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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대 |
연 혁 |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
○ 고구려 장수왕(475년) 때 述爾忽縣이라 칭함 ○ 신라 경덕왕(757년) 때 峯城縣으로 개칭 |
고려시대 |
○ 고려 명종(1174년) 때 瑞原縣으로 개칭 |
조선시대 |
○ 1393년(태조2년) 瑞原郡으로 승격 ○ 1398년(태조7년) 파평현과 병합, 原平郡으로 개칭 ○ 1414년(태종14년) 교하현을 原平郡에 병합 ○ 1415년(태종15년) 原平郡이 原平都護府로 승격 ○ 1418년(태종18년) 교하현 독립, 원평군으로 격하, 주민 진정으로 도호부 재승격 ○ 1459년(세조5년) 坡州牧으로 개편 ○ 1895년(고종32년) 坡州郡으로 개편 |
일제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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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
○ 1996.3.1 坡州市로 승격 |
○ 명칭유래
- ‘파주’란 명칭은 세조비 파평윤씨(정희왕후)의 고향을 승격시켜야 겠다는 생각으로 原平都護府를 파평윤씨의 ‘坡’자와 ‘州’자를 따서 ‘坡州牧’으로 개칭하였다고 유래됨
- ‘파주’라는 명칭은 고구려 때 지명인 坡害平史縣에서 ‘坡‘자와 큰 고을에 의례적으로 붙이는 ’州 ‘자가 합쳐진 것이다.
○ 읍·면·동·리 연혁 및 명칭 유래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
汶山邑 |
○연 혁 - 1899년(광무 3년) 행정구역 개편시 파주군의 칠정, 마정, 운천, 신속면에 속한 곳으로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 때 마정면의 마정, 장지, 반장, 사목의 4개 동리, 운천면의 상리, 하리, 신속면의 비인, 내벌, 임진 각 일부, 오리면의 장포리 일부를 병합하여 임진강의 이름을 따서 임진면이라 하였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3호에 의하여 임진면이 문산읍으로 승격하였다. ○명칭유래 - 홍수가 날 때면 임진강으로 흙탕물이 내려가다 서해의 조수에 밀려 더러운 흙탕물이 산더미처럼 밀려왔다하여 汶山이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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汶山里 |
홍수가 날 때면 임진강으로 흙탕물이 내려가다 서해의 조수에 밀려 더러운 흙탕물이 산더미처럼 밀려왔다하여 汶山이라 하였다. 문산개, 문산포라고도 한다. |
仙遊里 |
경치가 아름다워 8선녀가 산봉에서 놀고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선유동, 선율, 선울, 선유울이라고도 한다. | |
梨川里 |
배나무가 많이 있었는데 어느 해 큰 홍수가 나 많은 배가 물에 떠내려가 '배가 내를 이루었다'고 하여 배내라 한다. | |
堂洞里 |
문산리에 있는 도당에서 굿을 하기 위해, 먼저 사목리의 고목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맞이하여 와서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갔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당골, 당동, 당굴이라고도 한다. | |
沙鶩里 |
임진강으로 둘러싸여 산수가 아름다우며 임진강 건너편 광활한 거두리 모래벌판에 매년 찾아오는 철새와 따오기가 장관을 이루어 붙은 이름이다. 사모기, 사무기, 새모기, 새무기라고도 한다. | |
馬井里 |
옛날 안개가 자욱한 어느 날 새벽 햇살 기둥이 우물에 꽂히자 그 안에서 갑자기 龍馬가 뛰어나왔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말우물이 있었으므로 붙은 이름이다. | |
雲泉里 |
큰 우물이 있었으므로 구루물 또는 운천리라 하였다. 산골짜기에는 구름이 돌아가며 여러 곳에서 많은 샘이 솟아나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 |
長山里 |
장산에서 임진나루까지 약 2km 가량 높이가 같은 산이 임진강 가를 따라 길게 뻗었으므로 진동산 또는 장산이라 하였다. | |
臨津里 |
임진나루터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임진골이라고도 한다. | |
內浦里 |
본래 오리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내동리, 굴촌리 전부와 장포리, 당산리의 각 일부, 칠정면의 문산하리, 당동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內洞里의 '內'와 長浦里의 '浦'자를 따서 이름을 붙였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
坡州邑 |
