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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서 온 그대. 일찍이 바둑계에선 이창호 9단을 이렇게 불렀다. 오죽했으면 ‘은하계에서 온 초능력 고수’, ‘전대고수(前代高手)의 환생’이라고까지 했을까. 그때까지의 바둑계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불가, 납득불가였기 때문이다.
이창호라는 ‘불가사의(?) 소년’이 등장하기 전까지 바둑의 실력은 만개(滿開)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경험이 쌓이고 관록이 붙어야 일가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면도날 바둑’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일본의 사카다(坂田榮男) 9단은 15세에 입단해 40대의 나이에 접어들어서야 7대 기전을 제패했고, ‘괴물’ 후지사와(藤澤秀行) 9단도 15세에 입단해 37세에 명인에 잠시 올랐을 뿐 52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본의 최대 타이틀인 기성(棋聖)을 호령했다.
이것이 70~8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만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린하이펑(林海峰) 9단과 한국이 낳은 천재기사 조치훈 9단이 20대 초반에 명인(名人)에 오름으로써 대폭 단축되긴 했다. 그렇기는 하나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10대 챔피언이 출현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19세의 나이로 일본 최연소 타이틀 보유기록(1975년, 일본기원선수권전)을 쓴 조치훈 9단이나 약관(1972년)에 한국 명인 타이틀을 차지한 서봉수 9단처럼 10대 말미에 두각을 나타낸 사례가 없진 않다. 그러나 이창호 9단은 이들처럼 한두 개의 성주(城主)에 그친 것이 아니라 10대 중반의 나이에 이미 천하를 호령하는 군주(君主)에 올랐다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세계 최연소(14세) 타이틀 획득(1989년 KBS바둑왕전) 기록을 세울 때도 그렇고, 직후 스승 조훈현과 사제대결을 펼치며 타이틀 몇 개 양위 받을 때까지도 ‘뭐, 작은 한국무대에서 일어난 일’이려니 했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세계무대(1992년 동양증권배)에서, 최연소(16세) 세계대회 우승기록까지 광속으로 갈아엎어버리자 세계가 경악했다. 바둑계의 상식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충격이었다. 지금 바둑이 스포츠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바둑의 정체성에는 예도의 정신세계가 엄연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물며 20년 전에야 더 말할 나위 없다.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는 바둑에서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명인(名人)은 오랜 세월 축적되고 다듬어져 만들어지는 존재라고 믿었기에, 여드름이 덕지덕지 앉은 소년챔피언의 등장은 참으로 충격이었다.
10대 소년챔피언의 출현에 과연 바둑은 예술인가? 기술인가? 바둑계는 의문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 어느 쪽이건, ‘외계 고수’, ‘전대고수의 환생’이란 뜬구름 잡는 추론을 갖다 붙이는 것 외에는 소년의 완숙한 바둑을 설명할 길 없었다. 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스승 조훈현 9단도 3년 전(1989년) 1회 응씨배를 우승했을 때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조훈현 9단이 이창호를 내제자로 들인 가장 큰 이유가 “자신의 뒤를 받쳐줄 기재(棋才) 육성”이었다. 5천년 역사를 이어온 바둑이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를 맞고 있었고, “나 혼자로는 힘들다”고 토로한 조9단의 진단은 시대를 정확히 내다본 수읽기였다. 조9단이 첫 응씨배에 홀로 출전해, 마치 적진을 필마단기(匹馬單騎)로 헤집고 나오는 조자룡처럼 숱한 난관을 헤치고 우승한 것을 기화로 한국바둑의 위상은 격상했으나 그렇다고 반석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일본이나 중국에선 여전히 “한국에는 조훈현밖에 더 있느냐”는 투였고, 점차 빈번해질 세계대회에서 조훈현 한 사람으로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조9단의 1989년 응씨배 우승은 “여기 한국바둑도 있다! 더는 무시하지 마라”고 외친 것이었고 그때부터 일본, 중국이 한국바둑을 달리 바라보긴 했다. 하지만 중심은 여전히 일본이었다. 응씨배는 4년에 한번 여는 대회지만 일본이 주최하는 후지쯔배는 매년 열렸다. 1988~1989년 다케미야([武宮正樹) 9단이 1, 2회 대회를 연속 우승한 데 이어 1990년 3회 대회는 린 하이펑 9단이, 1991년 4회 대회 우승자는 조치훈 9단으로 모두 일본기원 소속 기사였다. 이 사이 IBM배 속기(速棋)오픈전이라는 미니 세계대회가 세 번 열렸는데 이조차 일본기사들-이시다(石田芳夫), 오타케(大竹英雄), 고바야시 사토루(小林覺) 9단이 독식했다.
