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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구로 아리랑》,
《서울의 달》,
《야망의 세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넘버 3》,
《조용한 가족》,
《쉬리》,
《해피엔드》,
《파이란》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였고,
2002년에 개봉한 영화 《취화선》으로 칸 영화제 경쟁부분에 진출하였다.
존재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15년 동안 사설 감금방에 갇혀 살아야했던 '오대수 역'을 연기하여,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며
해외에서도 연기력을 크게 인정받았다.
이후 《꽃피는 봄이 오면》, 《주먹이 운다》, 《친절한 금자씨》등의 여러 작품에 출연하였다.
최민식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로
1999년 대종상 남우주연상, 2000년 제38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남우조연상,
제35회 백상예술대상 남우주연상,
제4회 도빌 아시아 영화제 최우수 남우주연상,
2004년 대종상 남우주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춘사대상영화제 올해의 남우연기상,
제3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남우주연상,
제7회 디렉터스 컷 시상식 올해의 연기자상,
미국 빌리지 보이스 선정 최우수연기자 30위 등 수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배경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당한 뒤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다수의 장병과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조선은 제해권을 상실하였다. 이에 선조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자 품계를 내려 조선 수군의 지휘 체계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순신이 파직당할 당시 그의 계급은 대감급인 정헌대부 정2품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권하기는 하였으나 정3품의 계급으로 부여했다. 당시 수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이미 계급 인플레가 심했다. 수군 수사의 기준 품계인 정3품을 가진 장수들이 넘쳐났다. 계급이 같은데 보직만 다른 상황이 일어났고 이순신이 통제영을 장악했던 세월이 길었고 그의 영향력이 미쳤기에 그나마 군이 통제가 되었지만 각 장수들의 불만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상당한 충돌을 일으켰다. 명량해전이 끝나자 마자 교체되어 이순신이 전사한 이후에나 다시 전라우수사가 될 수 있었다. 난중일기에도 "만호"에나 어울릴 놈이라는 평가가 전해지고 있다. 무의공 이순신을 수도방위를 이유로 전투참가를 불허하였다. 이처럼 조선 수군은 지휘 체계의 엉망으로 각종 잡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시작부터 불안한 출발을 하였다. 더욱이 조선 수군에게 남은 전선은 겨우 12척에 불과하였다. 회령포에서 전선 10척을 거두었고, 그 후 2척이 더 회수됨으로써 12척이 남은 전선의 전부였던 것이다. 나중에 명량 해전을 앞두고 또 1척이 추가되어 13척이 되었다. (그러나 1척은 매우 파손되어 쓸 수 없었음. 실제 전투에는 12척이 임했다.) 칠천량의 패전의 손실이 커서 선조는 수군을 폐지하려고도 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려 수군폐지불가론을 펼쳤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명량 대첩(鳴梁大捷) 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2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3척(총 참여 함선은 333척)을 물리친
조선 전사에 빛나는 해전이었다.
“
”
그 후,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수군 재건에 전력을 다했다.
이순신은 음력 8월에
일본 전투선이 어란포(현재 해남군 어란리 근처)에 나타난 것을 격퇴한 후,
음력 9월에 일본의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음력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해남의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겼다.
일본 수군의 기동
이 때, 어란포의 일본 수군은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가 지휘하는 333 척의 대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목포 쪽으로 흐르는 북서류를 타고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전라도로 서진하여
일본 육군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명량해협은
좁은 수로로
조류는 국내의 수로 중에서 가장 빠른 곳이다.
빠른 수로를 이용하여
잔존하는 조선 수군을 격파한 후
일본 육군과 합류하여 한양으로 진격하려는 것이었다.
일본 수군은
1592년의 전훈을 참조하여
내륙으로 깊숙이 진격하기 전에
이순신이 복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13척의 전선만으로는 무력하리라는 것이
일본 수군의 판단이었다.
이순신과 전투에서 이미 패배를 경험한 도도 다카토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칠천량 전투의 승리가
일본 수군의 사기를 드높여준 탓이었다.
일본 수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이순신의 수군을 격파할 것을 결의했다.
한편,
이순신도
일본 수군의 기동 보고를 받고
명량대첩 직전 날인 음력 9월 15일,
장병들에게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
(必死卽生 必生卽死)’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라고 거듭 말하며,
장병들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울돌목에서의 접전
울돌목(명량해협)은
수심이 얕아
실제 배가 항해할 수 있는 폭도 좁았고,
그 중에서도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서해로 빠져 나가면서
해안의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 빠른 조류가 흘렸다.
울돌목 물살의 또 다른 특징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암초가 솟아 있다는 점이다.
급조류로 흐르던 물살이 암초에 부딪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치게 되는 것이다.