○연 혁 - 1899년 광무3년 당시에는 파주군 주내면에 속한 지역으로 동부, 서부, 남부, 북부, 마산, 용지, 대조, 부곡의 8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 때 백석면의 오라, 우건, 봉현, 현암, 방축, 학동, 적전의 7개 동리와 자곡면의 도내리 일부, 칠정면의 향양리를 병합하고 이를 다시 파주, 연풍, 부곡, 백석, 봉암, 봉서, 향양의 7개 리로 개편하여 주내면이라 하였다. 1980년 12월 1일 대통령령 제10050호에 의하여 주내읍으로 승격되고,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하여 파주읍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명칭유래 - 세조비 파평윤씨(정희왕후)의 고향을 승격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原平都護府를 파평윤씨의 ‘坡’자와 ‘州’자를 따서 ‘坡州牧’으로 개칭하였다고 유래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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坡州里 |
조선시대 파주목의 治所였고 주내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주내면 동부리, 서부리, 남부리, 북부리, 마산리에 백석면 오라리 일부 지역을 편입하여 파주리라 하였다. 파주읍내, 파주구읍이라고도 한다. |
延豊里 |
갈곡천이 흐르고 삼방리 쪽에서 내려오는 물로 항상 농사가 대풍을 이루어 붙은 이름이다. | |
釜谷里 |
남북으로 둘러싼 다섯 개 산봉우리의 지형이 가마솥처럼 생겼으므로 가마울, 가말, 부곡이라 하였다. | |
白石里 |
가마봉 자락인 무쇠봉이 흰 돌로 이루어져 있어 붙은 이름이다. | |
烽岩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봉현리 전부와 오라리, 현암리, 방축리, 학동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 烽峴의 ‘烽’ 자와 絃岩의 ‘岩’ 자를 따서 봉암리라 하였다. | |
鳳棲里 |
봉서산 자락으로, 경관이 뛰어나고 송림이 울창하여 봉황이 깃든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 |
向陽里 |
양지바른 곳이어서 붙은 이름으로, 우계 성혼의 묘를 쓴 후 그를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서당을 세워 태양을 바라보듯 하였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향양말, 향말, 생말이라고도 한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
法院邑 |
○연 혁 - 본래 파주군 지역으로 泉峴(샘재)의 이름을 따서 천현면이라 하였는데 1895년(고종 32)에 천현내패와 천현외패 2면으로 갈랐다.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 때 천현내패, 외패면과 파평면의 지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천현면이라 하였다. 1989년 4월 1일 군조례 제1280호로 법원읍으로 명칭 변경과 함께 승격하였다. ○명칭유래 - 법원읍은 법원리에서 그 명칭을 딴 것인데 법원리는 法儀里의 '法'자와 院基里의 '院'자를 딴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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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院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법의리 전부와 대위리, 원기리의 각 일부, 그리고 천현내패면의 오리동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法義의 '法'자와 院基의 '院'자를 따서 법원리라 하였다. |
葛谷里 |
칡이 많은 골짜기이므로 칠울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갈동리, 은곡리 전부와 천현내패면의 오리동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葛洞의 ‘葛’자와 隱谷의 ‘谷’자를 따서 갈곡리라 하였다. 칡울, 갈동이라고도 한다. | |
梧峴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리동과 부작동의 각 일부 지역인 황발리, 샘골, 동두라지, 차현동 등을 병합하여 梧里洞의 '梧'자와 차현동의 '峴'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 |
直川里 |
곧게 흐르는 내가 있으므로 고드내라 하고 한자어로 직천동이라 하였다. | |
熊潭里 |
곰소가 있어 곰소 또는 곰시라 하였다. | |
金谷里 |
쇠를 캤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쇳골이라고도 한다. | |
東文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막리와 문평리 전부, 가좌동 일부와 파평면의 지천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東幕의 '東'자와 文平의 '文'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 |
加野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야리, 원기리, 가좌동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加佐洞의 '加'자와 陽野里의 '野'자를 따서 가야리라 하였다. | |
