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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사람은 모두 기쁨을 좋아하고 근심을 싫어한다. 사람이 기뻐하고 근심하지 않으려면 무거운 짐을 짊어져서는 안 된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면 기쁠 수가 없다. 성경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무거운 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죄의 무거운 짐이고, 다른 하나는 염려의 무거운 짐이다.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기쁨이 없게 되고, 염려가 해결되지 않아도 기쁨이 없다. 죄의 무거운 짐을 해결되었지만, 염려의 무거운 짐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그 또한 기쁨이 완전하지 않게 된다. 반드시 죄와 염려, 두 가지 무거운 짐이 다 해결되어야 기뻐할 수 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하면 기쁠 수 있는지 말하고 싶다.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모두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죄의 무거운 짐은 이미 해결되었다! 그러나 염려의 무거운 짐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기뻐할 수 없게 된다. 당신에게 기쁨이 없다면 주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고, 그분의 말씀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며, 그분을 믿지 않고 그분을 의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로부터 이미 용서받은 것을 알고,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다지 기뻐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뻐하지 않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몫이 아니다. 오늘 읽은 몇 구절의 성경은 어떻게 해야 기뻐할 수 있는 지를 우리에게 알게 한다. 사람을 염려가 없을 때 기뻐하며 살아 갈 수 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몇 사람이나 되는가?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 주님의 뜻은 당신이 자신의 죄를 알고 하나님 앞에 와서 그분께 요소를 구하고, 주 예수님의 보혈의 구속을 받아들임으로써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위를 갖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맞다. 하지만 하나님은 또한 당신이 항상 기뻐하기를 바라신다. 만약 당신에게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생활도 아니고 마땅한 태도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항상 기뻐해야한다. 당신이 성경을 읽어보면 믿는 이가 어떻게 해야 기뻐할 수 있으며 염려 없이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제 한 구절 한 구절 보기로 하자.
빌립보서 4장 4절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첫째로, 우리는 ‘기뻐하십시오.’가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아야한다. 성경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사람에게 하신 명령은 모두 사람이 해낼 수 있는 것들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기뻐해야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한다. 만일 우리가 우상을 숭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안다. 오늘 어떤 사람이 기뻐하지 않는 다면, 그도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계명을 범한 것이고, 기뻐하지 않는 것은 계명을 범한 것이 아니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두 가지 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른 것이다. ‘기뻐하십시오’는 명령이기 때문에, 이 명령은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이것은 어려운 일인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힘든 일이고 집에는 부양할 어른과 아이가 있다. 일은 바쁘고 힘든데 월급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의식주에 들어가는 돈이 많은데 어떻게 기뻐하겠는가?’ 그러면서 당신은 염려할 것이다. 어떠면 당신은 어머니이자 과부여서 자녀도 많고 의지할 데도 없고 수입은 적고 지출은 많아서 사는 게 힘든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혹은 당신이 학생이거나 의사이거나 주인이거나 종으로서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 사람과 왕래 하는 것이 실지로 기쁘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당신은 기쁘지 않게 하는 일이 분명히 많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4절에서 말하는 ‘기뻐하십시오.’는 자신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것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남편과 사별한 과부가 있는데, 재산을 압류당하고 집주인이 그녀를 쫓아내려고 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어떻게 힘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갓난아기와 웃으면서 놀 수 있다. 물론 그녀는 집이나 그녀의 사별한 남편과 환경에 대하여는 기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녀의 갓난아기에 대해서는 기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환경 때문에 기뻐하거나 일이 잘되어서 기뻐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또한 우리가 어떤 즐거움으로 인해 기뻐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이오.”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은 우리를 반대하고 오해하고 거절하고 사방에서 우리를 짓누를 수 있지만, 하늘을 가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주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세상 사람이 바울을 감옥에 가두고 묶어 두었지만, 그들은 결코 바울이 체험한 주님을 문 밖에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감옥 안에서 하나님께 노래하고 찬양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을, 우리는 환경으로 인해 기뻐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주님으로 인해 기뻐해야한다. 환경의 어려움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눈물을 흘릴 때에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을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사랑하는 분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 마음을 만족하게 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잘 잊어버린다. 오늘 들으면 다음 날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어서 즉시 “내가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아,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쨌든 기뻐해야한다.
