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가 고파 나간 거리
증 언 자 : 천순남(남)
생년월일 : 1953. 12. 12 (당시 나이 27세)
직 업 : 목공 (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8. 12
개 요
25일부터 박남선의 지시로 식량보급 차량에 타고 시내 곳곳에 돌아다니면서 식량을 보급하는 일을 했다.
젊은 여자를 희롱하는 계엄군
1980년 5월 18일 나는 서부경찰서 앞에 있는 주택공사장에서 목수일을 했다.
목수일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배워 마룻바닥이나 천정 등 주로 목재와 관련된 일을 맡았다. 하청을 받아 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는 일용노동이었다.
온종일 힘든 작업에 시달렸지만 '시마이시간'(작업이 끝난 시간)이면 동료들과 술도 한잔 걸치고 이것저것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날(5월 18일)도 오후 4시경 참을 먹기 위해 쉬면서 막걸리를 걸치고 밖을 내다보았다. 최루탄가스 냄새가 역하게 났다. 학생들이 데모를 하는가보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오후 6시경에는 얼마나 싸움을 치열하게 했는지 공사장에까지 최루탄이 날아왔다. 공사장이 경찰서 바로 건너편이었으므로 일을 계속할 수가 없어 작업을 중단하였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경찰서 앞에 평소와는 달리 계엄군이 서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아세아극장을 지나 광주고속 쪽으로 갔다. 광주고속 입구의 유리창이 깨져 있었다. 동료 두 명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는데 계엄군이 곤봉을 들고 달려들었다.
계엄군들이 도로에 서 있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같은 사람들을 설마 잡아가진 않겠지' 생각했는데 갑자기 우리를 향해 쫓아오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자전거를 재빨리 몰아 계림동 쪽으로 갔다. 계림동파출소 앞에서도 계엄군이 지나가는 청년과 중년의 시민들을 무조건 곤봉으로 후려치는가 하면 팬티만 입혀 차에 싣기도 했다. 그중 한 놈이 나를 멈추게 하더니 곤봉으로 때렸다. 나는 그 경황중에도 자전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나를 잡고 늘어지던 계엄군이 자전거를 보고는 데모할 놈이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놓아주었다. 그때는 두려운 마음에 군인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지만 왜 군인들이 시민을 잡아가고 때리는 것인지 생각할 수록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떤 놈은 때리고 어떤 놈은 죄없이 맞으면서도 소리 한 번 못 지르고 벌벌 기어야 하는지 기가 막혔다.
5월 19일 동네에 나가봤더니 시내에 난리가 났다고 너도 나도 한마디씩 했다.
계엄군의 횡포가 날로 더해 시민들이 투석전을 벌이고 있다고도 했다. 도청에서 사람들이 모인다고 하길래 궁금해서 나가보았다. 그때가 오후 4시나 5시쯤 되었을까. 도청 정문에 계엄군이 진을 치고 있었고 충장로, 금남로에서는 시민들이 투석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시내상황을 구경하였다.
도청 쪽에서 마주 보이는 상무관과 전일빌딩 사이에 서 있을 때였다. 도청 옆의 보이스카웃 건물과 마주한 골목길에서 계엄군이 여자를 붙잡아놓고 옷을 홀랑 벗겨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힌 채 손으로 팬티와 브래지어를 당기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저런 죽일 놈들이 천하에 또 있을까. 저런 놈들을 그냥 보고만 있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금남로에서 계엄군이 도청 쪽으로 밀리자 도청 쪽에 있던 계엄군들까지 합세해 몽둥이를 휘두르며 시민들을 잡아들이느라 혈안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몸도 피할 겸 집으로 돌아왔다.
5월 20일 오후 2시경 시내상황이 궁금해 전일빌딩 앞으로 나가보았다. 금남로 도로변에서 투석전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전날처럼 치열하지는 않았고 시민들은 건물 사이사이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계엄군이 여자의 유방을 잘랐다는 말이 들렸다. 어제 보이스카웃 건물 옆 골목에서 본 여자가 퍼뜩 생각났다.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 그 여자가 변을 당한 것은 아닐까? 계엄군들이 정말 유방을 도려냈을까?' 등 많은 생각을 했다. 인간으로서 차마 그런 행위를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지만 한편으로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주에 사람을 잡아다 짓뭉개는 놈들이니…….
