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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11일
말씀: 골2:12-15
제목: 부활 후 가야할 승리의 길
한국은 대단한 민족입니다. 세계에서 50년 사이에 가장 빠른 변화를 일으킨 민족이 한국이고 또 앞으로 50년 사이에 가장 빠르게 변화할 민족도 한국이랍니다. 대단하지요. 우리나라는 지난 세월 고난과 한으로 얼룩진 민족으로 6.25를 겪고 25년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한강의 기적이라고 외국인들이 일컫는 그런 풍요를 달성했습니다. 짧은 기간 안에 경제적인 풍요를 달성한 승리와 승공을 맛본 한 민족이 더욱 승리에 목마를 수밖에 없는 것은 이미 그런 승리에 젖어있다고 봐야할 정도로 승리에 익숙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와 목적을 달성하면 된다는 생각이 한국사회에 크게 펴져 있습니다. 이것이 승리주의지요. 승리주의란 양적인 개념과 시간적인 개념양쪽을 다 통괄하는 개념입니다. 빠른 시간 안에 얼마나 큰 결실을 내느냐? 에 관심을 두고 집착하는 자세를 승리주의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승리주의에 더 빠지기 쉽다는 것을 아십니까?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승리하셨고 그 승리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동행하시니 우리의 삶 속에서도 승리가 보장되어 있고 승리 할 수밖에 없는 자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믿음을 동원해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했으니까 얻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한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믿음의 탈을 쓰고 이 땅의 것에 배를 채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도인들이 성공한 삶 승리한 삶을 선호하는 승리주의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안타까운 것은 승리와 성공이 기독교가치관과 정신에 포장되어 소망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세상적인 관점에서 승리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가 다른 것인데 세속적인 성공과 야망을 그리스도인들이 특권으로 생각하고 소망으로 포장되어 나타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서울대를 졸업한 김동한목사가 오래 전에 ‘다니엘학습법’을 썼습니다.’교육에 관심이 있는 부모라면 그의 읽었던 책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분이 명문대를 목적으로 과외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스카이 스쿨(SKY school)이라고 이름 했다가 다니엘사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한 때 국민일보에 인터뷰한 글도 올라오고 한 참 유행이었습니다. 일부 교인들이 지방에서 아이를 서울대학교 보내려고 이 학교에 집어넣었습니다. 학교가 아니라 근처에 학교는 다니고 수업을 마치면 나머지 시간을 함께 기숙하면서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나중에 부모들이 기대에 어긋나자 문제를 제가하는 바람에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성공지향주의에 빠져 있느냐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사실 목회를 할 때 가장 쉬운 달이 있다면 10월과 11월이라고 합니다. 11월 수능을 앞두면 수험생부모와 수험생들이 평소에는 교회에 잘 안 나오더라도 그 때는 나와서 목사님이 등에다가 기름통을 짊어지고 불속에 들어가라고 해도 들어 갈 만큼 눈에 열망이 가득해가지고 목사님이 무엇이라고 하던 다 듣습니다. 이번에 붙여 주시면 하나님 뭘 하라고 해도 다 하겠습니다. 얼마나 순종적인지 모른답니다. 그렇다면 가장 힘든 달은 무슨 달이겠습니까? 당연히 12월달이지요. 예상 밖의 성적이 나와서 시험 드는 기간입니다. 이때는 목사가 무슨 위로를 해도 안 듣습니다. 신앙이 자기 자녀 대학진학에 달려 있다면 심각하지요.
