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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샤 존자의 명상요결 7가지> The Tibetan Seven Point Mind Training by Atisha
1. 먼저 예비적인 것들을 수행하라.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여기에 Dharma다르마가 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가르침이 다르마이다.
Dharma는 인도 문화에서 생성된 개념이다. 네 가지 의미가 있다. 보편적 법칙, 항상 참眞인 진리, 성자의 가르침, 지금 여기 몸과 마음으로 경험할 수 있는 현상/사건이다(이 경우에는 소문자 dharma/dhamma라고 쓴다).
다르마를 선지식에게 듣고 학습하는 것을 Pariyati, 교학이라 한다. 들은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들음으로써 생기는 지혜를 聞所成慧문소성혜라 한다. 그리고 익힌 다르마를 실천하는 것을 Patipada, 수행이라 한다. 들은 것을 사유하고 결택하여 실행에 옮기는 일이다. 사유함으로써 생기는 지혜를 思所成慧사소성혜라 한다. 실천함으로써 생기는 지혜를 修所成慧수소성혜라 한다. 예비적인 것들이라 해서 중요하지 않거나 사소한 것이어서 건너뛸 수 없다. 예비적인 것은 입문에 필수적이다. ‘예비적’을 의미하는 영어로 preliminary의 어원은 prae(앞에)+limen(문지방)이므로, 문에 들어오기 전에 해야 할 일, 입문과정을 의미한다. 다른 표현으로 pre-requisite는 '사전필수적, 선행하는'의 뜻이 있다.
*마음을 전환 시키는 네 가지 생각이라는 4가지 추론적 인식
불교가 인도에서 태어났으므로 인도적 사유에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인도적 사유는 논리를 중시한다. 불교인식논리학을 因明學인명학이라 한다. 인명학에서 진리라 판단하는 인식근거를 量량, pranama라 한다. 진리를 인식하는 방식으로 현량, 비량, 성교량을 세운다. 現量현량은 직접적 인식, 직관이다. 가령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감각기관으로 직접경험되는 사실 인식이다. 比量비량은 추론적 인식, 추리이다. 연기가 피어오르니 불이 났다고 추측할 수 있다는 인식이다. 聖敎量성교량이란 성자나 깨달은 사람(覺者)의 말씀을 진리의 인식근거로 삼는 것을 말한다.
[Ⅰ]인간 삶의 희유성을 생각하라.
우리가 지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춘 것은 8유가와 10원만을 누릴 복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말해준다.
*8有暇란: 수행할 여유가 있는 유리한 여건. 지옥, 아귀,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음. 야만인(불법을 모르는 지역)으로 태어나지 않음. 천상계(장수하는 신, 3600만년을 사는 도리천 등)에 태어나지 않음. 잘못된 견해를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음,
- 상견(영원주의): 자아가 영원하다는 견해, 창조주는 영원하다는 견해
- 단견(허무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 전생과 내생, 인과와 해탈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
부처님이 태어나지 않은 시기에 태어나지 않음, 신체적 장애가 있는 몸으로 태어나지 않음.
*10원만이란 :
①인간의 몸
②법이 있는 곳(중심지)에 태어남
③다섯 감각기관 있어 가르침을 이해하는 능력
④오역죄를 짓지 않는 일
⑤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
⑥부처님이 세상에 오신 때 태어남
⑦법을 설하실 때 태어남
⑧법이 남아있는 곳에 태어남
⑨법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음
⑩법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 있음
바야흐로 한국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경제적 안정을 얻었고 건강은 증진되었으며 수명은 연장되어 백세인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늘어난 노년을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이 중대한 문제로 떠 올랐다. 과연 장수하는 노인네들이 유익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늙어가는 대로 무작정 세월을 보낸다면 자기 한계에 갇혀 감수성과 공감력이 퇴화한다. 몸과 마음의 조화와 안정을 가져오는 수행 공동체,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는 영적인 공동체 spiritual community가 필요하다. 특히 자연과 어우러진 영적 공동체의 삶이 기대된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의 말씀: 우리의 믿음과 주의는 동일한 사실이다. 지금 바로 자기가 주의를 기울이는 곳에 자기 삶이 펼쳐져 있다. 주변환경과 인간관계는 자기의 주의력이 펼쳐놓은 무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나의 주 관심 대상은 무엇인가?
나의 주의는 어디를 향하는가?
