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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소설가)
제 고향은 경상도 첩첩산골입니다만 고향 사람들의 생활
패턴은 강원도와 비슷합니다. 이를테면 옥수수나 감자를
주식으로 해야 된다든지,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것 따위가
그런 예입니다. 태백산맥 기슭에서 살았기 때문에,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였지만 생활은 강원도와 닮아 있었습니다. 저는 요즈음에도 양식(洋食)을 먹지 않습니다. 양식에는 옥수수와 감자가 나오니까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렸을 적에 너무 많이 먹은 나머지 질려서 못 먹습니다. 음식은 별로 가리지 않는 편이지만 수제비를 비롯한 몇 가지는
먹기가 좀 힘이 듭니다.
제 고향의 면 소재지에는 조그만 영화관이 있었습니다. 객석이라고 해야 한 50석 정도 될 것 같은데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서 영화를 보아야 했습니다. 많은 도시들을 순례하느라 낡아서 폐기 처분 직전의 필름들이 면 소재지에 있는 그 조그만 영화관에 배급되었습니다. 영화에 대해 좀더
심하게 얘기를 하면,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오는 동안에 수없이 끊어지고 필름이 열에 타니까 화면에서 불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 줄거리는 생각이 나지
않고, 그 영화에 비가 굉장히 많이 왔었구나 하는 인상을
많이 받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보려고 재를 두서너
개 넘어서 30리나 40리 되는 곳에서 처녀 총각들, 거동이
불편하시더라도 아주머니들이 한밤중에 전지도 없이 성냥불 그어 가면서 오시는 것을 어린 시절에 많이 봤습니다.
얼마나 문화적인 환경에 많이 굶주려 있었으면 어두운 밤길을 마다 않고 왔겠습니까. 비가 주룩주룩 영화를 본 다음
깊은 밤길을 걸어서 집에 도착하면 아마 새벽 두세 시쯤은
되었을 겁니다. 이런 분들이 지금은 없을 것 같지만 아직도
지방으로 내려가면 있습니다. 문학 강좌가 지방으로 확산되어서 이런 분들에게 문화적인 향수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정서적 이산 가족이다한 이틀 동안 열심히 텔레비전을 봤습니다. 북한과 남한으로 갈라선 채 50여 년 동안 이별의 세월을 보냈던 분들이 만나는 장면을 보면서 저는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평소에 우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운다는 것은 우울하고 슬픈데다 힘 빠지는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저는 될 수 있으면
밝게 웃으면서 살고 싶어하고 눈물을 좀처럼 보이지 않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평소에는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데서 우는 장면이 나오면 꺼 버립니다.
그런데 이번 50년만의 남북 이산 가족 상봉에 즈음하여서는 글을 쓰면서도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저 자신은 이산 가족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자꾸자꾸 눈물을 흘리면서, 왜 내 스스로 즐기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텔레비전 속의 저분들은 전쟁 혹은 이념에 의해서
가족들과 헤어져 살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이산 가족이 아닌 나 자신도 정서적인 이산 가족이 되어 살아오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보고 또 보면서 하염없이 공감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생각되더군요.
어머니는 시골 고향집에 계시고 아들은 멀리 서울에서 떨어져 살고 있지만, 이를 두고 이산(離散)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마땅히 제가 모셔야 할 어머니는 시골에 계시고, 1년에 겨우 한두 번
찾아뵐 뿐입니다. 또 가난한 문인의 벌이로 우리 부부가 대학까지 보내는 등 애지중지 길러놓은 맏딸은 경기도에 살고 있고, 마땅히 우리 부부와 어머님까지 모시고 살 것으로
기대했던 가운데 아들놈은 결혼한 지 일주일 만에 마누라만 데리고 외국에 나가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집안에 들어가면 맞아주는 건 나이가 들어서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마누라뿐입니다. 이것은 곧 정서적
이산 가족의 풍경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산 가족의
상봉 장면을 보고 눈물 흘리는 걸 즐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가정 형편은 저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다른 가장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다 가 버리고 없지요. 다만 만나야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남북으로 흩어진 이산 가족들과 다를 뿐이지, 그 이상의
우울함, 때로는 처절한 것들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우리 모두 마찬가지 아닙니까?
