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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05년 4월 4일) 광주사태 발생 원인을 단서를 제공하는 두 개의 글이 나란히 인터넷 신문들에 올랐다. 첫번째 글은 데일리안 자유토론방 19985번 글에 "광주 5.18 특별법 초안 기안을 후회하면서"라는 제목으로 오른 글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광주 특별법 초안 작성자였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필자의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5.18 광주사태 당시 필자 역시 광주에 있었다. 광주사태가 5월 15일의 서울역 집회 연속이란 주장은 맞는 말이다. 당시 5월 15일 서울역 집회가 없었다면 광주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 집회를 악용한 세력인 김대중 일파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 날 이후 유언비어만 아니었더라도 광주 내란 음모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어 그는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집회와 5월 18일 광주사태의 관계를 이렇게 서술한다:
<<서울 역 시위대들이 경찰을 죽여가면서 까지 광주로 내려간 시각은 16일이었고 이때는 이미 전남도민 400만명을 학살한다는 유언비어가 광주 전역을 휩쓸 때였다. 과연 누가 무엇때문에 이렇게 유언비어를 조작하여 광주사태를 일으켰는지 알아야 한다.
당시 전두환 쿠데타라는 이 유언비어는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에 하달되었고 여기에 더하여 전남도민 400만 학살지령 유언비어는 사실인양 광주 충장로 일대에서 그리고 각 지역으로 퍼져났다. 이에 앞서 5월 16일 이화여대에서 긴급 체포된바 있는 김대중 세력들은 자신들이 살아 남기 위해 광주로 피신하여 거사를 일으켜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이들은 5.18광주사태 거사 계획을 위하여 이른바 민주항쟁, 혹은 민주화운동이라 부르자며 김대중으로 부터 거사 자금을 지원 받기에 이른다.
광주사태가 유혈 충돌을 피할 수 없었던 이유를 "치밀하게 계산된 폭도들이
도청을 점령하려 하였으며, 계엄군은 결사적으로 도청을 지키려 하는데서 발단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그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총검과 수류탄과 장갑차로 무장한 폭도들이 또한 칼과 낫으로 무장한 시민군까지 합친 수십만명이고작 200명 미만의 군인들이 지키는 도청으로 쳐들어가며 장갑차로 군인들을 깔아죽여야 했던 것은 어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 폭도들은 광주 방송국과 세무소를 불태우고 교도소를 습격하면서 시민군을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
5월 21일 밤 시민군의 광주 해방구 설치를 목격하면서 22일 광주를 벗어난 것은 광주가 폭도들에 의해 무법천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광주사태가 1기에서 2기로 옮겨가던 그 날의 상황을 이렇게 서술한다:
<<5월 22일 민중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던 김대중 세력들이 강행한 것은 파출소를 파괴하고 무기를 탈취하는 일이었으며 그들은 결국 도청을 경비하는 군인들을 공격하고 도청을 정복하여 궐기대회를 열었으며, 전국적으로 민중봉기를 확대시키는 작전을 시도했다. 이 작전에 휘말린 계엄군들과 그리고 폭도들에 의하여 살해된 사람들이 다름 아닌 광주 시민들이었다. >>
광주사태 배후에 북한 세력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그는 다음과 같이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제시한다:
<<광주사태는 그 배후에 분명 북한 세력이 있었다는 사실도 맞는 말이었다.
그 한 예가 시민군이 도청을 점령하자마자 정체 불명의 사람들이 도청 지하창고에 순식간에 광주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다이너마이트와 TNT를 설치했고 만일 간첩이나 폭도가 폭파시키기 직전 이 사실을 전달 받은 계엄군이 5월 26일 폭약 뇌관을 분리시키지 않았더라면 광주시는 언제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운명이었다. 광주시민이 혹은 민주화운동가가 전남도청에 다이너마이트 폭발 장치를 설치하였는가. 아니다. 광주 사태 배후에 북한 세력이 분명하게 있었다.
