 김효원(金孝元)과 함께 동인(東人)의 영수가 되기도 하였다. 초당두부(草堂豆腐)는 그의 호를 따서 만든 두부이다.
허성 許筬
허균의 이복형 .. 허성(許筬)은 유희춘의 문인(門人)으로 벼슬은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게 되어 세상 사람들이 고명칠신(顧命七臣)이라고 불렀다. 학문과 덕망으로 사림(士林)의 촉망을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서장관(書壯官)이 되어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정세(政勢) 탐색을 위하여 일본(日本)에 다녀왔다.
그러나 허성(許筬)은 김성일(金誠一)과는 같은 동인(東人)이었으나, 일본을 다녀온 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올 것 같다는의견을 낸 의인(義人)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좌랑으로 강원도 군병(軍兵) 모집의 책임을 지고 군병 모집에 전력하였으며, 후에 예조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성리학과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적자(嫡子)이면서도 다른 형제들에 비하여 성격도 원만하고 천성이 정직하여 옳다고 한 일은 끝까지 관철시키는 활동성을 보였다.
허봉 許봉
허균의 동복형.. 호는 하곡(荷谷), 자는 미숙(美叔)이다. 아우 허균과는 열여덟 살, 허난설헌과는 열두살이 위이었다. 그도 역시 동인(東人)의 선봉이 되어 서인(西人)들과 대립하였는데, 당시 병조판서이던 이율곡(李栗谷)을 탄핵하였다가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고, 이듬해 풀려 났으나 정치에 뜻을 버리고 방랑생활을 하다가 38살의 젊은 나이에 금강산에서 객사(客死)하였다.
그에 대한 여러 일화는 그의 성품과 문장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총며하고 민첩하여 10세 이전에 재화(才華)가 나타났는데,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한 번 보면 문득 외워 고금의 일을 꿰뚫어 보았다. 또한 시(詩)와 문(文)을 금방금방 지어 상소문(上疏文)은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그가 지었다. 그러나 그는 용모와 행동이 맑고 예리하여 그를 아는 사람은 그의 비상한 재주를 사랑하였은, 알지못하는 사람들은 그가 지나치게 재주를 드러내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한 친구가 귀양길에 있는 그를 희롱하여 이르기를 ' 그대의 시(詩)가 비록 아름답기는 하나 맑지 못하니, 반드시 귀양살이의 고생을 겪어야만 속태(俗態)를 면할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과연 갑산(甲山)으로 귀양간 뒤에 시(詩)가 나아졌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허봉은 일찍 죽은 탓으로 전하는 시(詩)가 많지는 않으나, 뛰어난 시가 많고 옛날 시법을 잘 알아서 허균보다 격이 높다고 평가받고 있다. ' 계곡 장유(溪谷 張維) '는 우리나라 시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이라고 칭송하였고, 제호 양경우(霽湖 梁慶遇)는 " 절대(絶對)의 시재(詩才)"라고 하였다.
허난설헌 許蘭雪軒
허균 許筠
허균..호는 교산(蛟山), 학산(鶴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5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 때 詩를 지었다. 유성룡과 이달(李達)에게 학문과 시를 배웠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고, 누이 난설헌의 詩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시선집 " 국조시산(國朝詩刪) "은 그를 당대 제일의 시적 감식안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받게 하였는데, 시는 비평만은 못하였던 것 같다.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 혜성(慧性)은 있으나 기력(氣力)이 부족하다"고 하여 그의 시(詩)를 격(格)이 낮다고 하였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양천허씨의 가족 묘역이다. 이 곳에는 허균을 비롯한 아버지 허엽 그리고 형제들인허봉, 허성의 묘가 있으며,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의 시비(시비)가 세워져 있다. 허난설헌의 묘는 용인 다른 곳의 시댁 묘소에 묻혀 있다.
사주처럼 살다니, 이상하기도 하다
허균이 9살에 능히 시(詩)를 지었는데 작품이 아주 좋아서 주위 여러 어른들이 칭찬하며 " 이 아이는 장차 마땅히 문장하는 선비가 될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허균 이모의 사위이었던 우성전(禹性傳)만은 그 詩를 보고 " 훗날 그가 비록 문장에 뛰어난 선비가 되더라도 허씨 문중을 뒤엎을 자도 바로 이 아이일 것이다 "라고 말한다.
우성전(禹性傳)은 허균 이모의 사위로써, 유성룡 등과 함께 동인(東人)세력을 대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義兵)을 일으켜, 권율장군과 함께 싸웠고 특히 역상(易象)과 예학(禮學)에 밝은 당대의 명사이었다. 그런 우성전이 어린 아이의 시(詩)에서 " 허씨 문중을 뒤엎을.." 운명을 보았는지.. 그만큼 허균의 어린 시절은 남달랐던 것 같다.
해명문 (解命文 .. 운명을 풀이하는 글)... 허균의 글
나는 기사년(己巳年. 1569년.선조 2년) 병자월(丙子月.11월) 임신일(壬申日. 3일) 계묘시(癸卯時)에 태어났다. 성명가(星命家 ..사주,관상가)가 이를 보고, 『 신금(申金)이 명목(命木)을 해치고, 신수(身數)가 또 비었으니, 액(厄)이 많고, 가난하고, 병(病)이 잦고, 꾀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겠다. 그러나 자수(子水)가 중간에 있기 때문에 수명이 짧지 않겠으며, 강물이 맑고 깨끗하여 재주가 대단하겠고, 묘금(卯金)이 또 울리므로 이름이 천하 후세에 전할 것이다 』고 말했다. 나는 그 전부터 이 말을 의심해 왔으나, 벼슬길에 나온지 17~18년이래 전패(顚沛 .. 엎어지고 자빠짐)와 총욕(寵辱 .. 명예와 모욕)이 반복되는 갖가지 양상이 은연중 그 말과 부합하고 보니 이상하기도 하다 ...惺所覆부藁
스스로 위와 같이 적은 것처럼, 허균의 운명은 사주처럼 순탄치 못하였다. 그가 12세에 경상도 감사이었던 부친이 객사(客死)하였으며, 15세에 그와 가까웠던 둘째 형 허봉(許봉)이 이율곡(李栗谷)을 탄핵(彈劾)하다가 함경도로 유배갔다가, 풀려난 후에도 서울로 오지 않고 금강산에서 병사(病死)하였다. 그리고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은 김성립(金誠立)에게 시집가서 시댁과의 불화(不和)와 자식들의 잇단 사망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다가 일찍이 죽었다.
이런 와중에 겪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은 형과 누이의 죽음 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허균은 모친 김씨와 만삭의 아내 김씨를 데리고 덕원과 단천 등으로 피난 갔는데.. 이 와중에 부인 김씨와 어린 아들이 모두 죽고 말았다. 이 때 허균 일가(一家)는 하루에 한끼 먹기도 어려웠다고 전해 지고 있다. 허균의 가족사(家族史)도 허균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만큼이나 험난하였던 것이다.
허엽(許曄)은 정실(正室)인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허성(許筬)과 두 딸을 두었고, '한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예조참판 김광보(金光輔)의 딸 '강릉김씨(江凌金氏)"를 얻어 허봉, 허난설헌, 허균을 두었다. 원래 이들의 묘(墓)들은 각기 다른 곳에 있었는데, 도시개발에 의하여 후손들이 힘을 모아 이곳 수정산 기슭에 이장한 것이라고 한다.
