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종교개혁
대륙의 교회들처럼 영국교회 역시 대변혁을 경험했지만 그 원인은 헨리 8세의 애정행각에 있었다. 영국 왕실은 본래 교황의 충실한 지지세력이었다. 1520년에 마틴 루터를 공격한 소책자 표지에 영국 왕 헨리 8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교황은 그런 헨리의 열심에 보답하는 뜻에서 오늘날까지 영국 동전에 새겨져 있는 ‘교회의 수호자 (Fd, Def)라는 칭호를 수여하기까지 했었다. ‘천일의 앤’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앤ㄴ 불린(Anne Boleyn, 1507?-1536)과 사랑에 빠진 헨리는 형수였지만 나중에 자신의 왕비가 된 아라곤의 카타리나에게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것을 빌미로 이혼을 강요했다.
1529년 헨리는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 1523-1534)에게 ‘그 스페인의 암소’와의 결혼서약을 무효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헨리의 요구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당시 교황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던 인물이었는데, 그 황제가 바로 카타리나의 조카였다. 황제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던 교황은 제의를 거절했다. 헨리의 욕심 때문에 불거진 왕실의 소동이 엉뚱한 쪽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헨리 8세의 스캔들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였던 역사하자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는 교황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묘안을 찾으려고 부심했다. 유럽 대학의 법학자들에게 질의서를 보냈기도 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1533년 1월 헨리는 임신 중인 앤 불린과 결혼했고, 5월에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된 크랜머는 카타리나와의 결혼서약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에 맞서 교황이 헨리를 파문하자 헨리는 자신이 영국교회의 머리라고 선언하고 맞섰다. 이로써 영국교회는 로마교회와 재정으로나 법적적으로 완벽하게 단절되었다.
종교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 앤 불린, 주교 총대리 토머스 크롬웰, 도머스 크랜머 등이 앞장섰다. 크롬웰은 개신교 방식을 수용하고 수도원들을 폐쇄했다. 크랜머는 기도서를 재정해서 로마식의 예배를 탈피하고 나중에는 종교개혁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이 세 사람 모두 최후는 좋지 않았다. 앤은 간통 혐의로, 크롬웰은 헨리의 넷째 부인을 잘못 중매했다는 이유로 헨리에게 참수되었고, 크랜머는 카타리나의 딸 메리의 손에 화형을 당했다.
헨리의 종교개혁을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은 사후에 ‘사계절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였다. 문학가이며 법학자, 그리고 정치가였던 모어는 다재다능했지만 별명을 완성하기에는 한가지가 부족했다. 평소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1494?-1536) 같은 개신교인들에 대해서 사뭇 적대적이던 그는 앤 불린과의 결혼을 위한 헨리의 이혼과 국교회 창설에 반대했다. 헨리는 대법관 모어가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꺾지 않자 런던탑에 가두었다. 감옥을 찾아온 딸과 아내가 신앙을 포기하고 살길을 찾도록 간청하자 “영혼을 파는 자는 세상을 다 얻어도 덧없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렇다고 해서 토머스 모어는 우울한 사내가 아니었다. 그는 단두대에 오르면서 두려워하는 사형집행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 일을 하는데 두려워하지 말게. 내 목은 아주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도록 하게.” 1534년 모어는 단두대에서 참수되었고, 교황은 1886년에 시복했다가 사후 400주년이 되는 1935년에 성인으로 시성했다. 모어의 별명은 그렇게 해서 완성되었다.
틴들의 성서 번역
헨리의 결혼은 교황과 카타리나에게는 불행이었지만 개신교인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헨리가 사랑하는 앤 불린은 프랑스 궁정에서 지낼 때부터 개신교에 호의적이었다. 앤은 윌리엄 틴들이 번역한 신약성서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틴들은 그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그래서 기회로 활용하지도 못했다. 일찍이 틴들은 루터의 성서 번역과 출판에 자극을 받아서 영어 성서를 번역했다. 그는 독일의 비텐베르크로 건너가서 열 달 동안 신약성서를 번역하고 나서 1526년 독일의 보름스에서 비밀리에 6천 부를 인쇄했다. 그의 번역은 나중에 국왕 제임스 1세의 지시로 제작된 <흠정역(King James Version)>에 90%이상이 수용되었을 만큼 문체가 힘차고 간결하고 아름다웠다.
그로부터 3개월 뒤에 틴들이 제작한 성서가 밀수업자들의 손을 거쳐서 영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토마스 모어는 상황을 바꿔보려고 수 천권의 신약성서를 구입해서 불태웠다. 하지만 그런 조처로는 틴들을 막을 수 없었다. 틴들은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많은 돈을 지신의 성서를 수정하는 데 다시 사용했다.