이 무렵의 세계바둑 판도를 야구로 비유하면, 한국은 선발 조훈현이 홀로 호투하며 일본의 강타선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9회까지 책임지기엔 버거운 상황. 특급 중간계투와 마무리 요원이 절실했다. 이때 이창호가 등판했다. 제3회 동양증권배가 세계대회 등판 무대였다. 이 대회 우승은 이창호시대의 전주곡이었고, 이후 세계바둑계 판도는 한중일의 각축이 아니라 공히 이창호를 쫓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동양증권배는 소년 이창호의 세계대회 등용문이요 이창호시대의 독주를 예고한 신호탄이었지만, 한국이 마련한 첫 세계대회로서 매우 각별한 기전이었다. 바둑사에 세계대회 원년은 후지쯔배(일본)와 응씨배(대만)가 만들어진 1988년이다. 4월에 처음 열린 후지쯔배의 우승상금은 1,500만엔(당시 환률로 약 9,000만원)이었고, 8월에 개막한 응씨배는 무려 40만 달러(당시 환률로 약 3억 2,000만원)였다. 일본, 대만(범 중국)이 경쟁하듯 세계대회를 출범시키자 당시 응씨배 서울 4강대결을 앞두고 한국 바둑팬 사이에 우리도 세계대회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여망이 일었다. 이에 바둑애호가이자 후일 한국기원 이사장을 지낸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이 기전규모 8,500만원, 우승상금 1,200만원을 건 동양증권배를 만들었다.
1988년 12월 9일 서울 롯데호텔에서의 개막축하 리셉션으로 첫발을 내딛은 동양증권배는 세계대회라는 명칭을 붙이긴 했지만 규모 면에서나 우승상금 액수에서나 왜소했다. 한국바둑사상 처음으로 외국기사에게 출전을 허용한 오픈기전이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일본기사 2명, 대만기사 2명만 초청한 수준이었다(한중 국교수립 이전이었으므로 중국기사는 아예 부르지도 못했다). 제한적 오픈기전이었기에 세계대회라기보다는 국내 13번째 기전으로 자리한, ‘국내 최대기전’이라는 수식어가 더 걸맞았다.
그런데 명색 세계대회의 명패를 걸고 선보인 국내 최대기전에 당시 한국바둑 일인자인 조훈현 9단이 불참을 선언했다. “아직은 외국기사에게 문호를 개방할 시기가 아니다”라는 게 불참의 변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괜한 걱정이었다며 웃어넘길 일일지 몰라도 그때 우리나라 기사들의 전반적인 수준은 안심할 처지가 아니었다(대회결과 우리나라 기사들의 실력이 걱정과 달리 그 이상이라는 게 증명되기는 했지만 뚜껑을 열기 전까지 조9단뿐 아니라 대다수의 인식은 그랬다).
대만기사 2명이야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건너오는 이시다와 야마시로(山城宏) 9단은 우승을 넘볼만한 정상급 기사였다. 기전 오픈은 아직 시기상조이며 안방에서 자칫 망신만 당할 수 있다는 게 조훈현 9단의 걱정이었고, 한국바둑의 위신을 걱정한 자신의 우려를 귀담아 들어주지 않자 불참으로 불만을 에둘러 표한 것이다.
과연 어느 기사가 일본기사 두 명과 맞붙느냐? 개막 리셉션의 관심사는 단연 32강 대진 추첨식이었는데, 이튿날 야마시로 9단은 1회전에서 양재호 6단(당시)에게, 이시다 9단은 2회전에서 유창혁 3단(당시)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초청 외국기사 4명 전원이 초전에 전멸했다.