조선 수군은
이 울돌목에서 결전을 벌일 계획이었으나
작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5Km 떨어진 벽파진에서 진을 치고
15일간이나 일본 수군을 유인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수군
역시 그런 급류에는 이미 어느 정도 적응되어 있었고
오히려 그런 급류를 타고 수가 적은 조선 수군을 단숨에 제압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의 탄생지라 할 수 있는
울돌목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조류가 흐르며
물의 속도 또한 울돌목에 못지 않다고 한다.
특히 구루시마 수군은
원래 해적 출신으로
이 지역을 근거로 했던 바,
빠른 물살에 익숙한 이들은
명량해협에서 무리없이 전개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이순신은
그들을 유인하고자 했다.
조선 수군은 벽파진 근처에서
일본 수군의 소함대를 격파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13척뿐임을 알고,
해상의 적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벽파진으로 우수영을 옮긴 이튿날인 음력 9월 16일 오전,
일본 수군 333여 척이
순조(順潮)를 타고 울돌목으로 접근했다.
일본 수군 지휘부는
대형 군선인 아타케부네가 협수로를 통과하기 어렵다고 보고
중형 군선인 관선(세키부네) 133척으로 진영을 짜고
협수로를 통과,
조선 수군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조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즉, 일본 수군의 진격 방향이 조류의 흐름과 일치하는 순방향이었다.
조선 수군 12척의 전선도
해협으로 들어서서
일본 수군을 맞이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조선 수군 일부가 적의 기세에 밀려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탑승한 기함은
계속 자리를 고수하며
부하들을 독려했고,
초요기를 올려
뒤로 물러나있던 중군장 첨사 김응함과
거제도 현령 안위를
진격해 오도록 한 뒤,
그들을 심하게 다그쳤다.
두 사람의 배가 적진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평산포 대장 정응두와
멀리 대략 1킬로미터 정도 물러나 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도 돌격에 가세했다.
특히, 안위의 군선으로 일본 수군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격전의 와중에 대포와 화살에 맞아
일본군들 일부가 바다에 빠졌는데
이 광경을 보고있던 이순신 기함에 탑승하고 있던 항왜 준사(俊沙)가
"저기 그림무늬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적장 마다시(馬多時,구루시마)다"라고 알렸다.
이순신은 물긷는 병사 김돌손을 시켜
즉시 구루시마를 끌어올릴 것을 명했다.
갈고랑쇠에 낚여 배 위로 끌려 올라온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곧바로 토막내어졌으며,
조선 수군의 사기는 급격히 올라갔다.
반면에, 전투 중에 지휘관이 적군에 의해 참수되고 토막난 것을 본
일본 수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일본군에게 또 하나의 악재로,
오후가 되자 점차 조류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조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에는 순조(順潮)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逆潮)가 되어,
일본 수군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군선이 첨저선이었던 일본 수군은
배가 선회하려면 많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좁은 해협에
많은 수의 전선을 끌고왔던 일본 수군에게
급한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배를 운신하며 전열을 정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이에 조선 수군은
포격전과 충파를 거듭했고,
일본 수군은 조류의 역조(逆潮)와
조선 수군의 포격과 충파로 인해 전혀 반격할 수 없었으며,
또한 군선이 많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군선끼리 서로 부딪히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었고,
이 전투의 총사령관 도도 다카토라가 부상을 당했다.
군감이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고,
총 사령관이 부상을 당한 것으로부터,
일본 본대도 큰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333척의 대함대를 12척으로 추격하는 형세가 되었고
일본 수군은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무렵,
물살이 느려지고 바람이 일본 수군쪽으로 부는 것을 이용,
퇴각하였다.
조선 수군의 승리의 요인으로는
먼저 전함과 함포를 들 수 있다.
일본군 전함은
첨저선으로 뱃머리가 뾰족하고 판자의 연결에 쇠못을 사용한 아타케부네(安宅船)고,
조선군의 전함은 뱃머리가 둥글고
나무못을 사용한 판옥선이다.
또한 판옥선의 크기는
일본군의 가장 큰 배인 아타케부네보다 컸다.
뱃머리가 둥글다는 것은
물에 잠기는 부분이 적어 회전이 용이하였고,
반면 왜선의 쇠못은
녹이 슬어 부식되는 결과를 가져와
배의 안정성에 심각한 문제를 안겨주었고,
충격에 약해 쉽게 파손되었다.
조선 수군은
포격전만으로 전투를 수행하지 않았고,
필요한 경우나 불가피한 경우 충각전술로
일본군의 배를 부서뜨리는 돌격전법도 자주 구사했던 것도
이러한 배의 특성 덕분이었다.