파란만장 .. 허균의 삶. 1
허균(許筠)의 생애처럼 수수께끼에 쌓이고, 생전은 물론 사후(寺後)까지 끝없는 논쟁의 대상되는 경우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부친 허엽(許曄)은 동인(東人)의 영수(領首)이었으며, 이복형 허성(許筬)과 동복형 허봉(許封), 그리고 누이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는 모두 당대의 유명 문사(文士)이었고, 허균의 조카사위, 즉 허성(許筬)의 사위는 선조(宣祖)와 '인빈김씨' 소새의 의창군(義昌君)으로서 왕가(王家)의 사돈이었다. 그럼에도 허균의 일생은 순탄치 못했다.
허균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定義)하기에는 너무도 파란만장하다. 그는 근대 사상의 선구자인지? 또는 처세(處世)의 달인인지? 권력을 잡기위한 야심가(野心家)이었는지 ? 아니면 역성혁명까지 꿈꾸었던 혁명가(革命家)인지 ? 이도 저도 모두 실패하여 영원히 이단아로 남은 것일까? 하여튼 거칠 것 없었던 그의 모습에서 천재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만, 끝내 세속의 진애(塵埃)를 떨쳐버리지 못한 비운의 천재일까?
과거시험에서 조카를 부정 합격시키다
허균은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면서도 정계를 떠나지 못하다가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1609년 형조참의(刑曺參議)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전시(殿試 .. 왕 앞에서 치루는 과거시험)의 대독관(對讀官)이 되어 과거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조카와 조카사위를 부정으로 합격시켰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고 42일 동안 의금부에 갇혀 지내다가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를 가는데... 이즈음에는 과거에 부정행위가 일반화되었있었고, 당시의 시험에서도 여러 大臣들의 아들들이 不正으로 합격되었지만, 허균만이 홀로 죄를 뒤 집어 썼다는 논란도 있었다.
칠서의 난(七庶의 亂)과 계축옥사(癸丑獄事)
광해군 5년(1613)에 일어난 " 칠서의옥(七庶의 獄) "이 일어나면서 허균의 운명은 칼 끝에 서게 된다. 박응서(朴應犀), 서양갑(徐羊甲), 심우영(沈友英) 등 양반 출신의 서자 7명이 여주 남한강가에 토굴(土窟)을 파고 무륜당(無倫堂)이라 이름 짓고, 스스로를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 불렀다.이 중 박응서(朴應犀)가 한 은상(銀商)을 살해하였다가 체포되었는데, 이 사건을 북인(北人)의 영수이자 모사(謨士)이었던 이이첨(李爾瞻)이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金悌南)을 제거하기 위한 "계축옥사(癸丑獄事)"로 확대하였다. 단순 강도살인사건이 역모사건으로 왜곡,확대된 것이다. " 광해군일기 "에 따르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김응벽이 "허균이 김제남의 집에 드나들며 말마다 상의하였습니다"라고 자백했다고 전하는데... 실제로 이들 서자(庶子)들과 친하게 지낸 허균이 두려움을 느낀 것은 당연하였다.
이이첨(李爾瞻)에 아부하고, 그의 수하가 되다
칠서의 난과 계축옥사로 관련자들과 모함받은 김제남은 모두 사형되었지만, 허균만은 안전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광해군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제남(金悌男)과 서자(庶子)들은 모두 사형되었지만, 허균(許筠)은 안전했는데,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의 사관(史官)은 이 사건의 불똥이 자신에게 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접근한 덕분이라고 적고 있다.
광해군일기 5년 12월 1일
박응서(朴應犀), 서양갑(徐羊甲)등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제자인 심우영 등이 모두 역적죄로 목주되자, 허균은 마침내 화(禍)를 피한다고 칭하고, 이이첨(李爾瞻)에게 몸을 맡기니 이이첨이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그 때 과거시험의 글이나 상소문을 그가 대신 지어준 것이 많았다
바로 이 대목에서 허균 인생의 수수께끼가 시작된다. 그토록 자유분방하고 앞서간 시대정신의 소유자이었던 허균... 그는 광해군(光海君) 대의 실력자이었던 이이첨(李爾瞻)에게 붙어 목숨을 부지하고 출세를 도모하려는 처세의 달인(處世의 達人)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이첨의 후원을 얻은 뒤부터 허균은 출세가도를 달린다. 광해군 6년에는 호조참의, 이듬해에는 요직인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문전 정시에서 1등을 하여 종2품 가정대부(嘉靖大夫)의 가자(加資 .. 벼슬을 높임)를 받았다. 그리고 광해군8년에는 형조판서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허균은 결국 정치적 무리수(무리수)를 감행하였다. 버로 대북(대북) 세력의 전면에 나서서 인목대비(인목대비)의 폐비(폐비)를 주장한 것이다. 인목대비의 폐비 문제는 '칠서지옥(칠서지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같은 북인(북인) 세력인 정온(정온)을 비롯하여 남인(남인) 계 이원익(이원익) 등 상당수의 신료들이 반대하였던 사안이었다.
허균과 함께 정치적 동지이었던 영의정 기자헌(기자헌) 역시 반대하였다. 그러나 허균은 인목대비의 죄(죄)를 언급하는 것은 물론이요, 영창대군(영창대구)은 선조(선조)의 아들이 아니고 민가(민가) 사람의 아이를 데려다가 기른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인목대비(인목대비)는 폐위되어 서궁(서궁)에 유폐되었지만, 허균은 이 일로 폐비(폐비)를 반대하는 상당수 여론으로부터 배격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동지이었던 기자헌(奇自憲)의 아들 기준격(奇濬格)으로부터 역모(역모)의 혐의로 고발되기에 이르렀고 끝내는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허균은 광해군 9년부터 시작되는 인목대비의 폐출에 앞장 서게 된다. 인목대비(仁穆大妃)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생모(生母)이다. 허균의 외손자 이필진은 "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의논에 끼어든 것은 본심이 아니었고, 간흉(奸凶 ..이이첨)의 꾐에 빠진 것 "이라고 말했지만, 이이첨의 사주로만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폐비 논의에 앞장섰다.
허균은 폐모에 반대하는 북인(北人)의 영수이자 영의정인 기자헌(奇自憲)과 대립각을 세울 정도이었다. 당시 인목대비를 비롯한 북인들은 선조(宣祖) 말기 광해군(光海君) 대신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폐모에 반대한 기자헌이 귀양에 처해지자, 그의 아들 기준격(奇濬格)이 부친을 구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상소를 올리며 " 허균이 역모를 꾸미었다 "고 주장하였다. 파란이 일어난다. 이에 허균도 자신을 변호하는 맞 상소(上疏)를 올리는데, 광해군을 왠일인지 진상을 조사하지 않고 묻어 두었다.
이이첨과 허균의 갈등
이즈음하여 이이첨과 허균이 벌어지는 계기가 생기게 된다. 당시 이이첨의 외손녀가 세자빈(世子嬪)으로 있었는데, 마침 허균의 딸이 세자(세자)의 후궁으로 내정된 것이다, 이때부터 이이첨은 허균을 제거 대상으로 바라 보기 시작하였다. 이이첨(이이첨)이 외손녀 세자빈(세자빈)은 그때까지도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였고, 만약 새로이 세자의 후궁이 된 허균의 딸이 아들을 낳게 된다면, 권력을 빼앗길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이이첨은 허균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란만장 ..허균의 삶. 2
허균(허균)의 생활은 매우 자유분방하였던 듯하다. 허균은 평소 '참선하고 부처에게 절을 할 정도 '로 불교(불교)에 대해서 호의적이어서 여러 명의 승려들과 교류하였으며, 신분적(신분적) 한계로 인해 불운한 삶을 살고 있던 서자(서자)들과도 교류하였다. 또 요즘 같으면 지탄받을 일이지만, 기생(기생)과 정신적인 교감(교감)을 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생활을 하였다.