특히 정밀한 마무리솜씨로 ‘컴퓨터’란 별명까지 얻은 이시다 9단의 좌초는 화제였다. 그는 1971~75년까지 일본 본인방전을 5연패하며 일본바둑을 호령한 기사였다. 한국호랑이 조훈현 9단도 불참한 마당이었다. 둘(이시다 9단과 야마시로 9단)은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결승에서 만나 축배를 들자”고 미리 샴페인을 터뜨렸다가 머쓱하게 귀국했다.
“막상 붙어보니 한국바둑은 중반 이후 실로 무서운 괴력을 지닌 무식(?)한 바둑”이었다며 야마시로 9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말에 한 팬은 “그래도 일찍 진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라며 “13세 이창호에게 졌으면 무슨 망신살이었겠느냐”고 통쾌해 했다. 1회 대회 우승은 양재호 6단이 장수영 8단(당시)을 3-1로 누르고 우승했다.
명예회복을 노린 일본은 2회 대회에 이시이 구니오(石井芳生), 고바야시 사토루(小林 覚), 고마쓰 히데키(小松英樹) 3명의 정예기사를 내보냈으나 이번에도 모두 초반 탈락했다. 1990년 10월말에 끝난 2기 대회는 4강에서 조훈현 9단을 이긴 서봉수 9단이 결승에서 이창호 4단을 3-1로 꺾고 우승했다. ‘15세 소년국수’에 올라 상종가를 치던 이창호 4단은 데뷔 후 서봉수 9단에게 5연속 패배를 안긴 바 있기에 우승할 줄 알았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소년 장수였지만 아직은 큰 승부 경험이 2% 부족했다.
2회 대회까지 일본과 중국이 최강의 전력을 보내지 않았다고는 하나, 두 번 다 초반 탈락했다는 건 그만큼 한국바둑의 실력이 강해졌다는 걸 말해주는 증거였다. 자신감을 얻은 한국은 3회 대회부터 외국기사 시드를 일본 6명, 중국 4명으로 늘리고 대만 2명에 미국과 유럽도 각 한 명씩 배정하여 명색 세계대회 면모를 갖췄다. 격에 맞게 우승상금도 5,000만원으로 대폭 증액했다. 후지쯔배, 응씨배에 이어, 비로소 세 번째 세계대회가 등장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1, 2회 후지쯔배를 연속 제패한 다케미야 9단과 오타케 9단 등 이름만으로도 산천초목을 저르르 울리던 초일류 기사들이 날아왔다. 중국도 조훈현 9단과 1회 응씨배를 다투었던 녜웨이핑 9단과 ‘떠오르는 태양’ 마샤오춘(馬曉春) 9단 등을 출격시켰다. 그해(1991년) 3회 후지쯔배를 석권한 린하이펑 9단은 출신지인 대만대표로 출전했고, 조치훈 9단 또한 한국대표(추천)로 얼굴을 내밀어 3회 동양증권배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별들의 전쟁’이 되었다.
1991년 6월 13일 서울 리베라호텔에서 열린 준결승에까지 살아남아 무대에 오른 기사는 린하이펑 9단과 조훈현 9단, 조치훈 9단, 이창호 5단이었다. 대만대표 한명을 3명의 한국대표가 에워싼 형국이었다. 한국바둑의 간판스타 조훈현 9단이 우승후보인 오타케 9단과 녜웨이핑 9단을 연파했고, 모처럼 태극마크를 달고 뛴 조치훈 9단이 중국의 신성(新星) 마샤오춘 9단을 따돌려 주었다. 이에 비하면 이창호는 대진운이 따른 편이었다. 이변이 없는 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손꼽히던 다케미야 9단과 8강에서 만날 것으로 예상했는데, 중국의 복병 첸위핑(錢宇平) 9단이 16강에서 잡아준 덕을 보았다.
3판 2선승제의 준결승은 린하이펑-조치훈, 조훈현-이창호 전이었다. “또 창호야?” 국내무대에서 ‘사제 백년전쟁’을 펼치고 있는 조훈현, 이창호 사제가 국제무대에서도 또 한번 정면대결을 펼치게 되자 조훈현 9단의 부인 정미화 씨가 비명을 질렀다.
