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학 목사. |
마침내 눈물을 머금고 황후가 부른 노래가 다음과 같다.
幼富貴兮厭羅綺裳 어린 시절 부귀하여 비단치마 싫증나
長入宮兮奉尊觴 자라 입궁하여 귀한 술잔을 받았네
今委頓兮流落異鄕 이제 나이 들어 타향을 헤매니
讚造物兮速死爲强 아! 조물주여 빨리 죽여 강하게 하소서
처절하게 부른 이 노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택리는 흡족하여 술을 따르라 하고 다시 한곡 더 부르게 했다.
昔居天上兮柱宮玉闕 과거 천상에서 보석으로 된 궁궐에 살았는데
今日草莽兮事何可說 이제는 풀숲에 있으니 이를 어찌 다 말로 할까
屈身辱志兮恨何可雪 몸을 굽혀 치욕을 당하니 이 한을 어찌 다 풀까
誓速貴泉下兮此愁可絶 어서 저 세상으로 가면 이 근심 끝낼 수 있을텐데.
찬란했던 송나라의 수치 정강의 변(靖康의 變)
정강의 변을 당하기 전 송나라는 경제가 번영했고 문화가 찬란했다. 가뭄에 강한 조생종 볍씨를 개발하고 2모작을 하여 쌀 생산이 넘쳐났고 백자 청자 등 도자기 생산과 차 생산, 조선 기술과 운하, 교량이 발달했고 수도 개봉(키이펑)에는 비단을 짜는 베틀 기계 100대 이상을 갖춘 직조공장이 100개 이상 있었다. 또 화약을 발명했고 방직, 염색기술 등 공업이 발달했고 인쇄술 발달로 교자 회자라는 종이화폐를 발간하여 상거래가 활성화되었을 뿐 아니라 나침반을 발명, 항해술을 익힌 무역선들이 유럽과 페르시아, 우리나라 고려까지 왕래하며 국제 무역이 왕성했고 상인들이나 노동자들의 조합까지 생겨났다
송나라 8대 황제 휘종(徽宗)은 스스로 ‘도군태상황제’라 칭했는데, ‘도군(道君)’은 옥황상제와 함께 도교의 최고신을 일컫는다. 그 시대는 도교와 역술이 이처럼 만연한 시대였다. 1120년 휘종은 만주에서 일어난 금(金)나라 태조 아골타에게 바닷길로 사신을 보내 두 나라가 힘을 합쳐 요나라를 공격하자는 ‘해상의 맹약’을 제의하여 금군과 함께 요나라를 공격했으나, 송나라는 방랍의 난을 평정하려 전쟁에 힘을 쓰지 못하여 아골타의 불만을 샀다. 그러나 금국은 만리장성을 국경으로 한다는 송과의 약속을 미루다 연운 16주 중 6주를 반환하고 철수했다.
이때 휘종은 패전하여 숨어있던 요나라 황제에게 금나라가 점령한 나머지 10개 주도 탈환하자고 비밀리에 밀서를 보냈는데, 금나라에 발각돼 격노한 아골매(아골타의 아우. 1123년 아골타는 죽고 2대 태종이 됨)가 1125년 겨울에 군대를 일으켜 송(宋)의 수도 개봉으로 출격하게 된다.
이때 송나라는 문치(文治)를 중히 여겨 무인(武人)을 멸시하는 풍조가 만연하여 국방을 소홀히 했다. 그 저변에는 도교로부터 유래된 사주명리학을 최고의 학문이라 여기고 연해자평(淵海子平)을 경전으로 여겨 음양오행·사주팔자·부적·풍수지리·궁합과 무격(巫覡)이 판을 치고 서민들 뿐 아니라 상인·공무원·중산층·귀족들과 황제까지 심취하여 정신적으로 혼미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밀서가 발각되어 격노한 금 태종이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접한 휘종은 기절했다. 그리고 급히 25세 된 장남 조환(흠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몰래 장강 남쪽 강소성으로 도망쳤다. 왕위를 물려받은 흠종 역시 겁쟁이로 도망칠 궁리만 했다. 그러나 이강, 충사도 등 장수들의 항전의지가 받아들여진 것을 파악한 금나라 태종은 흠종이 은밀히 제시한 금 500만냥, 은 5,000만냥, 비단 100만필, 말 1만마리를 접수하기로 하고 철수했다.
금군이 물러가자 도망쳤던 휘종은 개봉으로 다시 돌아오고 역술을 추종하는 평화주의자들의 허황된 모함으로 항전파 무장 이강과 충사도는 파직되고 말았다. 이때 황제 뿐만 아니라 문무백관들까지 역술을 통하여 태평성대가 열릴 것이라 믿었고 이와 같이 무방비상태로 있을 때 전열을 재정비한 금나라군이 6개월 후 다시 공격해 왔다. 당황한 흠종은 다시 이강과 충사도 등 주전파 장수들을 기용하지만, 금군이 이강과 충사도등을 파직하면 화친할 것이라 요구하여 파직하고 이전과 같이 재물을 주고 평화를 구걸하려 했다. 그러나 장수들이 쫓겨난 것을 안 금군은 공격을 계속했다.