大陵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오릉리 전부와 양야리, 대위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大位里의 '大'자와 五陵里의 '陵'자를 따서 대능리라 하였다. | |
三防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둔방리 전부와 삼현리 일부를 병합하여 三峴里의 '三'자와 屯防里의 '防'자를 따서 삼방리라 하였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
交河邑 |
○연 혁 - 조선말 교하면은 지금의 금촌읍, 탄현면, 교하면을 포괄하는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와석면, 청석면, 탄현면, 아동면 등으로 나뉘고 193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4호에 따라 와석면과 청석면 일원을 합하여 교하면이라 하였다. 1989년 군 조례 제1251호로 상지석리 일부가 조리면에 편입되었으며, 2002년 교하읍으로 승격하였다. ○명칭유래 - 면의 서쪽에서 흐르는 한강과 북동쪽에서 흐르는 임진강이 이 지역에서 합류하여 서해로 들어가는 데서 생긴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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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河里 |
옛날에 교하현 관아가 있던 마을로 교하읍내가 되므로 교하읍내, 읍내, 교하라 하였다. |
下支石里 |
고인돌이 두 곳에 있는데 이곳이 아래쪽이 되므로 붙은 이름이다. | |
上支石里 |
고인돌이 두 곳에 있는데 이곳이 위쪽이 되므로 윗괸돌 또는 상지석이라 하였다. | |
堂下里 |
산 제당 아래가 되므로 당아래 또는 당하라 하였다. | |
瓦洞里 |
기와를 구웠으므로 붙은 이름이다. 옛날 파평 윤씨 권문들이 많이 살던 곳이며 부자들의 기와집이 즐비하였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기새울, 지새울, 왯골, 와동이라고도 한다. | |
木洞里 |
나무가 무성하므로 나몰 또는 목동이라 하였다. 산에 나무들이 울창한 두메산골로 인근 주민들이 모두 여기서 겨울에 쓸 나무를 구하였다 하여 나무골로도 불리고 있다. | |
野塘里 |
들 가운데에 못이 있었으므로 들모시, 틀모시, 야당이라 하였다. | |
東牌里 |
석곶면의 동쪽이 되므로 동패라 하였다. 옛날 고양군과의 경계를 나타내는 동쪽 경계 팻말이 있는 지역이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 |
文發里 |
방촌 황희의 예장시 문종의 교시에 힘입어 선비들이 문학에 힘써 이름을 떨쳤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 |
山南里 |
심학산 남쪽이 되므로 산남리라 하였다. | |
西牌里 |
석곶면의 서쪽이 되므로 서패라고 하였다. | |
新村里 |
교하군 청암면 지역으로 새로 마을이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새말, 샛말, 간촌이라고도 한다. | |
松村里 |
소나무가 많으므로 송촌, 또는 이 마을 옆을 흐르는 곡릉천가에 웅덩이가 많아 沼羅地라 하였다. | |
煙多山里 |
작은 산이 연달아 있으므로 붙은 이름이다. 장명산 서맥 내령에서 북단 벌판에 자리한 마을로 삼도품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더불어 일상적인 해일로 안개가 자욱이 덮여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연달매, 연다매, 연담매라고도 한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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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道里 |
방촌 황희의 예장 당시 문종의 교시에 힘입어 이 마을 선비들이 문학에 전념하여 먼저 정도를 받아 널리 이름을 떨치자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오두말 또는 오도촌이라 하였다. |
多栗里 |
밤이 많이 나므로 한바미(一夜味), 한밤, 다율이라 하였다. | |
條里邑 |
○연 혁 - 조선 말기까지 파주군에 속한 곳으로,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교하군 아동면의 등원리, 아동리의 일부, 지석면의 상지석리 일부와 고양군 사리대면의 설문리, 지영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 죽원, 뇌조, 오산, 장곡, 봉일천, 등원 등 6개 리로 개편하여 조리면이라 하였다. 2002년 인구증가에 따라 조리읍으로 승격하였다. ○명칭유래 - 파주시 지역으로 條里洞面·助里洞面이라 하다가 조리면으로 줄여 부르게 되었다. 恭陵山 정상에서 사면으로 뻗은 가지 모양의 산줄기를 따라 골짜기마다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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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院里 |