오늘날 가족의 개념은 예전과 크게 달라져서, 맏이는 가난하건 부자이건간에 마땅히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깨져 버렸고, 또 제삿날이나 부모님이 편찮으실 때면 찾아가서 나흘이고 한 달이고 묵어야 한다는 개념도 다
없어졌습니다. 가족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전통적인 가족의 정체성은 전부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알고 보면
우리들은 모두 뜨내기들이고 떠돌이들입니다. 현실적인 떠돌이 못지 않은 정서적인 떠돌이가 되어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고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떠돌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그와 관련하여 제 작품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면 대하소설 [객주(客主)] 외에 [아라리 난장], [화척], [야정] 등의
장편소설이 있습니다. [화척(禾尺)] 도 다섯 권 분량, [야정(野丁)] 도 다섯 권 분량, [객주] 는 아홉 권 분량이고, 얼마
전에 출간된 [아라리 난장] 은 세 권 분량입니다. 이 소설들이 제가 지금까지 문단에 데뷔해서 이십오륙 년 동안에
생산된 작품들 가운데 주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 가운데 하나가 떠돌이 얘기들이라는 점입니다. 모든 작품들이 한곳에 오래 뿌리박고
살 수 없는, 운명적으로 혹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의해서 한 군데에 머물지 않고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 스스로 문득 '내가 왜 떠돌이 소설을 많이 쓰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한 자리에 오래 붙어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한 번 써야 되겠다고 마음먹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쓴 것이 [홍어] 라는 한 권짜리 소설인데, [홍어] 역시 끝에 가서는 주인공이 떠나가게 됩니다. '운명적으로 왜
떠돌이 얘기를 자꾸 쓰고 있는가? 무슨 한이 맺혀서 떠돌이 얘기를 자꾸 쓰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 많이 시달렸습니다. 문득 어렴풋하게나마 제 어린 날의 어떤 상황과 상당한 연관 관계가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전에, 저뿐만
아니라 많은 작가들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얘기들을 쓰고 있다는 걸 말씀드릴까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이문열, 이청준, 김원일, 한승원 제씨의 소설들을 읽어보면
어린 시절에 겪었던 얘기들, 혹은 고향에서 겪었던 얘기들이 작품의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몇몇 가까운 사람끼리 모인 자리에서 결국 작가에게는 고향의 얘기, 어린 시절의 얘기가 밑천이 아니냐 하는 자조 섞인 농담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왜 어린 시절의 얘기들이 그렇게 작가들을 평생 동안 붙잡고 있는가? 그건 아마 경험의 폭은 굉장히 좁지만, 때묻지
않은 감수성이 아주 풍부할 때 느끼고 보았거나 혹은 충돌했던 사회적인 현상, 조그맣고 국한된 지방사회에서 겪었던 일들이 아주 가슴 깊이 못 박히듯 들어차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중에서 특히 떠돌이 얘기를
자꾸 쓰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얼까? 여기서 벗어나야 되겠다고 마음먹지만 작품에 손대기 시작하면 떠돌이 얘기를
쓰게 되고, 또 [홍어]처럼 붙박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로 시작했지만 왜 결국은 떠나가는 걸까. 그만큼 나에게는
떠남과 만남에 대한 애착이 절실한 것인가?서두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제 고향은 경상북도 청송입니다. 경상북도는
다른 도들에 비해서 상당히 지역이 넓습니다. 충청남북도나 전라북도에 비해서 넓은데, 지방 공무원들이 더 갈 수
없어서 좌천되어 가는 곳이 바로 청송입니다. 지금은 도로가 뚫려서 하루 만에 갑니다만 제 대학 시절만 해도 서울에서 고향까지 가려면 열 시간 이상 걸렸습니다. 지금은 승용차로 5시간이면 갑니다.
저는 그런 첩첩산골에서 자랐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라곤 하늘뿐이었습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뚫린 것이라곤 하늘뿐이었습니다. 과격하게
표현을 하면 흡사 항아리 속에 들어앉아서 위를 쳐다보는
듯한 산골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하루 혹은 이틀에 한번씩 교차가 불가능한 좁은 도로에 자동차들이 지나갑니다.