1991년은 이미 이창호의 해였다. 왕위, 국수를 위시해 국내 13개 기전 중 반절이 넘는 7개 타이틀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해 65승 19패(승률 77.4%)를 기록하는 등 기록 전(全) 부문에 걸쳐 1위를 독식하며 질풍노도처럼 한국바둑을 정복 중이었다. 일인자 자리를 놓고 스승 조훈현 9단과 한 지붕 아래서 자고 일어나 날마다 ‘사제전쟁’을 벌이는 기구한 ‘적과의 동침’ 관계가 이어지고 있었고, 제자가 눈 깜빡할 새 7관왕에 올랐다는 건 그 수만큼 스승의 타이틀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말했다. 이창호는 뜨는 해였고 조훈현은 지는 해였으니 어찌 정미화 씨의 근심이 가벼울 수 있었으랴.
승부는 기세다. 이 무렵 제자는 이미 스승에게 이기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조훈현 9단은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1-2로 졌다. 바둑의 역사가, 어느새 장강의 물결이 그리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린하이펑 9단이 조치훈 9단을 2-0으로 이겼다.
1965년 23세의 나이로 명인에 올라 1974년 무관(無冠)이 될 때까지 10여년 일본바둑을 제패한 바 있는 린하이펑 9단이다. 3년 뒤인 26세에는 최연소로 일본 양대 타이틀인 명인, 본인방을 동시에 석권하는 기록을 세웠다. 당시 바둑계 풍토에서 약관(弱冠)의 일인자 등장은 매우 놀랄만한 일이었다(‘연령 쇼크’를 주었다는 점에서 10대에 돌풍을 일으킨 이창호와 닮은꼴이었다).
70년대 중반 초정밀 바둑, ‘컴퓨터’ 이시다 9단에게 밀려 일본 정상에서 내려왔지만 15여년 뒤 세계무대에서 진가를 다시 한번 드러냈다. 1988년 1회 후지쯔배부터 3회까지 세 번 내리 결승에 진출해 준우승 2번에 우승 한번, 그리고 3회 동양증권배에서 조치훈 9단을 꺾고 또 결승에 오른 것이다. 세계대회가 생기고 3년 새 열린 5번의 메이저급 대회에서 4번이나 결승무대에 등장한 기사는 없었다.
한번 뒷물결에 떠밀려 내려간 장강의 앞물결은 역류하지 못한다. 이게 자연의 법칙이자 승부세계의 법칙이기도 하다. 그런데 린하이펑 9단은 승부세계의 뒷물결에 밀리고서도 하류로 방류되지 않고 다시 역류해 나이 오십 줄에 제2의 전성기를 펼친 것이다. 승부세계에서 실로 무서운 보폭은 토끼뜀이 아니다. 다른 데 한눈 팔지 않고 우직하게 일로 매진하는 뚜벅걸음인데, 린하이펑 9단은 정상에 섰을 때나 한발 내려섰을 때나 바둑에 대한 열정이 한결 같았고, 바둑은 나이가 들어서도 늘 수 있다는 믿음으로 공부했다.
가령 이틀에 걸쳐 각자 8시간의 제한시간으로 대국하는 일본바둑 풍토에서(지금도 그렇다), 3시간짜리 국제대회 룰을 예견하고 이에 맞춰 페이스를 조절하는 연습을 거듭했다. 젊은 기사들보다 앞질러 준비하는 이런 근면한 자세가 쉰에 가까운 나이에 4번이나 결승에 오를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이름 그대로 우거진 숲(林)이고 망망한 바다(海)였으며 거대한 산(峰) 같은 존재였다. 이런 반상 거인 앞에 16세 소년기사 이창호가 섰다. 소년이 아무리 활화산 같은 기세를 타고 있다고는 하나 명성으로 보나 관록으로 보나 객관적인 전력은 열세였다. 이제껏 결승무대에서 겨룬 상대도 실상 스승 조훈현 9단, 그것도 국내무대 경험뿐이었다. 딱 하나 유리한 점을 있다면 나이일 텐데, 혈기방장한 패기는 노회한 관록 앞에 속절없을 때 또한 많지 않던가.
