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의 바다는 일몰과 일출을 한 품에 담는다. 위로와 희망도 하나로 끌어안는다.
석문산에 올라 바라본 당진 왜목마을의 일출. 물결이 느리고 곱게 흘러간다.
왜목마을에는 물 위에 정박한 어선들이 많다. 여느 항구와 달리 아예 물 위에 두거나, 뭍에 올려놓는다.
갯벌을 헤치고 낙지를 끄집어 올리는 데 성공한다. 어떻게 이들은 이토록 손쉽게 낙지를 잡을 수 있는 것일까?
썰물 때, 양식장까지 걸어 나갔다. 바다 내음이 가득하다.
서해대교를 건넌다. 창 너머로 짙푸른 새벽 바다가 넘실댄다. 이것은 다분히 의식적인 여정이다. 긴긴 다리를 지나 어제로부터 오늘, 지난해로부터 올해를 경유하는 것. 서울의 밤에서 시작된 여로는 이제 당진의 아침에 닿아간다. 충청남도 북쪽 끄트머리의 작은 반도에 자리한 당진은 ‘군’에서 어엿한 ‘시’가 된 지 올해로 5주년을 맞았다. 그 위치상의 특징 덕에, 당진은 서해에서 보기 드문 해돋이 명당의 위치를 누린다. 바로 석문면 교로리의 왜목마을이다.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이름, 왜목. 나무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면 마을 뒷산의 능선이 가로 누운 사람의 형상과 닮아 보인다고 해서 ‘와목臥木’으로 불리다가 충청 방언의 발음을 따라 ‘왜목’으로 굳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서해대교의 남단에서는 30분을 더 달려야 마을 어귀에 닿는다. 먼 바다에 붉은 빛이 번져온다.
왜목마을, 해가 뜨고 지는 곳
온통 주홍색이다. 그 위로 잔물결만이 조잘거린다. 나이 든 여인의 손등처럼 부드럽고 섬세한 곡선들. 마음이 그것을 따라 너울거린다. 하늘과 바다의 경 계를 그리는 것은 드문드문 정박한 통통배, 그리고 저 멀리 공장의 굴뚝이 이룬 능선이다. 뱃머리는 느릿느릿 고개를 주억거리고, 연기는 구름처럼 스멀거린다. 장고항과 주변 섬들은 이제 막 선잠에서 깨어난다. 석문산에 오른다. 왜목의 물가를 내려다본다. 바다의 무늬와 색깔은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진다. 이런 풍경 앞에선 언어도, 수사도 빛을 잃는다. 얼음장처럼 매서운 해풍에 콧등이 얼어 터지더라도, 입술이 부르트더라도 온 감각을 다해 각인해두고 싶은 하나의 장면. 이곳의 일출은 ‘당진9경’ 중 제1경으로 꼽힌다. 노적봉과 촛대바위의 머리 위로 떠오르는 거대한 아침 해는 동서를 가로지르며 길게 뻗은 마을의 지형이 빚어낸 작품이다. 왜목마을의 해변 어디서든 일출을 바라볼 수 있지만, 뒷산인 석문산으로 올라가면 일몰까지도 감상할 수 있다. 해 뜨는 방향을 0도라고 할 때, 약 270도 방향까지 모두 바다가 내다보이기 때문이다. 앞바다에선 해돋이, 뒷바다에선 해넘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봄부터 가을까지, 날이 좋을 때면 이곳은 패러글라이딩장으로 사용된다고도 한다. 시간을 잘 맞추면 서해의 낙조와 함께 지면에 착지 하는 꿈 같은 경험을 해볼 수도 있겠다. 마음껏 게을러질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이곳을 다시 찾을 것이다. 그러곤 여기 누워 해 뜨고 지는 순간을 모두 누려야지. 그러고 나면 주어진 하루하루가 지금보다 훨씬 소중하고 절실하게 느껴질 테다.