별로 구경할 만하지도 않은데 그 완행버스가 오는 날이면,
찻시간에 대어 정류장으로 뛰어 나갑니다. 공부를 할 필요가 없지요. 왜냐하면 공부를 해야 출세를 하는 것인가, 공부를 해서 무얼 할 것인지도 전혀 모르는 그런 폐쇄되고 바보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까요. 공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학교는 그냥 도리 없이 가야 되는 모양이다 생각하며 갔습니다. 학교에 가기 싫어서 때로는 어머니한테
매도 많이 맞았고,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기는 하는데, 왜
곱셈을 해야 하는 건지 덧셈을 해야 하는 건지 그 자체에
의심을 갖고 있으니까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습니다.
4학년 때 국어 시험을 치르는데 반대말을 쓰라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이를테면 '앉다'의 반대말은 '서다', '가다' 하면 '오다'를 써야 하는데, 앞에 전부 '안'자를 붙여 버렸습니다. '가다' 하면 '안가다', '앉다' 하면 '안앉다' 하는 식으로 전부 '안'자를 붙여 놓았더니 0점이 나왔더군요. 선생님한테 얘기할 수도 없고 '반대어를 썼는데 왜 이러나?' 하는
생각만 골똘히 하고 있었으니 공부가 제대로 머리에 들어올 리 없었습니다.그 대신 버스는 언제 오는가, 장날이 언제인가, 옹기를 언제 굽는가, 육곳간(정육점)에서 소를 언제 잡는가 따위에만 골몰해 있곤 했습니다. 또 그리고 서리를 가야 할 텐데 수박이나 참외가 언제쯤 익을까, 사과밭의
사과는 언제 열리는가, 냇가에 가서 그물을 치면 무슨 고기가 잡힐까 따위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만주 벌판을 달리던 떠돌이들의 힘을 되살려낯선 사람들을
실은 채 버스가 멈출 때면,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어디서 왔을까, 어디를 가기에 이 앞을 지나길까?' 궁금한 나머지 차창에 낀 성에를 닦고 바깥에서 입을 반쯤 벌린 채 구경하곤
했습니다. 의복도 남루해 보이고 불쌍해 보이는 소년 하나가 쳐다보고 있으면, 승객들은 사과를 깎아 먹다가 껍질을
던져주곤 했습니다. 소년은 사과를 얻어먹는 게 목적이 아니라 바깥 세상에 대한 궁금증에 사로잡혀 그렇게 차창 안을 언제까지나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 언덕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어떤 알지 못할 세계가 펼쳐져 있을까.
실제로 있었던 얘기입니다만, 예천군의 어느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바깥 세상을 전혀 구경하지 않은 어떤 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서 태어나서 장가갈 때 재를 한 두서너
개 넘어 보았을 뿐 농사 지으면서 70 평생을 보내신 분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아들이 너무 죄송해서 바깥 세상 구경을 좀 시켜드려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아버지 오늘은
예천 구경을 한번 시켜드릴게요."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부자는 이윽고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섰는데, 아버지는 너무나 넓어 보이는 산 아래를 보며 "이게 전부 다 대한민국이가?" 하고 말했답니다. 저는 그렇듯 좁은
산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공부도 잘 하지 않고 개구쟁이로 소년 시절을 보냈지만 호기심만은 누구보다 넘쳐 있었습니다.언덕
위의 성당에 다니시는 분들이 와서 옹기를 많이 구웠어요.
가마에 불을 땔 때면 언덕 위에 옹기 가마가 있었기 때문에
마을 전체가 밤새도록 환합니다. 어떻게 저런 큰불이 있을
수 있을까? 그게 구경하고 싶어서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아니고 애들이 가면 쫓아내는데도 밤새도록 구경을 합니다.
또 조그마한 장이 열리면 팔고 사고, 서로 싸우고 흥정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학교에도 가지 않고, 가더라도 아프다고 조퇴를 하고 나와서 장구경을 가곤 했습니다. 그릇에 붙은 상표 등을 주워서 구겨지지 않게 주머니에 넣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장사꾼들은 뭘 하고 살까? 어디에 사는
사람들일까?' 하고 골똘히 생각하곤 했습니다.
