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미군 철수가 계속되고 베트남내 미군의 사상자수가 감소되면서 미 국민들이 미라이(My Lai) 사건도 잊어가고 있을 무렵 1970년 4월 말경의 캄보디아 월경 작전은 그렇지 않아도 데모 구실을 찾고 있던 미 강경파 학생들을 자극하였다.
당시의 미국의 대학들은 지난 1년 동안 베트남전의 반대, 학생활동 규제, 학원 간섭, 소수민족 학생 입학 등의 문제로 4,800회의 데모가 일어났고 체포 7,400명, 3분의 2가 경찰이었던 부상자 462명, 방화 247명, 사망이 8명이나 되었고 도서관이나 연구소를 방화하여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을 때였다.
캄보디아 월경 작전을 발표한 후 닉슨은 한 베트남 참전 장교의 부인에게 베트남에 있는 병사들은 훌륭히 그들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데 대학에서 일부 건달패(Bums)들이 소동을 부리고 있다고 언급한 말이 보도되어 학생들의 반전 데모를 더욱 점화시켰다. 오하이오 주 켄트 주립대학에서 주지사는 주방위군을 파견하였고 발포명령이 떨어져 대학생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잇달아 전국적으로 데모가 번져 450개에 달하는 대학이 휴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베트남에서 계속 철군을 보장하기 위하여 실시되는 작전도 미 국민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작전 개시 전에 15만 명을 철군시킨다는 발표도 소용이 없었다. 미 언론, 의회도 완전히 반전이었다. 1970년 9월 키신저(Kissinger)는 레 둑 토(Le Duc To)와의 비밀 회담에서 상호철군 대신 “현 전선 동결 휴전”을 제의하여 중대한 양보를 하였으나 레 둑 토는 미국이 남베트남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현 남베트남 정부를 임시혁명정부(PRG)와 연립정부로 대치하여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였다.

키신저와 레둑토
1971년 라오스 회랑 침공 작전 시에는 반전 데모에 많은 베트남참전 제대군인들이 참가함으로써 더욱 절정을 이루었다. 4월 18일 반전 데모대들이 워싱턴으로 몰려가면서 베트남참전 제대군인들이 이를 “듀이 캐니언Ⅲ 작전(Dewey CanyonⅢ, 듀이 캐니언Ⅱ 작전은 라오스 월경 작전 전에 미군이 케산까지 진격한 작전)”이라고 명명하였다.



참전 군인들의 반전 시위-Dewey CanyonⅢ
워싱턴 거리에서는 전쟁의 참혹상을 연출하는 “게릴라 극장”이 공연되고, 의회 로비에서는 징집 기피자들이 특별사면을 요구하였다. 제대군인들은 연금의 증가를 요구하면서 베트남에서 받은 메달, 훈장 등을 거리에 던지며 시위하였다. 4월 24일에는 20만 명(미 경찰 추산, 주최측은 50만 명 주장)이 평화의 행진을 실시하였고 이런 식의 시위가 4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미군은 철수하고 있으나 전투는 오히려 증가되었으며 변한 것은 미군이 죽는 대신 아시아인들이 죽는다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미 흑인들도 인구 비율은 10% 미만인데 병사들의 비율은 30~40%로 징집에 불리하다고 주장하며 “백인과 유색인종 간의 전쟁”에 흑인이 대신 참전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5월 1일부터는 웨스트 포타믹(West Potamic) 공원에 캠프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시위를 시작하자 군대를 동원하여 5월 5일까지(후에 거의 다 석방은 하였으나) 12,000명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그리고 참전하지도 않은 영국까지도 미 대사관 앞에서 반전 시위를 하였다.
이러한 시위는 어는 나라를 막론하고 봄과 가을이 적절한 시기인 것이다. 가을에는 다시 제대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반전 추계공세”라고 명명한 반전시위가 워싱턴을 비롯한 16개 도시에서 일어났고 여기에는 닉슨의 재선 방해운동도 곁들여졌다.
1971년 6월 13일자 뉴욕 타임즈지는 소위 펜타곤 문서(Pentagon Paper)로 지칭되는 미 국방 기밀문서가 시리즈로 연재된다고 보도하였고 워싱턴 포스트지도 6월 18일부터 게재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문서는 1967년 6월 17일 당시 맥나마라(McNamara) 국방장관 지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게 되는 배경과 그 경과를 종합분석한 것으로서 1968년 말에 완성되었다.
“베트남에 관한 미국 정책결정의 역사”가 이 문서의 제목이며 본문 3,000페이지, 자료 4,000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으로 36명의 연구원이 18개월에 걸쳐 작업한 1급 기밀이었다. 미 국방부는 이 문서를 15부 복사하여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시켜 놓았었다.

