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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조, 광해군, 인조등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바 있는 청백리의 표상인 ‘오리대감’이라 불리는 이원익(李元翼,1548~1634년)은 탁월한 지도력과 행정력 그리고 고매한 인품으로 인해 한 시대의 사표(師表)로 우러름을 받은 분이다.
그가 어떤 분이었던가는 다음의 일화가 전해진다.
1. 젊은 시절
사대부 명문가에서 딸을 결혼시키려 신랑감을 찾고 있던중 중간의 소개를 받고 어떤 젊은 선비가 그 댁에 찾아왔다.
그 집 주인 대감은 가난이 몸에 베 찌들린 형상과 초라한 모습의 그 젊은 선비가 마음에 안들어 물리치기로 결심하고 식사
때가 됐으니 밥이나 대접해 보낼 양으로 진수성찬을 차려 식사대접을 하는데 그 산해진미 여러가지 요리가
가득한 밥상을 본 이 젊은 선비는 눈이 휘둥그레 져서 감히 먹을 생각은 않하고 자기 배랑에다 그 음식 들을 주섬주섬
집어넣기 시작했다. 이를 본 대감마님 이상히 여겨 왜 자네는 음식을 먹지 않고 배낭에 집어 넣느냐고 물으니 젊은선비 대답 하기를 집에 계신 어머니도 못드셔 보신이 귀한 음식들을 어머니께 맛보여 드리고 싶어 그런다고 대답하니 대감마님 이 젊은 선비의 효심에 감복 받아 딸의 배필로 맞아 사위를 삼았다.
2. 관직생활 시절
그의 집이 너무 낡아 새로 짓기로 하고서 목재를 마련했다. 집짓는 공사를 막 시작하려던 참에
호조판서로 임명되었다는 전갈이 왔다. 그는 집 짓는 공사를 중지했다. 호조는 나라의 재정을 맡은 최고의 관청이고, 판서는 그 우두머리가 되는 벼슬이다. 지금으로 치면 재무장관이다. 나라의 재정을 맡은 자가 새로 집을 지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첫째는 재물에 대한 의혹이 있을 수 있고, 둘째는 이권을 따기 위해 달라붙는 자가 있게 되고,
셋째는 건축재이며 노임에 대해 전국의 표준이 될 수 있으니 자칫하면 물가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호조판서 댁의 일이니, 많은 값을 주면 그게 표준이 돼서 일반국민에게 해를 입히게 되고, 적게 주면 또한 장사치나 노동자에게 원망을 사게 될 일이었다.
그는 별수 없이 금방 넘어질듯 한 세 칸짜리 오두막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호조판서를 지내고 나니 또 다른 높은 벼슬자리에 앉곤 해서, 그는 결국 집을 지을 수가 없어 목재를 썩히고 말았다.
이원익은 명종 2년인 1547년에 함천부수(咸川副守)억재(億載)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주 이씨로써 태종의 왕자 익녕군(益寧君)의 손자였다. 아버지 때까지는 국척(國戚 : 임금의 친족)으로 함천부수라는 칭호도 받곤 했으나, 그의 대에 이르러서는 자유로이 벼슬길에도 나갈 수 있었다.
그는 17세 때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공부를 했고, 21세 때(선조2년)에는 과거에 올라 벼슬길로 나아갔다. 그는 왕실의 먼 친척으로, 수완을 부리면 얼마든지 출세할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타고난 천성이 꼿꼿하고 아무나 사귀지 않아 외톨이가 되기 일쑤였다.
그를 알아보고 적극 이끌어준 사람은 뜻밖에도 멀리 영남에서 올라와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정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서애 유성룡과, 황해도사로 있을 때 상관인 감사로 부임해 그의 행정력과 곧은 인품을 알게 된 율곡이었다.
87세라는 기나긴 그의 생애는 그야말로 풍운의 역사였다. 그의 나이 45세로 이조판서가 되었을 때(1592년)임진왜란이 일어났고, 80세 때(1627년)는 정묘호란이 일어나 다시 한 번 노구를 이끌고 나라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계에서는 당쟁이 극심할 때였고, 광해군의 폭정에다 인조반정도 겪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이조판서이자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했다. 도체찰사라는 것은 임금을 대신해서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군사를 징모하고 양곡을 모으며 민심을 수습하는 임무였으며, 때로는 군사 작전에 직접 참여하여 도움을 주기도 했다.
임진왜란 중에 크게 활약한 그는 공신도 되고 정승도 되어 국가에 기여함은 물론 개인적인 영에도 얻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선조가 돌아간 후 새로이 임금이 된 광해군은 사나운 정치를 했고, 그때마다 이원익은 목숨을 걸고 충간했다. 광해군은 원로대신인 그를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홍천으로 귀양을 보냈다가 후에 여주로 옮겼다.
