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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감 음악 방 ☞ 스크랩 김도향 노래모음
서예촌 추천 0 조회 54 13.03.11 08: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랭그리 팍의 회상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 김도향,조영남


벽오동


바보처럼 살았군요(라이브버젼) 


바보처럼 살았군요


고독 / 김도향, 이화


 


목이 멘다 - 김도향



 


 


김도향씨의 원래 꿈은 가수가 아니라 영화감독이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64학번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제대 후에는 영화를 만들 자신이 없었다. 
여러 곳에서 조감독으로 그를 불렀지만, 영화판 대신 다방과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렀다.
가요계 대표적인 기인으로 통하는 김도향은 1970년 투코리안스라는 
듀오로 데뷔, ‘벽오동 심은 뜻은’ ‘언덕에 올라’ 등의 히트곡을 통해 국내 
솔 및 블루스 장르 보컬리스트를 대표하게 됐다. 
이후 73년부터 CM송계에 뛰어들어 ‘줄줄이 사탕’ ‘월드콘’ ‘스쿠루바’ 
‘맛동산’ ‘알사탕’ ‘뽀삐’ ‘삼립호빵’ ‘아카시아껌’ 등 우리가 익히 아는 
CM송을 만들어냈다. 

김도향은 지금까지 국내 CM송의 대부라 할만큼 오랜 세월동안 
한 분야를 깊이 있고 넓게 파오고 있다. 
방송되는 국내 거의 모든 CM작품들(3천여 편)을 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파를 타지는 않았으나 실제로 제작된 CM송은 줄잡아 1만여 편. 
게다가 소리로 몸과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명상음악까지 연구, 
30장 짜리 CD역작을 내놓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70년 9월 1일 TBC '게임쇼'에서 '벽오동 심은 뜻은'이라는 노래로 
데뷔를 했다. 그리고 현재 미국에 있는 손창철씨와 함께 '투코리안즈'라는 
듀엣으로 활동하다가 1972년 10월 해체를 했다. 
당시 김도향씨는 '언덕에 올라' '젊었다'라는 노래로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1974년 가요계에 휘몰아친 '대마초 파동'으로 자의 반 타의 반 가요계를 
떠났다. 당시부터 손을 댄 것이 CM송 기획이었다.

김도향씨(60)의 이름 앞에는 항상 '기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그렇다고 계룡산에서 '신기'를 보여준 것도 아니었고, 
솥뚜껑을 깨는 차력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잘나가는 가수 생활과 CM송 제작자를 때려치우고, '입산수도'를 하고 
명상에 빠졌던 모습 때문이다. 
20여 년간 가수가 아닌 수도자의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섰으니, 
'기인'이라는 단어가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다.

이어 80년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로 초히트를 했지만 81년 돌연 도를 
닦겠다며 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90년 ‘태교음악’ 등 명상음악가로 변신했고, 
2001년 ‘항문을 조입시다’라는 이색 음반을 소개했다. 
2004년 김창렬을 프로듀서로 한 정규음반 발매하며 가요계로 돌아왔다.
그는 가수의 몸을 만들며 매일 3시간씩 노래 연습을 했다. 
가수로 활동하는 데 레퍼토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젊은 가수의 
노래 중에서 나이 먹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곡들을 뽑았다.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 김범수의 '보고 싶다', 임재범의 '너를 위해' 등을 
김도향식으로 리메이크해서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렇게 그는 다시 가수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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