5월 21일은 석가탄신일이었다. 친구 김기준의 어머니가 불교신자 인데다가 기준의 생일이 석가탄신일이어서 해마다 음식을 나누어먹곤 했다. 이날도 오전 11시경 기준이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광주교대 앞으로 나가보았다. 버스와 지프차에 탄 사람들은 총을 메고 있었다. 또한 머리에 띠를 두르고 마스크를 한 젊은이들은 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자 고쳐보려고도 하지 않고 곧바로 불을 질렀다. 좋은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불타고 있는 차 쪽으로 다가가는데 기준이 말렸다. 저렇게들 마음대로 행동하는 곳에 가서 어쩌려고 하느냐며 술이나 더 마시고 그냥 집에 있자고 했다. 다시 기준이 집에서 시국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5월 22일부터 24일까지는 아내가 자취하는 두암동 셋방에서 보냈다. 나의 부모님이 집사람과의 결혼을 반대해 그때는 정식으로 혼인해서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총알이 쌩쌩 날아다녀 방안에서만 살았다.
쌀을 구하러
25일 아침밥 먹을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부엌에서 밥을 내오지 않았다. 궁금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식량이 떨어졌다며 요기나 하자고 시래기죽을 내미는 것이었다. 멋적은 듯 눈치를 살피는 아내에게 사실은 내가 사전에 챙겨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 여자가 먹을 것도 제대로 못 챙긴다고 투덜거리며 집에서 나왔다.
우선 쌀집을 하는 친구집으로 갔다. 목수일을 함께 하던 사람으로 그의 안사람이 쌀가게를 했다. 아는 사람이라고 우리 집과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졌지만 평소에 그곳에서 쌀을 사다 먹었다. 호주머니에 돈도 별로 없었고 가게문도 닫혀 있어서 곧장 친구에게 갔다. 쌀이 있으면 조금만 사자고 했더니 시내가 뒤집혀 쌀이 나오지 않는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친구 말대로 가게에는 쌀이 없었다.
아무리 그렇기로 쌀 한 되가 없다고 거절하다니 괘씸했다. 그런데 그집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보니 창고 뒤에 쌀가마가 쌓여있는 것이었다. 하도 기가 막혀 두 말 하지 않고 쌀가게를 나와버렸다.
화가 잔뜩 나서 풍향동의 기준이네로 갔다. 다짜고짜 쌀가게에서의 일을 이야기했더니 "이런 난세에는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다 없는 놈들만 서럽지, 광주시내도 공무원이나 잘사는 놈들은 이미 도망가 버렸다"고 기준이도 투덜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백림약국 앞에 이르니 사람들이 '경남'이라고 써붙여진 12톤 화물차에서 생활필수품을 나누어 갖고 있었다. 고무장갑, 전기밥솥, 비누 등을 서로 가져가라며 큰 인심이나 쓰듯 서로 주고받았다. 한 아주머니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경상도 차가 담양에서 들어오다가 시민들에게 걸려 운전기사가 차를 버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주인 없는 차를 만나 저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나도 가서 받고 싶었지만 어색하기도 했고 공짜라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냥 보고만 있었다.
또한 광주고속과 중앙고속, 대창버스에는 '김대중 석방하라', '노동삼권 보장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달고 전남방직 여공들이 타고 있었다. 전두환이 누구인지 노동3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내던 나는 좀 의아하기도 했고, 한편 어린 여공들이 기특하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국민학교 4, 5학년 쯤으로밖에 안 보이는 어린애가 "살인마 전두환을 죽이자"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애가 무슨 곡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집에서 나온 후 계속 분통터지는 일만 목격하다 보니 시내로 나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유리창 밖에 망이 씌워진 경찰차가 지나가길래 도청으로 가는지 물어보고 탔다. 도청 앞 광장은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상무관에 시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기저기 피묻은 천에 덮여 있는 시체에서 악취가 지독했다. 밖으로 나와 타고 왔던 차에 다시 올라탔다. 차는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이 밥을 나누어주었다. 도청 안의 오른쪽 2층 건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는 배가 고팠던 참이라 맛있게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도청 정문 쪽으로 내려갔더니 상황실장이라고 하는 박남선 씨가 주민등록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주민등록증을 확인한 후 무기를 다룰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다룰 줄 모른다고 하자, 그는 한 사람이라도 더 무장해야 한다며 M1과 실탄 한 클립을 주었다.
박남선 씨는 총을 든 여섯명을 경찰버스에 타라고 명령한 뒤 사람을 수송하라고 지시했고, 현재 식량이 떨어지고 있다며 '식량보급 차량'이라고 쓴 빨간 천을 달아주었다. 그러면서 먹을 것을 시민들에게 청해 구해 오도록 했다.