광주에서 시민군이 조직되고 나서 또 다른 시민군으로 위장한 조직들이 나주에 침투하여 예비군 무기고에서 2000 여정의 총기류와 중화기 수류탄등을 강탈해 갔다. 아직 광주 사태 희생자가 없는 때 였는데 도대체 이들이 무엇을 위하여
수천 정의 총기류가 필요하였단 말인가? 필자는 그 시민군이 광주 시민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다. 광주 도청 경비 작전에 동원되고 없는 틈을 타서 무기고를 강탈한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당시 나주 채석장에는 다이너마이트가 보관되어있었고 이러한 사실은 현지 주민들도 모르던 비밀이었는데 폭도들이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 폭약이 도청에 도착하기 무섭게 폭파 장치를 했다는 사실은 또 무엇을 뜻하는가
필자가 알기로는 당시 광주 시민 대다수가 무기 반납을 원했는데 폭도들은 총기로 위협하며 무기 반납을 막았다. >>
광주 시민들 중 그 누구도 총을 든 폭도들이 지배하는 무법천지가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그들로 그토록 대담한 행동을 하게 한 것은 유언비어들이었다고 분석한다:
<<유언비어 가운데 서남부지역 에서 나도는 내용중 하나가 광주 민중봉기가 성공하면 김대중 씨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시장 군수를 할수있다는 유언비어도 있었고 이 유언비어를 뒷받침하는 것이 김대중의 예비내각 명단이 기록된 문서였다. 당시 광주에는 혁명을 공연하는 극단이 있었고 혁명 분위기에 들뜬 사람들도 있었다. >>
자, 이분 글에서 5.18 광주사태 발생원인에 대한 두 핵심적인 원인은 5월 15일 서울역 집회와 유언비어였음이 밝혀졌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 것은 같은 날 한겨레신문에 실린 한홍구 교수의 글에서도 서울역 집회와 유언비어가 부각된다는 사실이다.
"유시민, 어떻게 ´폭력학생´의 대명사가 됐나"라는 제목의 역사 칼럼은 1980년 5월의 이야기를 이렇게 서술한다:
<<벌써 25년 전의 일이라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광주 학살이 벌어지기 1주일 전쯤인 5월11일이나 12일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서울의 봄’ 당시의 복잡했던 정세를 여기서 설명하려면 너무 복잡해지니 간단히 넘어가기로 하자. 당시 서울대에서는 학생들이 거리로 나가기에 앞서 학내에서 농성 중이었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주기를 고대하고 있던- 그래야 ‘혼란’이 조성되고 군이 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고 생각했기에- 군부에서는 학생들을 자극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계엄군(10·26 사건 당시 선포된 계엄령은 당시에도 살아 있었다)이 먼저 학교로 쳐들어와 학생들을 잡아갈 거라는 흉흉한 소문도 많이 돌았다.
그날 서울대에서는 300∼400명의 학생들이 철야 농성을 하면서 학교를 지키고 있었는데, 밤 9시가 지나 학생회 사무실로 여러 곳에서 주로 기자라고 하면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밤 군이 출동한다는 긴박한 정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보안사의 역정보였던 것 같다. 나는 그날 무슨 일 때문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학생회 주변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다가 유시민군을 만났다. 그는 당시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으로 그날 당번이 되어 농성을 이끌던 중이었다. 그날따라 복학생 선배들도 4학년 선배들도 보이지 않았는지, 그는 군이 쳐들어온다는데 농성 중인 학생들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의견을 물어왔다. 군이 쳐들어온다는 게 확실한 정보라면 1·2학년이 대부분인 농성 학생들을 빨리 해산시켜야지 별수 있겠는가? 힘든 결정이야 그의 몫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답했던 것 같다. 아무튼 유시민군은 해산 결정을 내렸고, 우리는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날 밤 늑대는 오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린 유시민군과 나는 다음날 아침 7시 조금 넘어 몇몇 친구, 선배들과 함께 학교에서 만났다. 민망하고 쪽팔려 그저 얼굴만 쳐다보며 웃기만 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날 아침 강의실마다 돌아다니며 양떼를 쫓아버린 전날 밤의 소동에 대해 사과와 해명을 하느라 혼이 났다. 그리고 5월14, 15일 가두시위에 이어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 있었고, 운명의 5월17일이 왔다. 그날도 나는 무슨 일인지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대낮에는 이화여대에서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의 회의가 경찰의 습격을 당해 참석자 대부분이 연행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학교로는 시시각각 군부대의 이동에 관한 제보가 빗발쳤다. 각 언론사 출입기자들도 오늘 밤 상황 발생이 100% 확실하다고 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음흉한 픽션 소설가 한홍구의 새빨간 거짓말들이 낱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픽션 소설가들의 특징은 안개를 뿌려 놓는다. 여기서 픽션 소설가 한홍구가 역사 이야기라며 늘어놓는 것에 어떤 안개가 끼어 있는지를 두어 개만 살펴보자.