한 번은 그가 아끼던 부안(부안)의 기생 "계생(桂생)'이 죽자, ' 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펴려 놓은듯 (妙句堪擒錦) / 청아한 노래는 가는 바람 멈추어라 (淸歌解駐雲) / 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에 귀양 왔고 (竊桃來下界) / 선약을 훔쳐가 이승을 떠나다니 (偸藥去人群) ..라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詩)를 짓기도 하였다. 계생(桂生)은 바로 매창(梅窓)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서 허균은 ' 남녀간의 정욕(情慾)은 하늘이 준 것이며,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윤리는 성인(聖人)의 가르침이다. 성인(성인)은 하늘보다 한 등급 아래이다. 성인을 따르느라 하늘을 어길 수는 없다' 고 말한다. 이러한 허균의 발언을 통해서 그의 생활 태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같은 허균의 생활태도는 학문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 글 쓰는 재주가 매우 뛰어나 수천 마디의 말을 붓만 들면 써 내려 갔다. 그러나 허위적인 책을 만들기 좋아하여 산수(山水)나 도참설과 도교(道敎)나 불교의 신기한 행저그로부터 모든 것을 거짓으로 지어냈다 .. 광해군일기 '고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의 행동과 학문은 분명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남대문 흉서(兇書)사건
이렇게 이이첨과 허균이 갈등 국면으로 들어가는 와중에 광해군 10년(1618) 8월 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대장군 정 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벽서)가 붙는다. 이 벽서의 작성자가 허균(허균)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광해군(광해군)은 과거 기준격(기준격)의 상소문을 조사하도록 지시한다.
이 지시에 따라 하인준(河仁浚), 현응민(玄應旻), 김윤황(金胤黃) 등 허균과 가까웠던 수십명이 체포되어 문초를 받는데, 현응민(玄應旻)은 " 앞뒤의 흉서는 모두 자신이 작성한 것이고, 허균은 알지도 못한다 "고 주장하였으나, 하인준, 김윤황 그리고 허균의 妾이었던 "추섬"은 심한 고문 끝에 "남대문의 흉서는 허균이 작성하였다 "고 자백하였다. 허균은 자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를 딸의 집으로 옮겨 놓고 다음 날 체포되었다.이 자백들은 허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그는 끝까지 혐의사실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허균은 하인준 등과 함께 8월24일 처형되었다.
당시 허균의 죄상으로 거론되던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무오년(광해군 10년. 1618년) 무렵에 여진족(여진족)이 침범이있자, 중국에서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러자 조선이 여진(여진)의 본거지인 건주(建州)에서 가까워 혹시 있을지도 모를 여진족의 침략으로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는데, 허균(허균)은 긴급히 알리는 변방의 보고서를 거짓으로 만들고 또 익명서(익명서)를 만들어, ;아무 곳에 역적이 있어 아무 날에는 꼭 일어날 것이다 '하면서 서울 도성 안 사람을 공갈하였다.
또한 허균은 밤마다 사람을 시켜 남산에 올라가서 부르짖기를 ' 서쪽의 적(적)은 벌써 압록강을 건넜으며, 유구국(琉球國) 사람은 바다 섬 속에 와서 매복하였으니, 성 안의 사람은 나가서 피하여야 죽음을 면하게 될 것이다 '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노래를 지어 ' 성(성)은 들판보다 못하고, 들판은 강을 건너니만 못하다 '하였다. 또 소나무 사이에 등불을 달아놓고 부르짖기를 ' ㅅ라고자 하는 사람은 나가 피하라 '고 하니, 인심(인심)이 놀라고 두려워 하여 아침저녁으로 안심할 수 없어서 서울 안의 인가(인가)가 열 집 가운데 여덟아홉 집은 텅비게 되었다는 것이다.이밖에도 김윤황을 사주(사주)해서 격문(격문)을 화살에 매어 경운궁 가운데 던지게 한 것, 남대문에 붙여진 격문을 허균이 했다는 것 등이다.
허균은 실제로 군사를 동원하였다 ?
허균은 실제 역모를 계획하였을까? "광해군일기" 10년 3월19일의 기록에는 ... " 허균이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궁을 도륙하려다 자신이 거꾸로 역모에 걸려 죽었다 "라고 전하고 있고, 8월21일에는 " 이 때에 허균이 무사를 많이 모으고 은밀히 승군(승군)을 청해서는 곧바로 대비궁을 범하여 일을 먼저 일으키고 나중에 아뢰려고 하였는데, 왕도 이미 허락하였다 "고 전하고 있다.
허균의 죽음에는 의문이 있지만, 군사를 동원하려고 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허균이 군사를 모은 것은 대비궁에 난입하기 위한 것으로 광해군도 하락했다는 것인데, 여기에 수수께끼의 열쇠가 있다, 황정필의 상소에 의하면, 허균은 승군과 황해도,평아노, 전라도의 군대를 동원하려고 했다는데, 실제 군사를 동원했다면 인목대비가 최종의 목표이었을까? 대비궁을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구낫를 동원하여 실제로는 조선에 율도국을 건설하려 한 것은 아닐까?
허균(허균)을 둘러싼 이같은 의혹에 대하여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광군일기(광해군일기)'에서는 이것이 당시 대북(대북) 정권의 핵심이었던 이이첨(李爾瞻)과 한찬남이 허균(허균) 등을 제거하기위하여 모의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이 옥사(옥사)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또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광해군 10년 8월 24일 인정전(仁政殿) 문에서의 국문(鞫問)은, 허균이 자신이 비록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국문(국문)을 끝으로 생(생)을 마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한때 정치적 동지이었던 기자헌(기자헌)은 허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 예로부터 죄인에게 형장(刑杖)을 가하여 신문하지 않고 사형이 결정된 문서도 받지 않은 채 단지 죄인의 범죄 사실을 진술한 말로만 사형에 처한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론)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아마도 기자헌(奇自獻)은 허균의 죽음이 무고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허균의 비극적 죽음
광화문 흉서사건으로 허균은 체포되고 곧 사형에 처해진다. 이때 이이첨은 심복을 시켜 몰ㄹ ㅐ허균에게 말하기를 " 잠깐만 참고 지내면 나중에는 반드시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다 "고 하고, 또 허균의 딸이 곧 후궁으로 들어 갈 참이므로 다른 근심이 없으리라는 것을 보장한다면서 온갖 수단으로 사주하고 회유하였으나, 이는 허균을 급히 사형에 처하여 허균의 입을 없애려는 계책이었다..라고 실록에는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실록에는 "허균운 아직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결안을 할 수 없다면서 붓을 던지고 서명을 하지 않으니 좌우의 사람들이 핍박하여 서명케 하였다 "라고 전하고 있다. 즉 조선의 형법상 본인의 자백은 필수적이었으나, 허균의 자백은 없었다.