식량보급 차량
우리 여섯 명은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음식은 못 구하고 사람들을 싣고 도청으로 왔다. 오후 5-6시 정도였는데 도청 앞에서는 시민궐기대회를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참여하지 못했으나 나중에는 구호를 외치며 함께 했다. 그리고 남자들 서너 명이 얼굴이 둥글고 입이 쭉 내밀어진 여자를 잡아 어깨를 부추겨서 '간첩이다' 하며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다.
궐기대회가 끝나고 9시경 도청으로 들어가서 밥을 먹었다. 여섯 명이 함께 있었는데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고 동지애 하나로 행동하고 있었다. 무전기 3대를 우리가 탄 차에 배급받아 그날 저녁 상황을 판단하여 위험한 일이 있으면 도청에 알리기로 하였다. 상무관 앞에서 차에 타고 대기하던 중 밤 10시경 무전기로 "황금동 콜박스에 강도가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버스를 타고 황금동 콜박스 거리로 갔는데 어디에서 강도사건이 생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버스기사는 임영록이었다. 기동타격대란 사람들이 우리보다 일찍 와서 콜박스 쪽을 뒤지고 다니던 참이었다. 우리도 그곳을 뒤져보았지만 강도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계속 찾아보자고 학생회관 쪽으로 가면서 강도가 있는지 살펴보던중 학생회관 옆에 있는 여관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집으로 들어가 아무 일도 없는지 물어보았지만 별다른 일은 없다고 했다.
여관집 주인이 우리들에게 밥을 주며 필요한 것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는 중에 총소리가 나길래 재빨리 여관 건물에 올라가 잠복했다. 학생회관 건물과 우리들이 있는 여관 사이에 건물들이 많아 어디서 총소리가 나는지 분간하기 어려웠으나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사람이 보여 M1총을 쏘았다. 한참 동안 총격전을 했어도 밤이라 어두워서 상황파악이 어려웠다. 거리가 조용해지자 옥상에서 내려와 여관 현관 복도에서 밤을 새우기로 하였다. 혹시 이 집으로 강도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도청으로 무전연락을 해 놓고 여관에서 교대로 잠을 자기로 했다. 여관집 주인이 음료수와 먹을 것을 주었고 이불도 가져다주었다. 그 여관 이름이 무엇이 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5월 26일) 여관에서 밥을 먹고 도청으로 갔다.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을 상황실장에게 기사 임영록이가 보고한 뒤 계엄군과 대치되어 있는 학동으로 갔다. 증심사 들어가는 길목 하천에 군인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유리창은 깨졌고 군데군데 피가 범벅이 되어 차의 이곳저곳에 묻어 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여 코를 막고 계속 증심사 쪽으로 가보았다. 현대교통 종점 못미처에 산등성이에서 희끗희끗 계엄군이 움직이며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무서워서 더 이상 가지 못하였다.
도청으로 가서 무전기로 연락하고 수송차량 역할을 하기 위해 백림약국 쪽을 지나 광주역으로 가서 사람을 싣고 돌고개로 가는중이었다. 무전기를 통해 식량보급 차량은 음식을 얻는 데 주력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돌고개 부근의 슈퍼가 문을 열고 있었다. 나와 두 명이 차에서 내려 어깨에다 총을 멘 채 가게 앞으로 가서 주인(양옥시씨)에게 정중한 말로 "도청에 식량이 떨어졌으니 도와주십시오" 하고 부탁했다. 슈퍼 주인이 고생이 많다며 라면 두 상자, 빵 한 상자, 음료수 두 상자를 주었다. 이것을 차에 싣고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화정동으로 갔다.
나무 각목과 철을 얽어 바리케이드를 쳐놓은 것이 보였다. 통합병원 쪽을 똑바로 쳐다보았더니 탱크가 세워져있었다. 그것들을 보고 도청으로 들어가 싣고 온 음식을 내려놓았다. 점심을 도청 안에서 얻어먹고 빵도 하나 받아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시민들이 차츰 분수대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궐기대회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도 궐기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무관 앞에 차를 세워 놓았다. 타격대는 차번호를 주었는데 내가 탄 버스는 차번호가 없었다. 어제와 같은 시민궐기대회를 통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계엄군의 만행을 규탄하고 광주시를 끝까지 지킬 것을 다짐했다. 궐기대회는 해 넘어갈 무렵에 끝났다.
