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뻐꾹새가 처연하게 울었다. 곧, 모내기철이었다. 분주하게 트랙터가 오갔다. 저물녘이면 살짝 연 창 사이로 들리는 논 개구리의 밤 울음이 청아했다. 천장 위 고양이는 다른 곳으로 이사 하였을 거라며, 남편은 잠자리에 들었다. 여느 도시인들이 그렇듯 어둠이 익숙하지 않은 나는 전등을 끄지 못하였다. 그래서 더 잠이 오지 않았다. 누우면 바로 코를 고는 남편이 깰까 봐, 휴대폰 화면 밝기를 최대한 줄이고 이어폰을 꼈다.
일 년여 전, 딸이 두 돌 된 손자를 데리고 온 날이었다. 집 앞 해수욕장에서 난생 첫 모래 놀이에 피곤했던 손자 덕에 우리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곧, 잠결에 들려온 소음은 딸을 무서움에 떨게 했다. 시골집의 퉁퉁거리는 소리는 도시의 층간 소음과는 전혀 달랐다. 딸은 어린 시절 청개구리를 손에 올려놓고 연한 풀잎을 대주기도 했다. 그러나 30여 년 도시생활을 해 온 그녀는 거미 한 마리에도 경악했다. 남편은 아이들이 성장해서도 에어컨보다 솔바람을 더 좋아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평생을 살았다. 딸은 몇 번의 간청 끝에 겨우 한 번쯤 시골집에 왔고, 특히 청소년 시기에는 온 날부터 돌아갈 때까지 방안에서 휴대폰 놀이에 빠져있기 일쑤였다. 그러나 손자가 아장거리며 걷기 시작하자 딸도 큰마음을 먹었다. 손자는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뒤뚱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갈색 모래 위로 달려오는 파도를 좇아 뒷걸음질 쳤다. 손자를 쫓는 딸도 푸른 바다에 흠뻑 젖었다. 높푸른 하늘과 나란한 수평선 위로 뭉게구름이 그린 하얀 그림이 눈부셨다. 바다, 바다. 손자는 바다와 바다 같은 하늘을 가리키며 함성을 질렀다. 파도 소리가 쪽창을 비집고 들어오는 이곳에 와서 처음 배운 말이었다. 후. 아기의 입김에 솔밭의 흰 데이지도 가는 팔을 흔들었다.
아기가 새근거리는 밤에는 달랐다. 안방 천장에서 나는 부스럭 소리는 딸이 이곳을 오고 싶지 않은 충분한 이유였다. 남편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딸은 재방문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코골이를 멈추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왜? 또 소리 나? 응. 뭔가 쫓고 쫓기는 소리 같지 않아? 한 달 만에 온 시골집, 어젯밤에는 논 개구리의 구성진 함성에 뒤척이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었다. 또 어찌 올라갔지? 두 달 전, 공사를 완벽하게 했는데. 어느 쪽이야? 남편은 바짓가랑이에 다리를 끼며 비틀거렸다. 나는 둘째손가락을 천장을 향해 들었다. 우리의 대화에 잠깐 멈칫하더니 둥둥거리던 방망이질이 다시 이어졌다. 천장 위에서 나는 소리였다. 남편은 벌써 윗옷과 플래시를 주섬거리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는 창고 옥상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갔다. 달빛에 남편의 실루엣이 선명했다. 긴 막대로 지붕을 몇 번 쳤다. 소리가 멈췄다. 고양이를 발견한 남편은 도주로인 지붕 반대쪽 홈통을 빼놓았다. 퇴로를 차단당한 녀석은 마당 구석에 둔 재활용 쓰레기 자루 위로 풀싹 뛰어내렸다. 주춤하더니 꽁무니를 감추며 맑은 달빛 사이로 줄행랑을 쳤다. 집주인의 횡포 아닌가? 그동안 고양이의 거주를 묵인했던 것은 허용의 의미가 아니었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남편이 미운 생각이 들어 눈을 흘겼다.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멸치 장국을 자주 끓였다. 찌개나 국물을 만들고 난 다시멸치를 냉동실에 모아 두었다. 조기도 장바구니의 필수 항목이었다. 시어머니는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더 많은 걸 왜 사냐고 타박을 했다. 건망증으로 핀잔을 들어도 이곳에 올 때는 간기 뺀 멸치와 조기 머리뼈는 꼭 챙겼다. 반려묘와 함께 사는 도시인들은 쓰레기를 준다고 눈을 흘길 것이었다. 사람들보다 동물들이 더 호강한다고 원성이 높기도 했다. 길고양이 보호로 인한 폭발적인 번식은 이미 생태계에 대혼란을 가져왔다고 불만도 컸다. 특히 휴가철 후 버려진 반려동물 문제는 단골 뉴스거리가 된 지 오래였다.