이 마을 사람들은 대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었으며 또한 남쪽에서 대나무를 사다가 마당에 집모양으로 돌려세워 놓고 죽세공품을 만들어 팔았다 하여 유래되었으며,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군호와 같다 하여 ‘대(大)’자를 대나무를 뜻하는 ‘죽(竹)’으로 고쳐 죽원리라 하였다. 2000년 죽원리를 대원리로 개칭하였다. |
奉日川里 |
곡릉천 하상보다 낮은 지역으로 매년 홍수로 물난리를 겪게 되자 비는 적게 오고 해가 뜨게 해달라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 한다. 곡릉천의 옛 이름은 寶信川이며, 조선조에는 봉일천이었고 곡릉천은 속칭이다. | |
弩造里 |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뇌곡동의 ‘弩’자와 조산동의 ‘造’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 |
梧山里 |
이 마을 뒷산 전역에 걸쳐 오리나무를 심어 울창하게 많이 있어 이름한 곳이라 한다. | |
獐谷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곡리 전부와 장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獐山의 ‘獐’자와 基谷의 ‘谷’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 |
登院里 |
이 마을 주위로 능선이 둘러싸여 있어 이 마을 사람들은 늘 이 능선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달밤에 모여 고담과 함께 사생활을 논의하기도 하며 능선을 걸어 다니는 것이 마치 큰집 용마루를 올라 다니는 기분이라 하여 이름한 곳이라 한다. | |
陵案里 |
조리면에 있는 恭․順․永陵 가운데 순릉이 마주 건너다 보이는 곳이다. 능안말 또는 안능안이라 한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
月籠面 |
○연 혁 - 조선 말기까지 파주군의 지살면, 자곡면에 속한 지역으로 위전, 용은, 덕옥, 영태, 순상, 도내의 6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 때 오리면의 당산, 능동, 내동, 굴촌, 장포의 일부, 백석면의 현암, 오라의 각 일부, 광탄면의 두만 일부, 칠정면의 문산하리, 당동리의 각 일부, 교하군 아동면의 등원, 아동의 각 일부 지역 등을 병합하여 월롱산의 이름을 따서 월롱면이라 하였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3호에 의하여 내포리가 문산읍으로 편입되었다. ○명칭유래 - 월롱산의 이름을 따서 월롱면이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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葦田里 |
다락고개 밑이 되므로 다락고개, 달앗, 누현, 위전이라 하였다. 옛날에 마을 주변에 갈대가 무성하고 배가 왕래하였는데 그 후 갈대를 베고 마을을 이루어 붙인 이름이다. |
德隱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위전리, 용은동, 덕옥리의 일부와 백석면의 현암리 일부, 오리면의 능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德玉의 ‘德’자와 龍隱의 ‘隱’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 |
英太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영태리, 위전리, 순상리 각 일부와 교하군 아동면의 아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영태리라 하였다. | |
都內里 |
도감 벼슬을 한 사람이 살았다 하여 도감골 또는 도감동이라 하였다. | |
陵山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당산, 능동의 일부와 감정골, 숨통골 등을 병합하여 陵洞의 ‘陵’자와 棠山의 ‘山’자를 따서 능산리라 하였다. | |
炭縣面 |
○연 혁 - 본래 교하군 현내면, 신오리면, 탄포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교하군 현내면의 법흥, 맥금, 성동 지역과 신오리면의 성동, 대동, 만우, 금산 지역, 탄포면의 축현, 금승, 낙하, 문지, 오금 지역, 청암면의 송촌, 연다산, 오도, 갈현의 각 일부지역, 파주군 오리면의 능동리 일부, 자곡면의 덕옥리 일부를 병합하여 탄현면이라 하여 파주군에 편입되었다. ○명칭유래 - 탄현은 탄포면(炭浦面)의 ‘炭’자와 현내면(縣內面)의 ‘縣’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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杻峴里 |
싸리고개 밑에 있어 붙은 이름으로 싸리고개, 축현동이라고도 한다. |
金蠅里 |
쇠를 판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월롱산맥 자락으로 금맥이 있다하여 여기저기 파보았으나 파리똥만큼의 소량이 매장되어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쇠파리, 솨파니라고도 한다. | |
洛河里 |
임진강 옆에 낙하원(洛河阮)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장단을 거쳐 개성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낙화라고도 한다. | |
