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1월17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청주] 무릎을 꿇어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히브 3, 7 - 14
† 복음 : 마르 1, 40 - 45
안토니오 성인은 3세기 중엽 이집트의 중부 지방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마태 19,21)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자신의 많은
상속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였다. 많은 사람이 안토니오를 따르자 그는 수도원을
세우고 세상의 그릇된 가치를 거슬러 극기와 희생의 삶을 이어
갔다. 성인은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릴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4세기 중엽 사막에서 선종하였다.
★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갖가지 시련을
견디지 못해 하느님을 불신하고 배반하였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우리 신앙인은 옛 백성이 보였던 그러한 불신의 마음을
경계하고 늘 그분의 목소리에 성실히 응답하여야 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그를
깨끗하게 치유해 주신다. 그분께서는 그가 나병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외톨이로 버림받으셨다는 것을 잘 아셨기에,
사제에게 가서 깨끗하게 되었음을 선언받도록 그를 이끄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이제 부정한 사람이
깨끗한 사람으로, 부족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으로, 상처투성이로
다른 이들까지도 부정하게 만드는 사람이 상처가 나아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나병은 이미 극복된 병입니다. 그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날에도 자신을 ‘부정한
사람’으로, ‘부족한 사람’으로, 너무나 상처투성이로 여겨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 상처를 전달해 버리는 ‘죄인 덩어리’
로 비하시키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상처에 얽매여 스스로를
소외시켜 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자신의 상처를
자꾸 다른 사람에게 공격적으로 전이시키는 바람에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손을 내미시어 나병 환자에게 대신
것처럼 그들에게 손을 내밉시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따스함을
전합시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손을 내민다고, 그의
상처에 손을 댄다고 그 상처가 무조건 낫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역시 그 상처에 감염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그 사랑과 인내, 애틋함으로 손을 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감염되지 않고 그 사람의 상처가 낫게 될
것입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무릎을 꿇어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1월17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 1,40-45
무릎을 꿇어라.
저는 한때 허리가 많이 아팠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낫지 않았습니다. 한의사에게 침을 맞기도 했고 통증을
완화시켜 주는 약을 먹기도 했습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매일 같이 ‘주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살려주세요.’ 하고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아프고 나서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더 알게 되었습니다.
편찮으신 분이 많습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여전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수 있으시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 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
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문제는 알지만 해결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써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일본의 한 신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글쎄 신당의
꽃병에 꽂힌 꽃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된 것이지요. 사람들은 모두 신기하다고 하며 동시에 신이 이
꽃병에 나타난 것이라며 난리를 치고 경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당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꽃을 움직이게 하는 이 꽃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신당의 관리인 꽃병 주위를 닦다가 실수로
꽃병을 건드려 땅에 떨어져 깨지고 만 것입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지요. 곧바로 신의 진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어떤 깨진 꽃병 안에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미꾸라지’였습니다.
누군가가 꽃병 안에 살아있는 미꾸라지를 넣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미꾸라지가 움직이다보니 꽃병에 꽂혀있는 꽃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꽃병을 신이라고 여기고 섬겼던
것이지요. 결국 미꾸라지를 신으로 섬겼던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찾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고
직접 말씀하시는 주님만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나라에서 스스로를 재림한 예수라고 말하는 사람이 40명이
넘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사기치고 뻥치는 사람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엄청 많다고 합니다.
이천년 전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인간의 육체를 취하시지
않습니다. 즉, 그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 주님이시며, 각
사람에게 맞게 오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천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 넘치는 사랑을 주시는 주님을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일상 안에서 깨닫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병을 깨끗하게
해주실 것을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면서 고쳐주셨습니다. 지금이야 이
나병이 완전히 극복된 병이지만, 당시에는 고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병이었지요. 흉측한 모습의 나병환자, 더군다나
전염의 위험도 있는데 직접 손을 대시는 예수님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간의 모습과 달리, 주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모든 사랑을 쏟아 부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사랑은 특별한 경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 너무나도 자주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특별한 사람만이 실천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지음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체험을 찐하게 할 수 있게 되어,
참 행복을 지금 이 순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이 나와 같기 때문이다.
자신과 무관한 부분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지지는 않는다
(헤르만 헤세).