사실 교회에서 세속주의가 심각하게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거기에 기복신앙이 일조를 했고요, 그런데 기독교에 승리주의를 구별해 내는 되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승리주의는 나름대로 성경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다가 기독교 가치관과 개념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부 목사님들이 동물적 감각에 만족시키는 승리주의를 교묘하게 기독교적으로 포장하고 있기 때문에 적지 않은 교인들은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승리와 승리주의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진정한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인 반면에 승리주의는 인간의 승리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분리하기 위해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주전 1세기에 살았던 예수님과 40년 후에 살았던 로마황제 디도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40년이 지나서 A.D67년에 로마를 상대로 유대인들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로마압제에 항거하는 일종의 독립전쟁입니다. 4년 만에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디도가 A.D70년에 예루살렘을 진멸하고 예루살렘을 불태우고 예루살렘성전에서 금촛대와 법궤를 빼앗아 개선행진을 했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디도의 개선문이 있습니다. 디도의 개선문은 디도가 죽은 다음에 우리가 잘 아는 도미시안황제가 자기 형을 기억하도록 하기위해서 로마에 세워놓은 개선문인데 그 개선문은 굉장히 장엄합니다. 4마리 말이 이끄는 병거를 타고 멋진 토라를 입고 보무도 당당하게 개선하자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마치 신에게 외치듯이 외쳤습니다. 황제아들 만세 황제아들 만세 그런데 이 개선식장면은 요셉푸스의 유대전쟁사 7권5장에 나타나있습니다. 이 유대전쟁사를 보면 주후70년에 유대가 로마에 멸망한 후 로마의 개선에 디도장군의 개선승리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 장군이 개선하면 포로들이 끌러갑니다. 그 중에 왕이라든지 귀족을 특별히 부각시켜서 끌고 갑니다. 그리고 노예들이 장군의 앞에서 향을 피웁니다. 또 그 뒤에 엄청난 양의 전리품을 끌고 가고 그리고 적장(시몬)을 마지막 순간에 처형하면 개선문의 행렬이 끝이 납니다. 얼마나 엄청난 승리였으면 동전까지 다 만들었겠습니까? 로마황제와 장군들이 전쟁에 승리하면 늘 이런 식으로 개선한 것입니다. (영상 상영)
그런데 요한계시록에는 로마를 가리켜 그리스도인들의 피에 취해 짐승을 탄 큰 음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승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진정한 승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자기영광의 표현, 교만의 과시, 인간 오만의 현실이었습니다. 이게 세상에서 추구하고 가져다주는 승리주의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예루살렘입성 장면 영상 상영)
이 두 장면을 비교해 보십시오. 디도의 개선식은 화려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영광을 사람들에게 받습니다. 이것은 세상적 승리요, 일시적인 승리요, 힘의 원리에 대한 승리입니다.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동경하는 승리요, 소망입니다. 이런 승리는 사람을 죽이고 세상을 짓밟고 칼과 권력으로 이기는 승리의 방법이요, 승리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은 평강이 없습니다. 이겼지만 그 이김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희생도 취루여야 합니다. T.V에서 고릴라들의 삶을 방영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고릴라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언제 강력한 수놈이 나타나서 자기를 넘볼 줄 모르기 때문에 항상 긴장하고 또 수놈들을 향해서 공격도 하고 위협도 하면서 자기의 자라를 넘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침입자가 나타날까봐 순찰도 하고 한 쉬도 편하게 지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영원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강력한 수놈이 나타나서 도전을 해서 자리를 빼앗기면 이제 그 권력의 자리에서 물려나야 하는데 그때야 비로소 자유롭게 열매를 따먹고 한가히 노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승리주의자들이 갖는 일시적인 권력과 힘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승리는 어떤 승리입니까? 죽고 섬김의 원리에 따르는 승리입니다. 영원한 나라를 목적으로 해서 이어지는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그리스도의 승리며 축복입니다. 영원한 나라의 것을 놓고, 그 곳에서 인정받고 보상받는 삶을 이 땅에서 살아내는 것이 기독교의 승리의 삶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디도시기에 갈망하는 승리나 우리가 갈망하는 승리와는 너무나 먼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왕의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디도의 승리가 있기 40년 전 예수님은 갈릴리 악센트를 쓰는 촌스러운 어부 몇 사람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평강의 왕으로 오신다는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인지 그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했습니다. 그 자리의 군중들이 종려나무를 꺾어들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여기까지는 왕 같지요. 그런데 그 후의 예수님의 행적은 왕에 걸 맞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청소하다가 정면으로 종교적인권위와 맞부딪히게 되었고 예수님은 채포되고 채찍에 맞고 조롱을 당하고 마침내 십자가위에 죽으셨습니다. 인간의 손에 붙잡혀 고문당하고 마침내 반역자들이나 노예나 종이 당하는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이 과연 승리자일수 있는가? 구약성경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고 했기 때문에 신명기관점으로 보더라도 예수님은 저주받은 자입니다. 승리자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어 종의 죽음을 당한 예수를 승리자로 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이해로는 승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신 것을 가리켜 진정한 승리라고 규정합니다. 골로새서 2:14 -15‘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여기서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개혁성경에 보면 ‘승리하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헬라어로 ‘드리암뷰사스’입니다. 승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영어의 triumph 와 같은 의미인데 승리라는 표현도 있지만 개선식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드리암’자음이 똑 같습니다. 