뒤늦게 이이첨에게 속은 것을 깨달은 허균은 크게 소리치기를 "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고 소리 질렀으나 모두 못들은 척하니 왕도 어찌 할 수 없가 없어서 그들이 하는대로 맡겨줄 따름이었다..고 광해군일기(광해군일기)는 전한다. 그리고 이이첨(이이첨)의 말 .. 지금 만약 허균에게 다시 묻는다면 허균은 반드시 잠깐 사이에 살아날 계책을 꾸며 다시 함부로 말을 낼 것이니 도성의 백성들을 진정시킬 수 없을까 걱정됩니다... 왕이 끝내 군신들의 협박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이에 따랐다 (광해군일기 10년 8월)
능지처참 陵遲處斬
대역죄나 패륜을 저지른 죄인 등에게 가해진 극형으로 능지처사(陵遲處死)라고도 한다. 언덕을 천천히 오르내리듯(陵遲), 고통을 서서히 최대한으로 느끼면서 죽어가도록 하는 잔혹한 사형으로 대개 팔다리와 어깨, 가슴 등을 잘라내고 마지막에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어 죽였다.
또는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죄인을 기둥에 묶어 놓고 포를 뜨듯 살점을 베어내되, 한꺼번에 많이 베어내서 出血 過多로 죽지 않도록 조금씩 베어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형벌이다. 본래는 수레에 팔다리와 목을 매달아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 시신에 거열형을 가하는 육시(戮屍)와 차이가 있으나 혼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시신을 여러 토막을 내어 전국 여러 곳으로 보내어 백성들로 하여금 보도록 하기도 하였다.
金玉均을 중국에서 송환한 후, 총살하고 시신을 토막내어 한강변에 머리를 효수(梟首)하였다.
이 형벌은 중국 元나라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공민왕 때부터 시행한 기록이 있다. 특히 연산군,광해군 시절에 많았고, 仁祖때에는 엄격히 금지되었으나 실제로는 폐지되지 않다가 1894년 갑오경장때 완전히 폐지되었다.
실록에.. 사육신을 능지처참하고 목을 베어 3일동안 저자거리에 걸어 놓아 백성들에게 공개하고, 특히 성삼문의 시신 토막을 전국 여기저기를 옮겨가며 공개하였다. 이리하여 성삼문의 묘는 세 곳에 있다. 당시 김종서(金宗瑞)장군도 같은 형벌을 받아, 그 다리 하나를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에 묻었는데..즉, 김종서의 다리 하나가 묻혔다고 하여 "한 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그 것을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한(大)+다리(橋) 즉 대교(大橋)가 되었다. 그 한 다리와 대교를 한자로 의역하니 "긴 가랑이" 즉 장기(長崎)가 된 것이다. 실제로 이 곳에 김종서의 묘가 있다.
이 능지처참형을 받았던 인물로는 1398년, 이방원(태종)을 살해하려 했던 박두언, 1407년 남편을 살해한 내은가이, 1467년 세조에 의해 옥에 갇힌 신숙주의 형구를 허술하게 해 주었다는 남용신,
광해군시절의 허균(許筠) 그리고 1651년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한 김자점, 조선말기 김옥균은 총살 후 능지처참되었다.
광해군의 반교문
반교문(頒敎文)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왕의 교서(敎書)이다. 허균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광해군은 다음과 같은 반교문을 내렸다.
허균은 性品이 사납고 행실이 개, 돼지와 같았다. 倫理를 어지럽히고 淫亂을 자행하여 인간의 道理가 전혀 없었었다. 죄인을 잡아서 동쪽 저자거리에서 베어 죽이고, 다시 기쁨을 누리고자 대사령을 베푸노라.....
성소부부고 惺所覆부藁
허균이 가장 불우하던 시기에 칩거하면서 지은 詩와 산문들을 모아 직접 시부(詩部), 부부(賦部), 문부(文部), 설부(說部) 등 4部로 나누어 실었으며, 8권 1책이다. 허균이 역적으로 몰려 죽어 공간(公刊)될 수 없었으며, 몰래 필사하여 전해진 연유로 틀린 글자와 빠진 장이 많다.
1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성을 다하여 쓴 필사본이며, 책의 첫 章마다 正祖가 世孫으로 있을 때의 장서인(藏書印)인 "관물헌(觀物軒)과 "이극지장(貳極之章)"이라는 어인(御印)이 찍혀 있다. 賦部와 文部의 내용은 일반 문집의 체제와 거의 비슷하나 詩部는 정유조천록(丁酉朝天錄), 남궁고(南宮藁), 궁사(宮詞) 등과 같이 시기나 주제별로 묶여 있어 특이하다. 이러한 체제는 그 뒤 많은 문집에서도 사용되었다.
詩部에서는 대 시인이었던 이달(李達)과 권필(權필)의 評語를 세주(細註)로 달아 놓아 그의 시가 당대에 높이 평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說部에 있는 "성수시화(惺수詩話)"는 따로 전하는 허균의 저작 "학산초담(鶴山樵談)"과 함께 우리나라 역대 詩話 가운데 뛰어난 작품이다.
허균의 저서 '성소소부고'에는 허균의 생각을 담고 있는 여러 편의 글이 있다. 학문의 목적과 진위(진위)를 논한 학론(학론)을 비롯하여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나라의 방비를 강화해야 함을 논한 병론(병론)이 있으며, 허균의 입장을 가장 잘 표현하였다고 하는 유재론(遺才論)과 호민론(호민론)도 포함되어 있다. 유재론(유재론)에서 허균은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본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한 것이므로 인재를 버리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서얼(서얼)이라서 인재를 버리고, 어머니가 개가(개가)했다고 해서 버리는 인재를 버리는 것을 개탄하였다.
호민론 豪民論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들은 홍수나, 화재 또는 호랑이보다 더 두려운 것이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들은 물이나 불 또는 호랑이보다 더 두려운 것이다. 그러함에도 윗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제 마음대로 이들 백성을 학대하고 부려 먹고 있다. 도대체 왜 그러는가?
무릇 정세에 대하여 깊이 살피지도 않고 순순히 법을 만들고 윗사람에게 잘 따르는 것을 항민(恒民)이라고 한다. 이들 恒民은 전연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다음, 살을 깎고 뼈가 망가지면서 애써 모은 재산을 한 없이 갈취 당하고서 탄식하고 우는 백성들이다. 이들은 윗 사람을 원망하는 자, 즉 원민(怨民)이라고 한다. 이 원민(怨民)들도 별로 무서운 존재는 아니다. 다음, 세상이 되어가는 꼴을 보고서 불만을 품고 인적이 없는 곳으로 종적을 감추고서는, 세상을 뒤엎을 마음을 기르고 있다가 기회가 닥치면 그들의 소원을 풀어 보고자 하는 자 즉, 호민(豪民)이 있다.
이들 豪民은 참으로 무서운 존재이다. 豪民은 나라의 귀추를 엿보고 있다가 적절한 기회를 타서는 분연히 주먹을 쥐고 밭이랑 논두렁에 올라서서 한번 크게 소리 지른다. 그러면 怨民들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든다. 그들과 모의 한 번 하지 않았어도 그들의 호응을 받는 것이다. 이 때 恒民들도 그들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하여 호민과 원민을 따라 호미와 쇠스랑을 들고 따라온다, 이로써 무도한 자들의 목을 베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진나라가 망할 때 진승과 오광이 있었고, 한나라가 어지러운 것은 황건적 때문이었고, 당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왕선지와 황소의 난이 있었다. 이들이 일어나기만 하면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두가 백성을 너무 혹사히고 착취하여 제 배만 불리려고 하다가 호민들이 그 기회를 타서 일어난 것이다.