여름장날 저물녘 파장이 되면 그 북적거리던 사람들의 자취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참새떼가 싸전에 내려와 떨어진 낱알을 주워먹는 것, 그 때 느끼는 황량함이며 그 넓은 장바닥에 떨어진 붉은 낙조 같은 것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교과서에서 어떤 소설 하나를 읽었습니다. 요즘처럼 참고서니 교양 서적은 있는 줄도 몰랐고 설령 있다고 해도 구할 수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김동인의 [붉은 산]이라는 아주 짧은 소설이었습니다. 그 때 읽었던 기억을 되살려 말씀드리면, 일제 시대
때 가난한 농민들이 만주로 이주를 해가서 벌어지는 이야기였습니다. 합법적으로 여권을 가지고 가는 게 아니라 몰래 두만강을 넘어서 가는 거지요. 숨어서 농사를 짓고 살고
있는데, 항상 원주민이 불법으로 이민 온 한국 농민들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여자를 빼앗고 임금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겨우 움막에 살게 하면서 농노로 삼았던 폐단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도 농사를 지어야 하니까 충돌이 일어나는
거지요.
항상 몽둥이 찜질하는 그 사이에 '삵'이라는 깡패가 있었어요. 이민을 간 한국 사람들과 한족(漢族)이나 만주족(滿洲族)들 사이에 충돌이 생기면 이 사람들은 밀리는 쪽이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깡패라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이 사람이 늘 한족들을 앞장세워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의 금품을 갈취를 하는 거예요. 농사를 지어
놓으면 빼앗아 가는 등 인간적으로 아주 형편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중국인과 한국인들 사이에 티격태격하던
와중에 대판 싸움이 붙었습니다. 삵이라는 깡패가 나타나서 한족들과 대결을 하는 거지요. 그러나 수적으로 밀린 나머지 몰매를 맞아 쓰러지고 싸움은 끝이 납니다. 이 사람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우리 한국 사람들이 주위에 모여서 바라보고 있으니까,
남쪽에 있는 사람을 향해 손으로 '좀 비켜다오' 하였습니다. 왜? 그의 희망은 '남쪽 두만강 건너에 있는 붉은 산을
보면서 숨을 거두고 싶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이 소설은 제 마음을 움직여, 뇌리에 아주 오래도록 각인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50년이 흐른 다음인데, 교과서에서 읽었던 그 작품을 토대로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써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간도를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작품 집필을 전후하여
아홉 번이나 드나들었습니다. 두만강 상류에서부터 하류까지, 압록강 상류에서 중류까지 아홉 번의 답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쓴 소설이 [야정]입니다. 답사를 하고 자료를 모으다 보니, 1800년대에 벌써 우리 나라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건너가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중국[漢族]은 두 번 다른 민족에게 지배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몽골족이 지배하던 원나라 시절이고, 또 한번은 만주족이 지배하던 청나라 시절입니다. 이른바 만주족들이 큰 한족이 살고 있는 중국 대륙을 지배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면 각 지방의 기관장을 만주족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주에 살고 있으면서 말 좀 할 줄 알고 사람 이름
정도 쓸 줄 알면 전부 뽑아서 중국 각지에 있는 지방장으로
앉혔습니다. 그러다 보니 만주 지역에는 인구의 공동(空洞)
현상이 생겼습니다. 비어 있었다는 거지요. 그러나 자기 민족의 발상지라고 해서 보호를 했지요. 그 넓은 만주 벌판이, 봄과 가을에 순시를 해서 대강 상태를 살피거나 왕이
때때로 와서 사냥이나 하고 가는 곳이 되어 버렸지요. 그래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야금야금 강을 건너가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불법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조사를 하다 보니까 일제 시대 이전에 벌써 그런 이야기들이 기록으로 남겨져 있었는데, 그걸 기초로 해서 쓴 소설이 [야정]입니다. 이 만주 이민의 선구자들은 때로는 쫓기고 약탈당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뺏기고, 자기 스스로도 농노로 전락하는 등 참기 힘든 노예 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한 군데에 오래 있지를 못합니다. 한 군데에