그가 여주에서 귀양살이하는 동안에는 자리를 짜서 팔아 겨우 입에 풀칠을 햇다. 그곳 호장(戶長 : 고을 구실아치, 즉 향리의 으뜸으로 중인이 맡았다)의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살았다.
호장의 아내가 죽자 그가 직접 나서서 여러 사람을 지휘해 장례를 치러준 일은 두고두고 일화로 남아있다. 이를 전해들은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이 “영의정이 호장 아내의 장례를 치러줬으니 호장이 호사를 했구먼” 했다고 한다.
그가 귀양살이하는 중에 어느 날 서울에서 원두표(元斗杓, 1593~1664년 : 훗날 좌의정에 올랐다)가 찾아왔다. 당시 원두표는 젊은 선비로 전도유망한 벼슬아치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원두표와 만나기를 사절했다. 귀양살이하는 몸으로는 조정의 관원과 접촉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두표는 한사코 면회를 청했다. 사실 그는 극비밀리에 광해군을 몰아내는 역모를 꾸미고 있어, 정계 원로인 이원익의 뜻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밤에 함께 자기로 했는데 자리에 들기 전에 “소생이 잠버릇이 조금 나쁘오니 양해해 주옵소서”라며 인사부터 닦는 것이었다. 과연 자리에 눕자마자, “지금 임금은 천성이 사납고 어두워 정치를 폭정으로만 몰아가고 있으니, 민심이 모두 능양군(綾陽君 : 훗날의 인조)에게로 돌아가고 있다”고 잠꼬대를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이튼 날 새벽에 이원익이 일어나 밖에 나갔다 돌아와 보니 늦게 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난 원두표가 요강과 담배통(요강은 천하고 담배통은 귀한 것으로 임금을 바꿔야 한다는 암시)의 자리를 바꿔 놓았다. 원두표가 이원익을 보고 “간밤에는 잠꼬대가 심했던 줄로 아옵니다”
하고 짐 짖 눈치를 살피자, 이원익의 대답은 이러했다. “다른 곳에 가서는 그런 말 하지 말게.” 이에 원두표는 용기가 났다. 허락이 내린 것이다.
그는 용기백배하여 서울로 올라와 이미 은밀히 뜻을 모은 동지들과 힘을 합해 반정을 일으켰다. 반정이 성공 하자 이원익은 귀양에서 풀려났음은 물론이고, 영의정으로 추대 되었다. 실은 이미 세 차례나 영의정을 역임(선조 32년과 광해군 원년, 3년)했지만 이번의 영의정 취임은 책임이 막중했다.
새로이 임금이 된 인조는 산더미같이 쌓인 구악(舊惡)의 처리를 이원익이 취임한 후로 미루고 있었다. 이원익은 여주 양덕리 에서 반정 소식과 영의정 임명 전갈을 받고서 가마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지나오는 연도마다 백성들이 몰려나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의 모습을 보고는 소리 높여 환호를 지르는 것이었다. 백성의 기대가 한 몸에 쏟아져 잇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서울에 당도해 입궐하자, 고대하고 있던 인조는 반정 공신들을 제쳐놓고 영의정과 의논해 모든 정사를 처리해나갔다. 광해군 시절에 정권을 쥐고서 갖은 횡포를 다 부린 권신들의 살고 죽는 일이 모두 이원익의 결정에 달려 있게 되었다.
하루는 퇴궐해서 집에 돌아오니 부인이 물건 하나를 내놓으며 “지난날 높은 벼슬을 하던 아무개의 소실이 이걸 가지고 와 바치며 목숨을 구해 달라 애걸하고 돌아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원익이 보니 아주 고급으로 만든 가죽신에다 값진 보배구슬이 송송 박혀 있었다.(珠履 ), 요즘으로 치면 다이아몬드가 박힌 고급신이다. 이를 본 이원익은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신하로 하여금 이런 물건을 갖게 했으니 그 임금이 어찌 망하지 않겠으며, 아내로 하여금 이런 물건을 쓰도록 했으니 그 남편이 어찌 죽지 않겠는가.”
결국 그 권신은 용서받지 못하고 처형되었다. 그는 사사로운 정을 절대로 공사에 개입시키지 않았다. 공명정대하게 처리했기에 원망을 사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원익은 속일수 있어도 차마 속이지 못하고, 유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이지 못한다’고 했다.
두 분 다 지혜와 심성이 맑았던 것이다.
이원익은 40여 년이나 벼슬살이를 하며 굵고 높은 자리에도 오랫동안 있었지만 옳지 않은 재물은 털끝 한 오라기도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늘 가난했고 세 칸짜리 초가에 살았다. 늙고 병든 후에는 약은 말할 것도 없고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다고 한다. 인조가 이를 알고서 어느 때 비단 이불을 보냈는데 그는 결단코 받지 않아, 할 수 없이 무명베로 다시 만들어 보내야 했다.