게다가 국내 7관왕으로 이미 스승 조훈현을 넘어 랭킹1위에 올라선 이창호였지만 ‘국내용’이란 불명예스런 꼬리표를 달고 있던 참이었다. 해외대회에 나가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탓이다. 이른바 ‘물징크’였다. 비행기를 타고 바다만 건너면 실력발휘를 못하고 돌아오자 팬들은 ‘그저 스승한테만 이길 줄 아는 소년’이라며 반신반의했다.
13세에 난생 처음 출전했던 IBM배 속기오픈에서의 2회전 탈락은 처음이니 그렇다치고, 2회 후지쯔배(89년)에서도 1회전 탈락했다. 그나마 3회 후지쯔배(90년)에서 거둔 8강 진출이 최고 성적이었다. 무엇보다 한국, 일본의 황태자대결로 요란했던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와의 한일신예정상대결 5번기에서 3-1로 진 것은 실망스러웠다. 바로 이 3회 동양증권배가 열린 해(91년) 봄날의 얘기다.
그렇기에 거장 린하이펑과 가을에 마주한 결승5번기는 말하자면 시험대에 선 격이었다. 뒤돌아보면 린하이펑-이창호의 대결은 세계바둑사의 물꼬를 바꾼 분기점이었다. 여러 모로 나을 것이 없었고, 또 어린 나이에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떠안아 부담감이 무척 컸을 텐데도 소년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마치 쭈쭈바 하나 입에 문 철부지처럼 느릿느릿한 양반걸음으로 천연덕스럽게 결승전을 맞을 따름이었다.
결승5번기 1, 2국은 타이베이에서 열렸다. 한국선수단은 1991년 9월 16일 타이베이로 들어가 17일 대만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을 예방했다. 계획에 없던 일정이었다. 총통이 접견을 원할 정도로 대만의 관심은 대단했다. 언론은 ‘한국의 세계적인 바둑신동 이창호가 왔다’며 대서특필했다. 200여 명이 운집한 전야제에서 린하이펑 9단은 특유의 유머러스한 임전소감으로 장내를 웃겼다. 백전노장답게 여유가 있었다.
“이5단은 내 자식보다 어리다. 하지만 그의 기예는 세계 최정상급 수준이라 내일부터 내가 괴로움을 당할 것 같다. 우선 겁나는 게, 이5단은 얼굴 표정이 없어 무섭다. 집 계산이 컴퓨터처럼 정확하고 중반 이후 형세판단이 예리하다.”
50세 대 16세의 대결. 흡사 아버지와 아들마냥 닮은 두 사람이었다. 둥글둥글한 생김새며 넉넉한 체격도 닮았거니와 바둑 스타일 또한 붕어빵이었다. 두 기사의 기풍을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단단하고 두텁고 조심성 많은 바둑. 예리한 창검술을 펼치기보다는 견고한 방패술로 상대를 제압하는 뒷심형. 2보 전진하기 위해 1보 나가는 게 아니라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를 기꺼이 감내하는 인내와 끈기. 느림으로 빠름을 제압하고 뭉툭함으로 날카로움을 분쇄하는 둔도(鈍刀)의 달인.
‘중후(重厚)’는 린하이펑 9단의 바둑을 압축한 단어다. 1952년 대만에서 도일(渡日)해 우칭위엔(吳清源) 9단의 제자가 되었고, 12세(55년)에 입단한 뒤 10년 만에 특유의 갑옷바둑으로 사카다 9단의 ‘면도날 바둑’을 무디게 만들며 일본바둑의 대통을 이어받았다. 1973년 린하이펑 9단과의 명인전 리턴매치에서 타이틀을 도로 빼앗긴 다카가와(高川格) 9단이 대국 후 남긴 소감은 린하이펑의 기풍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다.
“다리를 건넌다고 칩시다. 이럴 때 두드려보고 건너는 사람, 건너가서 두드리는 사람, 전연 두드리지 않고 썩썩 건너는 사람 등 여러 가지입니다마는, 린하이펑은 돌다리를 두드리고서도 여간해서는 안 건너가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얻은 별명이 ‘2중허리’였다. 여간해서 무너지지 않는 질긴 바둑이라는 얘기다. 지금까지 일본 7번기 타이틀전에서 ‘3연패 후 4연승’의 대역전극 기록이 6번 있었는데, 그 중 4번이 조치훈 9단의 작품이다. 3번은 4-3으로 이겼고 한번은 3-4로 졌다. 그런데 조치훈 9단에게 이 한 번의 아픔을 안긴 사람이 린하이펑 9단이다(1983년 본인방전).