“여러분의 관용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도록 하십시오.”(빌 4:5) ‘관용’은 원문에서 중용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좌(左)로나 우(右)로 치우치지 않고, 지나치지 않고,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작은 일을 당하고도 태산에 눌리는 것 같다면, 그것은 중용이 아니다. 정상적인 상황은 어려움이 우리를 누를 지라도,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즐거움은 큰 것이며, 우리가 하루하루를 생활할 때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지낼 수 있게 한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중용의도(中庸之道)’가 아닌 성경에서 말하는 ‘중용의도’이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빌 4:5) 이 말씀을 주의하기 바란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주님께서 빨리 오실 것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믿을 만하지 못한데,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원문에서 ’가까이 계십니다.‘는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이다. (2) 원에서 ’가까이 계십니다.‘는 신약에서 네 번 나온다. 로마서 10장 8절, 에베소서 2장 13절, 17절, 빌립보서 4장 5절이다. 처음 세 번의 의미는 무엇이고, 네 번째의 의미는 또 무엇인가? 처음 세 번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네 번째가 가리키는 의미도 그것과 동일할 것이다. 처음 세 번은 모두 장소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그리므로 네 번째도 반드시 장소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로마서 10장 8절의 ”이 의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이 너에게 가까이, 곧 너의 입에 있으며 또 너희 마음에 있다.‘라고 하였습니다.“에서 ’가까이 있다‘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3절의 ”그러나 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이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에서도 장소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또한 17절의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에게 화평을 복음으로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사람에게도 화평을 복음으로 전하셨습니다.“에서도 장소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빌립보서 4장 5절의 ”주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는 주님께서 오실 것이라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께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해야한다. 주님께서 우리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기뻐해야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빌4:6). 우리는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마땅히 기뻐해야한다. 또한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위에 문장은 기뻐하라는 것이고 그 아래 문장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아는가? 죄를 제외하고 가장 심각하게 사람을 해치는 것이 염려이다. 실지로 염려는 죄이다.
나는 세상에서 염려할 만한 이유가 아주 많다. 매일 이 세상에는 우리를 염려하게 만드는 충분한 이유들이 있다. 이러한 이유들은 찾기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환경을 만났는데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따지듯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당신에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생활 문제나 가정의 일이나 개인의 어려움 등을 염려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에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말한다.
나는 어떤 책에서 어느 목사가 한 여성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왜냐하면 사람이 일단 염려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것은 염려하지 않고 자신의 아홉 명의 아들만 염려할 뿐이라고 말했다. 목사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안에는 그녀의 이러한 염려가 전혀 포함되지 않는 다고 말했다. 목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는 염려가 하나도 없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네 명의 아들에 대한 염려를 이미 하늘로 보냈지만, 이제는 아직 남아 있는 다섯 아들에 대해 염려한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도 염려해야하고 저것도 염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염려하는 것을 그들의 본분으로 여긴다. 또는 ‘일 년 중에 한 가지도 염려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한 가지 염려도 있어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앞의 절에서 “주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라 말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염려한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 그분의 마음을 믿지 못하고 그분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이며, 그분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는 데도 당신이 염려하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손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주님께서 가까이 계신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어떻게 염려가 없을 수 있는가“ ‘다만!‘ 이렇게 하기만 하면 이루어질 것이다. 당신은 앉아서나 누워서나 걸으면서 할 수 있다. 무엇을 하는가? 세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첫째는 기도이다. 이것은 보통의 기도이다. 둘째는 간구 곧 전일하고 특별한 기도이다. 이 두 가지 방법으로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 셋째는 감사이다. 감사함으로 당신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당신은 모든 일에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고, 간구로 아뢰어야 하고, 감사함으로 아뢰어야 한다. 