文智里 |
임진강 가의 산줄기에 있으므로 문줄이라 하였다. 어봉산 앞에 자리한 지역으로 황희의 예장 때 문종의 교시에 의해 우선 문학과 지혜를 넓히자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 |
吾今里 |
옛날 질오목(叱吾目)과 오금미(烏今美) 부락으로 되어 있어, 질오목의 ‘吾’자와 오금미의 ‘今’자를 따서 오금리라 했다. 조선조 세종 때 밀산군 박중손의 묘지를 물색하고자 매봉재, 신선봉, 구미봉 등을 샅샅이 뒤졌으나 명당을 찾지 못해 서성이던 중 매봉재 아래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를 듣고 명당을 찾았다하여 ‘오고미(吾告美)’라 하였는데 이것이 오금리로 변한 것이라 한다. | |
錦山里 |
보현봉, 선무봉, 문필봉 등의 기암절벽과 임진강의 경관이 뛰어나 비단 같은 산의 형세라 하여 붙은 이름이며, 그미․금의라고도 불린다. | |
萬隅里 |
임진강 가의 큰 모퉁이어서 붙은 이름으로 만모퉁이라고도 한다. | |
大洞里 |
임진강 가에서 가장 큰 마을이어서 붙은 이름으로 큰골, 대동이라고도 한다. | |
城洞里 |
오두산성 밑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이 지역은 앞으로 임진강이 흐르고 삼도품과 김포, 강화, 개풍 땅을 바라볼 수 있는 요충지역이다. 잣골, 작골이라고도 한다. | |
法興里 |
큰 절이 있어 법회를 자주 열고 불법을 흥왕하게 했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황희의 예장 때 文, 德, 智를 넓히도록 교시한 것에 따라 우선 법을 준수하는데 앞장서자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 |
葛峴里 |
가루고개 밑에 있어 붙은 이름으로 가루개, 가루고개, 갈현이라고도 한다. 장터로부터 인왕산 내령을 넘어 저진개로 가는 고개길 양편 산야에 칡덩굴이 너무나 무성하여 이름한 곳이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
廣灘面 |
○연 혁 - 1899년(광무3년)에는 16개리로 구성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양주군 백석면 마장리 일부가 편입되어 7개리(용미, 분수, 신산, 창만, 마장, 발랑, 방축리)로 편제되었다. 1983년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해 양주군 백석면의 기산리와 영장리가 편입되어 현재 9개 리로 구성되어 있다. ○명칭유래 - 양주군 백석면과 광적면 양쪽에서 흘러내린 물이 문산천으로 합류하는데 이것이 넓은 여울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한자말로 廣灘이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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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尾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호미리, 구룡리 전부에 분수원 일부를 편입하여 九龍의 ’龍‘자와 虎尾의 ’尾‘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
汾水里 |
역원인 분수원(焚修院)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용미리와 분수3리가 만나는 작은 고개가 있는데 이곳을 기점으로 임진강과 한강으로 흘러드는 물이 기원한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 |
新山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신점리, 두만리 전부와 조리면 화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당시 新店의 ‘新’자와 化山의 ‘山’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 |
倉滿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두만리와 사창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社倉의 ‘倉’자와 斗滿의 ‘滿’자를 합쳐 붙인 이름이다. | |
馬場里 |
말을 먹이던 장소이므로 마장골 또는 마장동이라 하였다. 이 지역은 1504년(연산군 10년) 전국의 軍馬를 집결시켜 사육하고 기마훈련장으로 이용하게 되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 |
靈場里 |
이 지역은 普光寺 주위 일대에 걸쳐서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가 이끌었던 승병 수백 명이 목숨을 잃어 원한에 사무친 영혼들이 헤매고 있는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 |
基山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기곡리, 내고령리 전부에 중산리 일부를 편입하여 基谷의 ‘基’자와 中山의 ‘山’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 |
發郞里 |