린하이펑 9단은 ‘3연패 후 4연승 기록’의 원조였다. 1973년 명인 방어전에서 도전자 이시다 9단을 상대로 3연패 뒤 4연승을 거둬 ‘미증유(未曾有)의 기록(당시 일본언론의 표현)’을 선보인 바 있다. 그의 끈기를 말해주는 대목으로, 린하이펑 9단과 싸운 기사들은 언제나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을 실감해야 했다.
고래심줄로 말할 것 같으면 이창호도 못지않다. 린하이펑이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서도 여간해서는 안 건너는 바둑이라면 이창호는 돌다리를 두드려 볼 것도 없이 숫제 돌아가는 바둑이어서 ‘3중허리’로 불렸다. ‘바둑 질지언정 기세싸움에 지지 말라’는 게 승부사의 자존심이요 오기여서 때로 결사항전을 펼치기도 하는데, 두 사람의 바둑사전에는 그런 ‘기호지세’나 ‘옥쇄’ 같은 단어가 없다. 냉정한 형세판단으로 후일을 도모하는 ‘기다림’이 있을 따름이다. 호방한 스타일도 아니다. 스케일이 큰 바둑은 한편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부동심의 달인’, ‘반상의 강태공’이라 했을까.
신구세대를 대표하는 두터움 대 두터움, 느림 대 느림의 대결 결과에 관심이 쏠렸다. 1991년 9월 18일과 20일에 두어진 결승1, 2국은 서로 한판씩 주고받아 1라운드는 무승부로 끝났다. 예상대로 끝까지 반집을 다투는 살얼음판 싸움이 이어졌다.
“햐, 절대 둘 다 공격할 생각을 않네. 빈 낚시질만 한다니깐.”
“이 수는 창호 속에 들어가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네요.”
결승1국은 흑을 쥔 린하이펑 9단이 아슬아슬하게 반집을 이겼으나 내용은 전반적으로 완승에 가까웠다. 결승2국 역시 린하이펑 9단이 앞서 갔으나 너무 일찍 ‘셔터’를 내리려다가 1집반 차로 역전 당했다. 승부는 넉 달 뒤 서울대전으로 미루어졌다.
“정말 대단하시더라고요. 가면 갈수록 중압감이 다가오는데...아마 지금까지 싸워본 고수 중에 중반 이후 싸움에서 제일 힘들었던 분이 아니었나 싶어요. 초반은 선생님(조훈현 9단)이 아무래도 더 어렵지만…”
물찬 제비처럼 빠른 스승의 바둑과는 또 다른 묵직하고 둔중한, 그렇지만 숨막히게 만드는 큰바둑을 경험한 이창호 5단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그렇지만 평소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강자에게 한번 이기고 나면 자신감이 배가된다. 기름에 불붙듯 기세란 이럴 때 확 이는 법이다. 스펀지마냥 모든 걸 흡수하는 어린 이창호에게 한판 승리는 단순한 승점 1점이 아니었다. 결승2국이 끝난 이튿날 대만의 조간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린하이펑 9단은 복기하면서 자주 물었고, 귀여운 꼬마 이창호 5단은 말없이 아주 빠른 속도로 돌을 놓아 보였다.”
부자지간 같은 두 기사의 대결은 해를 넘겨 1992년 1월 23일 경주 힐튼호텔에서 재개됐다. 결승3국은 5번기 가운데 유일하게 계가까지 가지 않고 린하이펑 9단의 흑 불계승으로 끝났다. 2-1 스코어가 되자 다들 “어린 비둘기가 큰 산을 넘기엔 역부족인가?”라며 기대를 접기 시작했다. “다만 선생께 한판이라도 더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두겠다.” 막판에 몰린 사람답지 않게 소년은 언제나 그렇듯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태도였다. 어린 석불의 부동심.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것 같지만 실은 나무가 바람을 일으키는 것인지 모른다.