함포는 임진왜란 전체를 통틀어
조선 수군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
다양한 종류와 구경의 화포를 사용하였으며,
대형 로켓 병기라 할 만한 대장군전 등
신무기도 많이 사용되었다.
반면, 일본 수군
역시 함포를 사용하였으나
조선 수군에 비해 사용이 서툴렀으며
일본 수군의 함포 적재량이 조선 수군에 비해 열세였다.
또한, 울돌목의 지형과 시간에 따른 조류의 변화를 이용한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병사들의 사기도
주된 승리의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복합적 요인에 힘입어
조선 수군은
불리한 여건에서도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를 수 있었다.
유시(酉時 오후5시~7시)무렵, 전투는 끝났다.
실제 전투에 참여한
일본 수군의 전함 130여 척 중 30여 척(31~33)이 격침되었고,
왜군의 중형 군선에는 약 60명씩 타고 있었으므로
최소 1800여 명의 전사자가 났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반면, 조선군의 전함은
단 하나도 격침되지 않았다.
다만, 순천감목관 김탁과
이순신의 종 계생이 전사하였고,
안위의 전함의 격군 일고여덟명이 물에 빠져 죽은 것과
조선군의 전함이 총 13척이었던 것으로 볼 때,
전사자는 많아야 100명이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 전투는
조선이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전투가 되었다.
당시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파직과
남해안 대부분의 재해권을 장악하였고
일본 육군은
1597년 음력 8월 15일, 8월 19일 남원 전투,
전주성에서 조명 연합군을 대파하고
명나라군과 대치중인 상황이었다.
일본 육군과 수군은
수륙 병진을 통한 한양 공격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명량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이 모조리 무산되었으며,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정유재란은
농성하는 일본군을
조명연합군이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는 공성전으로 바뀌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이순신이 철쇄(쇠사슬)를 전투에 사용했다고 하나 신빙성이 희박하다.
그 예로, 《KBS 역사스페셜팀》은 철쇄를 사용한 명량 해전을 재현한 바 있다.
수중 철쇄(쇠사슬)는
지금 진도대교가 있는 폭이 가장 좁은 자리에 걸었다.
양쪽에 막개를 박아놓고 쇠줄은 물 속에 잠기게 숨겨놓은 뒤 왜수군을 기다리는 것이다.
오전 11시경,
우수영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에 들어선다.
그들이 울돌목에 들어서자
수중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혀 여지없어 부서진다.
오후 1시경
밀물이 끝나고 물길이 멈춘다.
일본 수군은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가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의 함선들이 전진하며 각종 화포를 빗발처럼 퍼붓는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왜수군 쪽으로 흐른다.
유리하던 조류마저 불리하게 변하자
그러나 명량 해전의 전투 위치와
철쇄 사용 문제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다음은 해군사관학교 해전사 담당 이민웅 교수(해군 중령)의 주장이다.
먼저 전투 위치는
명량해협(울돌목)이 아니라
해협을 통과한 뒤 해남군을 따라 우측으로 구부러진 지점인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
앞바다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그 부분을 보면
“왜 함대의 접근 보고를 받고 전투 준비를 마친 뒤
바다로 나갔는데
곧바로 왜선 133척이 우리 전선들을 에워쌌다.”라고 되어 있다.
명량해협(울돌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장면이라는 것이
이민웅 교수의 주장이다.
또, 명량에서 쇠사슬을 설치해
왜선을 격퇴했다는 설명에 대해서도
후대 영웅담이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설화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전라좌수영 앞에 방어용 쇠사슬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명량 해전에서 쇠사슬은
물살이 세서 걸 수가 없었으므로 사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쇠사슬은
당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공실기》에
“철쇄(鐵鎖) 즉 쇠사슬과 철구(鐵鉤)로 적선을 깨뜨렸다.”란 기록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기록은 과장이 많아,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철쇄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하나의 근거로써 쓰인다.
즉, 이민웅 교수는 철쇄 사용설을 일축한다.
또, 명량해전이 치러진 장소가 우수영 앞바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명량해전이 치러진 장소가 우수영 앞바다라는 이민웅 교수의 주장에 대해
이순신역사연구회는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하여,
명량해전이 정설대로 울돌목에서 치러졌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그러한 이순신역사연구회의 반론을 보여주는 책
《이순신과 임진왜란4》의 한 부분이다.
우선 우수영 앞바다는
조류의 흐름과 무관하며 바다는 호수같이 잔잔하다.
때문에 조류의 방향이 바뀌어도 왜군들은 물러가지 않고
조선 함대가 궤멸될 때까지 계속 공격해 올 것이다.
