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생일각(魚生一角)
육조스님의 적손이신 마조스님은 남악회상에서 좌선만 하면서 좌복을 일곱 개나 뚫었습니다. 좌에 집착되어 마치 죽은 사람 같고 또한 목석으로 만든 등상(等像)같았다고 합니다. 그때 회양(懷讓)선사께서 조금도 진전이 없는 것을 보시고 묻기를,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묻자 마조스님이 “좌선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또 회양선사께서 “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가”라고 묻자 마조스님은 “부처가 되려고 좌선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회양선사께서 암자 앞 바위 위에서 벽돌을 갈고 있었다. 벽돌 가는 소리를 듣다 못한 마조스님이 “스님, 벽돌을 갈아서 무엇 하렵니까”라고 그 까닭을 묻자 회향선사는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마조스님은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벽돌을 갈아서는 도저히 거울이 될 것 같지 않아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회양선사는 “벽돌을 갈아 거울이 안 되면 앉아 있어서 부처가 될 줄 아는가”라고 했습니다. 마조스님이 다시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라고 묻자 회향선사는 “우차가 가지 않을 때에 소를 때려야 되겠는가, 수레를 때려야 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마조스님은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언하대오(言下大悟)’인 것입니다. 회양선사의 일구(一句)는 그대로 생사해탈을 할 수 있는 활구(活句)였습니다. 참다운 선을 하려면 일체 선악 경계에 분별이 없고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아니해야 하며 반드시 간화선(看話禪)을 해야 합니다. 화두를 참구하는 데는 들어서도 생각으로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알 수 없는 화두를 용맹스럽게 꼭 잡고 의심을 매하지 말아야 필경에는 그 의심이 잡혀 들어와 뚜렷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의단이 차면 언하에 대오하여 생사 없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않으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게 됩니다. 모름지기 최상승법을 깨달은 선지식을 찾아서 바른 길을 지시 받아야 합니다. 만일 스승을 잘못 만나면 외도소견만 듣고 그것을 말하기까지 하니 외도가 번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옳은 스승을 찾아서 증득한 바를 똑바로 점검받아야 하겠습니다.
대중들이여! 이 삼계화택(三界火宅)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인데, 달마대사가 부처님의 정법을 동토에 전한 도리를 깨닫지 못하면 중생견에 빠져 사후에는 삼악도밖에 갈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생사해탈의 참선법을 배우는 대중들은 이 몸을 잃은 후에는 도저히 정법을 만나기 어려우니 용맹정진을 하여 육신을 가진 이 기회에 기어코 본래면목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동정(動靜)이 일여(一如)하고
오매(寤寐)가 성성(惺惺)하면
홀연히 본참공안(本參公案) 타파해
자기면목을 보게 될 것입니다“십년을 단정히 앉아 마음의 성을 지키니(十年端坐擁心城)/ 깊은 숲의 새가 놀라지 않게 길들었구나(慣得深林鳥不驚)/ 어젯밤 송담에 풍우가 사납더니(昨夜松潭風雨惡)/ 고기는 한 뿔이 남이요 학은 새 소리더라(魚生一角鶴三聲)”
이것은 서산스님의 게송입니다. 의심이 많고 놀라기 잘 하는 새가 이제는 사람이 와도 놀라지 않는다고 하니 그 얼마나 여여부동(如如不動)한 경계입니까. 분별.망상.산란심.무기심이 개시묘법(皆是妙法)이요, 그대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요, 해탈대각(解脫大覺)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속에서 옷을 입고 밥을 먹지만 분별이 없고 산하대지(山河大地),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의 온갖 것이 그대로 해탈입니다. 바로 ‘어생일각(魚生一角)’이 그대로 각(覺)인 것입니다. 인간 시비, 애착, 생로병사가 다 끊어진 곳이니 분별로는 도저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고기가 뿔이 하나 난 도리’란 무엇입니까. 이 도리는 언하에 시간도 공간도 없는 본마음을 바로 깨닫고, 생멸이 없는 본성품을 바로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금일 내가 참선법을 닦는 정법학자에게 권하노니, 평시에 구두선(口頭禪)만 익혀서 도를 통달한 것처럼 말하나 경계를 당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홀연 죽음이 닥치면 무엇으로 생사를 대적하겠습니까. 평상시에 맹렬히 정신을 차려 화두만 지켜 가면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불조대기(佛祖大機)를 깨닫게 되고 천하 선지식의 혀끝에 속지 않을 것입니다. 공부는 모름지기 참되어야 합니다. 오직 화두만 단단히 잡아야 하며, 지각심(知覺心)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동정(動靜)이 일여(一如)하고 오매(寤寐)가 성성(惺惺)하면 홀연히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타파해 자기면목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금일 대중들에게 분명히 이르노니 백천만겁을 몸으로써 보시할지라도 소소영영한 주인공인 본각을 얻은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구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九年小室自虛淹)/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爭似當頭一句傳)/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板齒生毛猶可事)/ 돌사람이 사가의 배를 답파했느니라(石人踏破謝家船)”
이것이 ‘판치생모’에 대한 고인의 송구(頌句)인데, ‘조사서래의’에 이 이상 더 가까운 게송은 없습니다. 대중들은 오직 ‘판치생모’만 붙잡고 용맹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인천 용화선원 홈페이지 전강스님 법문에서 발췌-
정리=허정철 기자 shutup0520@ibulgyo.com
-전강스님 (1898∼1975)전강스님은 1898년 11월16일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모친과 사별한 후 인생무상을 절감한 스님은 16세 되던 해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다. 해인사에서 인공(印空)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응해(應海)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법명은 영신(永信), 법호는 전강(田岡). 이후 8년간 치열한 정진 끝에 곡성 태안사에서 오도(悟道)의 기쁨을 맛보았다. 25세 되던 해 만공(滿空)스님으로부터 선종 77대 법맥을 전수받고, 33세의 나이로 통도사 조실로 추대됐다. 이후 법주사 복천선원, 동화사 선원, 천축사 무문관, 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후학들을 지도했다. 만년(晩年)에는 인천 용화사에 법보선원을 개설하고 중생교화에 힘썼다. 1975년 1월13일 용화사 법보선원에서 점심공양을 마친 전강스님은 시봉하는 제자에게 “나, 오늘 가야겠다”며 입적을 미리 알렸다. 이어 스님은 제자들에게 “내 몸에서 사리를 수습하지 말고 서해에 갖다 버리라”는 유훈을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법납 61세, 세수 77세.
[불교신문 2123호/ 4월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