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미약자들은 관람금지, 영화 ‘서울의 봄’
1979년 10월 26일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서너달에 한 번 돌아오는 매복조에 걸려 밤새 민가 지역에서 매복을 했다. 외등없는 시골길에서 총알없는 총으로 매복을 하다 심심할 때 쯤 지나가는 주민을 향해 ‘정지!’를 외치면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이 주민들은 놀라지도 않고 “집에 돌아가는 길입니다”라고 답한다. 최전방도 아닌 서울 근교 농촌지역에서 민간인들을 상대로 이게 뭐하는 짓인가? 군이 우위에 있던(민관군이 아니라 당시는 군관민이었다) 야만의 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복조를 끝내고 새벽에 돌아오면 토요일 아침 점호는 면제되고 늦잠을 잔다. 아침 9시쯤 10여명 정도의 분대원이 늦은 아침 식사를 하는데 식당으로 들어온 준위가 박정희가 사망했다고 소리를 쳤다. 당시 하사관(부사관)이나 준위로 ‘말뚝을 박는’ 경우 가난이 가장 많은 말뚝 사유였다. 이 사람은 그런 사유는 아닌 것으로 보여 사병들 사이에서 많은 추측들이 난무했다. 명문대학을 다니다가 집이 망해서 라는 둥, 사랑에 실패해서라는 둥. 그의 장기복무 사유를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사람이었다. 박정희 사망을 알리는 그의 목소리는 크고 맑았고 긍정적인 에너지까지 감지되었다.
내 옆에서 식사를 하던 나보다 4개월여 선임병이 사망 소식을 듣고는 식사를 하다 벌떡 일어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것이 아닌가! 나와 같은 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나이도 나보다 한 살 많고 선임병인데다가 목사 아들이었던 그는 어느 날 나에게 남이 없을 때는 서로 말을 놓자고 했다. 나로서는 손해 볼 일이 없으니 그러자고 했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그를 나는 주저 앉히며 “여기 군대야!’라고 했다.
제대한 후 복학생 신분으로 캠퍼스에서 그와 몇 번 마주쳤지만 우정을 쌓을 기회는 없었다. 그는 어떤지 몰라도 나에게 군대는 지워야 할 기억에 속했기 때문에 그 시절의 만남을 우정으로 발전시킬 마음이 없었다. 시간이 한 참 지난 뒤에야 우연히 SNS로 연락이 닿았다. 화학을 전공한 그는 학부 졸업후 의대로 편입해 의사로 변신해 있었다. 1979년 그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던 그가 40년 뒤에는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부류에 속해 있었다.
1979년 12월 12일 그날은 수요일이었다. 내가 근무하던 부대는 대대급이라 영내에 교회가 없었고 고양에 있던 1군단 부대 교회까지 가서 예배를 드렸다. 우리 부대의 지휘관들은 일요일뿐 아니라 수요일 저녁에도 영외의 교회를 가는 나일롱 신자들이 보기 싫었겠지만 당시 1군단장은 기독교인으로 유명한 황영시 중장이었으니 울며겨자 먹기로 사병들의 수요 외출을 허용했을 것이다. 그는 당시 진보적 교회로 알려진 경동교회(강원용 목사)의 교인이었다.
일요일에는 통근버스가 교회버스로 제공되었고 수요일은 트럭이 제공되었던 것도 황장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요일 저녁 예배 중에 부대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부대로 돌아왔을 때 부대원들은 모두 야간 경계 근무를 나가고 없었다. 야간 근무 때 입던 방한복은 동이 난 상태였다. 우리는 야전 점퍼만 입고 그 추운 겨울 산으로 나가 빈총을 들고 ‘기독교인의 고난(?)’을 견뎌내야만 했다. 영문을 몰랐다. 누군가는 북에서 처들어 왔다고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반공의식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누구도 나의 반공의식 없음을 탓할 수 없다. 그날 전방을 지키던 반란군들은 전방을 열어 둔 채 정권 쟁취에 눈이 멀어 서울로 진격했기 때문이다. 그들이야 말로 북한이 처들어 오지 않을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나는 북한 침입설에 두려워하던 선임병들을 달래며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신군부가 뭔가 일을 꾸민 것 같은데요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순교를 목전에 둘 만큼의 추위가 계속되자 누군가 나에게 외쳤다. “김일병, 너 저 사무실 키없냐?” 숙영지밖에 있던 사무실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하던 나에게 행정실 열쇠가 없냐는 질문이었다. 당연히 있었다. 방한복없이 추위에 떨던 ‘기독군인들’ 5~6명은 행정실로 숨어들어가 전등을 켜지 않은채 경유난로를 때며 따뜻하게 12.12의 밤을 지냈다. 전등은 꺼도 연기는 어쩔 수 없는 법, 연기를 본 중대원들이 하나 둘 씩 행정실로 몰려 왔다. 누군가에는 생사가 걸린 밤이었지만 서울 인근 벽제 지역의 부대원들에게는 조개탄 난로가 아니라 경유 난로로 밤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던 추억의 밤이었다. 게다가 일개 일병이었던 나는 줄어든 경유에 대한 날이 샌 뒤의 문책은 일단 제쳐두고 그날 밤 동료 군인들이 따뜻하게 보낼 수 있도록 행정실을 통제했다. 일개 소장이었던 전두환이 12.12 그 밤을 통제했던 것처럼.