도교의 역술가 곽경(郭京)
이때 육갑신술(六甲神術)을 행한다는 도교의 역술가 곽경(郭京)이란 자가 나타나 흠종에게 “제가 어려서부터 도를 수련하여 서축 방학산에 들어가 한천사(漢天師) 장도령의 비결을 득도하여 귀신을 마음대로 부리고 산을 옮겨놓고 바다를 거꾸로 뒤집는 술법을 익혔나이다. 10만명의 금군이 눈앞에 있다 할지라도 일주일만 작법(作法)하면 모조리 넘어뜨리고 죽이려 하면 죽이고 살리려 하면 살릴 수 있습니다만, 이래서야 폐하의 호생지덕을 손상시키게 되는 고로 다만 적군이 머리를 싸매고 도망쳐 버려 다시는 우리를 침범치 못하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에 얼굴에 희색을 띤 흠종은 “태조 열종의 영혼이 나라를 지키려 경과 같은 기인을 인도하셨도다! 무엇이든지 필요한대로 말하면 준비하도록 하겠소” 하여 곽경 요구대로 천단(天壇)을 만들고 16세부터 18세 사이의 동남동녀 24인을 선발하여 촛불을 들게 하고 출생일시(出生日時)가 똑같은 신병(神兵) 7,777명을 선발하여 흰옷을 입혀 채단(비단)과 제물을 제단 앞에 올리고 하루 세 번씩 향불을 피워 하늘을 향해 금군을 물리쳐 주시기를 기원하고, 부적을 붙여놓고 부적에 물을 품는 의식을 7일 동안 계속했다.
흠종은 곽경을 신뢰하여 속히 금군을 물리쳐 줄 것이라 의심하지 않고 유유자적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7일이 지나 성문을 활짝 열고 흰옷을 입힌 7,777명의 신병(神兵)을 출병시키니 금군은 함성을 지르며 밀물처럼 몰려들어와 신병(神兵)은 순식간에 도륙당하고 수도 개봉은 함락되고 곽경은 도망쳐 버렸다.
흠종은 금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청신청죄(신하로 칭하며 죄를 청함)하니 금 태종은 금 1,000만정(錠), 은 2,000만정, 비단 1,000만필 등을 요구했다. 여기서 정(錠)은 냥이나 돈이 아닌 금괴를 지칭한다고 해석되니 그 분량은 예측 불가능한 요구였다. 이와 같은 무리한 액수를 요구하는 이유는 조씨 송국 왕손들과 여자들을 모조리 포로로 잡아가기 위한 속셈이었다.
아무리 다 긁어모아도 채울 수가 없어 불가능하게 되니 금군은 황제의 친인척 왕비 24명, 공주 22명, 비빈 83, 왕첩 28, 종희 52, 어녀 78, 궁녀 479, 채녀 604, 종희 1,241, 가녀 1,314, 귀척, 관민녀 3,319 등 값을 매겨 깎기 시작했지만 액수를 채울 수 없었다. 당시 기록한 책 개봉부장(開封府狀) 1127년 2월 부분에 “병이 있거나 못생긴 여자 2,000여명을 금군에게 유린당한 후 쫓겨났고, 포로가 되어 끌려간 여자가 11,635인이며, 그밖에 기술자, 예술가, 학자 등 4,000여명이 일곱 무리로 나뉘어 끌려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포로들은 1127년 5월 23일 금나라 상경(上京)에 도착하여 8월에는 휘종·흠종 두 황제와 황족일행 1,300인을 경사회령부로 옮겨 금나라 종묘에 포로 봉헌의식을 거행했다. 황제와 황후들과 공주, 부마, 종실 모두 양의 가죽을 걸치고 머리에 두건을 매고 견양례(牽羊禮)를 행했다. 휘종·흠종 두 황제는 제물로 죽인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양 가죽을 걸치고 한 발자국에 한 번씩 머리를 땅에 굽혀 절을 하며 아골타 능을 세바퀴 돌았다. 그 다음날 금 황제 태종은 명을 내려 휘종을 혼덕공(昏德公-정신이 혼미한 자), 흠종에게는 중혼후(重昏候- 정신의 혼미함이 중한 자) 라 봉하였다.
그리고 황 태후 이하 모든 종실 여자들은 노비가 되어 여진족 부녀들처럼 상의를 벗고 양가죽만 걸치고 세의원(洗衣院)으로 보내져 거기서 생을 마쳤다. 이 세의원(洗衣院)이란 곳은 금군 병사들이 즐기는 위안소라 하니 일제의 종군위안부 수용소와 같은 곳이다. 휘종 흠종 두 황제는 1128년 통새주로 옮겨져 1,500경(가로 세로 10Km)의 땅을 하사받아 밭을 개간하여 자급자족하며 지난날의 부귀영화를 추억하며 비참하게 목숨을 연명하다 휘종은 1135년 4월 21일 죽고, 흠종은 20여년 더 살다가 1161년 5월 19일 치욕의 생을 마쳤다.
그토록 풍요롭고 생활이 윤택하고 학문과 문화가 번성하던 송나라가 이처럼 비참하게 멸망한 이유는 그 정신적 기반이 도교를 숭상하고 음양오행·사주팔자·부적·풍수지리·궁합·역술과 무격(巫覡)에 도취하여 지성이 혼미해졌기 때문이라는 교훈을 삼아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송나라 말기와 너무도 비슷하다고 보는 게 필자의 견해이다. 기독교인들까지 역술인과 점쟁이들을 찾아가서 미래와 길흉을 묻고 저들의 요설(妖舌)을 신뢰하고 있으니 과연 이 나라의 미래가 어찌될지 매우 염려스럽다고 생각된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59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