트리암비오라는 단어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개선식 할 때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자동사로 쓰면 개선식을 통해 승리를 축하다다는 말이고요 타동사로 쓰면 개선행렬에서 포로를 끌고 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개선할 때 유명한 적장이 왕을 포로로 잡아 개선행진식에 끌고 가면서 눈요깃거리로 삼았거든요 그렇다면 트리암비오는 누군가를 승리의 행진에서 포로로 끌고 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골로새서 2:15절을 이렇게 번역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안에서 정사와 권세를 포로로 끌고 행진하셨다’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로마장군 디도가 유대인포로를 이끌고 승리의 행진을 한 것처럼 예수께서도 정사와 권세를 포로로 끌고 승리의 행진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디도가 개선행진 한 것이나 예수님이 개선 행진한 것이나 똑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디도가 개선 행진하는 모습과 예수님이 개선 행진하는 모습은 너무나 다릅니다. 디도는 멋진 갑옷을 입고 4마리가 이끄는 병거를 타고 보무도 당당하게 입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리품을 끌고 가는 모습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정사와 권세를 전리품으로 아니면 포로를 끌고 가는 그 모습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이라는 것에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게 승리자의 모습입니까? 고난주간 때 영상을 통해서 보셨죠. 정말 비참하기 그지없는 장면 아닙니까? 어찌 그런 장면이 승리의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이 정사와 권세를 무장해지 시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으로 가시는 것이 되니까 결국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버렸는데 이것이 인간적인 시각에서 어찌 승리라는 바울의 표현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승리라고 누가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승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위에서 자기를 대속제물로 드리고 인간을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켰시고 부활하셔서 이제 죽음과 권세와 정사를 포로로 잡고 가는 길이기에 예수님의 승리는 진정한 승리입니다. 섬김을 받음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많은 이들에게 대속 제물로 드림으로 모든 일류가 생명과 부활을 얻었기에 죽음의 권세를 포로로 잡아 전리품으로 삼았습니다. 정사와 권세를 포로로 잡아 전리품으로 삼았습니다. 문제는 세상적인 시각에서는 십자가의 방법이기 때문에 이런 방법의 승리를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는 진정한 승리요 하나님의 승리라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리는 디도장군처럼 자기 힘, 자기과시, 자기 자랑과 권력의 자랑이 아니라 희생과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자신의 삶으로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희생과 죽음을 통한 승리는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들을 오늘날 승리하게 하는 방법 역시 자기과시나 힘이나 권력이나 자기주장이 아니라 희생과 죽음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이게 트리암비오입니다. 두 번 쓰였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쉽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승리의 개선식에서 포로로 끌고가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포로를 개선행진에서 끌고가다’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개선식에서 항상 우리를 포로로 끌고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이렇게 번역이 가능한 것입니다. 참 어려운 문구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에 의해서 포로가 된 사람 하나님에 의해서 패배하여 정복당한 노예로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것을 죽이고 자기의 욕심과 더러운 죄를 죽이고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옛것은 다 포로가 되어 끌러가는 삶입니다. 고린도후서 2:15절에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개선행진에서 우리를 포로로 끌고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하는 이 이야기가 바울의 삶과 너무나 맞습니다. 여러분 고린도교회 고린도서신을 보면 무엇을 느끼십니까? 고린도 성도들이 권력, 성공, 승리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4:7-8절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다도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보면 일부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고난은 바울의 무능을 두러낸다고 본 것 같습니다. 바울처럼 고생 많이 하고 바울처럼 환란이 많은 사람이 과연 사도냐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미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권력과 성공과 승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9절입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자기는 항상 죽은 자 같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때로는 원형경기장에서 야수들에 의해 희생되거나 검투사들이 야수와 벌이는 싸움을 구경하는 로마시 원형경기장의 모습을 떠올리면 됩니다. 바울을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야수와 싸우고 있습니다. 검투사처럼, 아니면 죽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취급을 받아 야수와 싸움을 하도록 원형경기장에 끌려와서 싸우고 있는데, 왜요 포로니까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이미 황제가 되어서 왕 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10-13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원형경기장의 검투사로 야수들과 싸움을 벌이면서 세상의 구경꺼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같이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태연히 로마황제가 되어있다는 말이지요. 바울이 당한 그런 환란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느냐? 바울이 과연 사도냐,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처럼 고난 많이 당한 사람은 사도로서 권위와 자격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을 자기의 고난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분명하게 들어났다고 주장해요. 고린도후서6:3-10