그러난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이 이와 같이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염려가 가득하고 기쁨이 없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기 때문에 염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만난 일을 하나하나 모두 하나님의 손에 놓을 수 있다면 좋다. 그렇게 하지 않고 첫 번째 일을 당신 자신 위에 두고, 두 번째, 세 번 일이 와도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짊어지면 짊어질수록 점점 더 눌림을 받게 되고 기쁨을 잃게 된다. 나는 전에 집을 짓는 일꾼들이 벽돌을 지붕까지 운반하는 것을 보았다. 세 사람이 나무 사다리의 아래, 가운데, 위의 부분에 서고, 아래에 사람이 벽돌을 중간에 있는 사람에게 보내고, 중간에 있는 사람은 다시 위에 있는 사람에게 보내며 멈추지 않고 계속 보내는 것이었다. 만약 중간에 있는 사람이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온 벽돌을 다시 위로 보내지 않거나, 위에 있는 사람이 중간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온 벽돌을 받지 않는다면, 중간에 있는 사람은 계속적으로 오는 벽돌의 압력에 의해 눌려 죽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도 이와 같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염려를 모두 하나님께서 짊어지시도록 그분께 드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이 준 염려 때문에 눌려 죽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온 염려가 자신 위에서 누르게 해서는 안 되고 그 염려를 하나님께 내려놓아야 한다. 언제든지 우리에게 염려가 있을 때 즉시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는 염려를 하나하나 인내하며 쌓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출로가 있다. 이 출로는 바로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이 일은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고 죄인들로 할 수 없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계시고,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큰일에만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작은 일에만 기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일에 기도할 수 있다. 염려할 이유가 있는 모든 일과 염려할 기회가 있는 모든 일을 기도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이유는 천성이 낙천적이거나 바보처럼 모든 일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가장 우둔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뢸 수 있는 분이 계시고 믿고 위탁할 수 있는 분이계시고 책임져 줄 수 있는 분이계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기도로 일들을 그분께 맡길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고 염려할 필요가 없다. 기도가 우리의 출로요, 하나님이 우리의 출로이시다.
이와 같이 기도하고 간구하기만 하면 족한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경에서는 기도와 간구를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감사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우리에게 임하는 모든 일은 못 박힌 손이 우리 손안에 놓은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임하는 모든 일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께 우리를 위해 안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하나님, 당신은 결코 틀리지 않으십니다.”라고 감사드릴 수 있다. 오늘날 말씀을 전할 줄 아는 사람이 많고 기도할 줄 아는 사람도 많지만, 하나님께 감사드릴 줄 아는 사람은 매우 적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람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고,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는 것이며, 감사는 자신을 감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하고 간구해야 한다고 말할 뿐 아니라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가? 즐거울 때에만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아니라, 근심할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드리라.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라. 당신이 좋다고 느끼는 일에 대해서만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좋지 않다고 느끼는 일에 대해서도 감사드리라.
미국 서부의 어느 대학의 한 대학교수가 있었다. 그는 항상 비관적인 말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동료들은 그가 이같이 하는 것을 보고 그와 교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날씨가 매우 좋은 어느 날 몇 명의 젊은 교수들이 그에게 말했다. “오늘 태양이 정말 환하지 않습니까? 꽃은 얼마나 향기롭고, 새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지저귀는지! 풀은 또 얼마나 신선합니까? 이러한 경치를 보시니 교수님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으시겠죠?” 그는 이러한 경치를 보고 참으로 할 말이 없다고 느꼈다. 그런데 그가 참으로 아무런 비평의 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한번 둘러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런 경치가 영원할 수 없다니!” 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처럼 하나님에 대해 항상 감사드리는 마음이 없는지! 탄식과 불평과 근심과 무거운 짐을 질 뿐 도무지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
