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식민지 질곡으로부터 해방되었던 8.15의 기쁨은 순간이었고,
북의 6.25남침전쟁이 몰고 온 분단의 고착과 갈등의 연속 속에서 반도의 남쪽에서나마 오늘의 대한민국이 성장할 수 있었음은 축복중의 축복이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공산주의자들의 적화위협 속에서 이룩해 낸 민주화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성공사이기 때문이다.
불행 중의 불행은 세계가 놀라는 대한민국의 성공 앞에서 이미 무릎을 꿇었어야 할 북의 공산세습독재정권이 남쪽의 “햇볕”을 받고 살아남아 교묘한 “대남공작”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며, 밥을 굶는 북한의 동포를 노예상태로 장악한 가운데 핵무장으로 남북관계의 주도권까지 장악해 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 기막힌 현실 속에서 6.25전쟁 57주년을 맞는 이 나라의 친북좌익 좌익 정치인들은 6.25가 조선시대의 역사인양 딴전을 피우는 가운데 6.25를 도발했던 북의 세습독재정권과 화해협력을 하면 평화와 통일이 굴러 오는 것으로 “평화”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형국이다.
이와 같은 거짓 평화 속에서 모두가 침묵한다면 지난 60여 년간 이룩해 온 대한민국 성공의 역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대한민국의 역사가 부정될 때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것인가?
대부분 70고령을 넘겼지만 아직도 6.25 전쟁의 참전 용사가 살아있는 동안, 젊은이들에게 6.25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언제 왜 일어났고 누구와 어떻게 함께 막아내어 오늘의 대한민국이 건재할 수 있었는지를 알려야 할 책임이 5,60대의 우리들에게 있는 것 아닐까? 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책임을 통감한 60대 후반의 동지가 있었으니 그 이름 "대청화곡"! 필명으로 남북의 분단과정과 피눈물 나는 6.25 전쟁의 목격담을 30여회에 걸쳐 조선 블로그에 연재해 오던 그가 6.25 57주년을 맞아 “내가 겪은 6.25”라는 단행본을 냈다.
그는 고향인 양양이 북위 38도선 이북에 위치한 탓으로 조국의 남북분단 시, “인민공화국”에 살다가 6.25전쟁을 통한 휴전선의 설정으로 자유 대한민국에 살게 되었으며, 양양군의 화룡“인민”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 때 6.25를 맞는다.
그의 부모는 일제의 억압으로 고향을 떠나 함경도 일대를 전전하며 살았다. 그가 다섯 살 때 해방의 기쁨을 안고 고향에 돌아 온 그의 가족은 “인공”치하의 백성이 되었고 김일성 무리들의 폭정에 시달리다가 6.25를 맞는다. 6.25가 나던 해 몰래 원산으로 피신했던 부모와 두동생과 생이별을 한 그는 전쟁터의 중심으로 변한 고향에서 할머니와 단 둘이 남아 이리 저리 피하고 쫓기면서 처절한 전쟁을 목격한다. 그러던 중 나이어린 화곡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원산일대에 대한 호주 쌕쌔기의 공격으로 다 죽었을 것으로 알았던 그의 부친이 1.4 후퇴 때 거제도로 피난을 가서 그곳에서 포로수용소의 “정훈교관”이 되어 7000여명의 반공포로를 대한민국 품에 안기게 하고 있었으니! 학교를 세우고 교편을 잡으신 그의 부친은 군인인 학부모를 통해 양양일대의 전쟁터를 수배하여 할머니와 그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거제도를 이산가족 상봉의 장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의 기쁨은 순간이었으나 전쟁의 아픔은 길었으며, 화곡은 부산등지에서 신문팔이로 연명을 했던 것이다. 국군과 인민군의 주고받는 격전이 반복됐던 양양일대에서의 명석한 한 소년의 목격담과 그 후 13년간의 처절한 삶의 이야기가 이 책에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해방 1년 후 부모님을 따라 탈북 후 서울 뚝섬의 경동“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충북옥천의 지전국민하교 3학년 때 6.25의 피난길에 올랐지만, 자식들에게 별로 할 이야기가 없었다. 북에 주둔했던 소련군을 본 기억도 없고 6.25 전투중의 국군과 인민군을 목격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관찰력과 기억력 면에서 대청화곡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진솔한 이야기는 참으로 많은 사실을 일깨워준다. 6.25 이전 인공치하의 삶과 6.25 전쟁 와중의 삶 그리고 거제도 피난민 생활과 청소년기 부산에서의 성장과정을 통한 삶이 그의 확고한 인생관 확립에 뿌리가 되고 있는 것을 도처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원한 조국은 대한민국이 되었고 그의 이상은 애국이 되었고 그의 가슴은 박애정신으로 충만해 있다. 중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면서 그의 애국정신 발로가 높이 인정되어 대한민국의 옥조근정훈장이 수여된 것을 무엇보다도 기쁘게 생각한다.
“대청화곡”과는 인터넷 게시판에서 답 글을 주고받다가 어느 덧 막역한 친구가 되었고 어느 날 직접 만나 식사까지 나누며 필자보다 생일이 두 달 빠른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필자는 그를 화곡“인형”이라 부르며, 밤늦은 시간에도 서로 격의 없는 전화를 하곤 한다. 그의 이야기가 많은 초 중고등학교의 교사들과 군 장병들에게 읽혀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07.6.30. 12:30 www.vietnamwar.co.kr 인강칼럼
책자소개: 내가 겪은 6.25, 김찬수 저 (명문당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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