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 ‘무릉도원’이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상상속의 선경을 일컫는데 중국 진나라 때 전란을 피해 숨어사는 사람들이 지내는 곳으로 이상향의 상징으로 묘사된 이곳은 은일의 삶을 추구했던 선조들의 유토피아 자체였다.
동해 무릉계곡(東海 武陵溪谷)은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에 의해서 명명되었다고 한다. 우리 땅의 지명에 중국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대상의 의미를 축소시켜 사용하던 일은 꽤 오래전 일이다. 명승지의 경우는 중국의 그것과 생김새가 비슷할 때 더 빈번하게 사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암각서는 정하언부사와 채제공이 신미년에 시문을 나누면서 석상에 암각하여 만들어졌다. 그런데 강원도 동해시장은 어떤 이유인지 양사언 강릉부사의 글씨며 암각서를 썻다고 가짜자료를 계속 관광객에 홍보하고 있다.
빨리 시정을 요한다.
첫번째 시문: ◎ 무릉석상(武陵石上): 채제공 저
옥호 공이 와서 무릉계곡 바위 위에 같이 앉았는데, 백운
상인도 함께하였다〔玉壺公至 共坐武陵石上 雲上人亦與焉〕
한낮 꿈속에 상봉하여 기쁘다가 / 午夢相逢喜
정말로 만났으니 기쁨을 알 만하지 / 眞逢喜可知
지저귀는 새 아래 앉아 환담하고 / 坐談啼鳥下
늦은 봄꽃 필 제 거나하게 취하네 / 微醉晩花時
물은 무릉도원에 이르러 굽이돌고 / 水到仙源複
시는 말 머리에서 이루어져 기이하다 / 詩成馬首奇
사군은 원래 성이 정씨인지라 / 使君元姓鄭
가는 곳마다 항상 스님이 따르는 구려 / 在處輒僧隨
두번째 시: 중방무릉(重訪武陵): 채제공 저
거듭 무릉을 방문해 시를 읊어 옥호에게 올리다.
〔重訪武陵 吟奉玉壺〕
견여 타고 멀리로 흰 구름사다리 밟고 가니
/ 肩輿迥踏白雲梯
낙엽 쌓인 오솔길에 바스락바스락 소리 나네
/ 屑窣聲生積葉蹊
숙취도 아니 깬 채 누대 술자리에 모였는데
/ 宿醉未醒凝榭酒
이번에 다시 와서도 무릉계에다 마련했네
/ 重來猶辨武陵溪
산사는 맑은 남기 모인 곳에 홀연히 숨었고
/ 花宮忽匿晴嵐聚
고운 나무는 지는 석양에 불처럼 타오른다
/ 錦樹交蒸返景低
스님은 오대로 떠나고 그대 또한 병이 나서
/ 僧去五臺君又病
동문 쓸쓸해진 가운데 뉘를 끌고 노닐거나
/ 洞門蕭瑟欲誰提
언젠가 정옥호공과 함께 호계(虎溪)의 동문(洞門)에서 백운 상인(白雲上人)과 삼소회(三笑會)를 만들기로 약속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하였다
셋째 글 무릉 백운상인(武陵白雲上人); 채제공저
[원문, 해설]
무릉에서 잠시 조는 사이 백운 상인이 홀연 왔기에 기뻐서 시를 지어 주다〔武陵小睡 白雲上人忽至 喜賦以贈〕
봄물에 복숭아꽃이 따사로이 피니 / 春水桃花暖
지팡이 기대어 한가로이 앉아 조네 / 搘筇坐睡遲
꿈에서 돌아오니 기특한 일이 있구려 / 夢回奇事在
스님이 무릉의 약속에 달려왔도다 / 僧赴武陵期
그대 온 곳에 몇 겹 폭포가 있었던고 / 來處幾重瀑
어젯밤 서로 그리워하며 시를 지었지 / 相思前夜詩
삼소회 모임을 이루고자 하기에 / 欲成三笑會
석양에 수령 행차 오시길 기다린다오 / 斜日待旌麾
옥호 공이 공무(公務)로 정선(旌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호계(虎溪)에서 모이기로 약속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넷째글: 다시 읊다〔又吟〕: 채제공 저
[원문과 해설]
동쪽으로 와서 산수에다 능히 의탁하니 / 東來勝托在煙霞
산사에서 편히 지내는 몸이 집에 온 듯하네 / 蕭寺安身到似家
오늘 밤 신선 세계에서 마침 달을 만났거니 / 上界正逢今夜月
무릉에 피어난 늦봄 꽃이 어찌 한량 있으랴 / 武陵何限暮春花
먼 숲 속 어둠 속에 들리는 새소리 괴이하고 / 遙林暝送禽聲怪
날리는 폭포에 한기 드니 학 꿈이 많아지네 / 飛瀑寒侵鶴夢多
낯선 객은 산의 소리가 많은 줄을 모르다가 / 生客不知山籟盛오
경에 놀라 깨어 빗방울 지나간다 말하네 / 五更驚道雨鈴過
2. 강원도민일보(2011.01.04)에 가짜소개관광자료라 하고 있다.
# 자연과 인간이 빚어낸 예술작품
무릉계곡의 하이라이트는 계곡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타나는 거대한 너럭바위인 무릉반석일 것이다. 무려 5000㎡(1500평)에 달하는 이 무릉반석은 석장(石場)또는 석장암(石場岩)이라 불렸을 만큼 거대한 하나의 바윗덩이이다. 여름이면 이 너른 바위로 수정같이 맑은 물이 넘쳐흘러 수 백 명이 함께 물놀이를 즐길 정도이니 바위광장이라는 그 이름이 전혀 과장되지 않다.
이 너럭바위에는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한 수많은 선인들과 시인묵객들의 이름과 시가 새겨져 있다. 그 글들 중 시선을 가장 잡아끄는 석각이 있으니 조선전기 4대 명필가의 한사람 봉래 양사언의 글이다.
커다란 초서체(草書體)로 음각되어 있는 열 두 글자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은 서예나 글씨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한눈에 그 범상치 않은 필치를 대번에 느낄 수 있다.
솜씨 좋은 화공(畵工)이 세심하게 그려냈다 해도 찬탄을 금치 못할 일이건만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글씨라 하니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조화와 힘이 느껴지는 필체다. 430여년 전 쓰여졌다는 이 글귀에 산천초목도 그 필력에 감응하여 사흘 밤낮을 흔들어 떨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하니 봉래선생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 입신(入神)의 경지에 들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봉래 양사언 선생은 한석봉과 동시대 인물로 큰 글씨와 초서에는 따를 자가 없다는 평을 받았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라는 한 구절 시로 더욱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세월의 풍상을 견디지 못하고 손상과 마모가 심해진 선생의 열 두자 글귀는 영구히 보존하고자 근자에 삼척시에서 모사(模寫)하여 같은 크기로 무릉반석 옆 길가에 조성하여 놓았다. 그 옆으로는 동양의 근본사상인 유·불·선 삼교를 동양사상이 추구하는 최고의 이상인 천인합일로 승화시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조화, 통일, 일체화합을 의미하는 글이라는 안내표지가 같이 서 있다.
헌데 그 글씨에 봉래(蓬萊)라는 선생의 호를 쓰지 않고 옥호거사(玉壺居士)라고 써 넣어 혹자는 양사언의 글씨가 아니라 하기도 한다.
이 계곡의 이름이 무릉계라 이름 붙여진 것도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이 이름을 지었다 하는데 봉래선생의 글자 중 앞의 네 글자 ‘무릉선원(武陵仙原)’에서 따 온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