이곳 뒷 골짜기에 절이 있어 이 마을을 지나는 중들이 등에 바랑을 지고 다녔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바람골, 바랑골, 바랑동, 발랑동이라고도 한다. | |
防築里 |
방죽이 있어 방죽말 또는 방축동이라 하였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
坡平面 |
○연 혁 - 파평현은 조선 말까지 풍덕, 천천, 늘노, 장포, 두문, 신사, 마사, 신곡, 이천, 지천, 용산 등 12개 동리가 이곳에 속하였는데 1899년 행정구역 개편시 한성부 파주군 파평면으로 되어 18개 리로 구성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칠정면의 이천리와 신속면의 임진리 각 일부 그리고 적성군 서면의 식현, 도장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율곡, 두포, 이천, 마산, 금파, 늘노, 덕천 등 7개 리로 개편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적성면의 장파리를 편입하여 8개리가 되었고,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하여 이천리를 문산읍에 넘겨주어, 현재 7개 리로 구성되었다. ○명칭유래 - 파평현 지역으로 임진강변 장파리와 금파리로 이어지는 편편한 언덕이 약 3㎞ 가량 펼쳐져 있다하여 이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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斗浦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두문리 전부와 신사리, 장포리, 마사리의 각 일부 지역을 편입하여 斗文의 ‘斗’ 자와 長浦의 ‘浦’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
栗谷里 |
밤나무가 많았으므로 붙은 이름으로, 밤실, 밤실골, 방굴, 밤골이라고도 한다. | |
麻山里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용산리와 마사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麻沙의 ‘麻’ 자와 龍山의 ‘山’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용산동이라고도 하고, 평촌동, 평촌리라고도 한다. | |
金坡里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장포리, 금곡리, 늘노리의 각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金谷의 ‘金’자와 長坡의 ‘坡’ 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 |
訥老里 |
늪이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늘로리, 늠노리, 늠느리라고도 한다. | |
德泉里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풍덕리 전부와 천천리 일부지역, 적성군 서면의 식현리, 도장리의 각 일부 지역을 편입하여 豊德의 ‘德’ 자와 泉川의 ‘泉’ 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 |
長坡里 |
긴 등마루에 마을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이 긴 능선은 금파리에서 고랑포 쪽으로 약 2㎞ 정도를 말한다. 긴등마루, 장마루, 장파라고도 한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
積城面 |
○연 혁 - 백제의 七重城에 속해있었고 그 후 고구려에 지배권이 넘어가 고구려의 칠중성이 되었고 신라 757년(경덕왕16)에는 重城懸으로 개칭되었다. 940년(태조23)에 적성현으로 개칭, 1895년(고종32)에는 부군제가 실시되면서 군으로 승격되었다. 현 적성면 지역은 적성읍내였으므로 현내면이라 하여 읍내, 관동, 가월, 검상, 주월, 설마 등으로 6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동면의 9개 동리와 서면의 9개 동리, 마전군 군내면의 삼화리와 장단군 고남면의 장좌리와 양주군 영근면의 하원리 일부와 파주군 파평면의 천천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적성면이라 하고 연천군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45년 11월 3일에는 파주군 관할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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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智里 |
지형이 마디처럼 생겼으므로 마디라 하였는데 발음이 변하여 마지로 되었다. 당의 장수 설인귀가 주월리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용마와 갑옷, 투구, 칼을 얻은 뒤 적성 일대에서 훈련하였다고 한다. 그의 말발굽이 이곳 마지리를 가장 많이 지나갔다고 하여 馬蹄里라 하였는데 발음이 변하여 마지리가 되었다고 한다. 마디, 마지, 마제라고도 한다. |
食峴里 |
밥재고개 밑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밥재 혹은 食峴洞이라고도 한다. | |
武建里 |
옛날 설인귀가 이곳 산골짜기에서 무술을 연마한 곳이라 한다. 무건이, 武建洞이라고도 한다. | |