한홍구는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주기를 고대하고 있던- 그래야 ‘혼란’이 조성되고 군이 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고 생각했기에- 군부에서는 학생들을 자극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유언비어를 퍼트리고>라고 하였다. 당시 계엄사령관은 이희성 대장이었다. 이희성 대장이 유언비어를 퍼뜨렸는가? 한홍구는 말하라! 계엄사령관 이희성 대장이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픽션 소설가 한홍구가 그 당시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느냐의 문제이다. 아직 국민?전두환이란 이름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을 때였다. 광주 시민들도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을 때였다. 4월 30일에 중앙정보부 서리 취임 인사를 짤막하게 한 적이 있었으나, 5월 22일로 예정된 김대중의 쿠데타(전국적 민중봉기)를 준비하던 운동권 몇명만 마음에 두었을 뿐 대다수의 국민들은 전혀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전두환이란 이름을 한홍구가 언제 처음 들었느냐는 광주 사태의 원인을 캐는 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무엇이 광주사태였던가? 1980년 5월 18일 오전 8시에 자기 하숙방에서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으로부터 전두환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들어본 윤상원이 주동하여 일으킨 폭동이었다. 그는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날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제조하여 폭동을 선동하였다. 광주에서 하무 전까지는 시위 구호가 "최규하 대통령 하야, 신현확 총리 퇴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시위 구호가 등장한 것이었다. 그리고, 서울역 집회의 붙똥이 광주로 튀긴 이 사건의 핵심은 서울의 유언비어 제조기는 누구였는지의 문제였는데, 이제 한홍구 교수 스스로 그 유언비어 제조기가 누구였는지를 밝히는 듯하다.
한홍구는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주기를 고대하고 있던- 그래야 ‘혼란’이 조성되고 군이 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고 생각했기에- 군부에서는 학생들을 자극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유언비어를 퍼트리고>라고 말하였다. 자, 윤상원이 퍼뜨린 유언비어는 그가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 벽보로 붙이기도 하고 삐라로 뿌리기도 했던 투사회보로 물증이 분명하다. 그러면, 한홍구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군부에서는 여러 가지 유언비어를 퍼트리고>라는 말을 하는가? 아무리 유시민을 변호하기 위해서라도 근거가 있는 주장을 해야 설득력이 있을 것이 아니던가?
5월 15일 서울역 집회의 문제는 오후 한시 반 경 남대문 앞에서 유시민 등의 시위대가 시민 버스를 탈취하여 순경 몇 명을 깔아죽인 사건이었다. 아마 한홍구도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은 못할 것이다. 만약 정말로 역사의 진실을 말하려면 그 사건을 감추지 말고 말하여야 한다. 당시 시위대는 왜 순경들을 학살하였는가? 즉결 재판이었는가? 현장 증인들의 말에 의하면 당시 순경들은 단지 얌전하게 한 줄로 서있었을 뿐 시위대의 행진을 가로막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죽였는가? 즉결 재판이었는가? 도대체 그 순경들이 무엇을 잘못했었다는 것인지 설명이 있어야 한다.
한홍구는 5월 11~12일경 군부에서 <학생들을 자극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고 말하였다. 즉, 그 즈음에 유시민이 양치기 소년이 되었던 것은, 그리고 그 이후의 운동권의 과격 시위는 군부가 유언비어를 퍼뜨렸기 때문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5월 15일 서울역 집회 때 단 한 명의 군인이라도 동원된 적이 있었는가? 단 한 명의 군인도 동원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애매한 순경들을 시위대가 잔인무도하게 학살하였느냐 말이다. 여기서 한홍구는 순경 학살자들의 신원을 먼저 밝혀 주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시위대 중에 북한 특수군인들이 침투해 있었다는 가능성을 열어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시 유혈 폭동을 한홍구의 주장대로 군부가 충동하였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가능성을 열어두듯이 북한 세력이 그 배후에 있었는지는 한홍구 편에서 두가지 사실을 명확히 밝혀 줄 때 판단이 가능하다. 만약 그 날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순경들을 깔아죽인 이가 정말로 운동권 학생이었다면 우리는 그것이 순수한 민주화 운동이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아직 유시민과 한홍구 등 당시 운동권에서 그 범인의 신원을 밝혀준 바 없다. 따라서 그 범인이 북한 공작원일 가능성이 있는 한 한홍구가 모든 책임을 군부로 떠넘기는 픽션 소설을 쓰는 문제는 자제가 필요할 것이다. 적어도 군부에서 유언비어를 퍼뜨렸거나 공작을 하였다는 물증은 독자에게 제시하여야 한다.