나의 일상에 내 주의가 제일 많이 가는 사람과 대상은 무엇인가?
내 주의가 많이 자주 가는 것이 실체화된다. 내가 보든 안 보든 어떤 것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의력을 받아야만 나에게 비로소 실체화되어 보인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내 주의력은 왜 어떤 상황에서 고갈되는가?
어떤 사람, 어떤 상황이 나의 주의력을 빨아들여 나를 소진 시키는가?
똑같은 일을 한다 해도 왜 어떤 일에는 내 주의를 흔연하게 쏟을 수 있는데, 어떤 일에는 내 주의력이 집중되지 않고 흩어지는가?
내가 주의를 보내는 대상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따라 내 주의력의 집중도가 결정된다. 따라서 나의 주의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주의를 기울일 대상들의 우선순위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그러고자 한다면 자기 인생에서 성취하고 싶은 것 가운데 무엇을 최우선 순위로 놓을 것인가를 먼저 선택해야 한다. 그러면 그에 따라 주의력을 집중해야 할 대상들의 순서가 정해진다. 그러나 주의력은 언제나 합리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별안간 돌발 사건이 벌어지면 그쪽부터 우선 내 주의력을 쏟아, 해결한 다음에야 다른 일로 주의를 보낼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지나치게 할 일이 많으면 언제나 내 주의력은 고갈된다. 그러기에 내가 나의 주의력을 조절할 수 있을 만큼의 자유를 가지려면 경제적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문화시민으로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복지제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가령 3세 미만의 영유아를 보육하려고 엄마가 독박육아를 할 수밖에 없다면 그 엄마의 주의력은 고갈될 것이고 그의 삶의 질은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력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여 삶의 질을 높인다는 문제는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복지적 차원의 두 가지 측면이 함께 갖춰져야 한다.
윌리엄 제임스의 저서 가운데 <심리학 원리>에 ‘의식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다. 이 말이 나온 다음 심리학이나 종교적 경험을 다루는 신학, 내지 철학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저서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 나오는 ‘순수경험’이라는 말은 니시다 키타로(西田幾多郞, 1870~1945)가 자신의 견성체험을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교토학파 철학이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임스는 주체와 경험 대상의 동일성, 즉 주객 미분(未分)의 경험을 순수경험이라고 명명하였다. 가령 길을 걷다 풀 섶에 피어있는 꽃을 보고 ‘아!’하며 감탄할 때 그것은 일종의 순수경험이다. 순수경험은 사유나 분별이 더해지기 이전의 의식의 통일적 상태이다. 순수경험은 분별적 판단이 더해지기 ‘이전’의 경험이다.
윌리엄 제임스를 비롯한 찰스 퍼어스, 존 듀이 등 미국 철학자 그룹을 일러 실용주의 프래그머티즘 pragmatism이라 한다.
초월주의(超越主義, Transcendentalism) 또는 초절주의(超絶主義)는 1830년대부터 1840년대 본격화된 산업혁명과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는 미국의 전환기를 밑바탕으로 미국의 사상가들이 주장한 이상주의적 관념론에 의한 사상개혁 운동이다. 미국의 문예 부흥기를 장식하며 사실상 미국의 사상,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 인물로는 랠프 월도 에머슨,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트 휘트먼 등.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열 명의 친구가 있다면,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나를 싫어하고 두 사람은 나를 좋아하며 나머지 일곱 사람은 나에게 무관심하다.
7:2:1=무관심한 친구: 좋아하는 친구: 싫어하는 친구. 여기서 이런 질문이 나온다.
왜 우리는 나를 좋아하는 두 사람에게 내 주의력을 쏟는 대신에 나를 싫어하는 한 사람에게 주의가 붙잡혀 소진되고 마는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Ⅱ]죽음과 무상
시간은 소유할 수 없다.
죽음은 불가피하다.
죽음은 임박해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죽음을 알 수 없고, 죽은 사람을 이미 죽었기에 죽음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경험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죽음’이란 경험이 삶의 끝맺음으로 주어지기에 두려워하거나 거부하기보다는 오히려 삶이 가져다주는 신비로운 선물로 여기면 좋지 않을까? 죽음이란 차라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여백이지 않은가? 어둠이 빛을 더 밝게 보이게 하듯, 죽음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삶을 더 생생하게 만든다.
죽음을 넘어선 삶을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당신은 삶과 죽음이란 인생의 큰 문제에서 자유로워졌는가?