雪馬里 |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칠중성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말을 달려 훈련했으므로 薛馬馳, 또는 설인귀가 추운 겨울에 눈이 쌓인 상봉을 거쳐 감악산 봉으로 말을 달려 무예를 쌓았다고 하여 雪馬里라고도 한다. 설마동, 설마치라고도 한다. | |
赤岩里 |
뒷산에 붉바위(赤岩)가 있으므로 붙은 이름이다. 고려 때 적암향이 있었기 때문에 적암향이라고도 한다. 붉바위, 적암향이라고도 한다. | |
魚遊池里 |
임진강 가의 용 못에 살았던 이무기를 고기에 비유하여 魚遊池里라 하였다. 옛 기록에는 魚餘地로 표기되어 있다. | |
墻峴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장평리․송현리․산덕리를 병합하여 墻坪의 ‘墻’자와 松峴의 ‘峴’자를 따서 장현리라 하였다. | |
栗浦里 |
밤나무가 많은 포구이므로 밤개라 하고 한자말로 栗浦라 하였다. 밤개, 율포동, 율포라고도 한다. | |
客峴里 |
손(님)고개 밑이 되므로 손고개, 선고개 또는 한자말로 객현동이라 하였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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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邑里 |
옛 적성현 읍내가 되므로 붙은 이름이다. 읍내라고도 한다. |
佳月里 |
감악산 북맥 자락이 임진강 가 칠중성에 이르러 반달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곳에 있는 돈대에서 옛 군졸들이 파수를 볼 때 강물에 비친 달이 너무 아름답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가룰, 가루리, 갈올, 갈월, 기월동이라고도 한다. | |
舟月里 |
원래 한야리라고 하였는데 고려 때 우왕과 공민왕이 궁녀들을 거느리고 달밤에 뱃놀이를 하였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한배미, 한야미, 한야리라고도 한다. | |
斗只里 |
지형이 두지(뒤주의 사투리)처럼 생겨 붙은 이름이다. 두지리는 원래 ‘斗只’가 아니고 ‘頭耆’라고 한다. | |
紫長里 |
국사봉 밑이 되므로 자핫골 등으로 불렸다. 임진강변에 붉은 찰흙이 넓게 분포되어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자핫골, 자자기, 자장이, 재재이, 자하리라고도 한다. | |
畓谷里 |
논이 많은 골짜기여서 붙은 이름이다. 논골이라고도 한다. | |
長佐里 |
장자못이 있어 붙은 이름으로, 장자울, 장좌울, 장좌동이라고도 한다. | |
郡內面
長湍面
津東面
津西面 |
○연 혁 - 이 지역은 삼한시대의 습천군에, 백제 근초고왕 시기에는 백제의 야아현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 뒤 475년 고구려가 이곳을 복속, 장천성현으로 하였고, 삼국통일 후 757년 장단군으로 개칭 우봉현에 소속되었다. 고려전기 995년에는 개성부 관할의 기현에 속하게 되었고, 1001년에는 시중 한언공의 본관이라 하여 단주로 승격되었다. 1018년에는 다시 장단현으로 되어 적성, 파평 등 7개 현을 관할하면서 상서도성의 직속이 되었다. 이후 1390년에는 경기좌도에 소속되었다. 조선 건국 후 1414년에 임강현을 병합하여 장임현으로 되었다가 다시 장단현으로 되고 1435년에는 원평부에 이속되었다가 1469년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 뒤 혁파와 격하, 복구가 거듭되다가 1895년 부군제 실시와 함께 군으로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단군은 전체 10면 67리의 체제가 되었는데, 여기에 현재의 지명인 군내, 진동, 진서의 명칭이 나타나며 장단면 지역은 진남면 지역으로 편제되고 있다. 그리고 1945년 국토의 분단과 함께 5개 면이 북한 영토로 편입되고, 5개 면 41개 리만 남게 되었다. 그 후 군내면은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에 의하여 파주군 임진면에 편입되었다. 1972년 12월 28일에 법률 제2395호에 의해 장단, 진동, 진서면이 함께 파주군에 편입되었다. ○명칭유래 -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
郡 內 面 |
白蓮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진현내면의 백연리, 서상리, 서하리의 일부와 중서면의 도라산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백연리라 해서 군내면에 편입하었다. |
造山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진북면 조산리, 송산리 일부와 개성군 동면 백동음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군내면 조산리가 되었다. | |
亭子里 |
정자포 가에 자리하고 있어 붙은 이름이다. 장자포리라고도 한다. | |
邑內里 |
장단 고을이 있었던 곳이다. | |
松山里 |
소나무가 울창했던 산 밑에 자리하고 있어 송산이라 하였다. | |