철로에서 일하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그는 병이 있건 없건, 일이 순조롭건 순조롭지 않건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래서 그의 동료들은 그를 낙천주의자라고 말했다. 어느 날 그가 철로를 보수하다가 기차에 치어 한쪽 다리를 잘린 채 정신을 잃었다. 사람들은 그가 정신이 들었을 때, 또 거기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보았다! 그들 속으로 화를 내며, ‘한쪽 다리를 이미 차에 치어 잃어버리고도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가?“하고 생각했다.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아직도 한쪽다리가 성하지 않습니까?“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이 비록 병에 걸렸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다. 당신이 비록 가난 하지만, 아직 궁지에 몰릴 정도는 아니다. 비록 당신의 옷이 누추하지만, 당신은 아직 몸을 가릴 것이 있다. 당신의 집이 비록 작지만, 당신이 아직 머리를 둘 곳이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기를 배워야 한다. 설사 당신에게 염려할 만한 이유가 있더라고, 이렇게 당신의 모든 염려와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내려놓는다면, 당신은 기뻐할 수밖에 없다. 당신에게 무거운 짐과 염려가 있지만,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죄를 짊어지셨다고 말한다면, 설마 그분께서 당신의 근심과 어려움과 염려를 짊어지지 않으시겠는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벧전 5:7)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돌보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돌보다’라는 단어는 성경 원문에서 앞에 있는 ‘염려’와 동일한 단어이다. 다만 문법적으로 구조가 다를 뿐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염려를 짊어지시고 대신하시기 때문에, 당신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이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당신이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물건과 정과 혹은 어떤 도움을 주어, 그들에게 기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에게 즐거움과 도움과 정을 달라고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앞에 와서 우리의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고 하신다. 많은 사람이 당신에게 즐거움과 도움과정을 그들에게 주기를 바라지만, 당신의 염려를 그들에게 주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염려를 짊어지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염려를 그분께 내려놓으라고 하셨다. 그분께는 전혀 어려움이 없다. 왜냐하면 이사야서 53장 4절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오늘 자기의 몸을 염려하거나 가정과 자녀와 사업을 염려하거나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문제를 염려하거나 하나님의 자녀의 영적인 상태를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당신의 염려를 그분께 내려놓으라고 하신 것과 그분께서 오늘 당신의 염려를 짊어지기를 원하신다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상태 가운데서 여러분이 그분께 오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다만 여러분이 그분께 오기를 바라시지 절대로 당신의 좋은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의 염려와 근심을 바라신다. 그분은 오늘 당신의 염려와 근심을 짊어지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부서진 마음과 무거운 마음과 고통스러운 마음을 모두 그분께 가져오게 하신다. 이게 당신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당신이 만약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와 감사로 당신의 마음의 필요한 바를 하나님께 아뢴다면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인가? 가장 좋은 결과가 있다. 빌립보서 4장 7절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지키다‘라는 단어는 원문에서 군사용어이다. 이를 변역한다면 ’수비하다‘나 ’순찰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성경에서 이와 동일한 단어가 고린도 후서 11장 32절에 있다. “다마스쿠스에서 아레다왕 수하에 있는 총독이 나를 잡으려고 다마스쿠스 성을 지켰지만”. 여기에서의 ’지키다‘는 빌립보서 4장 7절의 ’지키다‘와 같은 단어이다. 당신에 다마스쿠스의 총독이 바울을 잡으려고 병사를 사용하여 성벽을 사방으로 둘러싸며 지켰다. 하나님의 평안도 병사가 성벽을 지키는 것과 같이 우리 마음을 지키며, 밖으로부터 근심이 우리 마음 안으로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평안이 모든 염려의 침범에서 벗어나도록 우리 마음을 수비하고 순찰하고 파수한다. 이 얼마나 기묘한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 ’하나님의 평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천사장(후에 마귀가 됨)이 죄를 범했고, 천사들 중 삼분의 일이 그를 따라 죄를 범하여 땅은 황폐하고 공허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조급해 하셨는가? 결코 조급해하지 않으셨다. 후에 하나님은 엿새 동안 회복의 역사를 완성하셨고, 한 쌍의 부부를 지어 땅에 거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그들도 범죄했다. 하나님은 조급해하셨는가? 하나님은 여전히 조급해하지 않으셨다. 천사가 넘어졌고 사람도 넘어졌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조급해하지 않으셨다. 마침내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도록 구주를 보내셨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사람이 오늘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 내일 곧 구주를 파견하셔야 할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급해하지 않으셨다.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 그분은 수천 년을 기다리셨다. 그분은 결코 조급해하지 않으셨다. 오늘 우리는 모든 죄인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급해하지 않으신다. 오늘 사람들이 그분을 대적하고 반대하고 비난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즉시 천둥과 번개로 사람을 치시는 것을 전혀 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가장 평안하신 분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평안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환경은 가장 좋지 않았지만, 그분은 가장 평안하셨던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파수하는 하나님의 평안이 있는데, 어떤 염려가 우리의 마음을 침입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평안하지 못하게 하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의 구할 것을 그분께 말하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또한 그분의 모든 평안이 파수병처럼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모든 조급함과 어려움과 불편함 등을 밖에 가두어 둘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평안은 참으로 사람의 이해를 초월한다.