펜타곤 문서
이 문서를 공개한 사람은 엘스버그(Daniel Ellsberg)로 그는 이 연구에 종사한 적이 있었고 사직한 후에는 RAND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내용이 공개되면 암호 해독까지 가능하고 CIA에 정보제공자, 외교적 중개역할을 한 외국정부, 정보수집 활동, 각종 비밀 정책이 노출되어 미국의 국익에 위해를 끼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 정부는 연방 대법원에 게재를 금지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다니엘 엘스버그
6월 30일 미 연방 대법원은 이 문서의 공개가 미 국익에 중대한 영향을 줄 가능성은 인정하나 이것이 언론, 보도의 자유를 제한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6:3으로 미 정부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미 정부는 즉각 엘스버그를 국방기밀문서 불법소지로 고소하였으나 보석으로 풀려나고 이후 엘스버그에 대한 판결은 세월을 끌다가 2년 후에는 정부의 패소로 끝나고 말았다.
미 의회에서는 미국의 국익을 무시하는 풍조에 개탄하는 의원이 있었는가 하면, 정부의 당황하는 모습에 쾌재를 부르는 의원도 있었고 정부가 의회 몰래 확전을 조장하였다고 분개하는 의원도 있어 이후 행정부 관리들은 의회의 청문회에 불려와서 증언을 계속 해야만 되었다.
반전주의자들의 듀이 캐니언Ⅲ 공격에 대응하기 위하여 1971년 4월 7일 제5차 철수계획으로 현 284,000명의 주베트남 미군 병력 중 12월 10일까지 10만 명을 철수시킨다고 발표하였다. 추계공세인 11월 12일에는 제6차 철군계획으로 1972년 2월 10일까지 45,000명을 철수시킨다고 발표하였다. 따라서 1972년 선거가 시작되기 전에는 지원부대 위주로 139,000명이 남게 되어 1972년도부터는 완전히 남베트남군에게 전투가 인계되었다.
라오스 회랑 침공 작전 후 키신저는 비밀협상에서 미군은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6개월 이내에 완전히 철수하고 티우(Thieu) 대통령은 공정한 선거를 위해서 선거 실시 1개월 전에 하야하도록 하겠다고 양보하였으나 레 둑 토는 5월 3일 회담에서 이를 거부하고,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 하였다. 이후 1971년 9월까지 6차례 비밀 회담을 가졌으나 진전은 없었고 회담은 다시 1972년의 재대결 이후로 넘어가야 했다.
미 국내전선에 계속 패배를 당하여 전장에서는 공세를 취하고 군사적 압력을 가하고도 휴전협상에서는 양보를 해야 하는 묘한 현상이 계속 되었던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태국군은 1971년 말까지 철군을 완료하였고 한국군도 1971년 12월 4일부터 1972년 4월 6일까지 해병 2여단인 청룡부대를 주축으로 하는 제1진이 철수하였다.
첫댓글 끝을 향해가네요.
네, 이 연재도 이제 막판으로 가고 있습니다.
흠 흑인문제도 나왔군요 ㅎㅎ. 하긴 포레스트 검프에서도 잠깐 언급이되긴 하죠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