우리 여섯 명은 도청으로 들어가 왼쪽 식당에서 밥을 먹고 버스에 대기하고 있었다. 27일 새벽 4시경 기동타격대 3조인가 4조에서 계엄군이 밀고 들어온다는 소식을 무전기로 전해 주었다. 곧이어 상황실장의 방송이 들려왔다.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모여주십시오. 계엄군이 광주시로 진입해 들어오려는 중이니 시민들은 도청에 모여 죽더라도 같이 죽고 살더래도 같이 살아 끝까지 광주시를 지킵시다."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도청 안에서는 고등학생이고 대학생이고 할 것 없이 총을 지급하여 YWCA, YMCA, 도청, 은행 건물 등 주요 건물에 배치하는 등 서둘렀다. 갑자기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으니 이틀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고 연락을 못 한 것이 떠올랐다. 식량을 마련해 두지 않은 안사람이 괘씸하여 쌀을 구하러 시내까지 왔다가 이렇게 된 것이었는데.
갑자기 집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사 임영록에게 집에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차를 타고 광주은행 본점 쪽으로 가는데 1, 2, 5 기동타격대가 내가 탄 차를 못 가게 막았다.
"지금부터 상황실에서 외부로 나가는 차량은 발포를 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누가 그랬느냐?"
"상황실장 박남선이가 그랬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가지 못하고 상무관에 버스를 댔다. 무전기에서는 계엄군이 들어온다고 소식을 알려오지, 방송을 하고 다니는 거리는 온통 공포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오히려 방송 때문에 사람들은 전혀 얼씬거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우리도 총을 쏘기 시작하면 실탄이 더 필요할 것 같아 탄창 하나, 카빈 실탄 12발씩을 여섯이서 나누었다. 그때는 누가 총을 관리하여 나누어준 것도 아니고 무기가 있는 곳에서 가져가도 아무런 규제도 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도 총을 주면서 잘 쏘라고까지 하였다.
상무관 앞에서 계엄군이 들어올 것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들어오지 않아 깜박 잠이들고 말았다.
새벽 5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도청 쪽에서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소리가 진동하였다. 친구의 동생 백00가 갑자기 내가 탄 차로 다가왔다. 총알이 사방 군데 군데에서 불통 튀듯이 튀겼다. 기사 임영록이가 탈출하자고 했으나 그 상황에서는 도망갈 곳도 없는 것 같아 차에 그냥 있자고 하였다. 또한 우리들이 총을 가지고 있으면 개죽음이라고 말하며 군인들이 입은 비옷과 총, 실탄을 차 맨 뒷자리에 있는 자리 밑에 넣고 옷으로 덮어버렸다. 운전기사는 운전석으로 고개를 숙였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자리에 앉아 있었다. 기사가 운전석에서 밖으로 빠져나갔다.
운전기사가 빠져나가는 문을 통해 밖이 보였는데 헬기가 불을 환하게 내비쳤고 탱크도 쿵쿵거렸으며 거리는 대낮처럼 환하게 보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의자를 머리에 대고 밖으로 슬금슬금 빠져나오려는 순간 총알이 내 왼쪽으로 10센티미터 정도 피해 날아갔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엎드려 차에 나오는 순간 "총 들고 나와라.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계엄군이 총을 들이대었다. 버스 문을 열고 손을 들고 나가는데 계속 총을 쏘아댔다. 발 사이로 총알이 튀어나갔다.
차에 탔던 우리들은 도청 안으로 끌려갔다. 계엄군들은 우리를 세워놓고 호주머니 것을 다 내놓으라고 하였다. 기사한테만 총알이 나왔고, 나머지는 아무런 총기류도 나오지 않았다. 계엄군들은 "이 새끼들, 죽여버린다"며 호주머니를 뒤져 나의 독일제 라이터를 압수해 가버렸다. 그러고는 워카발로 조인트를 까면서 엎드리게 해놓고 머리며 허리, 다리 등 온몸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비디오에 내 모습이 찍혀
맞고 있는 중에 도청 안에 있는 45세 가량의 나이 든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까지도 우리와 같은 처지에 도청 안에서 함께 움직였다. 인상착의는 곱살하였고 마른 형이었으며 공무원처럼 머리가 짧았고 키는 크고 고동색 잠바 차림이었다. 그가 군인하고 합세하여 엎드려 있는 우리를 보더니 발로 차면서 빨간 매직으로 옷등에 '극렬'이라고 썼다. 그 사람이 죽도록 미웠다.
고개를 숙이고 팔을 뒷짐진 뒤 엎드려 있는데, 우리가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총알이 튀어와 엉덩이와 허벅지를 관통해 갔다. 나는 아픔을 느낄 틈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계엄군이 "개년! 너보고 누가 방송하러 다니라고 그랬느냐?"고 소리소리 지르길래 고개를 들어 살짝 보는 순간 "뭘 봐?"하고 워카 발로 머리를 짓이겼다. 아마 어떤 여자가 계엄군에게 잡혔던 것 같다. 계엄군은 경상도 말투였다. 8년이 지난 후 비디오를 보았더니 그때 내 모습이 찍혀 있었다 .