마을 구석구석이 다 환하게 밝았다. 어둠이 물러가고 나니 바람이 한결 세차게 불어왔다. 예약해뒀던 낚시터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풍랑주의보 때문에 예약해둔 배가 나가질 못한다는 소식. 바다 한가운데까지 나가보겠다는 야무진 결심은 다 물거품이 됐다. 우럭이 제철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왔던 터라 적잖이 아쉬웠다. 병어, 서대, 물메기도 한창이라던데. 울적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무작정 갯가로 걸어나갔다. 바람결에 묻은 갯 비린내는 코끝이 찡할 만큼 지독했다. 그나저나 물때가 맞은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미 낙지 잡는 어민 몇몇이 나와 있다. 양털 부츠가 진흙에 뭉개지는 줄도 모르고 그 진기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갯벌에서 어떻게 그토록 민첩한 낙지를 잡아 올릴 수 있을까. 삽질에 여념이 없는 한 사내에게 물었다. “비결? 말해줘도 당신들은 못하지. 숙련자만 할 수 있거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손끝엔 낙지가 휘감긴 채 딸려왔다. 빨판이 탱탱해서 자꾸 양 동이 바깥으로 튀어 오르려는 것을 간신히 집어넣곤, 재차 이마의 땀을 닦아 내며 ‘덥다’를 연발한다. 노동의 숭고함 앞에선 칼바람도 무색하다. 오직 내 두 뺨만이 애처로울 뿐이다.
버그내 순례길을 걷다
합덕성당은 고풍스러운 만듦새 덕에 웨딩 사진 촬영지, 결혼식장으로도 자주 쓰인다고 한다.
일출의 황홀경 앞에서 정작 해야 할 기도의 제목도 잊었지만, 괜찮다. 당진에서 가장 영험한 땅, 버그내 순례길을 곧 밟게 될 테니까. 당진은 예로부터 서학의 고장, 순교자들이 일군 성지로 이름을 높였다. 항구에는 먼 나라에서 건너온 배가 자주 드나들었고, 내포(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가야산 일대의 10개 고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인데, 당진도 여기 포함된다) 지역의 뜨내기 상인들은 시대정신이 변화하고 있음을 민감하게 읽어냈다. 특히 백정부터 양반까지 모두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상은 빠르게 흡수됐다. 슬프게도 이런 사정은 이곳을 금세 피로 물들였다. 조정은 신분제를 어지럽히는 이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으므로, 외국인 주교부터 이제 막 사제 서품을 받은 어린 신부까지 가리지 않고 몇 번씩이나 목을 내려쳐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도 그중 하나였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사제품을 받고 1년 1개월 만에 순교한 젊은이는 이런 유언을 남기고 떠났다. 솔뫼성지는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집터를 중심으로 조성됐다. ‘소나무가 산을 이룬다’는 뜻을 지닌 솔뫼는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김진후 비오부터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까지 4대의 순교자가 삶의 한 시절을 보낸 자리다. 버그내 순례길은 바로 이곳 솔뫼성지를 기점으로 한다.
버그내 순례길의 기점, 솔뫼성지. 이곳에 올라선 15미터의 십자가 예수상.
입구에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당진의 어린이들, 그리고 김대건 신부가 손을 맞잡고 인사하는 캐릭터 동상이 세워져 있다. 문을 지나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가장 먼저 야외 회당인 솔뫼 아레나를 만날 수 있다. 아레나의 제단에는 김대건 신부 가족의 순교 기록화가 모자이크 성화로 남겨져 있다. 이를 둘러싼 12개의 기둥은 12 제자를 상징하는데, 가운데 베드로의 자리로부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고통스럽게 매달린 예수상이 눈에 든다. 15미터 높이의 이 조각상은 아시아 최대 규모의 십자가다. 그 뒤꼍으로는 ‘십자가의 길’이라는 이름의 소나무 숲이 이어진다. 그 맞은편에는 김대건 신부의 생가를 복원한 건물이 있다. 아담한 초가집 마당에는 그를 바라보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앉아 있다. 성지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은 순교자들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 철판으로 지어 올린 기념성당이다. 김대건 신부가 가까스로 귀국했던 순간 타고 있었던 배, 라파엘호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곳엔 당진의 바다를 담아낸 듯한 푸른빛의 스테인드글라스와 함께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자리한다. 김대건 신부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기 전 몇 편의 ‘복자상’을 통해 그려졌다. 그의 앳된 얼굴 뒤에 어른거리는 광배는 성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애달파보인다. 겨우 15세의 어린 소년이었던 김대건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고 있던 마카오로 건너가 사제 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고 돌아와 신부가 된 그는 5개 국어를 익힌 만큼 조선의 젊은 엘리트로 촉망받았다. 중앙 기관에선 그를 잃는 것이 아쉬워 몇 번이고 배교할 것을 명했지만 끝내 의로운 순교를 택하는데, 그의 나이 25년 1개월의 일이었다.
