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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관심
인류 문명사에서 기원전 500년 전후는 아주 각별하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1883~1969)는 이 시기를 가리켜 ‘축의 시대(Achsenzeit, 기원전 8세기~기원전 3세기)’라고 불렀다. 왜 그럴까. 인간이 가지는 가장 근원적인 물음과 가장 본질적인 지향에 대한 답을 내놓은 인물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인도의 석가모니 붓다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그리고 중국의 공자 등이다.
2500년 전 인도에서 출생한 석가모니 붓다는 모든 인간이 가지는 본질적 문제인 생로병사에 대한 근원적 솔루션을 내놓았다. 그 솔류션이 붓다의 설법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사진은 붓다가 열반한 인도 쿠시나가르의 열반당에 있는 불상. 백성호 기자
이들이 인간과 세상, 그리고 우주를 향해 내놓은 답들은 하나씩의 별이 되었다. 이후 2500년간 인류에는 밤마다 반짝이는 삶의 나침반으로 작동하고 있다. 끝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영원과 무한을 얻는 방법을 붓다는 설했다. 서로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는 동물의 왕국처럼 살아가던 인간 사회에 예(禮)를 통해 질서와 조화를 일러준 이는 공자였다. 끊임없는 문답법으로 인간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은 소크라테스였다.
이들이 내놓은 각각의 가르침이 인류사에는 하나의 거대한 기둥으로 서 있다. “축의 시대.”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대단하다. 무려 2500년 전에 어떻게 이런 물음을 던지고, 또 이런 답을 내놓는 게 가능했을까.
그렇다. 결국 인간은 인간이다. 2500년 전에도 인간은 인간이고, 1000년 전에도 인간은 인간이다. 그리고 지금도 인간은 인간이다. 2500년 전에 던진 물음과 지금 내놓는 답, 2500년에 내놓은 답과 지금 던지는 물음. 이들 사이에 아무런 담벼락이 없다. 서로 통한다. 그래서 이들이 세운 ‘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인류사의 큰 기둥으로 작동한다.
2021년부터 3년간 ‘백성호의 예수뎐’ 시즌1과 시즌2를 연재했다. 올해는 ‘축의 시대’의 한 주인공인 석가모니(샤카무니) 붓다를 만나고자 한다. 매주 수요일 중앙일보 프리미엄 콘텐트인 더중앙플러스에서 ‘백성호의 붓다뎐’ 연재를 시작한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인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한 사람. 그가 바로 붓다다. 길이 없는 곳에서 스스로 길을 내면서 깨달음을 이룬 이, 그리고 그 길을 아주 소상하게 후대에 일러준 이. 그가 바로 붓다다.
‘백성호의 붓다뎐’에서는 2500년 전에 인도에서 태어난 석가모니 붓다의 생애를 다룬다. 그가 얻은 깨달음, 그로 인해 달라진 우리의 삶. 인도 북부에 퍼져 있는 붓다의 발자취를 직접 좇으며 붓다의 삶, 붓다의 깨달음, 붓다의 메시지를 풀어본다. 아울러 인도 불교가 동북아로 건너와 뿌리 내린 동아시아 선(禪)불교의 여러 풍경도 함께 담아보려고 한다. 이유가 있다. 인도의 깨달음과 동북아의 깨달음이 둘이 아닌 까닭이다.
#목숨을 걸어야 갈 수 있던 땅, 인도
인도는 머나먼 땅이었다. 열 사람이 가면 여덟이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둘만 살아서 돌아왔다. 동아시아에서 실크로드를 거쳐 인도로 갔던 승려들 이야기다. 산중에는 도적 떼가 우글거렸다.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에서 쓰러지거나,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에서 실족할 때는 시신조차 건지지 못했다. 인도로 가는 길은 그토록 험했다.
육로만 그런 게 아니었다. 뱃길을 택한 이들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허름한 목선과 조잡한 항해술로 집채만 한 파도에 잡아먹히지 않아야만 인도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중국의 현장 법사는 땅에서, 신라의 승려 혜초는 바다에서 목숨을 걸었다. 붓다의 법(佛法). 그게 대체 무엇이었을까. 왜 동아시아의 수행자들은 목숨을 걸고 인도로 갔을까.