고개를 숙이고 땅만 보고 있었는데, 여섯 대의 차가 도청 안으로 들어왔다. 병장인가 하는 사람이 나에게 달려들어 경상도말로 "극렬분자구먼!" 하고 발로 배를 질러버렸다. 그러자 헌병대 군기과장이라고 하는 소령이 "왜 사람을 때리느냐! 때리지 마라"고 하며 말렸다.
상무대에 실려간 뒤 모래바닥에 거꾸로 처박혀 엉덩이를 하늘에 대고 뒷짐을 지고 있었다. 이름을 적을 때만 고개를 들었다. 온종일 대소변을 볼 수조차 없어 옷에다 대소변을 보아야 했다. 움직이기만 하면 워카발로 죽지 않을 만큼 쪼인트를 깠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조사를 세 번 받았다. 마지막 조사를 받을 때는 감각이 없었다. 몸에 폭도라고 씌어 있는 하얀 종이를 떼고서 사진을 찍었다. 머리는 길고 온몸은 땀범벅이었다.
5시경 헌병대 영창으로 들어갔는데 함께 왔던 6명이 서로 갈라졌다. 영창에 들어가서야 안도의 숨을 쉬고 있었는데, 사복을 입은 조사관이 나를 불렀다. 영창에서 나와 PX 옆에 있는 막사로 들어갔다. 막사 안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종이와 곤봉을 들었고, 또 한 사람은 오른쪽에 서서 곡괭이 자루를 들었고, 또 한 사람은 곤봉을 들고 있었다. 조사는 '데모를 했느냐, 안했느냐'는 질문에 '예', '아니오'로만 대답을 하게 했다. 이때 나는 영창에서 가장 먼저 불려갔기 때문에 요령도 없이 내가 했던 행동 그대로를 말했다. 세 명의 조사관이 돌아가면서 조사했다. 전두환이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냐고 묻고서는 머리, 어깨, 다리 할 것 없이 때렸다. 다음엔 '김대중이 석방하라고 했냐? 안했느냐? 시위를 하였느냐? 총 들었느냐?' 등 작성서류 순서에 따라 물었다. 나중에는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무조건 부인을 하였더니 조사관이 계속 몽둥이로 허리, 등을 마구 때렸다.
'총알 몇 개 들었느냐? 계엄군에게 쏘았느냐?'하며 계속 고문을 하였다. 세 명이 달려들어 어찌나 때리던지 마치 짐승들에게 뜯기는 것 같았다. 어깨가 시커멓게 멍이 들어 구렁이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자국이 나 있었다.
새빨갛게 피가 터지면 그때서야 때리는 것을 중지했다. 맞고 심문하고 고문하는 일을 몇 번씩 반복하였다. 무릎을 꿇고 엉덩이가 땅바닥에 닿게 앉아 있으라고 하였다. 엉덩이가 바닥에 닿지 않고 뜨면 곡괭이로 무릎을 얼마나 내려치던지 엉덩이가 바닥에 닿아버렸다. 이렇게 약 세 시간에 걸쳐 묻고 대답하여 매를 맞는 동안 나는 가족에게 해가 될까봐 될 수 있으면 안 했다고 빗대려고 했으나 어찌나 맹수같이 사람을 다루던지 변명과 함께 내가 했던 활동 등에 관해 그들의 요구대로 말하였다. 생각해 보고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 싶은 대답을 허위로 한 셈이다.
조사관이 나보고 너는 내일 아침 8시에 다시 나오라고 명령했다. 영창으로 들어갔더니 그곳에서 알게 된 윤영규 선생님이 왜 그렇게 맞았느냐고 놀라워했다.
막사에 들어가 조사받은 내용을 영창 안에 있는 사람에게 다 말해주었다. 윤영규 선생님이 우리는 죄인이 아닌데 뭐 하러 변명을 했느냐고 안스러운 듯 두둔하여 주었다. 나는 제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엎드려 있는 상태에서 말을 하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어깨, 다리 등을 찜질해주었다. 함께 있던 대학생들이 다른 방에 서 내가 너무 가혹하게 맞은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조건 했다"고 하라며 손짓을 衁, 遁, 鑁식으로 알렸다. 가장 먼저 조사를 받은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영창에 있는 사람들의 관심은 나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9시에 취침을 하는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앉은 채로 포개어 잠을 자라는 것은 뜬눈으로 밤을 새라는 말 밖에 되지 않았다. 그나마 아픈 나는 엎어져 있는 상태에서 말도 못 하고 움직이기가 곤란해 뒤척였더니 헌병이 앞으로, 뒤로, 옆으로 취침하라고 명령을 내리며 곤봉으로 쳤다.