또 <지도 5-1-2>(옮긴이 주 : 우수영 앞바다에서의 전투모습)와 같은 진법으로
대치하고 있었다면 마다시의 죽음과 관계없이 도도 다카도라, 구키 요시다카,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선단들도 총력 공세를 폈을 것인바,
왜군들은 칠천량에서 조선 함대를 전멸시켰듯이 13척의 이순신 함대를 전멸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진도대교 아래에서 마다시를 죽였고
마다시 선단을 대신해서 공격을 시도코자 했던 도도 다카도라 등 뒤따르고 있던
왜선단은 패전한 마다시의 선단이 불이 붙은 채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떠내려 오고 있었기에 공격에 나설 수 없었다.
그 위에 역류가 된 물살은 더욱 급류로 변해 갔기에 이순신 함대에 접근해 간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렇게 정리해 볼 때
필자들은 <지도5-1-2>에 동의할 수가 없다.
《난중일기》에는
마다시(馬多時)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명은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로,
일본의 해적 가문 출신이다.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9월, 이순신의 부하였던 오익창의 사호집이 발굴되었다.
자료에는
"이순신 장군을 힘을 모아 돕는다면 살 것이요,
죽더라도 나라에 충성했다는 명분은 남을 것이다."
등에 피난길에 나선 사대부들을 설득해
식량과 옷을 조달하게 한 것도 승리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하며,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의 배에 걸었더니,
왜군의 조총 탄환이 그것을 뚫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난중일기, 사호집을 완역한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다른 부하들의 문집보다 사호공의 문집이 더 구체적이고 상세해서
12척의 배를 가지고 어떻게 싸웠는가를 알 수 있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전남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명량대첩기념비가 있다.
일제 강점기시 피해를 입어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옮겨졌던 것을
1945년 해방 이후 우수영 유지들에 의해 원래 세워졌던 장소로 회수됐다.
보물 제503호로 지정되어 있다.
2014년 8월 인기 상영중인
영화< 명량 > 을 본
시청자의 소감은 어떤가요?
지금까지 < 명량 > 을 두 번 봤는데 아직까지는 관객처럼 즐기면서 못 보겠어요.
시사회 때 CG가 마무리 된 영상을 처음 봤는데 요즘은 CG가 정말 좋아졌구나(웃음),
이 장면은 이렇게 찍혔구나, 그 장면은 편집됐구나, 이런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스탭 가족 시사와 전야 시사 때 영화를 다시 볼 생각인데 그때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겠죠.
해전 신은 CG가 많아 촬영하면서도 힘들었을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은 유달리 징글징글 했어요(웃음).
배가 움직이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판옥선을 놀이기구 같은 기계 위에 올려놓고 촬영했어요.
블루매트를 깔아놓고 바다라고 상상하며 찍었는데,
영화에서는 정말로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저걸 어떻게 찍었지,
기술이 정말 많이 좋아졌구나, 신기했죠.
영화를 보고 나서 아쉬움과 만족 중 무엇이 더 큰가요?
항상 아쉬움이죠.
어떤 점이 아쉬웠나요?
인물들이 정신적, 감성적 교감을 쌓는 과정을 지금보다 더 세밀하게 짚고 넘어갔으면 했어요.
지금은 시간 관계상 필요한 대사가 끝나면 다음 신으로 넘어가요.
하지만 감정신 같은 경우는 대사와 대사 사이의 호흡도 중요하거든요.
특히 수봉이가 죽은 아버지의 갑옷을 안고 우는 장면은 박보검이 연기를 정말 잘해서 아까웠어요.
영화를 찍고 나면 그런 점이 항상 아쉬워요.
경남 통영관광개발공사는
거북선 3척, 판옥선 1척 등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조선 수군의 군선을 원형 복원해
전시 중인 통영시 중앙동 문화마당을 찾는 유료 방문객이
7월 초에는 하루 500여 명에 불과했으나
지난 5일에는 2100명을 돌파하는 등
이달 들어 유료 방문객이 하루 평균 2000명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고 7일 밝혔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해전에서 패배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거제시 하청면 칠천량해전공원을 찾는 관람객도
이달 들어 하루 평균 150명으로
지난 5월의 30명보다 5배로 늘었다.
명량대첩의 실제 배경인 전남 진도와 해남 지역 관광지에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명량해전의 격전지인 울돌목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이 60m의 진도타워에는
지난 3일 600여 명의 관람객이 찾았다.
해남군이 운영하는 인근 우수영국민관광지의 방문객도
이달 들어 하루 평균 350 명으로 지난 4월의 20명보다 17.5배로 늘었다.
우수영 관계자는
“영화 ‘명량’이 흥행에 크게 성공한데다
본격적인 피서철이 닥친 탓인지
최근 이곳을 찾아 영화에 등장하는 ‘회오리 파도’ 해역이 어딘지 등을 묻는
가족 단위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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