點元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진현내면의 점희릉리 전부와 원당리 일부, 중서면의 도라산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點希陵의 ‘點’자와 元堂의 ‘元’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 |
芳木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진현내면의 방목리, 동하리, 서하리 일부와 진동면의 동파리, 서곡리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방목리라 해서 군내면에 편입되었다. 방모기, 방무기라고도 한다. | |
長 湍 面 |
盧上里 |
가루개 위쪽에 자리하고 있어 붙은 이름이다. 윗가루개라고도 한다. |
盧下里 |
가루개 아래쪽이 되므로 붙은 이름이다. 아랫가루개라고도 한다. | |
巨谷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거로리와 금곡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巨路의 ‘巨’자와 金谷의 ‘谷’자를 따서 거곡리라 하였다. | |
都羅山里 |
도라산 밑에 자리하고 있어 붙은 이름이다. 도리미, 도라미라고도 한다. | |
石串里 |
곶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돌고지, 돌곶이라고도 한다. | |
江井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강연리와 굴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江連의 ‘江’자와 堀井의 ‘井’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 |
東場里 |
장말 동쪽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동장말, 동장촌이라고도 한다. | |
井洞里 |
큰 우물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우물골이라고도 한다. | |
津 東 面 |
東坡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동파리, 서곡리 일부와 진현내면의 정자포리 일부를 병합하여 동파리라 하였다. |
龍山里 |
주위의 산이 용처럼 생겨 붙은 이름이다. | |
下浦里 |
임진강가에 있으므로 아랫개 또는 하포리라 하였다. | |
瑞谷里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진동면 서곡리 일부와 장북면의 두매동리, 장서면의 초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서곡리라 하였다. | |
哨里 |
지형이 초리(꼬리)처럼 생겨 붙은 이름이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
津 西 面 |
金陵里 |
조선시대 송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그대로 금릉리라 해서 진서면에 소속되었다. 금릉공, 금릉동이라고도 한다. |
魚龍里 |
조선시대 송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어룡리라 해서 진서면에 편입되었다. 어룡개, 어룡포라고도 한다. | |
金村洞 |
○연 혁 - 1899년(광무3) 당시 교하군 아동면, 현내면 일대였는데, 1914년 4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시 교하군 아동면의 신금촌, 야동리, 아동리, 금릉리와 현내면의 맥금리, 검산리 지역, 지석면의 하지석리 일부 지역, 청암면의 갈현리 일부 지역, 파주군 자곡면의 용은동 일부 지역이 병합되어 아동면이라 하였다. ○명칭유래 - 본래 교하군 아동면 지역으로 새로 조성된 마을이므로 새말, 신촌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세말, 쇠말, 금촌이라 하였다. | |
衙洞洞 |
본래 교하군 아동면 지역으로 교하군의 관아가 있었으므로 관앗골이라 불렸다. 앗골, 앗굴, 아동이라고도 한다. | |
金陵洞 |
본래 교하군 현내면 지역으로 쇠 또는 금이 묻혔다하여 쇠자, 쇠재, 금척, 금성이라 했으며, 금성천에 상선이 오르내리던 전성기에는 금화로 둘러싸였다하여 금성리로 호칭하다 숙종 때 능자리를 잡은 후 금릉리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영조7년 장릉을 갈현리로 천묘한 후 교하군 관아를 이곳으로 이전하고 당초 금자와 릉자를 따서 금릉리로 개칭하였다는 설이 있다. | |
冶洞洞 |
본래 교하군 아동면 지역으로 풀무간이 있었으므로 붙은 이름이다. 용산골에 천정구현 관아가 있을 당시 군기와 농기구를 만들던 대규모의 대장간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풀뭇골이라고도 한다. | |
檢山洞 |
본래 교하군 현내면, 하지석리 지역으로 신령스런 월롱산 밑에 자리하고 있어 붙은 이름이다. 신숙주의 아버지 申檣의 묘를 물색하기 위해 월롱산 남맥 오장봉 일대 산을 샅샅이 검색한 후 묘 자리를 발견했다 하여 유래한다. | |
陌今洞 |
본래 교하군 현내면 지역으로 매흙이 많은 구미(후미)이었으므로 맥그미, 맥금이라 하였다. 이 지역 일대가 보리밭이 많아 보리가 익을 무렵 바람이 불면 황금물결이 일어나는 듯했다 하여 麥金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
첫댓글 유익한 내용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