한홍구는 또 이런 기술을 한다. <그날 서울대에서는 300∼400명의 학생들이 철야 농성을 하면서 학교를 지키고 있었는데, 밤 9시가 지나 학생회 사무실로 여러 곳에서 주로 기자라고 하면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밤 군이 출동한다는 긴박한 정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보안사의 역정보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보안사의 역정보였던 것 같다> 바로 이런 표현들이 음흉한 픽션 소설가들이 뿌리는 안개이다. 한홍구는 역사를 그런 식으로 강의하는가? "보안사의 역정보였던 것 같다"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 서술인지, 아니면 한홍구 본인의 픽션 소설인지 독자들에게 명확히 밝혀달라. 만약 이것이 한홍구의 개인적인 픽션 소설인데, 독자들이 사실로 받아들이면 역사가 얼마나 왜곡돼는지 모르는가?
당시, 일본 조총련에서 주체사상 등 북한서적을 수입하여 전국 대학가에 공급하던 녹두서점이란 좌익서점이 광주에 있었다. 그리고, 광주사태가 유혈폭동이 된 것은 윤상원과 녹두서점에서 미리 제조한 화염병으로 5월 18일 오후 한시반부터 오후 5시 30분 사이에 광주 파출서들을 파괴하였기 때문이었다. 광주시장과 전라도지사가 폭동을 수습하려고 백방으로 하던 중에 광주사람 정웅 장군이 폭동진압 작전 명령을 내린 시각은 오후 5시 40분이었다. 그런데, 당시 녹두서점 주인은 그런 과격 시위 선동의 배후에 괴전화의 충동이 있었음을 증언한 바 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서울 운동권뿐만 아니라 지방 운동권도 괴전화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군경과 민간 유혈 충동을 일으킨 배후에 북한 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을 일단 열어두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5월 22일로 예정된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와 때를 같이하여 남한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고 남침하기 위해 북한군이 휴전선 일대에 총집결하고 있던 때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런 사실을 미 정보부에서 알고 항공모함을 한국에 급파하던 시점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때가 어느 때라고 괴전화 발신인의 신원도 확인해 보지 않고 군부 쿠데타 소문을 퍼뜨린다는 말인가? 그리고, 괴전화 발신자가 기자였다고 하다가 보안사 역정보였던 것 같다고 말을 바꾸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사실이며 어디까지가 픽션 소설인가?
한홍구는 이어 이런 말을 하였다:
<<그리고 5월14, 15일 가두시위에 이어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 있었고, 운명의 5월17일이 왔다. 그날도 나는 무슨 일인지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대낮에는 이화여대에서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의 회의가 경찰의 습격을 당해 참석자 대부분이 연행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학교로는 시시각각 군부대의 이동에 관한 제보가 빗발쳤다. 각 언론사 출입기자들도 오늘 밤 상황 발생이 100% 확실하다고 했다. >>
1980년 이화여대에서 (김대중 홍위병들로 구성된) 총학생회장 비밀연속회의가 경찰에 발각된 것은 시위 주동자들이 전날 밤 서울역에 십만 명이 운집한 서울역 회군 때 비밀연속회의 시간과 장소를 마이크로 광고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광고를 초청장으로 여기고 이화여대 강당에 온 경찰은 5월 22일 김대중이 전국적 민중봉기(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것과, 그것이 보통 시위가 아니라 물리적인 방법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김대중이 집권하려는 목적의 민중봉기였음을 발견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자물쇠였다. 그의 경제 정책도 자물쇠였다. 여러 차례의 5공 청문회 때도 그는 자물쇠였다. 당시 그가 중동 순방길에 나선 것은 한국이 석유 수입선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국민이 알면 경제에 나쁜 영향을 준다며 언론이 보도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순방 중에 두가지 긴급 상황 소식을 듣고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갑자기 귀국하셨다. 하나는 북한군이 남침하기 위해 휴전선 일대에 총집결해 있다는 그래서 미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입항하고 있다는 미 정보부의 보고였으며, 다른 하나는 집권을 목적으로 김대중의 내란 거사일이 5월 22일이라는 보고였다. 그래서 5월 17일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되고 야간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이때도 국무회의는 국민들이 전쟁 위기를 알면 경제에 나쁜 영향을 준다며 언론의 특종 뉴스 보도를 금하고 단지 5월 18일 0시를 기하여 긴급조치를 발표하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은 내렸다.