승리자의 기쁨으로 잠자리에 들려 했던 남편은 얼굴이 벌게졌다. 잠시 그쳤다가, 천장 위 달음박질은 반복되었다. 작은 새의 퍼드덕거리는 소리 아냐? 그러게. 고양이 한 마리가 아닌가 봐. 새끼를 낳았나? 쥐 눈과 맞닥뜨린 어릴 적 기억으로, 밤에 보는 고양이 눈은 더 소름 돋는다고 남편은 팔 사레를 쳤다. 그래도 고양이가 집을 오고 간 후, 쥐가 없다고 좋아했었다. 안 되겠어. 다락에 다시 올라가 봐야겠어. 어제 낮에도 확인했는데, 흔적이 없었어. 거실 한쪽 벽에 붙은 다락방 문을 열었다. 끼익. 녹슨 경첩이 지르는 비명이 밤의 고요를 깼다. 열리는 문을 따라 훅 퍼지는 퀴퀴한 냄새에 얼굴이 찡그려졌다. 아파트에서 거의 평생을 살아온 나로서는 시골집 다락방이 그리 호감 가는 곳은 아니었다. 음습한 동굴 같은 공간이었다. 내일 낮, 밝을 때 올라가 보면 어때? 나는 불안한 듯 속삭였다. 성질 급한 남편은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벗으려던 윗옷을 다시 여몄다.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금방이라도 눈을 켠 고양이가 거실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별다른 게 없는데. 그때 바로, 윽. 짧은 고함이 들렸다. 판자 틈새로 눈이 마주친 고양이가 달아났다고 했다. 남편은 뒷걸음질 쳤다. 먹이를 주지 마. 식은땀을 훔치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도 쥐가 없다고 좋아했잖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길고양이들이 문제잖아. 이런 코딱지만 한 시골 동네에도 너무 많아. 묻어 놓은 음식 쓰레기도 돼 파고. 남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는 무책임한 집주인이었다. 무료 임대이긴 하지만 안락한 보금자리가 되도록 미리 정비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미들이 우리를 얼마나 원망할까? 나의 잠도 저만치, 새 둥지를 찾는 어미 새와 고양이를 따라갔다. 새끼 새들이 눈에 밟혔다. 새끼를 물고 어두운 밭두렁을 헤매는 고양이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별수 없어. 남편이 옥상에 그물을 치면 한쪽을 잘라야지. 밤에 소리가 나더라도 남편을 깨우지 말아야겠어. 그 사이 고양이도 새 보금자리를 찾고, 새들도 언덕에 새 둥지를 틀겠지. 이곳은 세 가구의 쌔컨하우스야. 우리가 도시의 미세먼지에 허덕이는 날, 그들은 천장 위 쌔컨하우스에서 휴가를 즐기면 되니까.
오래간만에 졸음이 쏟아졌다.
첫댓글 시골이나 도시나 사람이살지 않으면 다른동물이 자리를 틀려고하지요ㅡ고야이의 번식력도 만만치않죠ㅡ통로는 차단하시는게 우선인것같아요
전원생활이 인간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고양이나 새와 함께 하니 더 폭넓게 다가옵니다.
사람보다 반려 동물의 역할이 커져 가는 현대사회 이지요. 나이든 노부모는 요양병원으로, 간병인에게로, 그리고 남은 경제력과 시간, 그리고 사랑은 애완동물에게로. 참으로 큰 격세지감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