‘우리가 이 직분에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가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게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입니다. 절대로 이 땅의 것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보세요. 겉으로 보기에는 패배로 보이는 곳에서 승리를 이끌어낸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을 통해 드려내 보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한 번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한 번은 자신에 대해서 포로로 끌고 개선행진하는 로마의 개선행진 이미지를 채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선행진에서 바울을 포로로 죄수로 끌고 가는 이미지는 기독교 안에 승리주의에 대한 결정타를 날리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가 못 박히신 것을 전하는 자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에 의해 영광의 관을 쓰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에 의해서 우리가 영광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을 자기과시 자기주장이 아니라 헌신과 희생으로 진정한 승리를 거두게 하시고 있다는 점을 이런 식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승리를 드러내는 더 적합한 방법은 언젠가 그리스도께서 최후승리하실 것이고 끝까지 참고 견디는 자에게 최후의 승리의 면류관을 주실 것을 믿고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으로 고난에 참여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승리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승리를 주장하며 승리를 빨리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최후승리를 보장하셨다고 확신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에 대한 확신을 증거하는 사실이라는 잊지 말아야합니다. 바울을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바울이 승리를 말하면서 우리가 승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환란, 곤고, 핍박, 적신, 기근, 위협, 칼 이게 승리랍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경험하면 패배했다고 느끼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바울을 이런 것들이 한 가운데 있더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기근이나 위협이나 칼이 없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승리는 주님을 위해 죽음을 당케되고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고 이런 고통가운데 있더라도 이것을 넉넉히 이겨내는 것을 부활의 승리라가고합니다. 그래서 여기 이 부분에서 번역자들이 바른 번역을 하기위해 애를 많이 썼습니다. 윌리암같은 경우는 ‘그리고 이 모든 일 가운데서 우리들은 영광스러운 정복을 계속하고 있다’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필립스라는 사람은 ‘아니다 이 모든 일들 가운데서 우리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다’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믿음의 선각자들은 병속에서 감옥에서 수용소에서 복음의 능력으로 엄청난 시련을 이겨냈습니다. 그럼으로 나타난 생명의 열매가 있기에 진성한 승리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자기주장과 자기과시로 가득 찬 디도황제의 승리주의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충돌과 정복의 방식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방식으로 복음을 통해서 승리하는 삶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교회는 자문해 보아야합니다. 진정으로 교회가 세상에 생명과 부활을 위해 그리스도의 겸손과 섬김의 뒤를 따르며 진정한 승리를 추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외적으로 화려한 자기영광에 도취되어 현세적 승리만을 구하며 추구하는 승리주의에 빠져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베풀어주심에 감사하여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자문해 봐야합니다.
지금 우리가 원형경기장에서 때로는 패배하고 때로는 만물의 찌꺼기같이 보이고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악한 세력과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지만 최후승리에로 초청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끝까지 참고 견디면 승리의 면류관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런 진정한 승리를 통해서만이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우리를 통해 주변에 펴져나갈 것이라고 바울을 가르칩니다. 고후2:15-16
‘우리는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로마의 황제가 행진할 때 앞에서 향을 피우던 노예처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쫓아 그리스도와 함께 포로가 되어 그리스도를 따라간다면 우리 앞에서 나는 향내가 다른 사람을 생명으로 이끌게 하는 향내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쫓아 생명에 이르는 부활을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제 부활의 삶을 살아가야 되는데 그 삶이 바로 그리스도의 냄새를 드려내시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승리해야하는 승리의 삶은 마귀를 멸하고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며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부활 후의 삶은 부활의 연속성을 가지고 가야할 우리의 책임과 의무는 바로 생명구원에 있습니다. 그 생명구원을 위해 오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신비함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나라 확장을 위해 애쓰고 복음의 사명을 분명히 감당해야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길이 전리품인 우리를 포로로 끌고 가고 있고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가는 삶입니다. 그기에 신비하게 승리가 있다는 것을 삶 속에서 증거되고 있고 체험되고 있고 깨달아 알게되는 영적감각을 주셨습니다. 윤석전목사님이 집사 때 간증입니다. 집 팔아 헌금해야 해서 집 팔아 헌금했더니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간증을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지어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저희집사람이 저희교회 전에 한돌교회였는데 사택자리의 땅을 매입한다고 1평값을 헌금해라해서 그때 저희 집사람이 초신자인데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희교회가 이 자리를 허락해 주셔서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를 위한 이 일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한다하더라도 그 당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최후의 승리를 우리에게 안겨주신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주님이 부활하셔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의 승리의 길을 쫓을 것이냐 아니면 세상의 승리를 쫓을 것이냐하는 문제에서 진정한 승리는 주님을 쫓으면서 가지는 승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런 삶을 살아내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연속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활 후의 삶이 과연 어떤 삶인가를 성경을 통해 확인하고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내는 부활 후의 삶이 되셔서 최후의 승리자, 죽음 앞에, 일생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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