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30.주일낮예배 설교
*본문; 시 50:14~15
*제목: 맥추감사절(1) 감사가 나오면 이미 이긴 것입니다!
프롤로그. 자기주도성
“자기주도학습”이란 말 들어보셨습니까?
이는 억지로 하는 공부보다 자기가 스스로 하는 공부가 더 효율적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주도성”이 없는 인생은 참 못나 보입니다. 의욕도 없어 보이고, 생각도 없어 보입니다. 늘 남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하는 바보 같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자기 주도성을 가진 사람,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아가는 사람을 멋있는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믿음에서는 이러한 자기 주도성이 매우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죄가 인류 안에 들어오게 된 계기를 만든 하와’입니다. 그녀는 매우 똑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의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선악과를 먹지 못한다는 것은 불합리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네가 그것 먹고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피조물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와는 이러한 ‘자기 주도성’으로 죄를 범합니다. ‘나 스스로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를 추방되고 죽어가는 비극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자기 주도성”은 죄입니다. 가장 훌륭한 신앙은 바로 “하나님의 주도성”을 따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매우 바보스러워 보여도, 천국을 소유하고 하늘 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주님에게 나의 인생의 주도성을 내어 드리는 것!’, ‘주님이 하라고 하는 대로 하는 것!’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다윗도 그랬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 주도성”의 끝판 왕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실패할 것처럼, 세상이 볼 때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지만 위대한 하늘 복을 누린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똑똑한 자기 주도성을 가지고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신앙은 약간은 바보스러워야 합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 신앙이고, 그것이 하늘 복은 누리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1. 믿음과 자기 주도성
매우 자기 주도성과는 상관없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멘입니다. 이를 믿고 따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2.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천성적인 태평의 차이점
그런데 여기서 이 평안과 혼돈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천성적으로 “천하태평”인 분들입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하며 늘 평안가운데 있는 분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사람과 천성적으로 태평인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이야기입니다.
“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환란 가운데에서 도우실 하나님을 기억하고, 도우실 하나님의 은혜를 미리 감사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래서 환란이 오히려 기대와 소망을 낳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믿음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 가운데에서 “감사가 나오면 이미 이긴 것입니다.”
3. 감사하는 믿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습니까?
환란 가운데 감사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결단코 쉽지는 않습니다. 아니 평범한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럴수록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반감이 들기도 합니다. “감사가 나와야 감사를 하지...” “감사할 상황이 되야 감사를 하지...”
사실 환란 가운데 감사는 한 단계를 먼저 거쳐야 합니다. “좀 울어야 합니다.”
‘시 57:1’을 읽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 57:1)
다윗이 이 고백을 하던 시기는 사울왕에 쫓겨 동굴에 숨었는데, 그 동굴 앞에 사울왕의 군대가 들이닥친 것입니다. 바로 죽음의 문턱 앞에 서서 그는 이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다 자신의 신세가 너무 서러워 펑펑 웁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울만큼 울도록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나 났더니 다윗이 새로운 고백을 하기 시작합니다. ‘시 57:7~11’입니다.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시 57:7~11)
울만큼 울어야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좀 울도록 내버려두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고통 가운에 있을 때, “좀 울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이 그 눈물로 우리의 영혼과 생각의 어리석음을 씻으시고,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 새로운 고백을 하자마자 주는 역사하셔서, 갑자기 사울이 변을 보고 싶게 하셔서, 군대와 함께 그 굴에 들어오지 않고 혼자서 들어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는 과정을 믿음에서는 기도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환란 가운데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은 ‘바보스러운 순종’과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이 그의 생각도 환경도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뀌어진 생각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나올 때, 그는 이미 이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삶을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과 감사의 백성되시길 기도합니다.
4. 감사하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이용규 선교사의 <내려놓음>이란 책이 한참 인기를 끌었었습니다. 그 안에 보면 몽골소녀인 ‘벌러르’ 자매가 나옵니다.
하루는 이 자매가 소를 돌보다 그만 그 소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정신없이 소를 찾아 헤메던 벌러르 자매는 마침 주일이라 멀리서 들리는 예배타종소리를 듣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찾던 소를 포기하고 예배드리러 갑니다.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너무나 감사했기에, 1년치 생활비 정도를 내어야 살 수 있는 소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나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전 내내 벌판을 헤메도 찾지 못하던 소가 예배 마치고 나니, 예배당 앞에서 풀을 뜯고 있던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 아멘! 아멘! 아멘입니다!
그렇지 못한 상황에도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그 감사대로 당신을 도우실 것입니다.
김요한 선교사님은 터키에서 사역할 때 참으로 힘든 일들을 많이 겪으셨습니다.
전도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모질고 혹독한 고문을 당해 그만 기억상실증이 걸릴 지경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그 마음에 불평의 마음이 들더랍니다. ‘하나님 내가 주의 복음을 위해서 여기까지 와서 이런 죽을 고생을 하는데 왜 도우시지 않습니까?’
그 후에 영국으로 건너간 선교사님은 영국에 있는 터키인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덩치큰 터키교인들이 조그마한 동양인 목사를 너무 사랑하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고국에서 예수를 믿다가 갖은 고초와 고난을 당하고 이제 영국에 이민 온 사람들인데, 동양인목사가 그들의 아픔을 너무도 잘 알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 터키인 집사님이 자기의 사정을 상담을 하러 와서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울면이 이렇게 이야기하더랍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다 아시지요?” “네, 제가 알지요. 제가 알지요” 하면서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고 나니 그 집사님의 고통이 해결되고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김요한 선교사님은 터키에서의 그 고통을 생각하며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시 고백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도우십니다. 내 상황과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것으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울만큼 우셨으면, 이제 감사하십시오. 내가 감사하면 이미 이긴 것이니까요.
같이 고백하십시다. “감사가 나오면 이미 이긴 것입니다.”
5. 다음 주는 “맥추감사절”입니다.
맥추감사절은 지난 6개월 동안 놓쳤던 감사를 하는 날입니다. (놓쳤던 감사기도제목표 쓰기)
다음 주일의 그 감사가 여러분들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고 감사하시면 이미 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우리는 "자기 주도성"에 취해서, 내 마음 내 계획대로 사는 것이 멋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멋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도성"에 나를 맡기는 것은 "하늘 복과 천국의 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조금은 못나 보이고 바보스러워 보여도, 하나님의 주도성을 따른 것,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 바로 복의 비결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마음 속에 기대와 소망이 생기고, 입술에는 감사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미 이긴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