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은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일을 그분께 맡긴다면,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평안을 갖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고,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에게 평안을 체험 할 수 있게 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은 하나님의 평안을 체험해 본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평안의 지킴을 아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평안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어떤 경우에는 압박이 너무나 무겁고 사방으로 길이 막혀서 염려와 근심이 우리의 유일한 의무인 것 같지만,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아뢰어 기도하고 간구하며 감사할 때, 우리는 염려를 알지 못하는 것같이 됨을 보게 된다. 우리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이상하게 여긴다. 우리가 왜 이처럼 평안한가? 이것은 사람의 이해를 초월한 평안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평안의 지킴이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는 당신의 환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당신의 환경이 무사하게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또한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하게 합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의 의미는 당신의 마음과 생각이 모두 주님을 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당신에게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통이 있다면 당신은 그분께 “하나님, 이 어려움과 고통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이미 그분의 명령을 들었다면, 그분은 그분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한번은 내가 어떤 곤란한 일을 당한 적이 있다. 그때 내게는 정말 길이 없었다. 나는 이 성경 구절을 기억하고 어느 광야로 가서 기도했다. 나는 열 몇 번 기도했지만 여전히 평안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성경 구절은 사람이 읽을 수 있을 뿐 실행될 수 없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너는 평안이 없다고 말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곧 뛰어 일어나서 말했다. “하나님, 당신께서 저에게 평안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저에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자 즉시 평안이 있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평안이 없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평안이 있게 된다. 만약 당신이 “평안이 있으면 믿겠다.”라고 말한다면 평안이 없게 된다. 오늘 당신에게 어려움과 고통이 있고 당신이 감당할 수 없어서, “하나님, 저를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린다면, 당신에게는 평안이 있게 된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또한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그분의 약속이다. 당신이 그분의 명령을 따른다면, 그분은 그분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워치만 니 전집, 18권, 주제별 진리 연구 기록(2),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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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떤 사람들은 워치만 니의 글을 감상은 하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었는가? 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4장 7~16절은 "은사들의 기능 발휘및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과 건축"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성도 개개인이 받는 은사(선물)가 있고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사(선물)가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직접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전하는 이로 또 어떤 사람들은 목자및 교사로 -[주셨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 사역의 일을 하게 하려는 것,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엡 4장 11~12).
저의 개인적인 관찰입니다만... '선지자(복음전하는자)와 목자(교사)'는 '지역(지방)교회'를 위하여 주신 은사이고 '사도'는 '교회들(우주적교회)' 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은사)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66권 성경 가운데 오로지 사도행전은 끝매듭이 없고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워치만 니'가 성령께서 세우신 이 시대의 사도라는 것을 부정하기란 힘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는 초대교회 이 후 없다"라고 말합니다만, 저는 오늘날도 "사도행전은 계속된다"라고 믿는 분들을 향하여 글을 쓰고 있기에 전자에 속한 사람들은 넘어가도 좋겠습니다.
@이기는생명 문제는 대부분의 신실한 형제(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워치만 니의 사역(1920~1952)과 워치만 니가 순교(1972)한 후 미국땅에서 시작한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특히 한국교회)입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 교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은사)을 교회가 풍성히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주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마지막 시대에 교회 안에 진리를 확산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사도와 선지자의 기초 위에 교회가 건축된다(엡2:20)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은 사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을 향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