무릇 하늘이 관직자를 세운 것은 백성을 부양하라 한 것이지, 한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대로 끝없는 욕심을 채우라고 한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중국과 다르다. 땅이 넓지 못하고 인구가 적다. 또 백성은 게으르고 속이 좁고, 절게와 협기(俠氣..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함)가 없다. 그리하여 평상시에는 뛰어난 인재가 나라와 세상에 쓰임을 받는 일도 없거니와 난을 당해서도 豪民이 사납게 일어나서 나라의 근심거리가 된 적도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고려시대와 다르다. 고려 때에는 백성을 위한 제도가 달라 모든 이익을 백성과 함께 하였다. 상업하는 사람이나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같은 혜택을 입었고, 또 수입을 보고 지출을 했기 때문에 나라에는 곡식이 여유가 있었고, 갑작스럽게 큰 병란이나 국상이 생겨도 거두어 들일 줄을 몰랐다. 단지, 말기에 와서 삼정(三政 .. 전정,군정,환곡)이 문란하여 환란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현재에는 그렇지 못하다. 변변치 못한 백성과 땅덩이를 가지고 귀신을 받드는 일이나 윗사람 섬기는 제도는 중국과 같이 해서 백성들은 5분(分 ..1분은 10%)의 세금을 정부에 바치고 있다. 이 것도 대부분 그대로 국가에 납부되지 않고 중간에 있는 자들이 사복을 채우고 있어서 국가으 ㅣ수입은 실상 1 分 정도밖에 안 된다. 백성은 백성대로 고생을 하고, 국가는 국가대로 비축미가 없는 것이다.
국가에 무슨 일이 있으면 저축이 없는 정부에서는 1년에 두 번씩 거두어 들이기도 하고, 부패한 관리들은 이 것을 기화(奇貨)로 하여 온갖 착취를 다한다. 이러한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두려워 하거나 바로잡을 줄 모르고, 우리나라에는 호민이 없다고 말하니 한심스러운 일이다.
불행히도 견훤과 궁예같은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적이 있은 즉, 이와같은 사람들이 나와서 백성들을 충동한다면 근심과 원망에 가득한백성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며, 바로 눈 앞에 있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때에 위정자는 백성들을 무서워 할 줄 알고 전철을 밟지 않는다면 겨우 걱정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許筠論 ... 허균의 사상
허균의 사상은 "성소부부고" 제11권, 文部 8의 "논(論)"에 종합되어 있다.이 것을 읽으면 학문, 정치, 관직, 군사, 인재, 등의 논의에다 인물론까지 곁들여져 있다. 지금으로 보아도 상당히 실용적인이면서 개혁적이다, 무엇보다도 당시는 왕조국가이기 때문에 임금 한 사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학론 學論
학문을 할 때 자신의 몸의 이익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참 선비는 理致를 窮求해서 천하의 변화에 대응하고 道를 밝혀서 후세의 학문을 열어 주었다. 거짓 선비들은 私心으로 참(眞)을 어지럽게 하여 임금이 道學을 배척하게까지 만들었다.
人君荀明公私之辯則眞僞不難知矣.
然則其機安在在乎人君一身也亦不過日正其心而己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즉,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公과 私를 밝게 분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참과 거짓이 분별되게 되고, 그러면 진리를 궁구하고 道理에 밝은 자가 나와서 배운 바를 행할 것이다. 그러면 나라의 옳고 그름도 따라서 정해질 것이다.
정론 政論
宣祖때 李栗谷이 훌륭한 정책들을 도모했는데, 속된 선비들이 방해를 하여 이루지 못했다. 만일 왕이 믿음으로써 이율곡에게 맡기고 흔들리지 않았다면 外敵(임진왜란)도 막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明以察其下信以任其臣斯二者足以盡之而己終執與斷而己矣
그러므로 왕은 나라를 훌륭하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밝음으로써 아랫사람을 살피고. 믿음을써 신하에게 맡겨야 하며, 끝까지 굳은 의지와 결단을 갖고 있어야 한다. 밝음으로써 아랫사람을 살피고, 믿음으로써 신하에게 맡기는 이 두가지로 충분한데, 최종적으로는 확신과 결단이 있어야 한다.
관론 官論
쓸데없는 관직이 너무 많으면 전문적이 되지도 못하고, 일을 제대로 신속하게 처리하지도 못하며 봉급도 낭비된다. 유사한 기능을 하는 부서들은 합병되어야 한다.
병론 兵論
나라에 있어 군사는 극히 중요하다. 우리나라 군대는 형편이 없어서 나라가 유지되는 것이 기적이다. 고려시절에는 군정이 엄하여 관리들도 높은 관리가 아니면 모두 군대(친군)에 속해 있었고, 재상의 아들들도 군인이 되었고, 선비들도 종군하였다.전시를 대비하여 군대 동원 계획이 잘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임금 밖에 없다. 군사를 다스리고 장수를 통솔해서 나라를 굳세게 할 사람은 오직 임금 뿐이다.
유재론 遺才論
나라를 다스리려면 인재(人才)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나라가 작아서 인재가 드물다. 그런데도 세족(世族)이나 과거시험을 통하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없다.
天之生也而人棄之是逆天也
賤한 출신과 서자(庶子)를 중용하여야 나라를 훌륭하게 다스릴 수 있다. 하늘이 낳아 주신 것을 사람이 버리니, 이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짓이다.
후록론 厚祿論
官吏에게 봉급을 후하게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利)를 다투지 않고 마음 편안하게 포부를 펼칠 수 있다. 봉급을 적게 주면서 청렴하기만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특히 하급 관리와 외직(外職)과 정년 퇴직한 사람들을 우대하여야 한다. 긴요하지 않은 관직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고, 윗사람이 공손하고 검약(儉約)하여야 한다.
소인론 小人論
우리나라(조선)에는 소인도 없고, 군자(君子)도 없다. 君子가 없는 까닭에 小人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스스로 군자라고 칭하는 자들은 자기 중심주의자들이지 결코 진실한 군자들이 아니다.
그런 무리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나라의 기강도 서지 못하고 있다. 곧 "붕당의 해는 소인이 조정을 전횡(專橫)하는 하는 것보다 심하다 " 음붕지해유심어소인지전조야교의
호민론 豪民論
백성은 그 무엇보다도 더 두려운 존재이다. 그런데 백성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항민(恒民)은 눈 앞의 일에 얽메이고, 법을 따르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이고, 원민(怨民)은 세금 등으로 심하게 빼앗겨서 시름하고 탄식하며 윗사람을 원망하는 사람이며,
天下之所畏者唯民而己
천하에 두려워 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뿐이다
호민(豪民)은 딴 마음을 먹고 천지간(天地間)을 곁눈질하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으면 세상을 뒤 엎으려고 하며, 이 때에 恒民과 怨民들이 이에 따른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는 豪民이 없다..고 말하며 두려워 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민목(民牧 ..임금)은 이런 두려운 사정을 알아 밝은 정치를 펼쳐야 한다.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論
관리들은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만났을 때, 세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절개를 굽히지 않는 사람들이고, 둘째는 살기를 구해서 구차하게 새 姓氏를 섬기는 자들이고, 셋째는 임금을 속이어 富貴를 도모한 자들이다. 둘째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아껴 어쩔 수 없이 행동하는 자들이라 하늘이 제 명대로 살게 허락하지만,셋째 부류는 부귀만을 바라는 자들이라 하늘이 혹독한 벌을 내려 보복한다.
