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수 목사의 이단성 연구 보고서
- 예장(합신) 신학위원회 -
에 대한 반론 (4)
< 필자: 카이로스 >
4) 창세기 3장에 대한 그릇된 해석
김성수: “선악과 사건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나약함을 확연하게 구별해 주므로 해서 하나님의 안식은 인간의 힘으로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걸 납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이었다. 하나님과 피조물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격적이며 도덕적인 존재에게 가르치시고 싶으신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지켜낼 수 없는 하나님의 계명이었다” (창세기1, 162쪽). |=> 인본주의 신학이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죄성을 지닌 육을 입고 이 세상에 던져진 인간은 피조물이고 유한자인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무한한 가능성의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그 무한한 가능성의 착각 속에는 선악과를 따 먹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착각도 들어있다. 인본주의 신학은 이러한 착각 속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죄의 원인도 하나님 탓으로 돌리거나 사탄의 탓으로 돌린다.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둘 다 좋은 나무이다. 그런데 티끌에 불과한 인간은 도저히 그 선악과나무의 시험을 통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그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안 따먹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지시고 선악과의 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니다. 그 선악과나무를 통해 너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티끌인지를 만천하에 폭로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발적인 항복과 순종을 할 수 있는 자로 설복시키기 위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라는 소품을 에덴에 심어 놓으신 것이다” (창세기1, 198쪽). |=> 인본주의에서는 이 문단의 내용을 제대로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모양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지킬 수 있었는가 없었는가에만 관심을 두고 논쟁거리로 삼고 있지 왜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셨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뜻)를 읽어내려고 하는 시도는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사고의 능력이 한정되어 있다. 알레고리적 성경해석으로 인본의 관점에서 성경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인본주의 신학은 선악과 사건의 해석에 들어서면 마치 냉동실에 얼려놓은 생선처럼 선악과나무를 심어 놓으신 의도를 풀어보려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한다.
“선악과는 하나님이 왜 만들어 놓으셨을까? 그것도 제일 잘 보이는 동산 중앙에? 그것은 그것을 따 먹어라! 그리고 내 은혜받아 산 자가 되라는 이유에서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를 반드시 죽이셔야 했다. 왜? 언약을 하셨기 때문이다. ”정녕 죽으리라! 죽고 죽으리라“라는 반복이다. 이것이 나중에 야베스에서 복의 복으로 확 뒤집어 진다.”
비판 => 김성수는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의 혼란스러운 적용을 한다. |=> 합신 신학위원회(‘신학위’)는 선악과 사건에 대한 김성수 주장의 초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고 있다. “교훈적 의지”라는 애매한 용어를 사용하여 선명하게 주어진 “금지” 명령을 지키지 않아도 되거나 없어도 무관한 명령인 것처럼 의미를 혼탁시키고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 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은 교훈적 의지이다. |=> 금지 명령이 교훈적 의지를 담고 있다는 것은 ‘신학위’의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해석이다. 객관적으로 전혀 동의할 수 없고 수긍할 수 없는 자의적 해석이다. 그렇게 해석한 것이 옳다면 혼자서 그렇게 알면 될 일이고 김성수의 해석을 비판할 소재는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보기를 기뻐하시는 의지이다. |=>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다. 지으신 것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고장이나 사고가 나지 않는지 확인이 되었기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무슨 아담이 순종하는지를 지켜보고 기뻐하실 필요가 있는가? 교훈적 의지라고 하는 쓰잘 데 없는 용어를 써서 성경의 순수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게 오히려 방해가 된다. / 순종하는 것을 보기를 기뻐하셨다는 표현은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고 있는지 아닌지, 이제나저제나 언제 명령을 어길지 걱정이 되어 노심초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 아담은 이러한 교훈적 의지에 순종할 수 있는 순전한 상태로 지음을 받았다. 그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의 자유를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 인본주의는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라는 실낱 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빠져나올 수 없는 사고의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다. 영원히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었는데 그만 사탄의 꾀임에 빠져서 죄를 지었다고 사탄에게 죄의 책임을 떠넘긴다. 신본주의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것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주장이다. /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라는 표현은 어폐가 있다. 그 말은 일상적으로 늘 죄를 짓고 있으나 잘 하면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차라리 “죄에서 자유하다”라고 말하는 편이 죄를 짓지 않는 존재로 이해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은 이 시험에 통과할 수가 없는 존재이거나, |=> 인본주의는 선악과 시험에 통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절대 내려놓을 수 없다. 구약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인간의 불가능함을 깨닫지 못한다. 육신을 입은 인간의 불가능함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이 빠져 있는 함정이다. / 인간은 에피두미아(ἐπιθυμία)로 인해 언젠가 한 번은 시험에 넘어갈 수밖에 없고 그러면 “정녕” 죽게 되는, 그래서 선악과 시험에 통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 신본주의 신학이다. 애초부터 순종을 기대하지 않으시고 금지명령을 내리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 순종을 기대하지 않는데 금지명령을 내릴 필요가 있는가? 애초에 선악과를 심지 마셔야지 순종하지 않을 것을 아시면서 금지한다는 것은 고약한 심보의 하나님이거나 지능지수가 아주 낮은 하나님으로 이해될 소지가 있다. /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고 시건방을 떠는 존재에게 그게 불가능함을 알게 해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아야 한다.