영화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은 10월 26일부터 12월 12일까지 신군부가 정권을 탈환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스포일러랄 것도 없고 영화 리뷰랄 것도 없다. 결국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가 정권을 잡았고 이를 막아 내려는 진압군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결국 진압군들이 패했으니 말이다. 전두광(전두환)으로 분한 황정민과 진압군의 이태신 장군(실제 인물 장태완 장군, 정우성 분)이 서로에게 유리하게 전세를 이끌고 가려다가 결국 이태신 장군은 패한다.
실제의 장태완 장군은 12·12 사태 이후 강제 예편됐다. 실의에 빠진 그의 부친은 1980년 세상을 떠났고, 장태완 사령관의 아들은 1982년 장장군 부친의 산소 근처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장장군은 2010년 별세하는데 2년 뒤 이번 영화에도 등장한 그의 아내가 아파트에서 투신으로 세상을 마감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극중 이름 공수혁, 정만식 분)은 강제 예편 후 우울증을 앓았으며, 1989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끝까지 저항하던 김오랑 소령(극중 이름 오진호, 정해인 분)은 장렬하게 전사한다. 그의 아내는 이날의 비극으로 실명했다가 의문의 실족사로 생을 마감했다.
사실과 허구가 어느 정도 비중으로 시나리오에 반영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압군과 반란군 사이의 급박한 흐름은 2시간 이상의 러닝 타임이 지루하지 않게 느껴졌다. 편집의 힘을 실감한 영화였다.
등을 보인 전두광과 정면을 향한 이태신이 서로 눈길을 피하며 지나가고 있다.
영화 평론가들은 전두환을 충분히 악인으로 그렸다고 했지만 보기에 따라 그는 ‘사내’였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이태신이 전두광을 향하여 “너는 군인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라”고 했을 때 전두광은 이태신에 대한 묘한 존경심을 느낀다. 감독은 이 장군의 위신을 세워주려는 의도로 이렇게 연출했겠지만 나는 전두환이 저런 인간적인 면을 가졌을까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거기서 감독은 전두환을 더 야비하게 그려야 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리지 않았을까?
영화에 따르면 내가 1군단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부대로 복귀한 그 시간 1군단장 '독실한 기독교인' 황영시는 부하 전두환의 조롱을 견뎌가며 반란군에 가담하고 있었다.
1군단장 황영시(극중 이름 한영구) 역을 맡은 배우 안내상
심신미약자들이나 분노조절 장애자들은 전두환의 반란 성공에서 분노를 이겨내기 힘들다. 전두환같은 정치 건달 하나를 막아내지 못한 역사의 비극앞에서 우리의 분노게이지는 치 솟는다. 형님 아우하며 건달스러움으로 뭉쳤던 하나회, 그리고 하나회의 위력에 비겁하게 기생하는 고위급 장성들이 나라를 망쳤다.
87년 6월 항쟁 이후 그나마 진보와 보수가 바뀌어 가며 민주주의 정치가 안정되는 것처럼 보였다. 비리를 저지른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도 보냈다. 그러나 44년전 12.12 그 밤의 반란을 가능케 했던 그 ‘건달스러움’을 2022년에 다시 경험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술과 형 동생의 호칭으로 뭉쳐 ‘조직에 충성하는’ 것들이 만들어가는 대한민국 정치는 후진 기어를 넣고 달려가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을까? 신군부의 반란이 기세 등등 하자 진압군 내부에서는 신사협정, 인간적 대화 등의 용어로 그들의 기세를 오히려 키워주었다. 여기서부터 단추는 잘못 끼워졌다. 과감하게 그들을 쳐냈어야 했다. 다행히 훗날 김영삼 대통령은 하루 아침에 하나회를 척결했다. 3당 합당으로 호남을 소외시킨 역사의 큰 죄를 지었지만 하나회 척결은 분명 그가 이룬 대단한 공적이다.
건달의 정치가 다시금 부활하는 이 시점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단 하나다. 루쉰(노신)의 물에 빠진 개는 몽둥이로 두들겨 패라는 말이다. 이는 폭력을 옹호하는 말이 아니다. 물어뜯는 속성을 가진 개에게는 그보다도 더 가혹한 응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뜯는 습성을 끊어내자는 의미다. 물어 뜯는 존재는 신사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기에 그들을 믿는 것은 개를 믿는 것과 같다. 루쉰의 이 말은 ‘페어플레이를 하자’는 린위탕(임어당)에 대한 논박으로 나온 말이다. 그래서 루쉰은 말한다. ‘페어 플레이는 아직 이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