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 브로피(Des Brophy)의 시선으로/ 김밝은
순진한 입술을 가진 적도 있었지만,
라스베이거스에서 8분 만에 끝나는 드라이브 스루 결혼식을 한 뒤
쉰다섯 시간 만에 안녕을 고할 수도 있고
단번에 눈길을 잡을 펑퍼짐한 탭댄스를 빗속에서 거뜬히 출 수도 있어
얼음판 위를 걸어봐
신나는 춤사위쯤 절로 나온다니까
화려한 꽃보다 막 구운 빵이 더 향기로울 수 있다는 걸
멀리서 온 시간을 만나 알게 되기도 하고
편안한 복장으로 친구에게 가는 발걸음이
연애할 때 걸음걸이보다 더 발랄할 수도 있다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날을 불현듯 잡아채기도 하지
인간은 북두칠성을 통해 세상에 나와 살다가
죽으면 다시 북두칠성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데
어제의 맑은 눈망울이 빛을 잃어가는지
조금씩 낯선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기죽을 필요 없어
오늘이 가장 눈부신 날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삶은 여전히 신명 나는 춤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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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달/ 서정복
오늘은 2024년 음 8월 14일
올 추석 달은 당신의 마음보다
더 엷은 천에 가려진 채
허허 공공한 하늘 벌판에 두둥실 떠
온 세상 안부를 살펴오다
반세기 전 가을이 무르익어갈 때
논 밭두렁길 이슬을 털고
만조에 가득 출렁이는 가을 바닷가
비룡 바위 위에서 서로가 바라보며
사랑을 키웠던 여린 그녀 머리 위
그 자리에 높은 뜻 그대로 떠있다
언제나 이탈 없고 철칙의 약속대로
찾아와 가는 저 달에 새겨놓은
당신과의 약속들이 다 지워졌는지
아무 대답도 없이 올 추석 달도
그냥 또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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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벌 같은 말에 쏘이는 여자/ 윤경자
나는 한 달에 한 통씩 빨래하는 세제를 사
한 달에 한 번 말 통으로 피죤을 사지
썩을 년
살림 못할 년
죽일 년
대 문둥이
말
벌처럼 쏘아버린 말
그
말에 나는
번개 맞은 듯
감전되었다
그래도
아직 나는 살아 있지
나는 말벌의 침이
내 몸에서 세제처럼
날아가기를
거품처럼 사라지기를
나는
매일
날마다
풍력발전기처럼
피잉핑 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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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훔쳤습니다/ 이미자
가을을 훔칩니다
그렇다고 체포하지는 않을 겁니다
가을을 사러 편의점에 갈 수는 없지요
가을을 훔치는 건 가을에게 나를 맡기는 것
흔들리는 코스모스
한 송이마다 가득 찬 가을
가을이 떼로 와
나를 데려갑니다
가을이 나를 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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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 박찬규
작약 새싹이
깡깡한 흙을 뚫고
세상에 나와 두리번거린다.
숨 쉬는 모습이
병상에 있는 나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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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안부- 2024. 5. 18/ 오미순
5월이 고독하게 나무에 매달리면
미세먼지 가득 안고 혼자서 우울해져
봄 햇살 거울이 비치는 그날을 반사한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말이 없고
떠난 이 남은 이 울음만 가득해
바람이 다듬어 놓은 길엔 안부도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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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는 어디에/ 고미선
일란성 쌍둥이처럼
함께했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
저절로 잠겨버린 문
열쇠는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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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바닷가에서/ 유춘홍
밀려드는 파도 하나
욕심껏 움켜쥔다.
한 옴큼 짜릿하게
깨알 같을 물비늘
빈손에
난파된 채로
버둥대는
세월,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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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잠자리/ 최미선
비상을 준비하고
아픔을 깨고 나온
햇살에 빛나는
찬란한 아름다움
날갯짓 저 높은 비상
사랑인 줄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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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無我)/ 김순영
잃어버린 날개 찾아 새로 돋우는 날갯짓
한사코 버려야만 날아오를 수 있다는 걸
한참을 껴안았다가 느지막이 깨닫는 길
모든 것이 묶였다 창살 없는 감옥에
손발이 꺾이고 온몸이 눌린 채
탐심에 눈귀 멀었던 나를 비우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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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박미경
자식들 굶길세라
쉼 없는 굽은 등으로
동죽 농게 잡아다가
한아름 이고 지고
탯자리 그리워하다
묻혀버린 어머니의 꿈
땀내 나는 타향살이
사무치는 나의 바다
소박했던 그날의 기억
흔들어 깨워본다
지금도 그대로일까
보고픈 나의 안식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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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을 금목서/ 이보영
새하얀 목마름으로 휘청이는 저물녘
누군가 흘리고 간 황금색 흔적을 향해
몇 박자 작은 은율로
만 리를 건너간다
별빛 머물던 자리에 꽃잎 한 장 접어서
작은 속울음으로 불러보는 그리움을
은은한 그 향기에 취해
따뜻해진 저물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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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대학 찬가(전남 노인 지도자대학)/ 나관주
예이면 하늘길이 이리도 좋은 세상
멀다고 모르는 척 가까우면 시새우고
내노라
내 탓이로다
손을 잡고 안아보세
같은 세대 한 나라에 우리 다 이웃 골에
타향에선 까마귀도 지기인 양 곱다는데
우리 다
호남의 태생 팔을 끼고 걸어보세
70이 고래희란 말 흘러간 유행가
이제는 80이라도 대학에 다닌 세상
즐겁게
함께 나가세
지도자 대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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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길에서/ 문주환
지나온 길 돌아보며 울어본 적 있는가?
내 슬픈 기도가 메아리로 남는다
바람에 나부끼다가 날려버린 푸른 꿈들.
빛바랜 사진 속에 지워져 간 추억처럼
가을빛 젖어오는 쓸쓸한 미로 속에
이제는 떠나가야 할 가랑잎도 물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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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윤영대
저렇게 찔레꽃이 흐가게 피면은
쌀밥처럼 풍년이 든 한 해가 온다고
즐거워 좋아하시던 어머님은 요양원에서
오월의 보리들이 누렇게 익어 가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휠체어에 몸 맡기고
어쩌다 면회 가면은 찔레꽃처럼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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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익은 가을/ 곽호연
1
연화리 가는 길에 홍 갓은 허리 펴고
미사보 쓴 은목서 노을 길을 축복한다
전어는 전설이 되고
대하가 폴짝폴짝
2
표절 시가 넘어져 상을 물어 토해 내고
발로 그린 도장이 수상 경력 부풀리면
가을은 교란종에 몸살!
앓거나
더 여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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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윤선웅
비 그친 후 강물이 가득하니
달빛은 방긋방긋 월인천강이 되어
밤 강가를 걸어가는 나그네 가슴속에
들어와 호흡한다
영롱한 보름달은 맑고 맑아
하늘은 높아져
하늘 달과 천강의 달은 하나가 되어
자비의 빛을 여기저기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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