결승4국이 분수령이었다. 장소를 옮겨 이틀 뒤 서울 라마다올림피아호텔에서 결승4국이 이어졌다. 이 바둑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샅바싸움이었다. 여기저기서 국지전이 벌어져도 마무리되고 나면 늘 팽팽한 형세를 유지하는, 제자리걸음을 거듭했다. 누군가 비밀처럼 속삭였다. 서두르는 쪽이 진다!
그러던 바둑이 한순간 일찍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흘렀다. ‘여기까지인가?’ 대국장 밖의 분위기는 아쉬운 탄식을 신음처럼 길게 빼어 물고 있는 상황이었건만 모니터에 비친 소년의 표정은 먼산 바라기하듯 태연했다. 오히려 이긴 사람처럼 천연덕스런 착점을 일관했다. 어서 쳐달라고 길게 목을 내미는 것인가. 린하이펑 9단이 더는 참지 못하고 역습을 강행했다. 이창호의 ‘기다림의 덫’이었다. 조훈현 9단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심정이었는지 나직이 말했다. “결정적인 장면에서 참을 줄 안다는 점이 린하이펑 9단의 최대 장점이었는데…나이 탓인지…” 이5단이 흑 4집반 승을 거두고 2-2를 만들었다. 단판승부가 되었다.
바둑사의 흐름이 바뀌는 순간. 50세 아버지뻘인 린하이펑 9단이 1집반 패배를 확인하고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10대 소년의 ‘역사’가 미처 납득되지 않는다는 듯. 전력을 다했지만 소년의 괴이한 힘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그렇지만 ‘반상의 신사’답게 이내 환하게 웃으며 아들뻘의 소년챔프에게 축하의 악수를 건넸다. 시상식 때도 한 점 표정 변화 없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소년 이창호와 나란히 축하 케이크 커팅까지 했다. 이 한판의 승부에서, 이런 필승의 판을 잃어버리게 되면 쓰나미처럼 엄습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현장을 떠나는 게 보통이다. 린하이펑 9단은 대인의 풍모를 갖춘 승부사였다. 소년이 “가장 닮고 싶은 기사”라고 말한 이유가 있었다.
승부를 결정짓는 결승5국은 1월 27일,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최종국은 관례에 따라 다시 흑백을 가렸고, 이창호 5단이 백을 들었다. 이 한판이라면, 아무래도 초반 주도적으로 포석을 구상할 수 있는 흑이 편하다. “백이 나와서…이긴다는 생각은 못하고…그저 장기전으로…계가로 이끌면 성공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창호 5단은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큰승부에 명국 없다’는 말처럼 더는 뒤가 없는 최종국이어서인지 서로 실수가 잦았다. 9단급이 아닌, 마치 9급 노인들이 두는 바둑처럼 아는 코스로만 포석을 짰고, 조심스레 운석했다. 흐름은 앞서 대국들과 마찬가지로 린하이펑 9단이 앞질러 갔고 끝낼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그런데 막상 승부가 결정된 마지막 순간은 4개월에 걸쳐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펼쳐왔던 시소게임을 생각할 때 다소 어이없는 결말이었다.
좌하변 패싸움에서 바꿔치기가 일어나 백(이창호)은 하변 흑집을 깼고 흑(린하이펑)은 중앙 백△ 다섯 점을 잡았다. 그 전에 포획해 놓은 아래 백돌 여섯 점까지 제법 통통하다. 흑의 승리가 눈앞에 보인다. 그런데 사달은 항상 승리가 보이는 순간 발생한다.
백176으로 끝내기했을 때 흑177로 둔 것이 괜한 손찌검이었다. 받지 말고 그냥 흑‘가’로 두어 백 한점을 잡았으면 이변이 없었다. 린하이펑 9단은 하변 흑대마의 생사가 왠지 신경 쓰였고, 초읽기 독촉에 흑177의 수를 두었지만 보시다시피 이후 흑183의 수를 생략할 수 없게 되어 후수를 잡고 말았다.