그렇다면 헨리 왕의 스캔들은 윌리엄 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1530년 틴들은 소책자를 발행해서 카타리나와 이혼하고 싶어하는 헨리 왕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 책에는 ‘왕비가 왕의 형수였다는 이유로 이혼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부제가 붙었다. 사실 틴들은 헨리와 앤 불린을 반대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악화되는 영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은 책무를 느낀 것 같다.
문제는 틴들이 당시 정치 환경에 익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오로지 성서를 기준으로 진단하고 나름의 의견을 제시했지만 돌아온 것은 헨리의 분노였다. 틴들은 자신의 책에서 왕의 결혼이 무효화되어야 할 이유를 성서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썼다. 카타리나와의 결혼 생활이 타당하니 더 큰 수치를 당하기 전에 앤 불린과의 관계를 청산하라고 요구했다. 이 일로 틴들은 자신의 지지자들과도 갈등을 빚었지만 의견을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틴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왕비에게 얼마나 몹쓸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나중에 윌리엄 틴들이 이단의 혐의를 받아서 구금되자 앤 불린과 달리 헨리는 그에게 별다른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1536년 8월 틴들은 이단 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성직을 박탈하는 절차를 거치고 나서 같은 해 10월에 처형당했다. 틴들은 사형수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기도 시간에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 틴들이 묶여 있던 기둥 바로 뒤에 서 있던 사형집행관이 힘껏 올가미를 죄고 나서 화형대에 불을 붙였다. 이처럼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화형 전에 교수형을 집행하는 것은 죄수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물론, 틴들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다. 국왕 헨리는 그로부터 두 해 뒤에 틴들이 완역한 마태복음을 승인했다. 그리고 1539년에는 크롬웰의 후원을 받아서 파리에서 발간된 <그레이트 바이블>을 영국 내 모든 교회에 일괄적으로 배치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 성서는 틴들의 마태복음을 개정한 것이었다.
블러드 메리
영국의 종교개혁은 간단하지 않게 전개되었다. 1541년에 헨리의 셋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Jane Seymour)가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얼마 뒤에 제인이 세상을 뜨자 헨리는 이후로 세 명의 왕비를 더 맞이했다. 그 가운데 마지막 왕비만이 운 좋게 헨리의 죽음을 지켜볼 수 있었다. 토머스 크랜머는 헨리의 뒤를 이어서 아홉 살의 나이에 국왕이 된 에드워드 6세(Edward VI, 1547-1553 재위)를 위해서 <성공회 기도서>를 편집했다. 이것은 정교하고 복잡한 라틴어 기도문을 보다 간단한 영어로 대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크랜머의 기도문은 영국교회가 로마교회와 명확하게 선을 그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에드워드를 등에 업은 크랜머는 마음껏 독자적인 행보를 계속했다. 교회음악과 성찬식이 변화되었고, 영국교회의 신조가 새롭게 재정되었다. 하지만 크랜머의 개혁은 거기서 마침표를 찍었다. 기도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 전에 에드워드 6세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카타리나가 헨리 사이에서 유일하게 남기고 간 딸 메리 튜더(Mary Tudor, 1516-1558)가 왕좌를 차지했다. 그녀는 얼마 뒤에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와 결혼함으로써 영국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지 예고했다. 메리는 영국을 과거처럼 가톨릭 국가로 돌려놓으려고 노력했다. 개신교인들에게는 메리의 반동이었고, 가톨릭 교인들에게는 메리의 종교개혁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3백 명이 넘는 개신교인들을 화형대에서 처형하는 바람에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얻었다. 살해된 사람들 가운데는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와 주교 휴 래티머가 있었다. 병사들이 화형을 준비하자 래티머 주교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오늘 결코 꺼지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는 촛불을 하나님의 은혜로 밝히게 될 것이다.” 나머지 개신교 지도자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독일과 스위스 등지로 급히 망명을 해야 했는데, 그 덕분에 취리히와 제네바를 비롯해서 기타 종교개혁의 중심지와 자연스럽게 유대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영국이 오늘날처럼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앤 불린 왕비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때문이었다. 메리는 왕위에 오는 지 6년 뒤에 자식 없이 죽었다. 그녀가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영국은 영원히 카톨릭 국가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58-1603)가 왕위를 계승했고, 그녀는 교황파의 기대와 달리 개신교적 성향을 숨기려고 들지 않았다.
아버지 헨리와 달리 ‘교회의 수장’이라는 칭호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교황의 권위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영국 기도문안에 가톨릭과 개신교의 사상을 모두 포함시킴으로써 우리가 성공회라고 부르고 있는 영국교회만의 독특한 신앙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청교도들(Puritans)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고, 결국 그들은 나중에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