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권침해, 붕괴된 사제관계, 입시경쟁 위주의 교육…. 오늘날 대한민국 학교는 슬프고 우울하다. 학생들은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며, 교사는 학생에게 신뢰받지 못한다. 오직 입시만이 전부인 현실 속에서 모두가 메말라 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달라요!”라고 외치는 곳이 있다. 바로 산 좋고 물 좋기로 소문난 경상남도 마산시 무학산 자락에 위치한 합포고등학교(교장 정재표).
▲기자가 찾아간 18일, 합포고는 한창 체육대회 중이었다.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학생의견 100% 수용한 학생 생활규정 개정
지난 2월, 경남도교육청은 지역 내 초중고교에 16개 항목의 ‘학교 생활규정 개정 방향’을 전달하며 학칙 개정을 주문했다. 그러나 합포고는 이전부터 자체적으로 생활규정에 관한 논의를 꾸준히 진행해 온 끝에, 올해 학생생활규정을 새롭게 수정했다.
주목할 사항은, 이 과정이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뤄졌다는 것. 해마다 1박 2일 간부수련회 기간 동안 생활규정에 관한 토론을 지속적으로 해왔고, 작년에 본격적으로 생활규정에 관한 연구를 시작, 꾸준히 노력한 결과가 빛을 발한 것이다.
수정된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학칙이 무엇보다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고, 이를 침해하지 않는 최소한의 범위에서 적용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징계 대상 학생과 학부모의 재심청구권, 학생 대표 자격조건의 성적제한 삭제, 학생들의 사회시민단체 가입 등 정치활동 인정 등이 덧붙여져 전반적으로 학생을 민주적으로 배려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학생자치활동 적극 지원, 매점 수익금으로 정기 예산 편성 “재정 있으니 활동에 힘이….”
특히 학생 자치활동을 적극 지원하고자 학생회를 특별활동의 하나로 규정한 기존 내용을 ‘학생 자치활동’으로 용어와 성격을 바꾸고, 매점 수익금의 50%이상을 학생 복지기금으로 사용한다고 명시했다.
학생생활부장 이필우 선생님은 “매점수익금은 학생들이 창출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투명하게 쓰여야 하지만 여태껏 어느 학교나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다.”라며 “모든 물품에 바코드를 붙여 투명하게 운영하고 있으며 업체도 공개 입찰하고, 학생 학부모 교사가 함께 참여하는 관리위원회를 통해 매점 운영의 투명성을 보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합포고의 경우, 매점의 개념을 뛰어 넘은 ‘학생 휴게실’로 운영, 학생 복지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학생들의 동선을 고려해 교사 내에 자리 잡은 이곳에는, 전자렌지, 60인치 텔레비전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칠판을 마련하여 학생들이 자유롭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학생 휴게실 풍경ⓒ합포고등학교
무엇보다도 매점 수익금으로 학생회의 연간 예산을 보장, 활발한 학생자치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합포고 학생회장 강지훈(3년) 군은 “예산이 있기 때문에 학생회 활동에 힘이 실린다.”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학생들의 의견을 받아서 시설이나 물품 설치를 학교에 요청하면 ‘그런 예산 없다.’라고 딱 잘라서 거부당했는데 학생회 예산으로 이를 운영하니 자치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어요.”
긴 논의 끝에 유지하기로 결정된 두발규정, 그러나 두발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두발 용의복장에 관한 생활규정 개선도 학생들의 의견이 100% 반영됐다. 놀라운 점은 두발 관련 조항은 기존과 변함이 없다는 사실. 지난 간부수련회에서 가진 5시간의 생활규정 토론시간에서 두발에 관한 논의만 무려 2시간 가까이 진행됐을 정도로 이 문제는 합포고 전체에서도 뜨거운 감자였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친 연구와 논의 끝에 두발 규정은 그대로 두기로 결정됐다.
생활규정부장을 맡고 있는 강민기(3년) 군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개인적으로는 자유화가 옳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것은 저희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학교의 문제잖아요? 저희만 두발 자유화를 해도 그 여파를 감당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뿐더러, 사회 전체의 논의가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긴 토론 끝에 이렇게 결정하게 됐어요.”
체육대회는 체육부, 축제는 문화부가 총괄, 부서별 전문성 책임성 강화
합포고 학생회가 더욱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모든 구성원이 상당한 책임감을 갖고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교 학생회는 회장과 부회장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합포고는 각 부서별 활동도 매우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학생회장이 학우들의 의견을 학교가 수렴하도록 노력하고 있다면, 체육부 문화부 등의 부서는 전문성을 갖고 활동하고 있다.
체육대회 같은 행사는 체육부가 전면에 나서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을 맡고 있다. 또한 보통 학생회장이 하는 학생 선서대표를, 이때만큼은 체육부장이 한다. 이처럼 학생들의 전문성과 책임감을 부각시키는 노력이 있기에 학생회가 정말 ‘주체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날 체육대회에서는, 학생회 체육부장이 대표로 선서를 했다. ⓒ합포고등학교
그러나 이러한 결실을 맺기까지 많은 땀과 눈물이 있었다. 3년 전, 학교 자체적으로 학생자치활동을 특성화하기로 결정하고 난 뒤에 학생, 교사, 학부모의 신뢰를 얻기 위해 모두가 열심히 뛰었다.
작년 축제준비 기획단 회의 시간, 토론이 전혀 안 되자 “왜 아무 의견도 없냐?”는 지도교사의 물음에 1,2학년 학생들은 “선생님, 저희가 한두 번 속은 줄 아세요?”라며 반문했다. 지금까지 아무리 안건을 제시해도 수용하지 않은 학교에 실망한 학생들이 ‘어차피 말해도 안 될 텐데’라 결론짓고 입을 닫아버렸던 것이다. 결국 3학년들이 학풍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이해시킨 뒤에야 원활한 회의를 할 수 있었다.
▲지난해 축제준비 기획단 회의시간 ⓒ합포고등학교
“애들이 못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입시 중심의 교육 풍토가 안하게 만든 겁니다.”
결국 학생인권을 보장하는 학칙 개정 뒤에는 학생회의 적극적인 활동이, 그 배경에는 학생자치활동을 대폭적으로 지원하는 학교 분위기가, 더욱 밑바탕이 되는 곳에는 학생과 교사간의 굳은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날의 우리의 모든 교육제도는 그 중심에 입시가 놓여 있다. 인성교육이니, 특기 적성 개발이니 하는 교육 담론은 그저 빚 좋은 개살구에 불과할 뿐, 오직 좋은 대학을 가는 것만이 학교와 학생 모두에게 제일 중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억압과 규제도 정당화되는 장소가 바로 대한민국 고등학교이다.
하지만 합포고등학교 구성원들은 이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한다. 학생들의 의견을 100% 반영한 생활규정 개정뿐만 아니라 사회 과학탐구 영역도 지원자 수와 관계없이 8개 과목 모두 보충수업을 운영한다는 학교, 우리를 위한 학교를 만든다는 자부심과 학교와 선생님을 믿고 따르는 학생들, 이들의 의지와 책임감을 믿고 존중해주는 선생님들. 서로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학교야말로 참교육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기자가 교문을 나설 때. 운동장에서는 한창 사제 간 축구대결이 열리고 있었다. 서로 몸을 부딪치며 땀 흘리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학생인권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가는 요즘, 머지않아 대한민국 모든 학교에서 이처럼 교사와 학생이 진심으로 어울리는 모습을 볼 수 있길 빈다.