1 <1도> 후수 자초하변을 손빼면 백1 이하 11까지 대마가 잡힌다. 다음 흑이 A에 때려내도 백이 B로 따내는 양패가 있어 흑대마가 살 길이 없다. 하변은 가만히 놔둬도 살 수 있는 곳이었는데 공연히 실전 흑177 이하로 가일수해 뒷수를 꽉 메워놓는 바람에 후수를 자초한 것이다. 2 <2도> 마지막 기회를 놓치다백1(실전 백184) 때도 기회가 있었다. 흑2에 두지 말고 ‘가’로 손을 돌렸다면 ‘반집’을 이길 수 있었다고 하니, 린하이펑 9단으로선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테다. 이런 것이다, 승부란. 나이를 먹으면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은 언젠가 반드시 오는 법이다. |
235수 끝, 백 1집반승 백222-백△, 흑235-백X
235수 만에 바둑이 끝났다. 계가를 하니 백이 1집반을 이겼다. 종합전적 3-2로 이창호 5단이 우승했다.
소년의 나이 16세 6개월. 100미터 달리기에서 ‘마(魔)의 9초대’가 상당기간 ‘넘사벽’이었던 것처럼 바둑계에서도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으로 여기던 ‘10대 세계챔프’ 기록이었다. 26년 전 백전노장 사카다 9단을 명인전에서 누르고 20대 챔프시대를 연 린하이펑 9단이 10대 챔프시대의 물길을 터준 장본인이 된 것도 운명 같은 것이다.
경악! 최연소 세계바둑챔프 탄생! 언론은 큼지막한 제목을 뽑아 보도했고, 어떤 사람은 ‘바둑의 시계를 몇 바퀴 앞당겨 놓은 반상의 지동설’이라고까지 말했다. 흥분된 어조로 ‘16세 소년의 반상혁명’이라 규정짓는 이도 있었다. 월간『바둑』 잡지는 20세기의 10대 명승부를 꼽을 때 ‘1위 조훈현 9단의 응씨배 우승’에 이어 이창호의 동양증권배 우승을 2위로 선정했다. 응씨배 우승이 한국바둑의 최강시대를 연 출발점이었다면 92년 동양증권배 우승은 이창호시대를 연 서곡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일본에 유학하지 않은 순국산 기사가 올린 최초의 세계대회 우승이었다. 바둑사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소년 이창호는 3회 동양증권배에 이어 4회 대회도 거푸 석권했다. 이때는 조치훈 9단과 결승5번기에서 마주했는데, 제주도에서 결승1국을 앞두고 조치훈 9단이 이창호의 스승인 조훈현 9단에게 넋두리인지 조크인지 아니면 핀잔인지, 하여간 이런 식의 말을 던졌다.
우리가 진정 창호의 대성을 생각한다면, 벌써 이기는 데 익숙하게 해선 안될 나이다. 창호의 바둑은 ‘그래도 아직은…’이다. 패배의 쓴맛을 더 배워야 할 나이인데 자꾸 이기니, 이기게 하니 문제다. 그런 면에서 형의 책임이 크다. 뭐 이런 투였다. 그러자 빙그레 듣고 있던 조훈현 9단이 딱 한마디 답했다.
“형씨도 일단 링에 한번 올라가 보시라니깐.”
어린 후배에게 승부세계의 깊은 맛을 보여주어야겠다 다짐한 조치훈 9단이었지만 3-0, 단 한판도 건지지 못하고 졌다. 그도 개미귀신처럼 모래구덩이에 몸을 묻고 상대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이창호의 바둑에 진저리를 쳐야 했다.
“어때? 링 아래에서 보던 것과는 딴판이지?” 가운데 앉아 함께 복기하는 조훈현 9단이 이렇게 말하는 거 같다. 1993년 4월 유채꽃이 만발한 제주도(서귀포시)에서 대국 전날, 자꾸 지기만 하는 스승을 은연중 나무랐던(?) 조치훈 9단은 소년에게 뭔가 본때를 보여줄 참이었다. 그런데 마음과는 달리 1, 2국을 연패했다. 달리 강펀치를 허용한 대목이 없는데도 이상했다. 저만치 따돌렸다 생각하고 뒤돌아보면 어느새 등뒤에 따라붙어 와 있는 바둑이었다. 늘, 딱, 반집 간격을 유지한 채. 이쯤에서 천하의 조치훈도 소년의 바둑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