권근(權近)은 유배되었을 때 나라가 바뀌었는데 벼슬로 부르니까 목숨을 사랑하여 몸을 굽혀 나왔다. 그리고 벼슬이 높아졌고 제 명대로 살다 죽었다. 권근은 부름을 받았을 때 나오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숭앙(崇仰)하였을 것이다. 한편 鄭道傳은 스스로 나라를 엎을 계책을 실행하였다. 그래서 끝내는 천명을 살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서 정도전을 더욱 비난하는 바이다.
남효온론 南孝溫 論
남효온(1454~1492)은 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1478년 世祖에 의하여 물가로 移葬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의 복위를 상소하였으나, 다른 대신들의 저지로 실패하자, 失意에 빠져 유랑생활로 생애를 마쳤다. 이후 연산군시절 이를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는데, 이를 두고 허균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南孝溫이 벼슬을 하지 않은 것은 자의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남효온은 슬기가 없었고 도량이 좁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남효온이 上疏를 했을 때의 나이가 겨우 20세이었다. 그때는 世祖의 왕위 찬탈에 많은 내조를 한 신하들이 살아 있을 때라서 상소의 내용이 시행되기에는 시기상조이었다.남효온은 수양하고 道를 닦으며 시기를 기다리면서 작은 일부터 왕에게 시행하기를 청하면서 임금과 뜻을 맞추고 있어야만 했다.
『 홍길동 (洪吉同)은 실존 인물이다 』
홍길동은 연산군(연산군) 시절의 도적이다. 조선왕조실록과 몇몇 문헌에 간략히 적혀 있는데, 약 100여년이 지난 후, 허균의 최초 한글소설 " 홍길동전 "의 실제 모델이 되었다.
홍길동의 행적
홍길동은 처음에는 충주일대에서 활약하였다. 홍길동은 버젓이 당상관의 차림으로 무리를 이끌고 관아에 들어갔으며, 그 기세에 눌려 지방 관아에서도 깍듯이 존대하였다고 한다. 산 속에 들어가 근거지를 두고 활동한 흔적은 없으며, 지방의 권농(勸農)이나 이정(里正), 유향소의 佐首,別監 등도 알아 볼 정도이었으며, 그 위세가 일반 백성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었다고 한다.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좌의정 성준(成俊), 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 ... ' 듣건데 강도 홍길동(洪吉同)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홍길동이 옥정자(玉頂子)와 홍대(紅帶)차림으로 첨지(僉知)라 자칭하며 대낮에 무리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부(官府)에 드나들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자행하였는데, 그 권농(勸農)이나 이장(里正)들과 유향소(留鄕所)의 품관(品官)들이 어찌 이를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체포하여 고발하지 아니하였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을 모두 잡아들여 변방으로 옮기는 것이 어떠하리까 ? '....하고 말하니 연산군은 " 알았다 "고 하였다. 실록 연산군일기 1500년 11월28일
홍길동의 체포 이후
홍길동은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자칭하며 관가를 출입하였으며, 조정은 이에 강상죄 (綱常罪 ... 삼강오륜을 심하게 범한 죄)를 적용하였다. 조정은 홍길동의 이러한 행동이 지방관리와 유향소(留鄕所 ..일종의 지방 자치조직)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해를 넘긴 1501년까지 관련자를 잡아 국문하였다.
홍길동을 도운 죄로 잡힌 堂上武官 엄귀순(엄귀순)과 이에 연루된 권농(勸農), 이정(里正)같은 하급관리들은 변방으로 귀양보내졌다. 실록에는 홍길동을 잡았다는 기록 외에는 어떻게 벌주었다는 기록이 없다. 연산군일기(연산군일기)가 시대상황으로 다소 누락된 부분이 많을 수 있었지만, 다른 기록은 상세하였다는 점에서 이상하다. 다만 훗날 선조시절 홍길동과 같은 강상(綱常)의 죄로 잡힌 '이연수'의 처리를 논하면서, 홍길동의 사례를 들어 도당을 나누어 가두고 심문하기를 청하는 것으로 보아 홍길동 일당도 옥중에서 서로 말을 맞추었거나, 일부 탈옥을 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엄귀손 엄귀손
실록의 기록만 두고 본다면 홍길동사건보다는 엄귀손의 홍길동 비호사건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당시 조정에서는 엄귀손의 처벌에 대하여 의논이 분분하였다. 엄귀손은 무인 출신의 당상관으로 고위관리이었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 강도(强盜)를 비호한 인물이 어떻게 당상관이 될 수 있는가? " 라고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엄귀손은 결국 杖 100대와 3,000里 유배 그리고 고신(告身)의 박탈이라는 처벌을 받는다. 고신(告身)을 박탈한다는 것은 관리가 될 자격을 박탈하는 것으로 사형 바로 다음의 중벌이었다.
엄귀손이 동래 현감 등 관직에 있을 때 관물(官物)을 마음대로 도용(盜用)하거나, 공물(貢物)을 훔쳤다가 파면되는 등의 이력이 좋지 않은 인물이었다. 원래는 노비와 재산이 없었는데, 홍길동사건과 관련하여 조사 받을 당시에는 한양과 지방에 여러 채의 집이 있었고, 곡식도 4,000석이나 쌓아두고 있었다. 그 것은 홍길동의 덕택이었고, 그 재산을 뇌물(賂物)로 사용하여 당상관(堂上官)에 이르렀던 것이다.
홍길동의 출신성분
홍길동의 신분과 출생년도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홍길동과 같은 도당으로 여겨져 옥사(獄死)한 엄귀순(엄귀순)은 당상무관(堂上武官)으로 한 해 추수하는 곡식이 3~4천석에 이를만큼 부유하였다는 점을 보면 임꺽정과 같이 비천한 출신은 아니었을것으로 짐작될 뿐이지만, 당상무관 신분이었던 엄귀순의 행적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小說 "홍길동전"처럼 홍길동이 당상관의 가문이었다면 기록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 정도의 고위벼슬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길동은 의적(義賊)이었나 ?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으로 홍길동은 의적(義賊)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의 홍길동은 의적이었을까? 그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는 없다. 다만 실제로 의롭게 행동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민중들은 이들을 통해 부정한 체제에 대한 저항을 꿈꾸게 되므로 의적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데..허균의 홍길동전도 이러한 영향을 받았을 듯하다.