5월 22일로 예정된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와 때를 같이하여 북한군이 움직일 동태였으며, 북한군의 무력 도발을 저지하기 위해 미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입항하고 있다는 특종 뉴스를 최규하 정부는 언론이 보도하지 못하게 하였다. 만약 김대중과 운동권이 추진해온 전국적 민중봉기를 사전에 막지 못하면 바야흐로 제2의 한국전쟁이 언제 재연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언론사 편에서는 특종 뉴스 중의 특종 뉴스였되, 최규하 대통령의 자물쇠 정책에 따라 국민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만약 최규하 대통령의 자물쇠 정책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설사 경제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더라도 국민이 알 권리를 막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경제를 우려한 그의 자물쇠 정책은 운동권에 오해를 가져와 서울발 픽션소설이 광주의 픽션소설가 윤상원에게 전달되어 온갖 유언비어로 증폭되게 하였다.
김대중이 5월 22일 쿠데타(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려 하였던 만큼 광주사태의 연료는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연료가 있어도 점화되지 않으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서울발 유언비어가 광주에서 점화되었다. 따라서 광주사태 발생 원인을 우리는 서울 운동권발 유언비어에서 찾아야 한다. 한홍구가 25년 전에 광주 학살이 있었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군경과 시민군의 희생자 수가 비슷할 때 학살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비과학적인 표현이다. 더구나, 희생자 탄피 조사에 의하면 민간인 희생자 대부분은 시민군의 총에 희생되었다는 것이 과학적 사실이다. 이 경우 군경에 의한 학살이란 표현은 거짓말이 된다.
그리고 누가 학살하였다는 말인가. 1996년의 석달간에 걸친 5.18 특검은 전두환 당시 소장은 광주사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혀 내었다. 이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럼에도 유언비어는 전혀 엉뚱하였다. 전혀 그런 사실이 없는데, 군부 쿠데타 유언비어가 서울 운동권에서 출발하여 광주의 혁명가 윤상원에게 5월 18일 오전 8시에 전달되었다. 다시 두 시간 후 그 유언비어가 한층 확대되어 녹두서점 주인에게 들어거 또 하나의 폭동 주동세력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투사회보 등 폭동 선동 유인물 및 화염병 제작으로 폭동을 배후 지원하던 녹두서점 주인은 다른 한편으로 유언비어를 확대 재생산하여 전화로 전국 대학 운동권에 알렸다.
누구인들 광주사태 희생자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없으리요마는 그렇다고 진실을 왜곡할 수는 없다. 광주사태 가해자는 유언비어였다. 그리고 광주발 유언비어의 원출처는 서울 운동권이었다. 전남대 당시 총학생회장 박관현의 귀로 유언비어가 흘러들어간 시점은 5월 17일 야간이었다. 당시 전남대 학생회 기록에 따르면 박관현이 학생회 임원들과 더불어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다가 서울 운동권으로부터 빨리 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한홍구가 기록한 바로 그 제보였다. <이화여대에서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의 회의가 경찰의 습격을 당해 참석자 대부분이 연행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바로 그 말과 더불어 빨리 피하라는 제보였다.
그래서 그 즉시 전남대 학생회 임원들이 그 즉시 광주 외곽 산장으로 피신하였고, 박관철 학생회장도 오전 8시에 광주의 혁명가 윤상원을 잠깐 접선한 후에 곧 바로 외곽 산장으로 피신하였기 때문에 픽션 소설가들의 주장과 달리 광주 사태 내내 전남대 학생회 임원들의 참여도 없었으며, 학생들도 창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전남대 학생들은 온건파 혹은 투항파로 불렸으며, 폭도들에 맞서 목숨을 걸고 무기 회수를 위해 노력을 했었다.
