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역사의지와 인간의지” (나의조국대한민국홍일식 p290-295)
역사의 수레바퀴는 결코 인간의 의지대로만 굴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인 미영-프-소가 패전한 전범국들을 어떻게 다루었습니까? 전후문제 처리야 마땅히 전승국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니 패전국 독일에 대해서 가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독일은 부강해지면 전쟁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그렇게 전과가 많다 보니 다시는 주변국가에게 재앙이 되지 않도록 만들 필요가 절실했던 것입니다. ‘소小독일’도 위험한데 ‘대독일’은 더욱 두려운 존재라는 것이 그때 전승국들의 기본인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독일’이 되지 못하도록 오스트리아를 떼어 내 독립시키고, 나머지는 동-서로 갈라놓고, 한동안은 독자적인 군대조차 갖지 못하게 했으며, ‘제조업이나 해서 먹고 살아라’하는 것이 전승국들의 속마음이요 의지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지금은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절대로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정치대국 - 경제대국 군사대국이 되었고, 자력으로 보란 듯 통일까지도 이루지 않았습니까! 일본은 또 어떻습니까? 일본 또한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제조업이나 해서 먹고 살라는 것이 미국의 본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오래전에 경제대국-기술대국이 되었고, 정치대국에 이어 이제는 군사대국에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까지 노리고 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최근에는 집단자위권을 빙자한 아베류의 군국주의 야욕을 또 다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듯 오늘에 와서 보면, 전승국들의 의지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과만을 놓고 보면, 이게 어디 인간의 의지였느냐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2차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인 미소는 동서냉전체제를 구축하여 서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군비경쟁을 벌였습니다. 냉전기간, 소련은 GDP의 23%를 매년 군사비에 쏟아부었고 미국 역시 7%나 썼습니다. 물론 절대액수에 있어서는 미국의 7%가 소련의 23%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미-소는 이 군비경쟁을 우주탐사로까지 끌고 가, 한도 끝도 없이 싸움과 힘겨루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광복이 되자, 좌우대립이 격화되어 온 사회가 혼돈에 빠져들면서 우리의 도덕의식도 크게 추락하였고, 게다가 6·25동란과 5·16 정변을 거치면서 정치-사회적 갈등이 증폭되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국민적 자각과 더불어 이제 우리 사회는 급속도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 누구라도 부정과 비리에 연루되면, 전직이든 현직이는 대통령의 자식도 예외 없이 구속되고 재판을 받은 선례가 이를 웅변으로 말해줍니다. 이와 같은 변화야말로 도덕적 정당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의지가 모아진 범사회적 각성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시대나 ‘역사의지’와 ‘인간의지’가 조화를 이룰 때라야 비로소 인간이 회구하는 가치가 창조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2차대전 후 국토분단의 비극 속에서 사상과 이념의 대립으로 시련을 겪은 나라는 비단 우리 한국만이 아니었습니다. 저 대륙의 중국도, 베트남도, 패전국 독일도 우리와 같은 운명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 동안의 시련을 극복하고 이제는 모두 통일을 성취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이 통일을 성취한 힘의 원천이 대체 무엇이었나를 알아보기 위해 직접 그 세 나라를 찾아가 면밀히 살펴보았습니다. 고심 끝에 얻은 결론은 오직 '도덕성'이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먼저 1945년 2차대전 직후 중국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종전 당시 중국국민당의 장제스 총통과 중국공산당의 마오쩌둥 주석과의 객관적인 위상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이나 컸습니다. 국민당의 국부군은 장총통의 높은 국제적 위상에다가 미국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중폭격기(B29)를 비롯해서 엄청난 병력과 재력, 화력 월등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중국 마오의 인민해방군은 재력과 화력 장비 면에서 거의 상대가 될 수 없을 만큼 열악했습니다. 낡은 구식 개인화기(소총)조차 다 갖추지 못한 데다가 통일된 군복마저도 지급되지 못한 일종의 산발적인 유격대(게릴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과 4년 만에 중국대륙이 마오 주석의 공산당 수중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지난 1980년대 중반 내가 중국 내륙지방을 답사하면서 현지인들로 부터 직접 들은 바는 대개 이러했습니다. 국·공 내전 때 국민당정부군이 마을에 들어오면 그 마을은 삽시간에 쑥대밭이 되어 버린답니다. 부녀자들을 무차별 겁탈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소 돼지 양 등 가축과 귀중품을 마구 약탈해 가니 국민당군이 들어온다고 하면 주민들이 모두 산이나 숲으로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반면에 인민해방군이 마을에 들어오면 제일 상급자가 먼저 마을 어른을 찾아뵙고 깍듯이 인사를 한 다음, 이러이러한 사연으로 앞으로 얼마 동안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말과 함께 정중히 양해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전체 대원을 시켜 온 마을을 깨끗이 청소하고 궂은일들을 찾아서 봉사를 한답니다. 군기가 엄격하여 부녀자의 겁탈이나 재물의 약탈은 일체 없을 뿐 아니라, 돼지나 양 또는 곡식을 군량으로 가져갈 때는 붉은 용지에 재물의 목록과 함께 시가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적어 훗날 정부가 수립되면 보상하겠다는 증서를 써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디서나 인민해방군이 들어온다고 하면 주민들은 스스로 나와서 환영했다고 하니 이들의 도덕성과 엄격한 기강이 바로 승리의 원천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베트남의 경우도 중국의 경우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초에 베트콩 유격대를 결성해서 부패한 월남정부에 저항했던 첸 뉴 탄(월남 통일 무렵 프랑스 파리로 망명, 아직 생존여부는 알 수 없음)의 회고에 의하면 베트콩은 병력이 8만여 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물론 화력이나 장비나 재력은 열악하기 그지없었고요. 그런데 이들 베트콩을 상대로 수십만명의 월남 정부군, 한때는 그보다 더 많았던 미군, 1960년대 중후반에 가서는 한국군까지 합쳐 백수십만의 병력이 엄청난 첨단 무기의 화력에다가 상상을 초월하는 재력을 투입해 가며 그처럼 장기간 싸웠지만 결국 패배하고 만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북쪽 월맹군이 직접 개입한 것은 내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독일 통일의 경우, 흔히들 서독의 월등한 경제력이 마침내 동독을 흡수통일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독일 통일 직후 나는 베를린에 있는 ‘자유베를린대학’을 방문하여 그곳 여러 교수들과 많은 의견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나는 서독의 막강한 경제력보다 더 크게 또 직접 통일에 작용했던 것은 역시 서독 정부와 서독 국민의 도덕성, 즉 성숙한 문화의식이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극적으로 통일되는 과정에서 동독공산당의 고위 간부, 그리고 상명하복의 특수조직인 군과 경찰, 특히 비밀경찰이 엄연히 존재했었는데도 단 한 발의 총소리도 없이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통일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하게 입증된다고 하겠습니다. 만약 동독의 당 간부, 정부요인, 군 장성, 경찰 간부들이 서독에 흡수통일이 되면 자기들은 살아남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쏘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발포명령을 내렸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발포명령을 내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외로 탈출, 망명한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호네이커 수상 겸 당 제1서기가 비서 한 사람만을 대동하고 모스크바로 망명한 것이 전부였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독일 통일의 원동력 또한 누가 뭐라 해도 도의와 문화의 힘이였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우리의 통일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서둘러 해야 할 것은, 국민 개개인의 도덕성을 함양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북한보다 도덕적 우위에 서서, 진심으로 북한동포를 끌어안을 수 있게 되어야 그들도 우리와 함께 살기를 바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통일로 가는 왕도이자 지름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