저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 삶 자체를 사랑할 것~~
피터 버클리라는 권투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19년 동안 자그마치
299번 권투 경기를 했습니다. 전적은 어떻게 될까요? 299전 31승
256패 12무승부입니다. 화려한 전적이지요. 그는 이런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진 권투 선수’
하지만 버클리 자신은 이러한 세상의 기록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경기를 한 권투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권투 자체가 좋아서 권투를 하는 것이지,
승리를 위해서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행복을 느끼며 오랫동안 권투를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세상의 기록에 민감합니다. 좋은 성적을 맞아야 하고,
높은 지위를 얻어야 하며,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기록에 민감하면 할수록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대신 자신의 삶 자체를 좋아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랫동안 그 안에서 행복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록보다, 내 삶 자체를 사랑하는 오늘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눈길을 걷다가...
2013년 다해 1월17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마르 1,40-45
눈길을 걷다가...
피정 중에 눈 덮인 바닷가를 홀로 걸었습니다. 어젯밤부터
눈이 내렸는데, 그 동안 단 한 사람도 지나가지 않은 순백의
대지를 밟고 지나가려니 조심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은 길도 미끄러워지고 행동도 부자연스러워지고
무엇보다도 열심히 쓸어야 되고...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는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세상의 모든 추함과 더러움을
모두 덮어버리는 그 모습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손길을 엿보기도 합니다.
깨끗하고 하얗다못해 눈마저 부신 해안가 눈길을 걷고 있노라니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도 저 눈처럼 다시 한 번
깨끗해지고 싶다. 나도 다시 한 번 순수해지고 싶다. 다시 한
번 원점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다.’
예수님께 다가온 나병환자 역시 저와 비슷한 마음, 아니 더
간절한 마음이었겠지요.
얼마 전 원인 모를 간지럼증세로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너무 자주 샤워를 해서 그런지, 아니면 음식을 잘못 먹어서
그런지 온 몸이 간지러웠습니다. 밤낮으로 긁어댔습니다. 틈만
나면 긁어대니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참다 참다 안
되겠어서 결국 병원신세를 졌더니 즉시 완화가 되더군요.
특효약도 없던 예수님 시대 중증 나병에 걸린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조금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곪아터지고
깊어져가는 환부의 상처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나병환자였습니다. 매일 자신의 살점이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상실감에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열악한 의료
여건상 나병환자는 치유를 향한 일말의 희망도 없이 조금씩 죽음을
향해 한발자국씩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병에 걸린 것만 해도 서러워죽겠는데, 세상 사람들은 뭔가
큰 잘못을 해서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며 손가락질했습니다.
어쩌다보니 나병에 전염되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우연히 재수 옴
붙어 죽을 고생하고 있는데, 멀쩡한 사람 중죄인, 아니 죽은 사람
취급하니, 병도다도 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나병환자가 보여준 적극적인 태도를 보아 그는 이미 예수님과
관련된 소문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결심했겠지요. 이분만이 살길이다. 시도하다가 실패해도 상관없다.
목숨 걸고 매달려보자. 율법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그는 더 이상 앞뒤 재지 않고, 그냥 저돌적으로 예수님께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이렇게 외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간절함은 하늘에 닿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절박함은 하늘을
움직인다는 말도 있습니다. 나병환자의 절절한 슬픔, 부르짖는
외침이 자비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능의 손을 펴시어 나병환자의 환부에 손을 갖다 대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죽음을 향해 부패되어 가고 있는 인성이 눈처럼 깨끗하신
하느님의 신성과 만납니다. 비참한 인간 현실과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이 마주칩니다. 결핍 투성이인 인간이 충만한 하느님
사랑을 만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마침내 나병환자는 새 삶을 부여받습니다.
은혜로운 예수님과의 마주침으로 인해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끔찍하다 못해 처참할 정도의 환부를
지닌 나병환자였는데 이제 깨끗하고 깔끔한 꽃미남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리도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과의 참된 만남을 통해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로 다시 한 번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2013년 다해 1월17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마르 1, 40-45)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마르 1, 40-45)
도움을 청하는 자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모든 이들에게
가엾은 마음을 가지시어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신학생 때 졸업논문을 촉박하게 마무리해야 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몸과 마음이 모두 상당히 초초하고 힘든
상태였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인지 담배는 더 많이 피우고
그럴수록 몸과 마음은 더욱 나약해졌습니다.
거기다 감기 몸살까지 겹쳐서 담배를 끊으려 했는데 하루도
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거의 한계상황까지 닥쳤고, 도저히
학교생활을 마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까지 들었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저는
성체조배실로 향했고, 주님께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리려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젠 어쩔 수 없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부르셨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봅니다.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고, 시간은 다가오고 담배마저 끊을 수 없습니다. 책을
읽어도 하나도 머리에 남는 게 없습니다. 저 어떻게 하면 좋아요.