코로나 기간 3년 동안 인도의 모디 총리는 인도 전역의 도로 중 상당수를 아스팔트로 포장했고, 동시에 코로나 침체 시기에 일자리도 창출했다. 백성호 기자
지난겨울 끝자락에 인도행 비행기를 탔다. 봄으로 들어서면 인도는 뜨거워진다. 기온이 40~50도를 웃돈다. 숨을 들이마시면 ‘불덩어리’가 코와 입으로 훅훅 밀려온다. 냉방시설도 기대하기 어렵다. 여행에는 최악의 조건이다. 그래서 순례객이나 여행객들은 겨울이 끝나기 전에 인도로 떠난다. 나도 그랬다. 봄이 오기 전, 겨울에 나는 서둘러 인도로 갔다.
인천공항에서 델리까지는 아홉 시간이 걸린다. 인도 땅이 가까워지면 비행기 창밖으로 히말라야 설산이 보인다. 구름이 바다처럼 깔려 있다. 그 위로 히말라야 고봉(高峰)이 섬처럼 솟아올라 있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비행기 날개와 거의 수평으로 안나푸르나의 정상이 장엄하게 서 있었다. 2500년 전, 저 히말라야 산맥의 줄기 아래 남녘땅에서 붓다가 태어났다. 붓다는 거기서 성장했다.‘붓다의 땅, 붓다의 나라’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델리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나는 공항 청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인도는 달라지고 있었다. 15년 전 인도를 처음 찾았을 때만 해도 ‘이 나라는 100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도시 기차역의 화장실도 마음놓고 사용할 수가 없었다. 고속도로에는 휴게소도 없었다. 화장실 대신 들판에서 볼일을 봐야 할 때가 더 많았다. 버스가 도로에서 멈추면 남성은 버스 왼쪽, 여성은 버스 오른쪽으로 가서 ‘자연 화장실’을 써야 했다. 그만큼 낙후된 나라였다.
다시 5년 전에 인도를 찾았을 때는 공사장이 눈에 띄었다. 델리에서 머지않은 곳에 신도시가 여럿 건설되고 있었다. 높다란 고층 빌딩이 올라가는 공사장이 여기저기 보였다. “아, 인도가 달라지려나 보다.” 그러나 인도 북부로 가면 달랐다. 여전히 초가에 흙으로 지은 움막,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 지독한 가난의 풍경은 여전했다.
#최하층 계급이 총리가 된 나라
이번 겨울에 찾은 인도는 아주 달랐다. 빡빡한 일정으로 달려도 14박15일이 걸리던 불교 8대 성지 순례 코스가 10박11일 여정으로 확 줄어 있었다. 이유가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인도에는 일자리가 급격하게 감소했다.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코로나 사태 3년 동안 인도 전역에 포장도로를 깔았다. 비포장도로였을 때는 6시간 걸리던 도시 간 이동시간이 2시간으로 줄어든 지역도 있었다.
인도인 가이드 너읜은 “지금 모디 총리에 대한 지지율이 80%에 달한다. 2024년 총선이 있는데, 그가 다시 인도의 총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5년 전에도 그랬다. 그때도 모디 총리에 대한 지지율은 80%에 육박했다. 당시에는 모디 총리가 불시에 화폐개혁까지 단행했다. 최고액권을 중심으로, 통용되는 화폐의 86%를 종잇장으로 만드는 ‘혁명’에 가까운 조치였다. 물론 탈세와 지하경제를 잡기 위한 대수술이었다. 모디 총리는 당시 TV 생방송에 나와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믿어 달라”고 호소했다.
최하층 계급 출신인 모디 총리는 탁월한 리더십과 도덕성을 내세워 인도를 개혁하고 있다. 현재 모디 총리에 대한 인도 국민의 지지율은 80%에 달한다. 연합뉴스
모디 총리는 최하층 계급 출신이다. 인도에는 출신 계급을 나누는 카스트 제도가 있다. 법적으로는 없어졌다. 그러나 카스트를 따지는 사회적 관습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인도에서는 상대방의 출신 계급을 굳이 묻지 않는다. 대신 이름에 붙은 성(姓)씨만 봐도 카스트 계급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같은 계급끼리 결혼하는 사회적 불문율은 지금도 강력하게 존재한다. 그래서 인도에선 요즘도 젊은이들 상당수가 중매결혼을 한다.
카스트 제도는 수천 년에 걸쳐 내려오는 인도의 관습이다. 2500년 전에도 그랬다. 고대 인도에도 카스트 제도가 있었다. 지금도 인도 발전의 걸림돌로 지적되곤 하는 카스트 제도가 생겨난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런 배경 위에서 아기 붓다의 탄생도 이루어졌다.