견디기 힘든 고문과 조사
28일 8시에 불려간 나는 어제와 같은 심문과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아! 그때 심정은 철이라고 생긴 것만 있어도 너 죽고 나 죽자며 달려들고만 싶었다. 이젠 몸이 내 몸이 아니었다. 불똥이 튀기는 것처럼 온몸이 화끈거렸다. 실토를 안 하려고 훑어보아도 송곳 부스러기 하나 없어 반항할 수 없었다. 이틀 동안 조사한 결과를 조서로 만들어 내게 윽박지르듯 일러주었다. 무슨 대꾸를 하랴 싶었다.
너무 지쳐 있었기에 숨만 할딱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밥은 한 숟갈 뜨면 그릇이 빌 정도로 적게 나왔다. 얼마나 매를 맞았던지 나는 입맛이 없었다. 서로 마주 보고 밥을 먹었는데, 중학교 일학년생이 밥을 놀란 얼굴로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경황에도 해남서 왔다는 24, 5살 정도의 청년 셋이서 중학생 밥을 뺏어 먹으려고 하였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러랴 싶으면서도 배고프기는 다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구는 것이 발끈 화가 났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들에게 "너희들만 배고프냐! 저 학생은 배가 안 고프겠냐? 생각 좀 해 보라"고 했다.
그들은 그들대로 안 먹는 밥을 먹을려고 했을 뿐인데 왜 그러느냐며 대들었다.
이렇게 입씨름이 오고 간 것을 헌병이 보았던지 우리를 나오라고 하여 매를 때렸 다. 죽음을 앞둔 죄인에게도 밥상머리에서는 욕을 주는 법이 아닌데 상무대에서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았다.
보름 정도 지나니 허기가 져서 도저히 배고픔을 참기 어려웠다. 빈혈증세가 나타난 것은 이때부터였고 어지러워 조금도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아프다고하면 통합병원에서 의사가 나와 치료를 해주었으나 약을 한 움큼씩 주는 것으로 치료를 끝냈다.
영창에 있는 구속자들이 상무대로 조사받으러 가는 과정에서 통합병원에서는 밥도 많이 먹고 고기도 준다는 말을 듣고 너도 나도 통합병원으로 옮겨가기를 희망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반찬은 소금과 깍두기 두 개가 고작이었으니 밥이라도 많이 주는 감방에 갇히길 희망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통합병원 직원이 주는 약을 모아 한꺼번에 먹고 한 시간 후를 기다려 게거품을 품었다. 통합병원으로 옮겨가기 위해서였다.
영창 안에서 조사를 받고 온 윤강옥(김영철-조사자주)씨는 스스로 벽돌벽에 머리를 찧었고, 정동년씨는 밥을 먹다가 화장실로 들어가 스푼으로 동맥을 끊으려다 실패하였으며, 또 다른 이는 메리야스로 목을 매려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
탈출의 유혹
나는 원래 목수일을 잘하였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은 기술이 있어서 그 안에서도 내 기술을 써먹을 수가 있었다. 목수 경험이 12년 정도였으니 그 안에서 가장 경륜이 높은 목수로 발탁되어 각 영창마다 돌아다니며 침상을 고쳤다. 그리고 빨랫대, 침상, 모기장도 만들었다. 어느 날은 조사실로 나오라 하기에 감시받지 않고 혼자서 나갔다. 목수는 으레 일만 잘하려니 싶어서 보호감시를 소홀히 했던 것 같다. 막상 영창에서 조사실을 혼자 찾아가는데 어디가 어디인지 잘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철조망 너머에 민가가 보였다. 왈칵 탈주하고픈 마음이 샘솟았다. 그렇지만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 고초를 당할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되겠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약 한 시간 정도 어슬렁대다가 다시 들어가려고 하는데 헌병이 나를 보면서 놀랬 다. 혼자서 밖을 다녀온 나를 보더니 굉장히 놀랍고 의아스러운 듯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 영창을 맡은 헌병 하사가 있었는데 교수님들에게 사정없이 욕을 하길래, 거기 있는 모든 인원들이 헌병을 향해 철창을 흔들며 "너는 부모도 없는 자식이냐"며 죽여버리겠다고 대들었다. 그러자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비상이 걸린 듯 시끄러웠다.