신학위원들은 김성수의 ‘에피두미아(ἐπιθυμία)’ 개념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거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비판의 글을 쓴 것 같다. 인간 이외의 동물이나 식물이 창조의 질서를 위반하고 죄를 짓는 일은 없다(병에 걸린 경우를 제외하고). 오직 인간만이 죄를 지을 수 있다. 인간에게만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자유의지에 고삐를 물린 것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의 뜻에 순응하게 지어져 있으나 인간의 본성에는 창조 시부터 ‘에피두미아’가 내장되어 지어졌고, 그 에피두미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도 있다는 것이 김성수의 ‘에피두미아론’이다. (그게 하나님의 설계 원본이다.) 그 에피두미아는 끝없는 탐욕을 추구하게 만들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탐욕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거역할 수 없게 만들며, 그 결과로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을 받았을 때 선악과 열매를 따 먹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에 따라서 아담은 불순종하고 심판을 받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게 된다. |=> 에피두미아를 몰라서 무리하게 선악과 사건을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고 아담의 의지로 일어난 사건인데 하나님의 의지라고 궁색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를 들어, 애초부터 아담은 순종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이 없었다고 말하면 잘못이다. |=> 김성수가 한 말이 아니다. 아담은 순전한 상태로 지음을 받았으며, 그러한 상태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실행할 수 있는 자유선택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 하나님의 기본 설계였다면 에피두미아로 인해 그 뜻에 거스르는 행위를 하는 것은 특수 사건이고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선택의 범위 안에 있다. 김성수는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를 혼동하며, 그 결과 운명론적 이해를 전개하며 그것을 은혜론으로 왜곡하고 있다. |=> 김성수 신학에 해당 사항이 없는 뚱단지 같은 내용이다.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기 위해 무리하게 글을 쓴 것 같다.
5) 심각하게 잘못된 알레고리 해석
김성수: “창조 셋째 날이 담고 있는 구속사 안에서의 영적 메시지를 살펴보면, 성경에서 뭍과 바다가 대조되어 나올 때 항상 뭍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바다는 죄악된 세상을 상징한다. 그래서 창세기의 다섯째 날 만들어진 바닷속의 생물 중에 타닌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창 1:21의 그 큰 물고기, 타닌이라는 단어는 용, 뱀, 바다 괴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이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다가 물러가고 뭍이 드러나는 것으로 묘사를 하기도 한다” (창세기1, 84쪽). |=> 뭍과 바다의 의미를 귀납적 성경해석으로 이끌어 낸 것이다. 성경 전체에 대한 통찰이 없으면 이렇게 귀납적으로 유도해 낸 상징적 의미가 바로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알레고리 해석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김성수 목사의 해석에 익숙해지면 충분히 논리가 정연한 해석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은 반드시 너와 결혼할 것이고 예수를 낳을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비유 강해 11). |=> 생육 번성과 결혼과 예수를 낳는 것이 한 문장에 들어 있어 그게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 생뚱맞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각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내용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데 신학위원들은 김성수 강해의 아주 적은 부분만 읽어보았을 것이고, 그 정도로는 김성수의 알레고리 해석을 제대로 이해할 수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도는 처녀에 비유되고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도의 삶은 천국의 혼인잔치를 위한 준비과정(사시와 절기, 로마서 강해 102장 참조)으로 설명한다. 천국에는 없는 혼인제도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혼인을 모형으로 보여준다. 표피적으로 이해하던 성경 지식으로는 김성수의 웅숭깊은 알레고리 해석을 이해하고 따라잡기가 매우 버거울 것이다.
“창세기를 잘 보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아벨이나 에녹 같은 산 자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라인인 인물들의 나이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가인의 후손들의 나이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 |=> 필자도 미처 관찰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가인의 후손들도 더러는 나이가 기록되었을 것으로 막연히 추정했으나 김성수는 성경 기록을 다 체크해 보고 확인한 결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는 선택 밖의 사람들은 모두 죽은 자로 취급하셨다는 의미이다. |=> 이것이 귀납적 성경해석의 좋은 예시이다. 하나님은 바로 산 자들에게만 성경을 주신 것이다” (창세기1, 21쪽).