홍길동에 대한 평가
홍길동의 증발 이후 그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누군가를 욕할 때 " 홍길동 같은 놈 "이라고 할 정도이었다. 조현이 선조(宣祖)에게 올린 상소문에 " 정승을 잘못 골라 풍속이 탁해지고, 강상의 윤리가 무너져 이제는 홍길동을 욕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고 하였다. 즉 한마디로 홍길동보다도 못한 인물이 정승이 되었으니 굳이 홍길동을 욕할 일이 없어졌다는 의미이다. 조선의 3대 도적(盜賊) ...연산군시절의 홍길동은 허균에 의하여.. 명종(명종)시절의 임꺽정은 홍명희에 의하여 .. 숙종시절의 장길산(張吉山)은 황석영에 의하여 소설로 만들어져 되살아났다.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 역시 어디까지나 허구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 역시 결국에는 픽션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 인물 홍길동이 체포된 시점은 1500년이고, 허균이 생존한 시기는 1569~1618년이다. 그리고 허균은 역사서(역사서)로서의 '홍길동전'이 아니고 소설로서의 '홍길동전'을 저술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는 홍길동의 이미지는 1500년(연산군 재위 시절)에 체포된 '실제의 홍길동'이 아니라 선조(선조), 광해군(광해군) 시절의 허균이 상상한 ' 가상의 홍길동'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의 홍길동과 소설의 홍길동
그런데 문제는 허균이 작가로서의 상상력을 무절제하게 행사하였다는 점이다.더욱 더 큰 문제는 그로 인해 실제 홍길동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파괴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역사가 ' 전적으로 ' 사실에 근거해야 하는 데 비하여, 역사 작가는 ' 기본적으로만 ' 사실에 근거하면 된다. 역사 소설의 작가는 기본적 사실관계와 주인공의 이미지만큼은 살려둔다는 전제 하에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대중은 그것을 실제 역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균의 경우에는 과연 그가 그렇게 했는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왜내하면, 그는 주요 사실관계와 홍길동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허균이 잘못 전달한 주요 사실관계와 홍길동의 이미지란 어떤것일까 ? 사료(사료) 상으로 발견되는 '홍길동'은 ' 관복을 입고 첨지(정3품)으로 불렸으며, 백성들은 물론 일부 조정 관료 및 향촌세력들의 지지 하에 조선왕조를 공격하다가 연산군(연산군) 때 체포된 반체제세력의 지도자이다.
'관복을 입고 첨지(첨지)로 불렸는데 어떻게 반체제세력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새로운 체제를 꿈꾸는 혁명조직의 경우에도 초기에는 일반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 기존의 관념'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일반대중에게는 관복(관복)을 입은 관료가 사회의 지도자이었므로 그러한 기존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자기 집단에 대한 대중의 충성심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제(실제)의 홍길동은 엄연히 반체제세력(반체제세력)의 지도자이었지만, 허균의 '홍길동전'에 나타난 홍길동의 이미지는 전혀 그렇지 않다. 허균이 상상해낸 홍길동의 이미지는 고작 ' 의적(의적) '에 불과할 뿐이다.
허균과 매창의 플라토닉 러브
매창(梅窓. 1573~1610)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시인이다. 계생(桂生) 또는 계랑(桂琅)이라고도 부른다. 전북 부안의 庶女로 태어나, 시와 거문고에 뛰어났고, 이귀(李貴)와 시인 유희경(柳希慶) 등과 깊게 사귀었다. 매창의 대표적인 詩 "梨花雨"는 유희경과의 이별을 읊은 詩이다
梅窓의 묘 ..전북 부안
허균과 매창의 만남
허균과 매창은 허균이 33세일 때(1601), 전라도의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전운판관(전운판관)으로 전라도 부안에 갔을 때 7월에 처음 만났다. 그 때 매창의 나이는 29세이었다. 허균은 그즈음의 일기를 "조관기행(漕官紀行)"에 자세히 써 놓았는데, 梅창과 만난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壬子 到扶安雨甚留. 高弘達來見. 倡桂生李玉汝情人也. 挾琴吟詩
貌雖不揚有才情可與語. 終日觴詠相倡和. 夕納其姪於寢爲遠嫌也
23일(壬子) 부안에 도착하였다. 비가 몹시 내려 머물렀다. 고홍달(高弘達)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옥여(李玉汝 .. 옥여는 李貴의 字이다)의 정인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詩를 읊었다. 비록 생김새는 드날릴 정도는 아니지만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였다. 하루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詩를 읊고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자기 조카딸을 침실로 들였는데,곤란한 일을 피하기 위해서이었다.
아마 매창이 유희경을 가슴에 품고 수절하고 있었거나, 이귀의 정인이었기 때문에 피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기생의 신분이었기에 서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었다. 훗날 매창에 보낸 허균의 편지를 보면 서로 그런 유혹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서로 선을 넘지 않았으며, 이러한 사귐은 매창이 38세로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허균이 매창에 보낸 편지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에는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2통의 편지가 남아있다. 모두 1609년(허균 41세, 매창 37세) 1월과 9월로 되어있다. 당시 허균은 1월에 중국사신으로 중국에 다녀 왔으며,홍문관 월과(月科)에서 잇달아 세 번 일등을 하여 광해군의 눈에 들고 9월에는 형조참의(정3품)으로 급속 승진한다. 편지 내용은...
1906년 1월
그대가 달을 바라 보면서 거문고를 타며 산자고(새 이름)를 불렀다는데
왜 한가하고 은밀한 곳에서 하지 않고, 바로 부윤(府尹)의 비(尹碑) 앞에서
하여 남의 허물 잡는사람에게 들키고, 3척(尺)의 거사비(去思碑)를 시로써
더럽히는가? 이것은 그대의 잘못인데, 비방이 내게로 돌아오니 억울하오.
요즘도 참선(參禪)을 하시는가? 그리운 정(情)이 간절하구려 (相思취切)
사연인즉슨, 계랑과 가깝게 지낸 고을 원님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떠나간 뒤 그를 위해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계랑이 그 비석 옆에서 "산자고"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것이 누구를 향한 노래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여튼 그래서 "매창이 눈물을 흘리며 허균을 원망하였다"라는 소문 이 났고, 이들 들은 허균의 친구 이원형(李元衡)은 그것을 주제로 詩까지 지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허균은 곤란해졌고, 이 편지를 매창에게 보내게 된것이다. 매창이 참선을 했었음이 드러나 있고, 그것은 아마 허균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6년 9월
봉래산(蓬來山)의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으니,돌아 가고픈 생각이 가득 난다오.
그대는 틀림없이 성성옹(惺惺翁 ......허균 자신을 이름)이 속세를 떠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웃을 것이요. 그때에 만약 생각을 한 번 발못 먹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이처럼 교분이 돈독할 수 있었겠소. 이제
와서야 진회해(秦淮海)는 진정한 사내가 아니고, 망상(망상)을 끊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한 줄을 알았소. 어느 때나 만나서 하고픈 말 다 할런지. 편지 종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서글프오.............. 하시토진 임저개연 (何時吐盡 臨楮慨然)
계량(桂琅)의 죽음을 슬퍼하며 ..허균 詩
전북 부안의 선계폭포... 이곳에서 허균과 매창은 시와 잔을 주고
받으며 만남을 이어간다. 이 위에 있는 정사암(靜舍庵)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허균은 이 곳에서 국조시산(國朝詩刪) 등 여러 글을
썼다. 공주목사에서 파직된 후 이 곳에 머물렀다.
1609년 9월, 허균이 매창에게 두번째 편지를 보내고 이듬해 매창이 죽는다. 그 소식을 들은 허균은 문물을 흘리고 詩 2首를 짓는다. 그의 저서 "성소부부고"에 실려 있다.
桂生扶安倡也. 工詩解又善謳彈. 性孤介不喜淫
余愛其才交莫逆. 雖偕押處不及於亂故久以不衰
今聞死爲之一悌作二律哀之
계생은 부안의 기생이다. 시에 능하고 글도 알았으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 했다. 천성이 고고하고 깨끗하여 음탕한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우스게소리를 나누며 가까이 지냈지만 어지러운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그 사귐이 오래 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 한차례 울고난 후, 율시 2수를 지어 그를 슬퍼한다.
절묘한 글귀는 넓게 펼쳐진 비단이요
맑은 노래는 흩어지고 머무르는 구름이라
복숭아를 훔친 죄로 하계에 귀양와서
선약을 훔쳐 인간세상을 떠나셨네
부용꽃 휘장에 등불은 어두어졌는데
비취색 치마에 향내는 아직도 남아 있구려
내년에 복사꽃 활짝 피어날 때에는
그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아 주리오....
