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함께 읽기 2기 김OO 님 그림
홍차와 마들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② 마르셀 프루스트, 민음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맛, 냄새, 시각의 모든 것을 언어화시키려고 한 작품이다. 어느 겨울 날 마르셀이 추워하자 어머니는 평소에 마시지 않는 홍차를 권한다. 홍차 한 모금을 마신 마들렌의 회상이다. “생자크라는 조가비 모양의, 가느다란 홈이 팬 틀에 넣어 만든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짧고 통통한 과자를 사 오게 하셨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p.86)
마들렌을 홍차에 적셔 마시자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쁨이 화자를 사로잡는다. 이 순간 화자는 자신의 존재성을 깨닫게 되고 더 이상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p.86)라고 느끼지 않는다. 홍차 한 모금을 마셨을 뿐인데 알 수 없는 기분이 마르셀을 휘감는다. 이 기쁨이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 그것을 포착하려고 다시 한 모금을 마신다. 아무런 느낌이 없다. 다시 세 번째 모금을 마시고 첫 모금의 느낌을 찾으려 애쓰지만 차의 효력이 사라졌다. 차를 마셔서 그런 것이 아님을 깨닫고 마르셀은 자신의 내면에서 그 진실을 찾으려 기억을 더듬는다. 왜 홍차 첫 모금을 마셨을 때 아득했을까 말이다. “나는 도대체 이 알 수 없는 상태가 무엇인지 아무런 논리적인 증거도 대지 못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이 그 앞에서 사라지는 그런 명백한 행복감과 현실감을 가져다주는 이 상태가 무엇인지를 물어보기 시작한다.”(p.87). 생각을 거슬러 올라간 마르셀은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p.89)이었다고 추억을 떠 올린다.
지나가 버린 시간을 어느 순간 기억하는 경험이 있다. 시간은 늘 존재하지만 사라져가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동안 마르셀에게 잊혀졌던 콩브레의 시간들이 갑자기 떠 오른 것이다. 콩브레에서 보낸 시간들은 기쁨으로 기억된다. 콩브레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홍차의 맛으로 재탄생된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의 편린들이 하나 둘씩 펼쳐진다. 죽어있던 시간들이 홍차의 맛으로 생생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그 추억이 왜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했는지 알지 못했고, 그 이우를 알아내는 일도 훨씬 후로 미루어야 했다.)아주머니의 방이 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별채로 이어졌다.”(p.90) 마치 일본사람들이 물을 가득 담은 도자기 그릇에 종잇조각을 넣으면 물속에 잠기자마자 꽃이 활짝 피듯이 마르셀의 시간들이 꽃처럼 펼쳐진다.
“이제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들과 스완 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 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마을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p.91)
엄마가 주신 홍차의 한 모금이 어릴 적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맛을 기억하게 했고 잊혀졌던 콩브레의 풍경을 되살린다. 정원의 꽃, 스완씨 정원 꽃,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찻잔에서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책은 이런 기억들을 소환시키며 펼쳐진다. 1권에서 펼쳐질 내용은 콩브레의 거리의 풍경, 꽃들, 나무들, 사람들의 이야기, 레오니 아주머니 댁 방문, 성당과 종탑의 묘사 등이다. 마르셀은 당시의 모습을 맛, 색깔, 냄새, 촉감 등으로 시각화하려고 했다. 콩브레 마을은 소박하다. 성당하나를 중심으로 들판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다. 사람이 살기엔 다소 쓸쓸해 보이고 고장에서 생산되는 검은 빛깔 돌로 집들과 돌층계 등을 만들었다고 회상한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콩브레 도시는 비현실적인 세계로 다가온다. 콩브레의 거리를 연상하면 생틸래르 거리, 생자크 거리, 생테스프리 거리 등이 떠오른다. 화자는 거리를 연상하자 ‘레오니 아주머니’가 그려지고 함께 프랑수아즈, 욀랄리, 스완, 베르고트, 르그랑댕 등 여러 인물들이 줄지어 기억된다.
특히, 레오니 아주머니와 프랑수아즈의 관계가 흥미롭다. 화자네 가족은 외할아버지인 레오니 사촌동생 댁에서 묵고 있었는데 이 집 딸이 레오니 아주머니다. 레오니 아주머니는 남편 옥타브씨가 세상을 떠나자 집을 방을 침대를 떠나지 않고 언제나 슬픔과 무기력에 시달리며 모호한 상태로 침대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으셨다. 아주머니는 두 방을 번갈아 사용하며 바깥세상과 고립된 채 살고 있었다. 마르셀은 아주머니께 아침 인사를 하러 가면서 방을 관찰한다. 겨울 아침에 식당에서는 빵굽는 냄새가 날 것이고 방엔 장작냄새로 가득하다. 벽난로 불과 엉킨 방안 공기는 발효해 놓은 빵냄새와 섞여 이런 냄새로 기억된다.
“그러나 벽장이나 서랍장, 나뭇가지 무늬 벽지에서 풍기는 더 메마른 향내를 맡게 되면, 이내 나는 늘 말 못 할 식탐과 함께, 꽃무늬 침대 커버에서 풍기는 방 중심부의 뒤섞이고 끈적끈적하고 김빠지고 소화가 안 되는, 과일 냄새 속에 들러붙은 것 같았다.”(p.96)
방 안으로 들어가 아주머니에게 키스하면 프랑수아즈가 끓인 홍차를 내오거나 보리수차를 내온다. 보리수 잎은 하나둘씩 찻 잔에서 펼쳐지면서 꽃들의 황혼이 시작된다. “아주머니는 죽은 잎과 시든 꽃잎을 맛볼 수 있는 끓는 차에 프티트 마들렌을 담그고 과자가 충분히 부드러워지자 한 조가 내게 내밀었다.”(p.98) 아주머니 방에서는 생자크 거리가 보였고 거리에서 펼쳐지는 일상적인 일들이 시작되었다. 아주머니와 프랑수아즈는 거리를 내다보며 콩브레의 일상사를 읽으면서 때론 논평까지 한다.
책은 콩브레의 마을 모습과 인물들을 어린 화자의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독자는 마르셀의 그려주는 문장을 따라 콩브레의 거리, 꽃들, 성탑, 인물분석, 사건 등을 따라가면 된다. 때론 레오니 아주머니와 프랑수아즈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기억이 왜곡되는 경우도 있기에 어느 것이 진실하다고 말하진 못한다. 다만, 마르셀이 홍차를 마시면서 콩브레의 잃어버린 시간을 떠 올렸을 뿐이다. 그 시간들을 다시 꺼내고 재탄생시키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창조한다. 과거가 현재로 드러나고 미래까지 창조되게 된다. 우연히 떠 오른 기억은 삶을 재편성하고 자신이 존재성을 확인시킨다. 과거와 현재의 만남. 마르셀 프루스트는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을 모든 지성과 감각을 부여잡고 문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일독을 권한다.
<서평-46>
박oo s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