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뜬 봉사/최상하
너가 뺑덕이네라는 걸
눈 감고도 알았거늘
눈 뜨고 왜 모르겠냐
늙은 놈 마다하고
젊은 봉사놈과 붙어서 달아나더니
내가 내 딸 덕에 눈을 뜨고
팔자 폈다는 소문에
요게 어물어물 기어 들어와서는
말을 하면 들통날터이니
말도 않고 아양 떤다 마는
요년아 내가 네 살 맛 모르겠냐
어느 놈을 등쳤는지
곰보딱지 인두질하고 눈 까뒤집고
요지가지로 뜯어 고친 낯짝을
알고도 짐짓 모른 체 하는 건
그나마 샐쭉 토라져 아주 가버리면
천지간에 이 한 몸 뿐이거니
좋다 옘별헐 것
너가 말하는 벙어리면
나는 눈 뜬 봉사 아니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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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최상하 시인과 같이 소요산엘 갔다
땡볕에 날이 너무 더웠지만 목표했던 곳 소극장에 도착했다
깡맥주 하나씩 우선 까고 갖고 온 밥을 맛나게 먹어 치웠다
묵은 김치 딱 한 가지만 싸 갖고 오기로 했었고 펼쳐 본 도시락은 정말 묵은 김치 딱 한 가지 뿐이었다
갖고 올 반찬도 없지만 한 사람이 다른 반찬을 더 갖고 오면 한 사람이 쪽 팔릴까봐 내가 미리 그런 제안을 했다
나 혼자서 오는 경우는 비닐 주머니에 주먹밥을 갖고와서 냇가에 앉아 손씻고 손으로 우겨 넣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그에 비하면 고급스런 식사였다
동두천 시청에서 만들어 놓은 것인지 송판 쪽으로 만들어 세워 놓은 게시판은 언제나 비어 있었다
몇 명이 앉을 수 있는 숲 속의 나무 객석도 늘 비어 있었다.
비어있는 그 숲 속의 무대가 시를 업으로 하고있는 나로서는 대단히 민망스러운 일이었다
비어있는 게시판과 비어있는 무대 비어있는 객석은 누군가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땡볕에 둘이 엎드려 화선지에 붓펜으로 시를 써서 압정으로 붙였다
그 곳은 등산을 하는 사람만 가는 곳으로 사람들의 통행이 뜸한 곳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미치면 행동하고 싶은 바람잽이다
이름없는 시를 무명씨로 다섯 편이나 써 붙였다.
내 멋에 겨워 산 속에 전시하는 시에 이름 석 자를 넣는다면
오히려 보기 흉할 것 같아서였다
산 중에 붙이면 누가 읽느냐
코카 콜라도 처음에는 고비 사막에다가 광고문을 써붙였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만 볼 수 있었지만 입과 입을 통해서 광고를 했다
도시에 나가면 글짜가 많기 때문에 시가 안 보인다
시가 됐느니 글씨가 악필이라느니 명필이라느니 비가 오면 허당이라느니
주말까지만 붙어 있으면 누가 읽어 볼 것이라는니 아무도 안 읽어도 유감 없다느니
낮술에 취하고 풍광에 취하고 시에 취해서 노닥거리며
시를 다 써 붙이고 나니 해가 설핏 기우러지고 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러누웠다
최시인은 젊은 나이에 관절 수술을 하여 죽을 고비를 넘긴 분이다.
걷는 것이 시원치 않아서 늘 로보트 걸음을 걷고 있다. 기우뚱 기우뚱 매우 느리다.
발걸음은 더듬거리는 봉사지만 시력은 무지하게 밝다
지금도 안경 없이 책을 읽는다. 식사도 잘 하고 내과적으로는 이상무.
뒤뚱뒤뚱 내려오면서 눈 뜬 봉사 이야기를 하신다.
'"심학규가 눈을 떴지만 수궁 안에서 계속 살 수는 없는 것이잖여? "
난 그 한 마디에 무엇인가 또 좋은 시 구상을 하고 있다는 판단에 속으로 박수를 쳤다.
" 뭍으로 다시 나와서 뺑덕 에미를 또 만났어,
그런데 이 예펜네가 심학규가 눈을 뜨니께 지가 온갖 못 된 짓 한 것이 들통 날까봐서
목소리를 숨긴다고 벙어리짓을 하는겨"
캭! 난 속으로 감탄을 하면서 역시 소설 보다는 시를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 했다 하면서도
그런 시적 발상 역시 소설에서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같이 했다.
아무튼 나는 최상하의 소설 보다는 시가 좋다
그 날 우리는 어스름에 선술집에 들어 한 잔 더 하고 늦은 시간에
기차( 난 지금도 전철을 기차라고 하고 싶다) 를 타고 의정부로 돌아왔다
오늘 한 보름만에 최시인이 어슬렁 어슬렁 그 특유의 걸음 걸이로 우리 집에 오셨다
나 역시 술을 먹으면 빨리 가라앉지 않는다는 의사의 경고에 따라 일단은 최시인에게 전화조차 하지 못했다.
만나면 일단 술이 있어야 하니까 원천봉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담배마저 끊었으니 술까지 없는 상태로 둘이서 마주 보고 어쩌구 저쩌구 한다는 일은
소금없는 계란처럼 싱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에 비가 퍼붓고 있었고 비는 곧 그리움을 동하게 했고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만나야만 하는 사람처럼
빗속을 뚫고 그 특유의 걸음 걸이로 올라 오셨다.
바지 가랑이가 다 젖어 있었다
마침 소주는 한 병 있었다. 우리 집은 술과 고기는 절대로 사 놓지 않기로 했는데
지난 번에 아이들이 먹고 남은 소주가 한 병 있었다
소주를 한 병 까고 김치랑 양파랑 먹다 남은 두부를 같이 섞어서 후라이 팬에 부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콩나물 국 끓이기와 라면 끓이기 그리고 기름 두르고 구워내는 부침개가 전부다
비는 계속 억수같이 쏟아지고
한 잔 하시고 노래가 슬슬 나오고 시가 나오고 시론이 나오고 흉도 보고
마누라가 약으로 먹던 오가피 주 한 잔 더 하고는 마침내 욕도 걸죽하게 한바탕 나오고
우리는 낄낄 웃고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그리고 빗길로 내려 가셨다
큰 키에 벙거지 모자 구부정한 어깨 기우뚱 거리는 로보트 걸음
나랑 헤어지고 둑길을 따라 집으로 내려가는 그의 뒷 모습은 언제나 쓸쓸하고 처량맞아서 좋다
그래서 또 보고 싶다.
오늘 쓸쓸한 시인을 배웅하고 돌아와 보니 책상위에 <눈 뜬 봉사> 한 수가 놓여져 있었다
역시 그 특유의 비뚤비뚤한 악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