그는 거듭되는 전란으로 인해 민생이 피폐되었음을 절감하고 국가의 조세 제도를 개혁해서 경제를 다시 일으켜야 된다고 주장하고는, 잡다한 세금을 곡식 한 가지로 통일시키는 대동법시행을 앞장서서 추진하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오리 대감’이라 부르기를 좋아했는데, 그를 친근하게 생각하는 애칭이었다. 오늘날도 ‘오리 정승’이라 일컽는다. 오리(梧里)는 그의 호다. 군호는 완평부원군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73년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갈 때 일이다. 큰 내를 건너며 중인과 역관들이 맨발로 담여를 멨다. 역관들이 중국말로 투덜댔다. "지위가 낮은 이런 녀석까지 우리가 메야 하다니 죽겠구먼." 연경에 도착해서 중국 관원과 문답할 때, 오리가 역관 없이 유창한 중국어로 대화했다. 역관들이 대경실색했다.
그의 집은 어의동(於義洞)과 대동(臺洞) 사이에 있었다. 채벌이 금지된 소나무를 베던 소년이 산지기에게 붙들렸다. 근처 허름한 집 마당에 늙은이가 해진 옷을 입고 앉아 자리를 짜고 있었다. "여보, 영감! 내일 끌고 갈 테니 이 아이를 잘 붙들어 두오. 놓쳤다간 되우 경을 칠 줄 아오." 산지기가 가고 아이가 울었다. "왜 안가고 거기 있니?" "제가 달아나면 할아버지가 혼나잖아요?" "나는 일없다. 어서 가거라." 이튿날 산지기가 와서 아이를 내놓으라고 야료를 부리다가, 의정부 하인에게 혼이 나서 돌아갔다. 당시 그는 영의정이었다.
그는 수십년을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험난한 국사를 원만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해 모든 이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막상 그는 턱이 뾰족하고 콧날이 불그레하며, 주근깨가 많은 볼품없는 외모였다. 다산은 그의 화상(畵像)에다 이런 찬(贊)을 남겼다. "사직의 안위가 공에게 달렸고, 백성은 공 때문에 살지고 수척해졌다. 외적이 공을 인해 진퇴가 결정되고, 기강이 공을 통해 무너지고 정돈되었다."
84세 때 인조가 승지를 보내 위문했다. 그 거처에 대해 묻자, "띠집이 낡아 비바람도 못 가릴 지경입니다"라는 대답이었다. "재상 40년에 몇 칸 모옥뿐이란 말인가?" 모든 이가 그 청렴함을 보고 느끼라는 뜻으로 나라에서 직접 집을 지어 주었다. 이 집이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의 관감당(觀感堂)이다.
영남 사람들이 이원익과 유성룡을 비교해서 말했다. "오리는 속일 수 있지만 차마 못 속이고, 서애는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 그는 더도 덜도 말고 꼭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좌우명은 '뜻과 행동은 나보다 나은 사람과 견주고, 분수와 복은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한다'였다. 그의 수많은 일화에는 모든 이의 한결같은 존경이 담겨 있다. 오늘에는 어째서 이런 큰 어른을 찾기가 힘든가.
3. 오리 이원익에 대한 다른 자료 (퍼온글)
그의 청렴함이 드러난 일화는 '조선실록'에도 기록돼 있다.
인조 9년(1623년) 정월 10일, 임금이 승지 강홍중을 보내어 이원익을 문안한 뒤 "그가 사는 집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강홍중은 "두 칸 초가가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데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무너지고 허술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재상이 된 지 40년인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청렴하고 결백하며 가난에 만족하는 것은 고금에 없는 것이다. 내가 평생에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은 그 공로와 덕행뿐이 아니다. 이공(李公)의 청렴하고 간결함은 모든 관료가 스승삼아 본받을 바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5칸짜리 집 한 채를 이원익에게 하사했다. 하지만 이원익은 "신을 위해 집을 지으니,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는 한 가지"라며 수차례에 걸쳐 받기를 사양했다고 '조선실록'은 전하고 있다.
관감당(觀感堂
관감당은 이원익이 은퇴한 후 인조가 하사했으나 이원익이 네 차례에 걸쳐 받기를 사양했다는 5칸짜리 집이다. 계속된 사양에 인조가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신민이 보고 느끼도록 하려는 것이니, 경은 굳이 사양하지 말고 거기에 살라"라고 하자 이원익이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어서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종택
문 오른쪽에는 이승규, 이종민, 이장호 등 이 교수의 3대 직계손의 문패가 달린 종택이 버티고 있다. 이 집은 1960년대 말 이 교수가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까지 이원익의 후손이 대대로 거주하던 곳이다. ㄱ자 형의 안채와 ㅁ자 형의 행랑채가 배치되고, 그 옆에는 ―자형 사랑채가 달린 형태다. 종택은 20세기 초 경기 지역 상류 주택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1917년에 완성된 안채는 가구의 짜임이나 기둥의 이음 등이 매우 정교하다.
