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남(淮南)에서 본국(신라)에 들어오면서 조서(詔書)등을 보내는 사신을 겸한, 전(前)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 사(賜) 자금어대(紫金魚袋) 신 최치원은 저술한 잡시부(雜詩賦)및 표주집(表奏集) 28권을 올립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5수(首) 1권 오언칠언 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1부(部) 5권 계원필경집 1부 20권.
신은 나이 12세에 집을 나와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배를 타고 떠날 즈음에 망부(亡父)가 훈계하기를 “앞으로 10년 안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을 기울여라.”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엄한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감히 망각하지 않고서 겨를 없이 현자(懸刺. 현두자고 懸頭刺股의 준말로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끈으로 묶어 대들보에 걸어 매고 송곳으로 정강이를 찔러 가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공부했다는 고사를 말함)하며 양지(養志.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는 효도라는 뜻으로, 衣食을 풍족하게 하는등 육신만을 위해서 봉양하는 口體봉양과 상대되는 말,맹자 離婁上)에 걸맞게 되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실로 인백기천(人百己千. 남이 백번 하면 자기는 천번 한다는 뜻으로,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할 때의 결의를 표현한말.中庸章句)의 노력을 경주한 끝에 중국의 문물(文物)을 구경한 지 6년 만에 금방(金榜. 과거 급제자 명단)의 끝에 이름을 걸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정성(情性)을 노래하여 읊고 사물에 뜻을 부쳐 한 편씩 지으면서 부(賦)라고 하기도 하고 시(詩)라고 하기도 한 것들이 상자를 가득 채우고 남을 정도가 되었습니다만, 이것들은 동자(童子)가 전각(篆刻. 조충전각雕蟲篆刻의 준말로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새기는 것처럼 미사여구로 문장을 꾸미기나 하는 작은 기예라는 뜻의 겸사)하는 것과 같아 장부(壯夫)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라서 급기야 외람되게 득어(得魚)하고 나서는 모두 기물(棄物)로 여겼습니다(과거 급제라는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는 그동안 연습으로 지었던 시문들을 모두 폐기 처분했다는 말.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생각하지 않게됨). 그러다가 뒤이어 동도(東都.洛陽)에 유랑하며 붓으로 먹고살게 되어서는 마침내 부 5수, 시 100수, 잡시부(雜詩賦) 30수 등을 지어 모두 3편(篇)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뒤 선주(宣州) 율수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는데, 봉록은 후하고 관직은 한가하여 배부르게 먹고 하루해를 마칠 수도 있었습니다마는(飽食終日), 벼슬을 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학문을 해야 한다(仕優則學)는 생각에 촌음(寸陰)도 허비하지 않으면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지은 것들을 모아 문집 5권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산을 만들 뜻을 더욱 분발하여 복궤(覆簣. 흙 한 삼태기를 부어 산을 만들기 시작한다는 말로 積小成大의 뜻)의 이름을 내걸고는 마침내 그 지역의 명칭인 중산(中山)을 맨 앞에 얹었습니다.
급기야 미관(微官)을 그만두고 회남의 군직을 맡으면서부터 고시중(高侍中)의 필연(筆硯)의 일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군서(軍書)가 폭주하는 속에서 있는 힘껏 담당하며 4년 동안 마음을 써서 이룬 작품이 1만 수(首)도 넘었습니다만, 이를 도태(淘汰)하며 정리하고 보니 열에 한둘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어찌 모래를 파헤치고 보배를 발견하는 것(披沙見寶)에 비유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기왓장을 깨뜨리고 벽토를 긁어 놓은 것(毁瓦畫墁)보다는 나으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계원집》20권을 우겨서 만들게 되었습니다.
신은 마침 난리를 당하여 군막에 기식(寄食)하면서 이른바 여기에 미음을 끓여 먹고 여기에 죽을 끓여 먹는(饘於是粥於是) 신세가 되었으므로, 문득 필경(筆耕)이라는 제목을 달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왕소(王韶)의 말을 가지고 예전의 일을 고증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몸을 움츠린 채 돌아와서 환호작약(歡呼雀躍. 기뻐서 소리치며 날뜀)하는 이들에게 부끄럽긴 합니다만, 일단 밭을 갈고 김을 매듯 정성(情性)의 밭을 파헤친 만큼 하찮은 수고나마 스스로 아깝게 여겨져서 위에 바쳐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에 시(詩),부(賦),표(表),장(狀)등 문집 28권을 소장(疏狀)과 함께 받들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전(前)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 사(賜) 자금어대(紫金魚袋) 신 최치원은 소장을 올려 아룁니다. (끝)
註: 『계원필경(桂苑筆耕)』은 최치원 선생이 885년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한 뒤, 이듬해 886년 당나라에 있을 때에 지은 작품들을 28권의 문집으로 간추려 신라왕에게 바쳤다. 계원필경 내용은 대부분 당나라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을 때 대작(代作)한 시문들로 신라와는 관계가 없는 내용이지만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문집이라는 의미가 있다.
첫댓글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동국문종(東國文宗)으로서의 명성은 얻었지만 당나라의 세계정책의 테두리 안에서 한정된 사고를 했다. 그는 발해의 존재를 신라의 불완전한 통일에 대한 보완이나 문제제기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극복의 대상으로 봄으로서 삼국통일의 민족사적 시각이 결여되었다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