성지 순례는 합덕성당으로 이어진다. 1929년 설립한 이 성당은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고딕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벽돌과 목재를 함께 사용하고 종탑을 쌍으로 쌓아 올린 것 등이 건축적인 특징으로 꼽힌다. 1890년 에퀴를리에 신부가 이곳에 파견된 이래 2개의 본당을 설립했는데 합덕성당이 그중 하나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아산의 공세리성당이다. 그 시절 이곳 합덕성당 뒤편으로는 내포평야가 펼쳐졌다. 가을이면 수확한 쌀을 서울 신학교로 보내 수많은 사제들을 먹여 살렸던 땅. 실제로 합덕성당은 가장 많은 신부를 배출한 성당 중 한 곳으로도 이름이 높다. 지금은 봄이면 곳곳에 개망초꽃이 흐드러진다고 한다. 본당 안으로 들어서면 그림 같은 스테인드글라스와 벽돌 장식, 그리고 한글로 또박또박 쓴 글귀 하나가 눈을 사로잡는다. “사람이 보천하를 다 얻을지라도 제 영혼에 해를 받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제단 앞까지 걸어가 성가족상을 바라보며 품어온 기도를 읊조린다.
한국의 카타콤, 신리성지. 현재 공사 중이다.
합덕성당에서 마지막 행선지로 향하는 동안에는 들러야 할 2곳이 더 있다. 원시장-원시보 우물과 무명 순교자의 묘가 그것이다. 내포 지역의 첫 번째 교자로 알려진 원시장 베드로는 사촌 원시보와 함께 입교했으나 감옥에서도 신앙을 고백하며 끝내 순교했다. 이들이 살던 마을인 성동리에서 가장 오래된 샘으로 알려진 이곳 우물 터를 성지화한 것은, 순례자들이 마음을 정화하고 생명을 길어 마시길 기원하는 이유에서다. 목 없는 유골들이 수많은 묵주와 함께 발견되어 조성한 순교자의 묘는 두 차례의 파묘, 이장을 통해 지금의 자리를 얻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1.8킬로미터 떨어진 신리성지는 이 순례길의 종착지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교구였던 신리는 선교사들이 비밀 회합을 가졌던 곳으로 ‘조선의 카타콤’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곳에서 거처하던 다블뤼 주교는 조선의 제5대 교구장이었다. 주교는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하기까지 이 땅의 미래와 교인들을 위해 발로 뛰었던 인물로 손자선 토마스, 황석두 루카의 도움으로 책을 집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다블뤼 주교의 모습은 거대한 순교 기록화로 남겨져 있는데, 이를 그린 이는 5만원권 신사임당의 자태를 묘사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이종상 화백이다. 이 그림에는 삼베 두루마기 차림의 다블뤼 주교가 거룩하고도 처연한 모습으로 현현해 있다. 앞마당의 순교자 기념공원은 5명의 성인들을 부조로 새겨놓은 5개의 경당이 있다. 바람 불어오는 경당에 앉아 다블뤼 주교의 선한 얼굴을 마주하려니 괜히 눈이 시렸다.