뿌리를 내릴 만하면 타민족에게 타격을 받아 다시 또 떠나가고, 만주족이나 한족의 부호들에게 아내나 딸을 빼앗기고 나면 그곳에서 살 수 없으니까 이주를 해 다시 농사를
시작하는 등 끊임없이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현실을 소설로 담다 보니, 자연스럽게 떠돌이 이야기가 되었습니다.어린 시절의 유랑은 정신적 자산이 되어저 스스로도 가정적으로 불행하게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계셨지만
다른 곳에서 살고 계셔서, 항상 아버지는 어디에 계실까 궁금하게 여기며 지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찾아뵙고 함께
살고 했습니다만, 그런 정신적인 유랑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떠돌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한자리에 붙박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못 쓰는 이유와 어린 시절의 경험이 상당히 농도 짙게 연결되어 있구나 하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작가의 내면 세계는 감수성이 가장 풍부한 어릴 적 경험에게 일생 동안 지배받는다고 봅니다.저는 딸 둘과 아들을 다 중매로 성혼시켰습니다만, 크게 내세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의 혼사에 즈음하여서는 무엇보다 사위나 며느리가
될 아가씨가 형제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자랐는가 하는 걸
먼저 봤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다음 일이고, 적어도 셋 이상이 되는 가정에서 형제들 간에 싸우고 매맞아 가면서 자랐는가 하늘 걸 봤습니다. 요즘 결혼하는데 보면 남자나 여자나 무슨 대학을 나왔는가, 저 집에 돈이 많이 있는가, 실력은 별로 없어도 돈만 많으면 되고 시집올 때 백금 같은 것을 많이 가져오는가를 많이 따집니다. 이것도 우리 가족 개념의 이완 현상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데서 자랐는가를 첫째 조건으로 선택하기로 하고, 마누라와 합의하는 데 한 3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대학은 삼류를 나와도 좋고, 그보다 어떻게 자랐는가가 더 중요하다. 저 자신 어린 시절에 불우하게 자라서 부모의 애정이며 가족의 따스함이나 형제를 모른 채 육십을 넘기고 난 다음에 내 아들딸들만은 공부보다도 옳은
가정 속에서 자라난 사람을 만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자기 이름이나 쓸 줄 알고 사기나 안 치면 되지 일류 대학 나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해가 빠르고
원만해지면 집안이 평온해집니다. 형제간에 다투면서 살아왔으니까 남의 사정을 잘 알고 양보할 줄 압니다. 외톨이로
자란 애들은 성격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아주 모나고 이기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합니다. 형제들과 같이 살면서 밥그릇 싸움하고 티격태격하며 자라면 성격이 원만해지기 마련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산다는 게 대단히 철학적이거나 심리적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아주 단순하고 사소한 것에 더 많이 집착합니다. 아주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데서 삶의 지혜가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아주 사소하고 잊어버리고 있던
것에서, 하잘것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습니다. 사실은 저도 작가 생활을 하다 보니까 여러 가지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필요에 의해서 읽기도 했고, 명색이 지식인이라고 소문이 났는데 이런 책 정도는 읽어놔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하면서 읽은 책도 있는데, 지나고 보니 다 소용없었습니다. 그것이 내 정신적인 성장의 밑바탕에 밑거름이 되는 것은 분명하겠지요.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작가로서 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준 것은 틀림이
없겠지만, 현실적인 삶에서 벌어지는 충돌을 해결하는 데는 그런 지식들 아닌, 아주 단순하고 하잘것없고 사소한 데서 해결책이 많이 나올 수도 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편하더라는 겁니다.
간혹 고향을 찾아갑니다. 어머니가 88세이신데 거동이 좀
불편하십니다.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동생이 모시고
있는데 1년에 한두 번 갑니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텃밭에서 김을 매시다가 일어나 마당으로 오시면서, 치마를
걷고 몸뻬에 달린 주머니에서 핀을 뽑아 뭔가를 꺼냅니다.