얼마 후 별 두개를 단 군장성이 오더니 무엇을 원하길래 이렇게 어수선하냐고 물었다. 밥을 더 달라는 게 주요한 요구였고, 치약, 치솔을 주라는 것과 성경과 불경만이라도 넣어달라고 했다. 그후로 밥도 많이 나오고 면회와 영치도 가능하게 되었다.
한번은 2소대 방의 침상을 고쳐주려고 들어갔는데, 어떤 조선대 교수님은 담배를 숨겨놓고 피우기도 하였다. 교수들은 몸을 검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담배를 몰래 피우는 것이 가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교수님이 피다 만 담배를 다른 사람이 피다가 헌병에게 걸리면 3일간을 두들겨맞아야 했다. 침상을 고쳐주는 일이었기에 나에게도 담배 두세 가치 정도는 거저 들어왔고, 나도 담배를 주는 사람에게는 못을 주었다. 담배는 주로 마룻바닥 귀퉁이를 잘라 세모지게 뜯어낸 다음 그곳에 숨겨두었다.
재판받을 시기에 면회가 허락되었는데, 사회적 지위가 있는 교수나 대학생, 사회 저명인사만 가능하였다. 조사실로 면회 나간 학생들과 교수들은 영양제와 과일을 쌓아두고 먹으면서도 심부름나간 나를 보면 아는 체도 않고 그들끼리만 먹었다. 평소 잘 알던 사람들조차 먹어보란 사람이 없었다. 입은 모두 한입이고 허기지고 갈증난 것도 모두 같았건만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인간의 신분은 서로 다를지 모르나 인간이고자 하는 것은 모두 같다고 생각했다. 과일 하나에 서운함을 느낄 필요가 없었지만 새삼스레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자들에 대해 노여움과 환멸을 걷잡기 어려웠다.
재판 받기 한 달 전 1979년 내가 집을 지어준 이 형사가 나를 불렀다. 이 형사가 나를 보더니 "너 이놈! 뭔 짓을 하다가 잡혀왔냐?"며 자기가 조사를 하겠다고 했다.
이형사가 공책 껍질을 넘기더니 A - 천순남, 주소가 빨갛게 적어진 것을 나에게 비추어주었다. 나는 너무 억울해 조사관에게 말했던 것을 그대로 이형사에게 되풀이했다.
이형사는 나에게 곧 나갈 테니 참아보라며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배가 고프니 빵이라도 사달라고 했다. 이형사가 나가고 나서 다른 형사가 들어오더니 이형사와 무슨 이야기를 했냐며 사실대로 말하라고 계속 사정없이 때렸으나 나는 혹시라도 이형사에게 폐가 될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버텼다.
검사에게 검치를 받으러 갔더니 내가 대답하지도 않았던 자술서를 가지고 따져 물었다. "왜 말하지도 않은 것이 나와 있냐"고 묻자 "삼청교육대로 가볼래" 하며 겁을 주었다. 아무 말 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신상에 이롭다고 하여 대답도 않고 그대로 있자 나가라고 하였다.
첫번째 재판공소장에 내란음모죄, 총기소지죄, 불법무기 단속 위반, 특수강도 절도, 살인미수혐의, 소요계엄법위반으로 되어 있었다.
5년 실형을 받았고, 이때 윤영규 선생님도 함께 있었으며, 고재호, 구명수도 알게 되었다. 재판장이고 심판이고 모두 하늘만 쳐다보고 구형을 내릴 때도 검사가 한 사람씩 나오라고 해서 공소장 사실을 확인, 대조, 심문을 하였다. 나에게 "시위를 하였느냐? 총을 들었는가?" 하고 묻자 "그런 사실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온 시선이 나를 향해 불호령이라도 하듯 집중하였다. 피고석에 선 나는 "검사가 삼청교육대에 보낸다고 하여 아무 말 않고 있었을 뿐이지, 하지 않은 것을 말한 적은 없다"고 하였다.
석방
석방된다는 소식은 10월 24일 오후 5시에 받았다. 그 전에 박춘배 형무반장이 나를 부르더니 더블백을 주면서 돈과 수표를 분류하라고 하였다. 영창에 갇히기 전에 소지품을 다 풀은 재소자의 물품을 구별하여 종류별로 선별하는 작업이었다. 돈을 보았지만 돈 욕심은 생기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목숨만 붙어나가면 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나 반지를 보게 되자 넣을까말까 망설이다가 옷주머니에 숨겨놓았다.