[Ⅲ]윤회계의 불만족성
삼사라 samsara 속에 만연한 고통과 불만족성에 대해 사유하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고성제이다. 부처님은 고통을 부인하는 우리의 습관을 깨뜨린다. 고통을 인식하라. 고통을 바로 보라. 세상에 대한 헛된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라. 하지만 세상에 대한 연민과 자애를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다. 환멸 幻滅 dis-illusionment 을 말한다. 욕망의 추구가 헛됨을 인식하라는 말이다. 소욕지족하라는 것이다.
당신의 즐거움은 어디서 오는가? 무엇을 할 때 당신은 제일 즐거운가? 그것이 당신의 삶이다.
무엇을 할 때, 누구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즐거운가? 거기 그 사람에게 당신은 의존하고 있다.
지금 경제적 여유를 누리는 한국 중산층은 감각주의자, 물질주의자가 되었다. 더 잘살수록 과시적 소비를 한다. 더 미묘하고 미세한 쾌감을 누리고자 한다. 한번 쾌감에 중독되면 더 강하고 더 독한 쾌감을 원하게 된다. 쾌락에 중독되면 도덕 불감증이 오고, 그 후유증으로 우울과 불안, 집중력 및 판단력 감소, 충동 조절 등의 장애가 온다.
물질과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 행복은 가능한가?
불교는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행복할 가능성을 지닌다. 행복은 당신의 생득권이다.
그러면 어떻게 내면에서 행복한 샘물을 솟아나게 하여 기쁨이 꽃 피어나게 할 것인가?
이 질문을 다시 묻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해지는가?’
자기의 삶과, 세상과 타인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바꾸라. 행복해지고 싶다면 행복을 가져오는 말과 행동과 마음을 쓰고 살아라. 자기의 몸과 마음을 사랑스레 보살펴라. 그리고 자기 가슴에 사랑이 깃들도록 기도하라.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라.
[Ⅳ]카르마를 인식하라.
카르마 karma란 행위와 그 행위에 따른 결과의 법칙을 말한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law of action and reaction에 해당한다. 윤리적으로는 의도가 실린 행동과 그에 따른 결과의 법칙을 말한다. Law of action & its result. 흔히 業因果報업인과보라 한다. 의지적 행동이 원인이 되면 그 결과로서 응보가 돌아온다. 善因樂果 惡因苦果 선인낙과 악인고과. 착한 원인을 심으면 즐거운 결과가 열리고, 나쁜 원인을 심으면 괴로움이란 결과가 열린다. 윤리적 인과법칙은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의식의 흐름’으로 잘 설명된다. 의식의 흐름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의식의 흐름이란 생각의 흐름이다. 착한 생각이 흘러가면 착한 삶의 상태이다. 한순간 착한 생각이 지속되면 다음 순간에도 착한 생각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착한 생각의 흐름은 지속된다. 이렇게 선한 의식의 흐름이 지속된다면 현생은 물론 다음 생으로도 그 흐름의 연속성이 전달될 가능성은 높다.
“정신적 삶에서 한번 형성된 것은 그 무엇도 사라질 수 없다. 모든 것은 어떻게든 보존되며 적당한 상황이 오면 다시 한번 드러날 수 있다.” 프로이트의 말이다.
그런데 자신의 의식상태에 대한 성찰 없이 되는대로 살아간다면 나쁜 생각의 흐름이 지속될 것이다. 나쁜 생각의 흐름은 나쁜 삶이며, 현생에서의 나쁜 삶은 내생에서의 나쁜 삶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다. 그러니 현생과 내생에서 살게 될 자기 삶에 대한 최고의 투자는 지금 여기에서 의식의 흐름을 정화하는 작업이다. 모든 나쁜 짓을 하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행하라, 자기 마음의 흐름을 맑히는 일,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諸惡幕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마음의 흐름을 정화하는 네 가지 치유 방법이 있다.
①참회하라.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따라서 기뻐하라. 수희(隨喜).
②타인을 신뢰하고 자비를 계발하라.
③건전하지 못한 행동을 끊도록 결단하라.
④부정적인 행동을 정화하는 해독제를 사용하여 정화하라. 화를 잘 내는 사람은 화를 정화하기 위한 해독제로서 용서와 사랑의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여기에서 진짜로 자기성찰과 자기절제, 태도의 훈련이 요구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마음에 새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