5월 18일 오전 10시에 50명의 전남대생이 노동자 윤상원의 선동을 받아 전남대 정문 7명의 공수부대원들에게 30분간 돌을 던진 사실은 있다. 그러나, 피신 중 윤상원으로부터 폭동을 일으키자는 연락을 받았던 학생회 총무는 기겁을 하고 반대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시위가 과격해지자 전남대생들이 자진하여 시위 중단을 호소하였다는 사실은 광주사태 배후 세력은 따로 있었음을 말해 준다. 한홍구는 <군부에서는 학생들을 자극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는 말을 몇차례 하였다. 그러면 한홍구에게 따져 물어보자. 광주시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며 광주시가 대한민국 지도에서 없어질 만큼의 위력을 가진 폭약을 도청 지하에 실어다 놓고 폭파 장치를 한 이들은 누구인가? 무엇 때문에 계엄군이 목숨을 걸고 그 수많은 뇌관을 일일이 분리하여 광주 시민을 구하였는가?
광주사태 동안에 전남대 학생들은 온건파였다. 많은 학생들이 폭도들에게 얻어터지고 사살 위협을 받으면서도 무기 회수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면, 왜 마지 전남대가 광주사태의 상징인 것처럼 알려졌을까? 그것은 당시 경찰이 박관현을 폭동 주동자로 오해하였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김대중 선생의 전국적 민중봉기를 돕고 있었으되, 폭력 시위 의도는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댜수의 광주사태 관련자들이 석방되었던 데 비해 그는 여러 해의 옥고를 치루어야 했다. 1984년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단식 투쟁하다가 옥사하였는데, 이것이 전남대와 전국 운동권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1984년이 어떤 해였던가? 바로 그 해가 광주사태 주동하다가 군에 입대하였던 학생들이 모두 복학하였던 해였다. 김대중의 쿠데타를 돕던 다른 모든 학생들은 단지 군대에 조금 일찍 입대하는 처벌만 받았던 데 비해 전남대 총학생회장은 옥살이를 하였다. 그것이 억울해 그는 단식하다가 옥사하였는데, 바로 그때 김대중 홍위병들이 모두 복학하였으며, 학생회 활동도 자유로와졌는데 이때부터 픽션 소설가들은 다시 유언비어를 전국에 퍼뜨리기 시작하며, 일부 과격 학생들이 미국 문화원에 방화하면서 주사파 등 좌익 단체들의 세력을 키워나갔던 바 속칭 386이 바로 그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박관현이 5월 17일 밤 늦게 들은 서울발 유언비어의 출처에 대해서 한홍구가 어떤 단서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날은 토요일이요 그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김대중의 쿠데타 거사 계획이 전날 오후 6시에 이화여대강당에서 발각된 사실을 모르던 박관현은 김대중 선생의 거사를 돕기 위해 학생회 사무실에 뭔가를 밤늦게 하고 있었다. 한홍구가 <그날도 나는 무슨 일인지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그는 공부하기 위해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렇다면, 무슨 일로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었는가. 그리고 그 시간 누군가가 자신을 서울의 학생이라고 밝히며 박관현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피하라고 일러 주었다. 문제는 여기에 "전두환 쿠데타설"이라는 픽션 소설이 추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누가 그 늦은 시각에 수고스럽게 박관현에게 전화를 걸어 유언비어를 전했는가? 당시 서울 운동권의 사령부는 서울대였기에 그 학생은 서울대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 시각에 한홍구가 서울대에 있었다면 그 학생은 한홍구가 아는 학생일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 학생이 "전두환 쿠데타설"이라는 허황된 유언비어를 제조한 경위를 우리가 듣게 될 때에 광주사태 발생 원인에 대한 실마리는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 누가 서울 운동권발 유언비어 제조기였는가? 그 인물이 누구인지는 당시 시위 주동 세력 혹은 한홍구 교수와 같은 그 측근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홍구가 <군부에서는 학생들을 자극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만일 그 근거를 객관성 있게 제시해 주지 못하면 우리는 그가 유언비어 제조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사실에 수반하는 것이 그가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언제부터 유언비어를 제조하기 시작하였느냐는 질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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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공개총살 동영상 을 클릭하시면 지난 3월 16일 N-TV에 방영된 동영상 링크가 있습니다.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