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선민이 된 증거
(창세기 12:1-4)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한 사람을 택하여 민족을 이루어 그 민족으로 제사장 나라를 만들려고 하시였습니다. 그 선택된 사람이 아브라함이고 그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한 배경을 역사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 살 던 곳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그 곳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으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영한 고대 문명이었습니다. 즉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합니다. 이 이곳은 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문명으로서 농업이 발달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곳에서 아브라함을 이끌어 내신 것은 분명한 목적을 갖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업 사회는 분명한 목적이 없이 반복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해마다 씨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일로 반복되는 것임으로 이것을 순환사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농업 사회에서 유목민으로 선택하시었고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게 하심으로 분명한 목적으로 가지고 이동하게 하시었습니다. 이것을 목적론적 직선사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이미 아브라함이 살던 곳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선택된 아브라함이지만 그의 생애를 보면 그가 실제 믿음의 사람인지 의심을 들게 하는 내용들이 적지 않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번성하게 됩니다. 이 민족이 선택 받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거하면서도 하나님을 부정하고 우상을 섬기며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을 진노하시고 벌을 주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 하고 또 죄를 짓고 벌 받고 이것이 반복된 패턴으로 기록 된 것이 구약 성경입니다. 예수님 오셨을 때에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도 했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 가라고 마태복음 7장에 말씀하시였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라고 해서 또는 선택된 백성이라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37.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민족
(민수기 6:22-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설교 말씀을 묵상하면서 진짜 복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풍요롭게 사는 것도 복이고 평안히 사는 것도 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육체적 만족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잘 먹고 편안하려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오는 복은 육체적 만족과 같은 복이 아니라 영혼의 기쁨이라고 확신합니다.
본문 말씀처럼 아론은 두 아들에게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말했지만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번제단에 다른 불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죽임을 당합니다. 이에 대해 아론은 슬퍼하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번제단의 불은 불씨를 죽이지 말고 보존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레위기 말씀을 보면 아론의 두 아들은 술에 취해서 분별을 잃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것을 볼 때 두 아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복을 받았지만 그 복이 육체적인 복으로 착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대로 아론의 가문은 제사장 가문이었으나 마지막 제사장 엘리와 그 두 아들 역시도 똑같이 자신들에게 차려진 복이 어떤 복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들과 교인들이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하고 또 복을 주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먹고 마시고 숨 쉬는 것 자체만 하더라도 복 일 것입니다. 대부분 이야기 하는 복은 뭐가 잘 돼서 평안을 지켜 주셔서라는 말을 합니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많은 의문과 함께 모순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일이 잘 풀리고 평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교인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해서 복을 주실까요? 오히려 세상을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재물과 권력을 가지고 나름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도 많다고 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복, 믿는 이유가 이와 같은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북한에는 수많은 지하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은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과 우리의 받은 복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만약 하나님을 빼면 자유롭게 잘 먹고 잘 사는냐, 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똑같은 복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천국 복음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부자는 죽을 때까지 잘 살 다 죽었지만 거지는 평생을 거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거지는 하나님을 믿었음으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 교인들 속에서 신비주의를 비롯한 성경적 복에 대하여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복은 진짜 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에게로부터 받는 진정한 복은 영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38. 선민의 국호(國號)
(롬 10:19-21; 사 55:5)
(롬 10:19-21)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서) 로마서 10:19에서 이스라엘이 시기하고 노여워하는 한 민족(나라)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백성 아닌 자’요, ‘미련한 백성’입니다. 이사야 55:6의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와 “가까이 계실 때”란 5절의 “한 이방민족이 너에게 달려올 때”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백성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에 대한 설명이 이사야서에 몇 가지로 나옵니다. 곧
① (사 55:5) 이사야 때에 이스라엘이 몰랐던 나라요, 또한 이스라엘을 모르는 나라입니다.
② 동방 먼 곳에 있는 나라입니다(사 24:15; 41:2; 46:11).
③ 북방 해 돋는 곳에 있는 나라입니다(사 41:25; 렘 16:15).
설교를 통해 우리나라 국호에 대하여 더 깊이 알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코리아’는 영어 보다는 독일어에서 유래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프랑스어로는 코레, 러시아어는 까레야, 아랍어로는 코리라고 부르지만 모두 고려라는 뜻입니다. 코리아의 영어 알파벳이 K가 원래 C였지만 일본에 의해서 변경 되었다는 것은 사실 무근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조선중앙의 TV에서는 공식적으로 일본에 의해서 C에서 K로 바뀌었다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아마도 북한 주민들은 이에 대하여 확인을 할 수 없으니 반일 감정을 고조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나라들이 고려라는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고려시대에 우리나라는 주변 나라들과의 무역을 활발히 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송나라와, 거란, 여진족 더 나아가 아랍 국가들에 이르기 까지 무역을 확대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고려의 수도는 개경, 옛날의 송악(지금의 개성)으로 인구가 수심만이 되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수많은 나라들의 상인들이 송악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비 올 때 처마 밑으로 다녀도 비를 맞지 않다는 할 정도로 상가들이 즐비하였다고 합니다. 매 나라 상인들이 머무는 하숙집들이 잘 구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아랍국가의 상인들까지도 실크로드로 고려를 방문하였고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고 합니다. 기록에는 이슬람권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기독교인들도 왔을 것이라 개인적으로 추정합니다. 때문에 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앞으로 사용하시려고 이미 선택하셨다는 것을 더 확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나라의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외부와의 접촉을 금지하는 반면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사회의 이념을 삼아 중앙 집권적인 양반 관료 체제를 이루었습니다. 때문에 세계는 조선을 알 수 없었고 고려라는 이름으로 남았다고 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북한은 역사적으로 이성계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조선시대를 사대주의 봉건체제로 보고 있지만 이성계가 지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았다는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 조선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39. 여호와닛시
(출애급기 17:14-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려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묵상하면서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깃발 되신 하나님이시며 둘째는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게 하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말렉은 잘 준비 된 군사들인 반면 이스라엘은 쉽게 말해 광야 방랑자에 불과한 무리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우수한 군사나 병장기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승리의 깃발이 되시어 모든 전쟁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팔이 내려 갈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의 공격에 밀리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팔이 피로하여 내려오면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들어 올려주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기발이 되신 전쟁은 반드기 이기게 됩니다. 모세는 이 엄청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기념하게 합니다. 후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를 알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탈출 할 때부터 항상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불평과 불만 그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하나님께서 가장 증오하시는 우상까지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매일과 같이 기적의 삶을 살아온 광야 1세대들도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육체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였던 것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종으로 살 때 당시 애굽의 더러운 문화를 간접적으로 보고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자유의 몸이 되니 애굽 사람들이 하던 행동들을 그대로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죄를 짓고 불평하여 거룩한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전부 죽고 맙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행한 일들이 어떤 역사인지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모든 영적 전쟁에서 하나님이 친히 깃발이 되시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또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깃발 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 하는지 아니면 상황과 형편에 따라 깃발을 슬그머니 내려놓지는 않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깃발을 들고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