독방에 드러누워 자유롭게 쉴 수 있을 정도로 영창 안에서는 신임을 받고 있었고, 그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하건 간에 간섭을 받지 않았다. 은근히 반지가 걱정이 되었다. 만약 걸리게 되면 어떻게 되나 하고 마음이 불안했다. 오후 5시가 되니 존대말로 나의 이름을 부르던 형무반장이 사제로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철창 문을 나와 형무반장실로 갔더니 형무반장이 고생하였다고 하였다. 사제로 옷을 갈아입은 나는 주민등록증만 가지고 나왔다. 형무반장이 상무대 남문까지 바래다 주면서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 격려하여 주었다. 그는 호남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다독거려주었다.
상무대 버스가 월산동까지 바래다주었다. 함께 석방된 사람들이 술이라도 한잔하자고 권해 선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그 친구도 나도 돈은 없었는데 그 친구는 내가 행무반장에게 돈 2천 원을 받은 것을 보고 술을 권하였던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술을 조금만 마셨다. 술값을 지불하고 남은 5백 원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양동 복개상가까지 걸어가서 택시를 잡아 운전기사에게 나의 사정을 말하고 5백 원어치만 태워달라고 하였다. 먼저 기준이 집으로 갔더니 형님은 나 때문에 피해 다니고, 형수님은 친정에 가고 없고, 부모님은 목포에 계신다고 하였으며, 나의 마누라가 될 사람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암담하였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해 집안이 쑥밭이 된 것도 문제이지만 앞으로가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저녁내 생각하며 날을 새웠다.
우선 상무대에서 모르게 가져온 반지라도 팔아 가족의 행방을 아는 것이 먼저겠다 싶어 화장실로 가서 반지를 꺼내어보았다. 그런데 웬걸! 금반지가 구리반지로 변해 있었다. 순간 너무나 허망하고 기가 막혔다.
가족들의 고통
어머니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어머니 친구분 집으로 가서 나의 사정을 말했더니 담배 한 갑과 돈 2천 원을 주면서 형을 먼저 찾아보라고 하였다. 조카가 각화동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갔더니 집은 뜯겨지고 헐려지기 일보직전인 곳에서 어린 국민학생이 혼자 있었다.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주택공사를 함께 하던 오야지를 찾아가 일감 좀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일을 하기란 좀체 어려웠다. 그나마 고문당하여 예전같지 않은 몸이 밤에 진흙땅에 빠져 다리가 마비되어 버렸다.
나중에 형님과 형수가 왔다. 나로 인해 겪은 고생을 하소연하며 살아서 돌아온 것만도 다행이라고 한심스러워하였다. 기뻐하기에는 그동안 당한 일이 너무나 억울한 모양이었다.
몸이 좋지 않았음에도 7시 30분이면 일을 하러 나가야 했는데, 형수님이 제때에 밥을 주지 않아 노동을 하는 나에게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제대로 먹지 못한 것이 후유증으로 남았는데 집에 와서도 규칙적으로 먹지 못하는 것이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나를 형부라고 잘 따르던 마누라의 친구 이성숙이라는 여자의 전화번호가 발견되었다. 전화를 해봤더니 대창버스 주유소에 있다고 하여 찾아갔다. 이성숙 씨는 남편이 죽어 학생들이 준 1백만 원과 시에서 준 1백만 원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후로 그녀는 대창주유소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나의 마누라가 안내양이 되어 나타났다. 2개월 째 했다며 꿋꿋이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영창에 갇히게 된 것 때문에 나의 부모님께 얼마나 구박을 받았던지 두암동에서 살다 못해 일거리를 찾아 나선 것이 안내양 직업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월급을 9만 원 받았다고 하면서 8만 원을 주며 약 사먹고 건강을 회복하라고 하면서 나하고 살 의향이 있으면 방을 하나 얻자고 하였다. 그 후 꼬두메라는 동네에 방을 얻어 함께 살았다.
아이를 낳고도 얼마 지난 후에 결혼식을 올렸다. 목수로 함께 일했던 고재봉 씨가 외국에 갔다 와서 나의 사정을 잘 알아 1백80만 원이 든 통장을 주면서 우선 필요한 대로 쓰고 통장을 갖다달라고 하였다. 그 돈으로 지금 사는 방을 얻어 쉽게 살림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갈수록 몸이 나빠져 움직이기가 어렵고 가족을 부양할 돈을 벌지 못하고 있다. 아내는 조산소 파출부 일을 하며 나의 약값을 대고 있다. 죽지 못해서 할 수 없이 사는 것뿐이고 아내에게 미안해 미칠 노릇이다.
젊디나 젊은 사람이 육신을 움직이지 못하고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욕된 것인가. (조사.정리 양홍진)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휴일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