인도 땅에는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이 살고 있었다. 몸집이 작고, 얼굴도 까만 사람들이다. 지금도 인도에서 드라비다족을 만나면 한눈에 구별된다. 그들의 외양은 전형적인 아시아인의 얼굴이다. 그런데 북쪽에서 이민족이 쳐들어왔다. 이른바 ‘아리안’족이다.
기원전 2100년께 우랄산맥 인근에 초원의 무리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몸집이 컸고 싸움에도 능했다. 쇠를 가공하는 능력이 있었고, 발달한 무기를 갖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금속가공술을 바탕으로 튼튼한 바퀴를 만들었고, 가공할 위력의 이륜 전차도 개발했다.
이들은 기원전 1800~2000년 무렵에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란고원을 침략해 이란인의 선조가 됐다. 이들의 외양은 달랐다. 키도 크고 몸집도 컸다. 햇볕이 부족한 시베리아 쪽에서 내려온 탓에 피부는 백색이었다. 이들이 바로 아리안족이다. ‘이란’이란 나라 이름도 ‘아리안’이라는 명칭에서 왔다. 나중에 유럽으로도 건너간 아리안족은 유럽인의 선조가 됐다. 그래서 아리안을 ‘인도 이란계 유러피언’이라고도 부른다.
인도의 모디 총리는 불교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인도의 교과서에 불교 내용을 게재하게 하고, 학생들이 인도의 불교 성지를 견학할 수 있도록 정책을 펴고 있다. 뉴시스
이란 고원에 살던 아리안은 크게 두 부류였다. 쓰는 언어가 달랐다. 하나는 아베스타어를 썼고, 또 하나는 산스크리트어를 썼다. 물론 두 언어의 뿌리는 하나다. 아베스타어와 산스크리트어는 상당히 비슷했다. 그러다 산스크리트어를 쓰는 아리안들이 기원전 1500년께에 인도 북부로 쳐들어왔다. 힌두쿠시 산맥을 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힌두쿠시는 중앙아시아 남쪽에 있는 산맥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파키스탄까지 1200㎞에 달하는 산맥이다. 힌두쿠시 산맥에는 7000m가 넘는 산이 많다. 가장 높은 산은 7708m의 티리치미르 산이다. 히말라야 산맥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이처럼 험준한 설산을 넘어 아리안족이 인도 땅으로 쳐들어왔다.
#아리안족이 만든 두 개의 종교
아리안족은 두 개의 고대 종교를 만들었다. 하나는 조로아스터교이고, 또 하나는 브라만교다. 아베스타어를 썼던 아리안은 조로아스터교를, 산스크리트어를 썼던 아리안은 주로 브라만교를 믿었다.
독일 철학자 니체도 언급한 바 있는 철인(哲人) ‘자라투스트라’를 그리스어로 옮기면 ‘조로아스터’가 된다. 누군가에 의해 창조되지 않은, 다시 말해 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있는 존재인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조로아스터교다.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보는 조로아스터교 특유의 세계관은 훗날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 설산을 넘어 인도 북부로 쳐들어온 아리안들은 브라만교를 믿었다. 그래서 브라만교가 인도의 고대 종교가 됐다. 후대에 등장하는 우파니샤드와 불교, 자이나교와 힌두교 등 인도 종교의 뿌리도 다름 아닌 브라만교다.
고대 브라만교의 전통 속에서 자라난 붓다는 깨달음을 얻고서 불교를 열었다. 고대 인도 사회를 떠받치던 카스트 제도에 향해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며 불교는 혁명적인 반기를 들었다. 백성호 기자
인도로 쳐들어간 아리안은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을 정복했다. 정복한 이들은 지배계급이 되고, 정복당한 이들은 피지배 계급이 됐다. 아리안족은 이러한 계급 제도를 아주 강력하고 공고한 사회 제도로 구축했다. 이것이 바로 카스트 제도다.
아리안은 ‘고귀한 자’라는 뜻이다. 반면에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낮은 이들은 계급조차 주어지지 않은 불가촉 천민들이다. 이들에게 손만 갖다 대도 오염된다고 해서 ‘언터처블(Untouchable)’로도 불린다.
그렇다면 최하층 출신인 모디는 어떻게 총리가 될 수 있었을까. 하층 계급에 속한 이들의 수가 많으니까, 민주적인 선거 제도에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디 총리의 리더십과 도덕성, 그리고 청렴함이 지지율을 80%까지 끌어올린 주요 동력이다.
나는 붓다가 탄생한 인도 북부, 지금은 네팔 땅인 룸비니로 길을 떠났다.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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