비판: 김성수는 심각히 잘못된 알레고리 해석의 오류를 보이고 있다. |=> 김성수 신학의 웅숭깊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신천지 같은 이단의 비유 풀이 정도로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합신 신학위원분들이 이해하는 김성수의 알레고리 해석의 수준은 좀 더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고 더 많이 공부해야 할 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6) 율법폐기주의를 주장한다. |-> 비판글로서 아래 비판글 본문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 “율법폐기주의”를 제목에 올린 것은 매우 선동적인 의도를 드러내고 있으며, 일방적으로 매도하려는 음모를 드러낸 것이다.
김성수: “우리는 창세전에 이미 완료된 다른 상태를 가지고 이 땅에 왔다”(비유강해 14번). “성경은 순종치 않음에 가뒀다고 하는데 순종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전부가 가짜다”(산상 수훈 16번). “생각해 보세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인간의 행함에 의해 믿음의 진위가 결정이 되는 이상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셨는데 인간이 행함으로 그 믿음을 확증해 내지 못하면 그 믿음이 죽은 믿음이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라는 제품에 인간의 행함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 이상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은 인간 측에서의 어떤 불순물도 가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야고보서에서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은 십자가 은혜라는 하나님의 행함에 의해, 자신의 옛사람의 심장에 칼을 꽂는 자기 부인의 행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인간 측의 노력과 공로가 가입된 불순물 묻은 믿음과 가짜 믿음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은, 착한 일을 많이 하지 않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측에서의 착한 일이나, 선한 행위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행함에 의해, 구원에 있어서 인간 측에서의 모든 행함을 부정하는 그런 행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믿음은 가짜라는 완전히 반대의 이야기인 것입니다”(예수님의 비유, 242-243).
비판 => 신자의 선행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믿음을 부인하거나 모순된 것이 아니다. 선행이 믿음의 증거가 된다는 말을 오해하여, 마치 선행이 믿음의 진위를 결정하는 근거이며 따라서 인간이 믿음을 결정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한 완전한 오류이며 또한 왜곡이다. |=> ‘신학위’가 어느 정도 신중하고 체계적인 연구 결과를 토대로 김성수 신학을 비판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아주 근거가 빈약하고 허무맹랑한 비판이고, 마녀사냥식 비판이다. 신본주의에 바탕을 둔 김성수 신학은 일반 인본주의 신학과 현격한 차이가 있어서 아무리 ‘신학위’ 위원이라 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 김성수는 선행을 권장하지만 그 선행이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없으며, 믿음의 결과일 수는 있다고 말한다. (다른 모든 종교도 다 선행을 추구한다.) 다른 일반 종교가 말하는 믿음과 김성수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구별되어야 한다. 신본주의는 믿음과 행함의 주체가 모두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라고 명확히 선을 긋고 있다. 즉,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이다’라고 설명한다. /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라는 말씀에서 그 믿음도 하나님이 넣어주신 믿음이고, 그 행함도 하나님이 주도하여 일어나는 행함으로 이해해야 한다. / 인간이 스스로 믿는다고 주장할 때 그 믿음은 자신의 탐욕이나 욕심을 이루기 위해, 또는 천국에 가고자 하는 자의적 소망에서 믿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가 구원에 전혀 기여할 수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다. 올바른 개혁신학은 신자의 믿음은 그 자체가 성령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러한 선물을 주신 성령 하나님께서 또한 거룩한 성화의 일을 행하시므로 선행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임을 가르친다.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또한 반드시 성화의 사역을 행하실 것이므로 행함이라는 열매로 믿음의 진실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교훈한다. 따라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4)의 말씀은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임을 행함으로 드러내게 된다는 원리를 교훈하는 말씀이다. |=> 선행은 믿음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것은 앞서 설명하였고 이 설명은 김성수 신학과 상충되는 것이 없다. 하나님의 믿음으로 시작된 행함은 반드시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니 그런 행함은 반드시 하나님의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라는 말이 그대로 성립한다. / 그러나 김성수는 인본주의가 주장하는 ‘성화’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이러한 까닭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신자가 선행을 하여야 할 필요를 다음과 같이 교훈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4문의 답). 당신은 이 모든 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지킬 수 없습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5문). 만일 아무도 이 생애에서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면, 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그렇게 엄격하게 선포하셨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의 용서와 의를 더욱 간절히 추구하게 하기 위해서이며...성령의 은혜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점점 더 새롭게 되기 위한 노력을 결코 멈추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5문답, 고전 9:24; 빌3:12-14; 요일 3:1-3).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일지라도 계명을 완전히 순종할 수는 없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나는 전혀 순종할 수 없다고 말한다거나, 새롭게 되기 위한 노력조차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믿음의 진위를 사람이 결정한다는 것을 결코 뜻하지 않는다. |=> 이런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해당하는 내용은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는 사항이다. 그러나 그 문장의 바탕에 짙게 깔려 있는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은 그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있다는 증거가 면면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