처절하구나. 반첩여의 부채여
서글프구나, 탁문군의 거문고여
흩날리는 꽃잎에 속절없이 한이 쌓이고
시든 난초에 다만 마음이 상할 뿐이네
봉래섬에 구름도 자취가 사라지고
푸른 바다에 달도 이미 잠기었구나
앞으로는 봄이 와도 소소의 집에는
앙상한 버들이 그늘을 이루지 못하겠구려
국조시산 國朝詩刪
조선 最高의 詩選集
국조시산(國朝詩刪) ... 허균이 엮은 시집이며, 9권 4책으로 되어있다. 조선 초기의 정도전(鄭道傳)에서부터 "권필"에 이르는 35名의 詩, 877首를 수록하고, 편말에 "허문세고(許問世藁)"를 싣고 있다. 이 시선집은 허균이 역적죄로 죽임을 당한 이유로 오랫동안 발간되지 못하다가 , 숙종때에 이르러 광주부윤, 박태순(朴泰淳)에 의하여 다시 편집,간행되었다.
國朝詩刪의 내용
1권에는 오언절구 34인의 49수, 2권에는 칠언절구 53인의 147수, 3권에는 필언절구 60인의 69수, 4권에는 오언율시 58인의 153수, 5,6권에는 칠언율시 41인의 116수, 7권에는 오언고시 29인의 56수, 8권에는 칠언고시 22인의 35수, 9권에는 잡체시 6인의 42수 등이 실려 있다.
박태순의 刊記
이 시선집은 허균이 공주목사로 재직하던 1607년 전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허균이 역적죄로 죽어 오랫동안 간행되지 못하다가 약 90년이 지난 숙종대, 1695년에 광주부윤으로 있던 박태순이 다시 편집, 간행되었다. 박태순은 그의 간기(刊記)에서...
허균의 "국조시산"과 여러 저술들은 허균이 역적죄로 피주(被誅)된 이후 거의 인멸되기에 이르렀다.혹 호사가(好事家)가운데 수록하여 둔 자가 있어도 밖으로 드러내기를 꺼려하여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폐(廢)할지언정 그 소집(所集)은 廢할 수 없을을 절감한다.또한 많지 않은 우리나라 詩選集 가운데도 가장 뛰어난 이 選集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어 널리 제본(諸本)을 구하고, 증정(證正)을 가하여 여러 권으로 찬집, 간행한다.
이러한 서문을 남기며 국조시산을 간행한 박태순은 그 후 전라도관찰사로 재직 시(1699년), 전라도 유생들로부터 강력한 규탄을 받아 경기도 장단부사(長湍府事)로 좌천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허균은 그만큼 조선의 기피 인물이었다.
국조시산의 價値
허균은 35명의 877首를 수록하였는데, 여기에는 당시의 명망 사대부들 뿐만 아니라 승려, 여승, 도학자 등의 신분을 따지지 않고 폭 넓게 좋은 詩를 골랐다. 그리고 이 선집에는 今體에서 고조장편(古調長篇)과 잡체(雜體)에 이르기까지 가구(佳句)와 절조(節調)마다 허균 자신의 비(批)와 평(評)이 붙어 있다.
이 것은 선시(選詩)의 작업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문학 비평사에 있어 실제비평의 선구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작자 또는 시작과 관련된 제영(題詠)이나 고실(故實)을 역대의 시화만록(詩話漫錄)에서 일일이 찾아 보주(補註)를 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평의 성과는 우리나라 비평사상 매우 소중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은 후대의 시인묵객들에게 널리 읽혔으며, 특히 시화와 비평서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허균은 사람됨이 경박하고 인륜(인륜) 도덕을 어지럽혔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총명하고 시(시)를 알았으며, 문장과 식견이 뛰어나 우리 국문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그가 지은 '홍길동전'은 '호민론(호민론)'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이상적인 혁명 사상을 구치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문집에서 나타난 사상은 민본사상(민본사상)을 주축으로 하면서 국방정책, 신분 계급의 타파, 인재의 등용으로 백성을 편하게 함을 근본정신으로 삼고 있다. 또한 허균(허균)은 유교(유교)에 기본을 두면서도 불교(불교),도교(도교)에 깊숙히 심취하였고, 특히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양생술과 신선(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여 은둔(隱遁)생활의 방법을 제시한 '한정록(閑精錄)'도 저술하였다. 이처럼 허균은 당시 예교(禮敎)에만 얽메인 선비사회에서도 다각적인 식견을 가졌고, 편협한 자기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을 대변하며 정치와 학문을 펼친 선각자(先覺者)라고 할 수 있다.
허균에 대한 단상
허균 당대의 사람들은 그를 "역적의 전형"으로 평가하였으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바뀌었다. 조선시대의 학자 신흠(申欽)은 허균이 儒,佛,道 삼가(三家)의 책을 닥치는대로 외우는것을 보고 "그는 사람이 아니다. 생김새 또한 나쁘니 필시 여우나 뱀이나 쥐의 정령이 아닌가 한다"라고 허균을 평하였다.
18세기의 철학자 안정복은 "총명하고 문장에 능한 반면 행실이 경박하고 분별이 없어 음란하다"고 하여 그 재주는 인정했지만 행실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현대의 철학자 박종홍은 "허균은 언제나 서민의 편에 서서 인간성의 의의를 밝히려고 노력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그의 일관된 사상과 이념은 무엇보다 침체와 부패에서 진취와 혁신으로, 사대사상에서 자주사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물론 허균에 대한 평가를 한 마디로 집약하기에는 힘들다. 다만 사회가 점차 모순된 방향으로 흐를 때 이를 과감히 지적하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식인의 존재는 매우 절실하며, 이러한 점에서 허균은 직선적이고 강하게 자신의 사상을 표촐한 인물이었음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가 뿌리내린 개혁의 씨앗은 역적으로 낙인찍힌 불명예에도 불구하고 조선 중기 이후 진보, 개혁사상의 원류로 발전하였다.
허균은 " 성리학적 예절이 어찌 인간의 자유를 얽메이게 할 수 있는냐"면서 "세상 살아가는 것을 천성에 맡기겠다"고 하였다. 그가 갖은 비난과 파직을 무릎쓰면서도 천주교에 심취하고 부처를 믿은 것도 그의 이러한 자유인의 속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영원한 자유인으로 살고 싶었던 허균..그러나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조선사회를 지배한 시대에 그는 영원한 이방인일 수 밖에 없었다.그가 갖춘 뛰어난 문장력과 외교적 능력은 그를 권력의 중심부로 불러오게 하였지만 지나치리만치 자유분방하였던 그의 사상은 결국 권력의 틀을 벗어 던지게 한다.
역모로 삶을 마감한 허균의 비운(悲運)의 생애는 무엇보다 그 스스로 표현하였듯이 " 불여합세(不如合世) " 즉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강한 기질과 혁신적 사상 그리고 자유로운 행동가적 면모에서 비롯된다.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 허균은 그 세상을 자신에게 맞도록 바꾸어보려고 했지만, 무리한 시도는 그에게 역적이라는 불명예만 남겼다. 처형으로 마감된 허균의 삶에서 예나 지금이나 급진적인 지식인이 밟고 나갈 사상의 토양은 여전히 척박함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