당진의 맛
프란치스코 교황을 위해 차려냈다던 소들강문의 ‘꺼먹지 정식’.
먼 길 걸어왔으니 쉬어갈 곳을 찾는다. 2014년 여름, 서울에서의 시복식을 위해 내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 당진 버그내 순례길을 찾았을 때 저녁 식사를 했던 식당, 소들강문이다. 가을 무청을 소금에 절여 나물처럼 무쳐내는 향토 음식 ‘꺼먹지’가 밥상 한가운데 올라 ‘꺼먹지 정식’이라 불리는 메뉴가 있는데, 이는 ‘교황님 밥상’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교황님 밥상에는 물 좋고 햇살 좋은 땅에서 자란 두렁콩으로 만든 두부도 함께 오른다. 그 맛이 깨끗하고 담박해서 짭조름한 꺼먹지와 더없이 잘 어울린다.
신평양조장은 3대를 이어 오랜 세월 막걸리를 만들어온 도가다. 백련막걸리는 신평리를 넘어 당진을 대표하는 술로 사랑받고 있다.
맛깔스러운 음식을 먹고 나면 그에 어울릴 만한 술을 찾게 된다. 당진 전역을 통틀어 대표적인 특산물로 꼽히는 ‘해나루쌀’은 기름지고도 고소한 맛으로 이름이 높다. 이 쌀로 빚어 만든 백련막걸리 생각이 났다. 신평면에 자리한 도가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신평양조장은 1933년부터 술을 빚어온 우리 주조사의 유서 깊은 장소다. 향기로운 고택과 낡은 장독대가 그 세월의 더께를 짐작하게 한다. 이곳을 대표하는 제품인 백련막걸리는 연잎을 넣고 빚기 때문에달콤하고도 싱그러운 뒷맛이 일품이다. 시음뿐 아니라 이곳에서는 다양한 주조 관련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도 있다. 막걸리 빚기, 누룩전 빚기, 막걸리 소믈리에 과정, 증류주 내리기 등 교육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내용으로 이뤄진다. 고소한 쌀 내음 맡으며 취흥을 즐기기엔 이보다 좋은 방법도 없다.
삽교호에 가면 여러 가지 테마로 조성한 공원을 볼 수 있다. 놀이공원에는 당진 앞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관람차가 운영 중이다.
당진의 맛은 뭐니 뭐니 해도 해산물이 아닐까. 삽교호 방조제 인근에는 수산물 시장이 있다. 유난히 맛이 좋기로 유명한 우렁과 간재미를 넣어 만드는 요리를 만날 수 있다. 우렁된장국, 우렁쌈밥 그리고 간재미무침. 무엇을 시도하든 훌륭하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 서해 바다를 한입에 머금어볼 수 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인근에 조성된 유원지를 둘러보기에도 좋다. 대형 상륙함과 구축함에 해군 문화를 전시한 함상공원, 당진 앞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관람차가 우뚝 선 놀이공원을 슬슬 걷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다시 다리를 건너며
점등 직전의 서해대교 건너편에는 낙조가 한창이었다.
매산 해변 길에서 행담도와 서해대교를 향해 비죽 솟은 땅의 한편에는 그림처럼 자리한 카페 하나가 있다. 이름하여 해어름. ‘해넘이’를 의미하는 이 지역 방언이다. 어느새 해가 넘어가기 시작한다. 창가에는 이미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자리를 붙박고 앉아 있었다. 카페라고 해서 늘 커피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반짝이는 서해대교의 야경을 향해 몸을 틀어 고정한 이들의 옆얼굴은 한결 들떠 있었다. 건물 테라스로 올라서면 왜 ‘해어름’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짐작하게 된다. 서해 야경이 펼쳐지는 쪽 반대편 하늘에선 온 세상을 새빨갛게 물들인 낙조가 한창이었다. 신의 섭리만이 오롯한 명멸의 시간, 그 속에서 빛과 어둠은 한 몸처럼 붙어 있었다. 이제 다시 다리를 건너간다. 새 여정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