오리 이원익이 손자 수약(守約)에게 쓴글
너희 아버지는 전후 고을을 맡을때마다 청렴과 간명으로 백성을 보호한다고 알려졌었다. 너는 네 아버지의 아들이니 마땅히 마음에 새겨 집안의 명성을 떨어트리지 말라.
1. 세상을 다스리는데에는 백성을 사랑하는것보다 더한것은 없다. 몸을 닦는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것보다 더한것이 없다.
2. 천하를 실정을 안후에 천하를 다스릴수있다.
3. 일에 다다라서는 포악함과 성냄을 경계하고 서서히 일의 실정을 파악하라
4. 사람을 다스림에 있어서 상벌이 있을 수가 없으니, 착한자에게는 상을 주라, 상을 주었으니 오랫동안 잊지말아야 한다. 악한자는 벌을 주어야 한다. 벌을 주었으니 시일이 지나면 (나쁜일에 대해서) 꼭 생각치 말라.
5. 한 이익을 일으키는것이 한폐단을 제거하는것만 못하고, 한일을 내는것이 한일을 더는것만 못하다.
6. 읍중에 일이 있거든 노련한 관리와 연로한 인민에게 널리 물어서 인정에 합하기를 힘써야 하고, 남에게 거만을 부리고 스스로 민심을 떠니게 해서는 안된다.
7. 백성은 마땅히 어루만져 돌봐야 하며, 관속을 대하는것도 각박하게 해서는 안된다.
8. 모든일은 때에 따라 마음을 다해야 한다.
관감당의 뜻은 오리 이원익이 살아온 일생이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된다 하여 백성에게 보고 느껴야할 것이라는 뜻으로 받은 사액이다.
탄금암
관감당 앞에는 이원익 생전에도 있었던 약 400년 수령의 측백나무와 탄금암(彈琴岩)이라는 한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측백나무 밑자락에 놓인 평평한 생김새의 탄금암은 이원익이 살아 있을 때 그곳에서 거문고를 타던 곳이라 하여 이름을 탄금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원익 선생 기념관
충렬박물관에서 약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기념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정장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
조선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오리 이원익은 태종 5대손이다. 왕족은 4대까지 과거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던 당시 법규로 인해 가문에서 처음으로 과거시험에 응시, 합격해 벼슬길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선조 때 청백리에 뽑혔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성품이 원만해 정적에게도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 이원익의 생애
명종2년 (1547년) 태어나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선조 2년(1569년) 22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제수 받았다. 이후 군기 시판관,사간,교리,호조참의,안주목사,예조판서,우의정을 지냈으며, 선조,광해군,인조에 걸쳐 6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다.
인조 12년(1634년) 향년 88세로 사망하였으며, 사망 후에는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고 문충(文忠) 이란 시호를 받았다.
선조 6년(1573년) 성절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가서 이름을 떨쳤으며 선조 20년 안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약곡 1만 여석으로 기민을 구호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도 순찰사,제도도체찰사가 되어 왜군과 맞서 싸워 많은 공을 세웠다.
그공으로 선조 37년 호성공신으로 완평부원군에 봉해졌다.
ⓒ2006 우관동
1608년 대동법을 시행토록하여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줄였고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시켜 국가경제를 윤택하게 하였으며 군병 방수제도를 개혁하여 농민들의 신역(身役)을 크게 경감했다.
선조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광해군때 대비폐위론을 반대하다가 홍천으로 유배되었으며 1623년 인조반정으로 사면되면서 재차 영의정에 올라 민심수습에 큰공을 세웠다.
ⓒ2006 우관동
ⓒ2006 우관동
이원익이 세상을 떠난 후 효종 9년(1658년),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현재의 경기 광명시 소하2동에 그를 배향하는 삼현사를 세웠다. 이후 삼현사는 충현사(忠賢祠)로 불리다가 숙종 2년(1676년)에 임금이 직접 충현서원(忠賢書院)이라고 이름지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2006 우관동
오리 이원익은 죽음을 앞두고 남긴 유서에서도 후손에게 검소함에 대한 당부를 남기고 돌아가셨다.
ⓒ2006 우관동
첫댓글 회장님!
이렇게 재미있는 얘기 또 기대하겠습니다.
제가 때를 쓰고 있나요?
인조반정이 백성의 응원을 받지못했을때, 오리 이원익 대감을 허수아비 영의정에 앉히고, 오리대감은 맘이 편치않았을것입니다.. ㅉ 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