예수님!”
그렇게 감실 안에 계신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말씀드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예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는 것은 저도 알아요. 그런데 저는
너무 힘들어요.”
“그렇게 부족한 너를 사랑한다, 얘야.”
재차 사랑하신다는 말씀에 저의 마음은 멍해지고, 온 몸이
따뜻해졌으며,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 나는 지금까지 생각으로만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지
온 마음으로 믿지는 못하였구나!”
그렇게 말없이 한 시간여를 머물다가 침실에서 돌아와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아침 기도와 미사 후 여느 때처럼 식사를
하고 담배를 피우려 하는데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도 감사해서 담배를 피울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그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인간적인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을 때,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저는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 저를 가엾이 보아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청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고, 그 문제에 대하여 함께 걱정하고 계신지를 알게 됩니다.
사랑의 예수님, 저희에게도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용기와
간절함을 주시고, 주님께서 저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주님께서 인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깨닫게 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수원] 올바른 침묵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냐고 누군가 물으면 나는
당연히 “예스.”라고 답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야유를 보내곤
한다. 하지만 그런 말끝에 내가 하는 말은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 뒷말을 덧붙인다. 가톨릭은
윤회사상을 믿는 것도 아니고, 말하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말에 인심 좀 쓰라고 하면서 한바탕 웃는다.
즐겁게 잘 지내던 남편과 근래에 사소한 일로 싸웠다. 우리 부부의
싸움 자세는 침묵이다. 위대한 침묵, 사랑의 침묵 이런 거창하고
좋은 침묵도 많은데 우리 부부는 상대를 무시하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요즘 워낙 경제도 어렵고 귀하게 자란 세대라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다투는 경우가 많다. 우리 부부도 양보할 것은 하지만 대립되는
부분은 침묵으로 타협점을 찾아가는 나쁜 습관이 있다. 먼저 말하면
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계속 버틴다.
부부는 부족한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키워가는 것인데,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는 승부욕과 자존심 싸움에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다. 내가 잘났다고 내가 더 편하겠다고 그러는 것이다.
10년 전을 생각해 보면 우리 부부는 많이 성장했다. 아이를 키우고
어른들을 대하면서 쌓인 성숙함은 아마 연애 때의 사랑과는 다를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원한 침묵은 입으로 하는 침묵이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원했던 침묵은 마음의 고요,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가 아니었을까. 우리 부부도 맞잡은 손 위에 그분께서 잡아주시는
그 손을 기억해 올바른 침묵을 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겠다.
- 장유진(수원교구 신장동 천주교회) -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 내맡긴 영혼은 -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은? (1)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에서 해방된다>
성모 '마리아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기게 되면,
100%를 완전히 내맡기게 되면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더 나아가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모두 사라지게 된다.
나는 과거에 교통사고를 두 번이나 크게 경험해 보았기에
장거리 여행이나 운전을 하게 될 때면 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동안 죽음에 대한 묵상은 신앙인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여기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말해왔지만
나의 내면에는 늘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내 자신을 하느님께 완전히 100% 내맡겨 드린 후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느님께 내맡기고
사는 것' 자체가 바로 죽음에 대한 묵상이요 준비로 여기게 되었다.
나의 모든 것, 나의 부족함과 죄까지도 송두리째 모두 다 하느님께
내맡겨 드렸고, 그분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 주셨다.
나의 모든 것이 이미 다 그분의 것이 되었는데 무슨 걱정과
두려움이 남아 있겠는가 말이다.
밖에 나가서 교통사고로 죽더라도, 비행기가 공중폭파 되어 또는
추락하여 나의 몸이 산화된다 하더라도 나의 영과 육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그분께서 어련히 알아서 다 잘해주시겠는가?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 영혼에게 '불행'이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불행이라고 여기는 것 안에도 반드시
'하느님의 뜻'이 깊이 숨어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불행이
크면 클수록 하느님의 뜻도 더욱 크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불행을 기다리게 되기도 한다. '행복이라는 관념'과
'불행이라는 관념'이 결코 둘이 아님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관념 속에 계신 하느님께 늘 감사드리며,
불행이라는 관념 속에 계신 하느님께도 더욱 감사를 드리게 된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더 나아가 죽음까지도 그것들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몽땅 다 내맡겨 드렸고 그래서 나의 모든 것이 없어졌는데
그 무엇을 두려워하랴!
오로지 '여기(hic, hear)서 지금(nunc, now)'을 살아갈 뿐이다.
'하느님의 뜻대로' 말이다!
- 동경 한인 성당 이 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