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금 거리에는 활기가 넘칩니다. 2년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가 힘들었으나 일상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또 닥친다면 익숙하게 마스크를 쓰고, 방역과 거리두기, 비대면 화상회의, 배달 앱을 사용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빈곤 가구가 더 증가했고 노인들과 여러 취약계층의 어려움이 더 늘었다고 합니다. 최근에 지적장애인 가정의 연이은 극단적 선택들은 팬데믹으로 더 열악해질 수밖에 없는 사회의 그늘들을 보여 줍니다.
이를 마주하며 ‘과연 나는 이웃들의 어려움에 얼마만큼 연관이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세상과 사회에는 차이와 격차가 존재하고 이것을 불평등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당부와 함께 부와 풍요로움에는 누군가의 고단한 희생이 담겨 있다는 적극적 연대의 시각도 함께 제시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344항)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과 평화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뤄진다면 여러분들은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물론 나의 수고와 노력의 정당한 결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우리는 이웃을 생각해야 합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참행복은 ‘함께함’에 있고 신앙의 결실인 기쁨과 행복은 그 속에서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심지어 내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비난받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요? 그것은 소외된 삶입니다. 그래서 행복을 위해 돈과 성공, 명예와 권력만 좇았던 삶은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고 증언합니다. 신앙과 윤리, 도덕적 가르침은 관심과 배려, 존중과 연민, 동반과 돌봄, 봉사와 경청, 함께 아파하고 누군가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돼 줄 것을 강조합니다. 그 속에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능적으로 차별화된 사회, 업무능력과 성과, 경쟁에서의 승리로 평가받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얼마나 착한지, 선한 마음을 가졌는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상황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높음만을 주장했던 제자들과 같은 우리의 모습들이 쌓인 결과입니다.(루카 22,24) 그러므로 우리는 참행복을 위해서 삶의 전환을 지향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의 삶이 과연 진정으로 행복한 삶인지 성찰하며 복음적 삶, 이웃과 함께하는 삶을 모색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실 수 있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행동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고 성령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사랑할 수 있고 또 사랑하여야 한다. 하느님에게서 그 피조물들을 넘겨받아, 이를테면 하느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으로 여기고 존중하여야 하기 때문이다.”(「간추린 사회교리」44항)
가톨릭 신문 2022-06-05 [제3297호, 1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