교편 잡고 있는 아들에게 받은 용돈을 쓰지 않고 모았다가
꺼내서 "뭘 사줄까?" 하고 묻습니다. 짜장면인가 간짜장인가를 묻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아닙니다. 나는 서투르나마 어머니가 손수 무친 콩나물, 된장국 끓여서 풋고추에 먹고 싶은데 어머니의 생각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음식이 바깥에서 말똥처럼 구르다 온
아들녀석의 입에 맞을 리가 만무하다고 지레짐작을 하시는
거지요. 고향 마을에 중국집이 딱 한 집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 음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어머니의 머리에는
청요리집이에요. 청요리집 음식을 애한테 사먹여야 되지,
내가 만든 것이 음식이냐고 생각을 하시는 거지요. 그런 데서 어머니께서 아들에 대해 품고 있는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됩니다. 어느 날 동생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약을 잡숫고 거동할 만하면 노인정에 가신답니다. 노인정에 가서는 고스톱은 어려우니까 민화투에 꽃만
맞추기로 10원짜리를 치신답니다. 그런데 모두 똑같이 다섯 장을 가지고 쳐야 하는데, 어머니만은 꼭 일곱 장을 가지고 친다는 거에요. 그것도 공공연하게 숨기지도 않고 친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함께 치시는 분들이 얘기를 안한다는 겁니다. 왜 얘기를 안하느냐면 얘기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왜 얘기를 못하느냐 하면 저 분의 아들이 김주영인데, 서울에 가서 엄청나게 출세를 했기 때문에, 걸핏하면
텔레비전에 나오고 책을 내서 유명 인사가 되었기 때문에
도저히 얘기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일곱
장을 가지고 친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저는 속으로
'야! 정말 내가 효도를 하는구나. 돈은 많이 안 부쳐드려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비밀스러운 끈 같은 것, 그런 것을
느낄 때 울컥하고 울음 같은 것이 올라옵니다. 가서 돈을
얼마 드리고 어머니의 어깨를 동동 두드려 드리지 않아도
혈육의 정이라는 게 너무너무 밑에 많이 깔려 있음을 느낍니다. 애정이기도 하고 때로는 사랑이나 미움이기도 하고
비빔밥 같은 것이 얽혀 있어서 도저히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됩니다. 또 그런 면에서 아! 어머니와 나 사이에 애정이라는 것이 이렇게 얽혀져 있다는 걸 느끼게 되지요. 애정이라는 게 별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거기에 무슨 철학이
있습니까? 가정의 규격화된 이론이 적용되어 있습니까?
애정을 느낀다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얽매어 주고 연결을 시켜주는 거기에는 아주 사소한 것, 웃음거리에 불과한 그런 얘기들이 우리들의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는 하나의 연결고리가 되어 있다고 느낄 때가 상당히
많다는 겁니다.
가난했던 시절의 저녁놀과 양귀비와 그리움과한번은 예고도 없이 들렀는데 텃밭에 계시다가 10분 정도 뵙고 나서는데 우물가에 풀이 하나 올라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오면 주려고 그걸 쳐내 버리지 않았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양귀비꽃이었습니다. 양귀비는 열매가 맺혀서 아편이 나오는데 이건 꽃피기 전이지요. 그걸 설렁 뽑아가지고 씻어서 점심 먹을 때 같이 먹으라고 주시는 겁니다. 동해안에 있는 횟집에서 씻어달라고 해서 먹었지요. 그게 굉장히 맛이 있었는데, 식후에는 얼마나 잠이 쏟아지는지 아주 시원하게 잘 잤습니다. 일어나 보니 문득 어머니가 아들에게 물 먹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4,5 년 전
일인데 아직까지도 그걸 못 잊고 있습니다. 애정이기보다
분명히 물을 먹인 것 같아요. 빌빌거리고 정한 자리도 없이
돌아다니니까 어디 가서 먹고 잠이나 실컷 자라고 그러신
것 같아요.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떠돌이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떠돌이의 작품을 꾸준히 써 나가고 있습니다.제가 이렇게 건강하게 별 잔병이 없이 60을 넘겼지만,
때로는 담배를 워낙 많이 피우니까 폐암에 걸리지 않을까
하고,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하루에 두 갑 정도 피우지만 술은 끊어도 담배는 못 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 기대하는 것은 내가 군에 입대하면서부터 담배를 줄기차게 피워 왔는데, 내 체내에 암으로 전이되지 않는 어떤
방호벽 같은 것이 신체 각 내부에 설치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자정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신체에도 자정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건강하게 지내는
것은 가난한 시절을 보내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가난했기 때문에 등 푸른 생선, 즉 고등어, 꽁치
등을 먹고 장으로 돌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여름
햇볕에 절어서 냄새 나면 소금을 치고, 굼벵이가 있으면 또
소금을 친 생선, 옥수수, 감자, 고구마, 무청 나물 이런 것들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경험들이 내 문학에 어떤
톤이 되어 주었다고 봅니다. 그와 함께 감수성이 더없이 풍부한 어린 시절에 품었던 바깥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며 호기심이 오늘날의 나로 하여금 떠돌이 문학을 깊이 파고들게 만든 힘의 원천이 되었다고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